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yond reason
부정적 정서 다루기
놓아버림
치유와 회복 09. 걱정과 두려움, 불안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전인의학 분야에서는 몸과 마음, 영혼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 말을 더욱 깊이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말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지 유행어나 구호에 불과한 것일까? 영혼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나 종교적 금언에 불과한 것일까? 현실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를 다시 살펴보면 분명히 이해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작업에도 속도가 붙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다시 살펴보고
경험이 실제로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하겠다.
몸과 마음, 영혼의 관계를 경험의 관점에서 살피다보면, 몇가지 다소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몸은 스스로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그중 하나다. 우리 모두 자신을 몸과 동일시해서 "나는 몸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은 특히 더 놀랍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몸은 자신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몸이 곧 자신이라는 생각은 진실이 아니다. 예를들어 왼팔은 자신이 왼팔임을 경험하지 못한다. 오감이 몸에서 생겨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몸이 아니다. 몸의 오감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오감도 스스로를 경험하지는 못한다. 팔에서 생겨나는 감각은 어딘가 다른 곳, 바로 마음속에서 경험된다.
두뇌가 절개되어
마음의 작용부위가 제거돼 버리거나
이 부위가 몸의 차원이 미치는 영향력이 사라져 버리면,
몸의 반대편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뇌졸중 후에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뇌졸중 환자는
자기 몸의 어느 부위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경험하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는
감각이 없으면
몸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리고
감각은
마음속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마음 역시 스스로를 경험하지 못한다. 생각은 자신이 생각임을, 기억은 자신이 기억임을, 환상은 자신이 환상임을 경험하지 못한다.
몸-오감-마음(생각)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실제로 마음자체보다
더욱 큰 에너지 장
즉 의식이라 불리는 것속에서 경험된다.
의식은
마음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자각하게 해준다.
마취의 근거도 여기에 있다.
마취상태에 들어가면
의식이 삭제되기 때문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각하지 못한다.
의식이 없으면
몸이나 마음에 대한 자각도 없고
마음이 없으면
감각이나 몸에 대한 자각도 없다.
결과적으로 온종일 자신을 관찰해보면 널리 퍼져있는 훨씬 총체적인 경험의 장속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체적인 방식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경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경험이
공간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며
이 공간은
우리의 의식안에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생각을 실제로 경험한다고
여기는 자리를 찾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실험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생각이 그들의 머리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생각에 대한
생각일 뿐이다.
이들에게
자신이
생각을 경험한다고 여기는 자리에 대한
모든 믿음을 내려놓고
생각이 경험되는 정확한 자리를 가리켜보라고
즉 현상이 일어나는 장소가 어디인지
근본적인 진실을 말해달라고 해보자.
그러면
이들은 생각이 일어나는 특정한 장소가
없음을 발견한다.
이들이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생각이 일어나고
자신은
이 생각을 인식한다는 것뿐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자리는 정확하게 지적하지 못한다. 총체적이고 전체적인 방식으로 생각을 경험하는 자리는 구체적으로 가리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경험하는
구체적인 자리는
꼭 알아야 한다.
우리가 사용할 몇몇 기법들이
인간 고통의 기저에 있는 믿음체계를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자체는
영화의 스크린과 같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스크린 위에서
변하는 장면들이다.
모든 경험은
변화에 대한
인간의 경험인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움직임은 오고 감,
차오름과 기울어짐,
즉 흐름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이유는
변하지 않는 배경에서
이것이 경험되기 때문이다.
영화속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스크린이 변함없이
그대로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요컨대
변화하는 것이 경험되고
이 경험은 의식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의식에는 정확한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기능적 저혈당
두려움과 불안은
주요 원천인 의식이
정서적 차원에서 발현된 감정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이런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흔한 근원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근원에는
신체적인 원인도
포함된다.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흔히 "기능적 저혈당이라는 생리적 문제에서 비롯'되며
음식물을 통해 섭취하는 당에 대한
과민반응과 관련되어 있다.
저혈당증은
과인슐린증이라고도 부르며
이것은 포도당과 자당에
과민만응을 보이는 증상이다.
혈당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화나 분노, 두려움, 불안정,
공포 심지어는 폭력같은
감정적 반응들을 촉발시킨다.
당 섭취를 일체 차단한 후
부정적인 증상들이 사라지는지 관찰하기만 하면
이런 증상을 임상적으로 진단할 수 있다.
다섯 시간의
포도당 부하검사로
이 증상을 확인할 수 있다.
보통사람은
처음에는 포도당 수치가 급격하게 치솟다가
천천히 내려간다.
그러나
저혈당증이 있으면
혈중 포도당 수치가 급속하게 떨어지면서
경미하게 혹은 심각하게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타나거나
몸이 떨리거나 기운이 없어지거나
기절을 하는 등의 양상을 보인다.
