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8 고향의 집안 누님 60년만에 만난 사연
자유인 조동화는 걷는일 1만보를 실천에 옮기고 오후에 고향의 집안 누님 생각이 났다.
나보다 8살 위인 그 누님은 23살에 시집을 간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나는 6.25가 발생할 때 나도 모르게 김제와룡땅에서 태어나 여기까지 세월의 강을 건너 석양의 노을을 바라보며 삶을 노래하며 세월을 즐기는 사람이다.
김제 공덕 마현마을에는 650년 된 은행나무 한구루가 기념물로 지정되여 서 있는데 여름철이면 은행열매가 빡빡하게 열리고 동네의 수호신처럼 자리잡고 있어, 내가 가끔 찾아가 신령스런 은행나무의 기를 받아와 마음을 안정시키곤 하였었다.
우연찮게 마현마을로 시집가서 살고 있다는 고향집안 누님 소식을 알고 오늘 역사적인 해후를 하였다.
어린시절 추억은 60년 세월에 그눈님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있었으나, 나를 본 누님은 아버지를 닳은 나를 금방 알아봤다.
누님 이름은 조영애!
7촌뻘되는
영애 누님은 공덕 마현마을로 시집가서 딸 넷과 아들하나를 낳아서 모두 출가시켰다 했다.
김제와룡애서 공덕 마현마을 농촌으로 시집와서 딸 아들 다섯 낳아 키우고 농사 짓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다보니 온 젊음을 다 보내고, 지척에 있는 고향땅도 밟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고 하시며 늙은이가 되었다고 세월을 한탄했다.
매형되는 이는 십수년전 이세상을 떠나 가시었다 했다.
딸 하나가 전주로 시집가서 당구장을 운영하는데 사위와 딸이 매일 와서 어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주고자 자고 간다고 했다.
이런 효녀 딸 부부가 어디 있으랴.
딸이 여럿이다 보니 눈님은 복받아 효녀 딸 두었다고 칭찬해주었다.
꼬부랑 할머니가 된 누님은 83세로 몸관리 잘하시고 동네 경노당에 나가 동네 할머니들과 즐거운 시간 갖으며 재미있게 사시라고 당부하고 떠나왔다.
눈님 기념사진 같이 한번 찍읍시다.
나 사진같으거 않찍는다 하시더니 동생말은 들어야지 하면서 사진도 같이 찍었소이다.
옛 추억이 그리운 조동화는 이렇게 오늘 하루가 흘러갔다.
조동화의 벗님들!
세상살이 뭐 별것인가요.
나 하고 싶은거 하고 살면 되야.
하루 하루가 소중한 시간
건강합시다.
행복합시다.
감사합니다.
<영애누님은 내가 사는 집이 누추한데 집에 가보자 해서 사람사는 것이 다 똑 같지요 하며 누님이 사는집에 가 보았다.
이집에서 딸 아들 다섯 낳아 키우느라 내인생은 없이 희생만 하다가 꼬부랑 할머니 되여 늙어갔다.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었다.>
<내고향 김제와룡에서 마현마을로 시집간 8살 많은 영애 누님이 마을회관 앞에 나와 조동화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60년만에 만난 누님 옛 모습을 떠 올려 생각해 보니 어렴풋이 누님의 얼굴이 그려졌다.
세월을 어찌할까! 허리도 않좋고.....................욕심 다 던지고 건강관리 잘 하시라고 당부 드리었다.>
☛공덕 은행나무 전북기념물106호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공덕면 마현리 816-1번지
공덕면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650년 정도로 추정되며(1350년경), 높이는 약 15m, 둘레는 4.5m로 8개의 가지가 사방으로 갈라져 있으며 경로당 옆에 있어서 주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650여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마현마을 사람들과 함께 해온 은행나무는, 음력 1월 3일날 나무 밑에 모여 마을의 안전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인생은 둥굴게 둥굴게≫
삶이란 참으로 복잡하고 아슬아슬합니다.
