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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인이 교회를 다니면 무병 장수하고 복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교회를 나갔습니다. 목사님 처음 출석한 성도에게 5년만 열심히 교회에 나오시면 교회에서 집~~사!! 주겠습니다. (집사직분을 집--사 준다는 것으로 착각) 초 신자인 성도는 예! 목사님 열심히 교회 다니겠습니다. 그녀는 열심히 교회를 출석했습니다.드디어 5년이 되는 해 집사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 성도 하는 말이 목사님! 교회 나온지 5년 됐는데 왜 집 안 사줍니까?..... 목사님 놀라며 네!!~~ 집이라니요?..... 여 집사님은 “ 목사님이 처음 제가 교회에 나왔을 때 5년만 교회 잘 다니면 집~~사 준다고 말씀 하셨잖아요? ” 하하하~~
처음 믿음 없이 교회 나오면 집사를 집~~사 준다는 것으로 착각하고 신앙 생활하다가 진짜 믿음이 생기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한 믿음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그러나 큰 믿음을 갖기까지 시련 또 시련이라는 훈련과정을 거쳐야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28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리스도인은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나의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성령님이 내 심령 안에 오셔서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심을 믿습니다’...... ‘성경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습니다’ 라고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고백을 말합니다.
믿음’이란 ' 헬:'피스티스(πίστις) 라는 단어인데 신뢰함, 확신함, 신실함을 뜻하는데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고 신실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 크다! 작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도 가나안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마15:28)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마14:31) 예수님은 믿음이 크면 칭찬하시고 믿음이 작으면 책망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크고 작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하나님을 믿은 자라면 속사람 즉 영혼의 깊이가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하고 확신하는가? 그래서 주님은 오늘 나를 볼 때 믿음의 크고 작음을 믿음의 저울대 위에 달아보시고 테스트 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주향성도여러분!!..... 큰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칭찬받은 가나안여인처럼 “네 믿음이 크도다” 주님 나에게도 말씀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21절 말씀 시작을 보면 우리 예수님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누구를 만나실지 알수 없지만 하나님은 택한 사람을 만나게 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여정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 예수님 두로와 시돈에 들어가 얼마나 가셨을까요?
오늘 본문 등장한 가나안 여자도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예수님을 만나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22절입니다....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유대인도 아니요 이방지역에서 사는 여인인데 예수님을 뜻 밖에 “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짖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또 한 단어가 있어요 “주”라는 단어입니다. 주는 큐리오스 헬: 당시 황제에게 부르는 칭호를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 한 것입니다. 지금 가나안여인은 예수님을 세상의 왕이시오 나의 주인이시오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여인은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부른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메시야적 신앙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참으로 귀한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예수님은 메시야 이십니다..... 또한 모든 문제의 해결자요, 만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시오..... 오늘 나를 구원하신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리 지을 수밖에 없었던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귀신들린 딸을 고치고자 하는 모성애가 있습니다. 대부분 부모의 마음은 자나 깨나 자식문제에 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 때문에 괴로워하면 마치 내 맘처럼 괴롭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위해 엄마가 해줄 게 없습니다. 귀신들린 것은, 우울증하고 전혀 다릅니다. 본문말씀에서는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다고 했지만 영어성경에는 딸이 고통을 받는데 terrible(테러블)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테러블은 테러당한 사람의 심리상태를 말합니다.
그만큼 딸은 귀신들려 소리 지르고 밤에도 안자고 이리저리 미쳐 돌아다니고, 이걸 보고 있는 엄마는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당시 이런 흉악한 질병에 걸리면 끝입니다. 자포자기 상태입니다. 가나안여인은 귀신들린 딸의 문제에대안 없이 무너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나안여인을 보십시오... 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왔으면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 해야 하는데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25절에서도..... '주여 저를 도우소서' 부르짖음에서도 '제 딸이 불쌍합니다. 도와 주소서'가 아닙니다. 나를 좀 도와주십시오 '귀신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의 간절함은 오직 딸을 향한 찐한 모성애입니다.
얼마 전 택배원에서 열심히 일하다 죽은 아들사진 앞에 애통하는 어머님이 TV자막에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것뿐인데 건강한 아들이 백신 접종 후 죽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청와대 국민청원에 20만명 넘게 이 쳥년 사인을 밝혀 달라며 청원 한 것입니다. 비록 아들은 이미 죽었지만~~~공무상 재해로 다행히 국가에서 인정한다는 결과를 통보를 받았지만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 올 수 없기에 어머님은 아들 사진을 보고 애통해 하는 겁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저 또한 가슴이 미여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딸을 위한 가나안여인의 간절함을 모를리 없으신 우리 예수님 보십시오..... 자비와 긍휼이 많으시기에 이 여인을 위로할 수 있으실 텐데 예수님은 여인의 부르짖음에 그냥 침목하고 계십니다.