걱정이 없는 날이 없고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어느 것 하나 결정하거나 결심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내일을 알 수 없고 늘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힘든 이야기입니다
말로는 쉽게
"행복하다", "기쁘다"고 하지만,
과연 얼마만큼 행복하고
어느 정도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막막합니다.
이러면서 나이가 들고 건강을 잃으면
"아! 이게 아닌데..."하는
후회의 한숨을 쉬겠지요.
그런데도 왜 이렇게 열심히 살까요.
어디를 향해 이렇게 바쁘게 갈까요.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요.
결국, 나는 나,
우리 속의 특별한 나를 찾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그 고통,갈등 ,불안, 허전함은
모두 나를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만나는 것들입니다.
참 나를 알기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 이유를 알기 위해서,
나만의 특별함을 선포하기 위해서
이렇게 바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치고
아무 목적없이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기만의 독특한 가치,
고유의 의미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것을 찾으면
그날부터 그의 삶은
고통에서 기쁨으로,
좌절에서 열정으로,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바뀝니다.
이것이야말로 각자의 인생에서 만나는
가장 극적이 순간이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아무리 화려해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여 오래 입지 못하듯이
아무리 좋은 일도 때에 맞지 않으면 불안하듯이,
아무리 멋진 풍경도 마음이 다른데 있으면,
눈에 들어오지 않듯이,
내가 아닌 남의 삶을 살고 있으면,
늘 불안하고 흔들립니다.
하지만 자기를 발견하고
자신의 길을 찾으면,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아주 멋진 환희의 파노라마가 펼쳐지게 되고
행복과 기쁨도 이때 찾아 옵니다.
-좋은 글중에서-
나의 초년인생 경험담
1970년 鐵道에 入門하여 40여년을 철도에 젊음을 불사르고, 무엇하나 만족스럽게 이룩 한 것 하나 없이 흘러간 歲月!
1970년2월20일 목포기관차사무소 기관조사 초임발령으로 사회 초년생이 되어 목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철도는 증기기관차(영국의 조지스티븐슨 1829년발명)의 운행에서 디젤전기기관차로 동력이 바뀌어가는 과정에 있었으며, 목포-광주간을 운행하는 몇 개열차는 증기기관차사업이 있었으므로 신규발령된 기관조사에게는 증기기관차승무로 지정되어 기관사1인 본무기관조사1인 보조기관조사1인 3명이서 하는 근무형태로 기관사는 운전만담당하고 기관조사는 교대하여 석탄을 투척하여 증기를 가열시켜 증기기관차가 움직이므로 석탄을 투척하는 작업이 기술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힘을 쓰는 작업이었기에 어려운 작업이었다.
칙칙폭폭, 철컹철컹 한밤의 정적을 깨며 기적소리를 직접울리면서 달렸던 추억어린 시절이 있었음을 추억삼아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시골의 어른들은 기차소리에 깨어 많은 자손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허구한 이야기는 아닐것이요, 그래도 인정있고 살기가 좋았던 시기는 그때 그옛날이 좋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순천철도국 목포기관차사무소 기관조사의 사회초년생은 2년6개월의 반복되는 임무후 1972.8.29. 군에 입대, 전주 35사단에서 6주간 훈련을 마치고 후방기 교육을 춘천에서 2주간의 훈련후 강원도 인제 현리 공병부대 의무실 위생병으로 자대 배치되었다.
군생활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35사단 훈련병때 모악산KBS송신소 건설 작업시 모악산아래에서 세멘 한포대씩 등에 메고 정상까지 오르던일이 가장 내인생에서 힘들었던 일이었답니다.
자유인 趙東和는 黃金萬能主義의 核家族 개인주의 세상에서 옛시절의 인정은 찾아볼수 없고 하루면 수도없는 갖가지 사건사고 홍수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속에 나자신도 예외가 될수 없듯 바쁜일상으로 어영부영 하루가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