23절....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님 여인의 부르짖음 앞에 침묵하셨습니다........소리 지르는 여인과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의 침묵, 이것은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장벽 중 하나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큰 관문이기도 합니다.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전혀 응답하시지 않으실 때에 우리의 기도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좌절하고 상처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침묵은 잠시 동안의 침묵입니다. 예수님은 침묵을 통하여 가나안 여인의 의도를 테스트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부르짖는다고 주님께서 금방 응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우리가 주님께 부르짖었는데, 진정한 믿음으로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자기 열심으로 부르짖을 수 도 있습니다.....시간과 정성 있는 힘을 다해 부르짖어도 다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부르짖음의 열정을 보시고 진정한 믿음에서 나온 것인가 테스트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그런데 가나안 여인 예수님의 일시적 침묵에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주님의 침묵으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포기하지 않았습니다.......응답이 없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응답되지 않아도 기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침묵하신 후 말씀을 하셨는데 어찌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24절.....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가나안여인에게는 전혀 해당이 없다는 말씀하십니다. 보통 이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아! 믿음생활 그만 하자...... 내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 안 해 포기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 더 이상 나에게는 관심이 없음을 알면서도 가나안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이제는 무릎을 꿇고 절하며 간청합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25절) 절박한 심정으로 도와 달라고 예수님께 애절하게 절규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옷자락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 앞에 절하며 도와달라고 하는데 우리 예수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아주 냉정한 말씀을 하십니다. 26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 봤느냐? 이것은 모멸감을 주는 말씀입니다. 개들이라는 게 뭡니까?..... 너는 내 식탁에서 빵을 먹을 자격 없는 이방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개는 옛날부터 욕입니다. 개 같은 놈! 이게 엄청나게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가나안 여인의 감정을 건드렸습니다. 가나안 여인 침묵하는 것도 힘들지만, 거친 대우는 더 힘듭니다.......자존심이 상할 때로 상한 것입니다. 사람이 인격이 무시당하면 힘듭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존심을 다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가나안 여인에게 가장 힘든 순간이 왔습니다 . 인격적으로 수모를 당했습니다. 이 정도 되면, 가나안 여인은 열 받고 한바탕 난리를 피울 만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의 반응 주목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마지막 시련의 단계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대단한 반응을 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가나안 여인은 “주님, 옳습니다. 바로 말씀하셨습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시련앞에 절망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예수님 앞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은혜를 입었다면, 이방인인 나에게 부스러기의 한 부분이라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나안여인의 모습은 큰 시련 영적 난코스를 이겨 내고 큰 믿음의 결과가 기다리는 순간입니다. 이런 시련을 이겨내는 가나안 여인을 지켜본 우리 예수님 위대한 선물을 여인에게 안겨줍니다.
28절.....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가끔 산을 오르지만 낮은 산을 오를 때에는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쉽게 정복한 산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오를 수 있기 때문에 등반이라기보다는 산책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정복할 수 있는 산이고, 평범한 산입니다.......그러나 높은 산은 산에 오르는 것이 힘들지만, 산에 오르고 나면, 기막힌 전망을 볼 수 있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산을 정복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해냈다 야호!!~~ 하는 겁니다.
지금 가나안 여인이 누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
롬5:3-4....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 말씀은 가나안여인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거쳐 가는 믿음의 과정입니다. 피할 수 없는 훈련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곧 소망입니다.
얼마 전 현대인의 지성인이셨던 이어령 성도가 89세로 천국 가셨습니다. 이 어른은 한국에서 내 놓으라는 지성인이셨습니다. 예수 믿고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지성에서 영성으로” “마지막 수업” 수많은 책을 집필하시며 시대의 지성인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어른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했습니다. 저런 지성인이 예수님을 믿어 의심 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을 믿기 전 이어령 지성인 앞에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깊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 샘플이 누구인가? 이어령 성도의 딸 이민아였습니다. 똑똑한 딸이 미국에서 변호사로 검사로 활동하여 잘나갔지만 이혼과 어느 날 자녀의 죽음을 통하여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납니다.그리고 나중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데 위암말기 판정을 받으면서도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시안부 인생으로 살아가는 딸의 삶의 여정을 통해 무신론자요 이성주의자 였던 이어령씨가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령 성도도 딸과 똑같이 수술 후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진통이 올 때마다 주기도문으로 계속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여러 교회 간증하며 복음을 전하고 마지막 수업이란 책을 내고 이 시대 지성인으로 살아가셨지만 아름다운 것은 마지막까지 믿음의 끈을 꼭 붙잡고 천국에 가신 이어령 성도야 말로 믿음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의 깊은 세계로 나아가려면 가나안 여인처럼 수많은 난관과 시련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큰 믿음으로 칭찬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