또
알코올이나
진정제 생각이
간절해지기도 한다.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협회같은
회복 프로그램 운영단체에서
이 병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윌리엄 더프티가 쓴 유명한 책 "슈거 블루스"도 이 병을 다루고 있다.
환자가
내 진료실을 방문하면
나는 먼저 다음 진료까지
알코올은 물론이고
당을 일절 끊으라고 지시한다.
몇해 동안
이렇게 해본 결과
환자의 25%가 치료되었다.
다시 만났을때
그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병의 발병률이
아주 높고 그 형태도 다양하므로
온갖 정서적 장애를 불러오는 요인으로
탐색해 볼 필요는 있다.
저혈당증은
신체적 폭력은 물론이고
정신 이상증세까지
촉발시킬 수 있다.
제대로 진단을 받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폭행이나 다른 폭력범죄로
구치소나 감옥신세를 지는 이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부부싸움이나 사회적 논쟁, 가족간 마찰,
행동 장애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우리는
병원내 진단연구소에서
이따금 다섯 시간동안 포도당 부하검사를 한다.
보통은
서너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의 환자들이
부정적인 감정반응을 보여준다.
한번은 어떤 여자가 갑자기 옷을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도 않은 채 도로를 질주한 적도 있다. 그 바람에 연구실 감독자는 길고 하얀 가운을 펄럭이며 "멈춰요"라고 외치면서 뒤를 쫒아가야만 했다. 그래도 그녀는 몇 블록을 계속 내달렸다. 미친듯한 광란의 질주에 차들도 멈춰야만 했다.
두려움은
의식의 한 단계로서
두려움이 존재하는
의식의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두려움의 표현이나
세상에서 확장돼 나타난 모습을
두려움의 차원에서 다루거나
대응하지 말고
의식의 한단계로서 취급해야 하는 것이다.
1. 75g 포도당을 250-300mL의 물에 용해시켜 5분에 걸쳐 마십니다. 소아의 경우 당부하량을 1.75g/kg으로 계산하며, 최대 75g까지 투여 가능합니다.
2. 포도당 복용 전과 포도당 복용 후 120분에 채혈하여 혈중 포도당 농도를 측정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본래 모습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두려움보다는
더욱 큰 존재임을 알아차리고
이 감정과 동일시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전체적인 장이고,
두려움은
이 안에서 경험된다.
두려움은
자신을 본래의 큰나로 인식하게 되는
더욱 커다란 환경안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것이다.
두려움을
내려놓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물중 하나는
두려움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드는 기법을 설명해 보겠다.
두려움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움도 아주 간단한 문제로
여겨진다.
우리는
마치 치과에 가는 사람이
통증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두려움을 두려워한다.
태초의 두려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두려움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두려움이 끝도없이 많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희생자를 자처하고
두려움의 근원이
자신의 외부에 있다고 믿어버린다.
그러나
두려움의 근원 혹은 시작점이
자신의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사실 할 수 있는 일이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
두려움의 근원이
바깥에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영원히 두려움의 희생자로 남는다.
두려움이
자기 내면의 현재 상태임을,
두려움의 근원이 바로 자신이며
자신이 내면이
두려움을 세상에 투사시키고 있음을
깨닫기 전에는
언제나 그럴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분명히
저기 바깥에서
두려움을 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기 바깥으로
두려움을 투사시켰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들여다보면
두려움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두려움이
의식의 한 단계임을 인식하면
이 의식의 단계에서
두려움이
이 모든 것에 들러 붙어 있음을
깨닫는다.
특정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제한적이긴 해도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두려움에 가득찬 사람이나
그의 인격을 바꿔주지는 못한다.
특정한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은
임상적으로 가치있고
삶에서 실제로 쓸모도 있지만
우리의 본래 모습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더 이상 스스로를
작은 나처럼 느끼고 무력하게 두려움에 휘둘려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두려움의 상태를 변화시켜야 한다.
두려움은
마치 접두사처럼
온갖 것에 들러붙을 수 있다.
의식지도를 보면 두려움은 100의 단계에 있다. 그리고 화살표의 방향이 보여주는 것처럼 두려움은 부정적인 감정이다. 두려움의 상대적 힘은 서로 다른 장들의 에너지를 수치화해서 보여주는 이 수학적 모델에서 확인할 수 있다. 30과 50, 75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지나 200에서부터 시작되는 긍정적인 감정들 속으로 옮겨 갈수록 에너지 장들의 힘은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봐도 실제로 증가한다.
두려움의 에너지 장을
중점적으로 다루다보면
두려움이
삶의 모든 것에
가리지 않고 들러붙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하는 경험중에서
두려움이 들러붙지 않는 것이 없다.
어머니를 사랑하면
'어머니를 잃으면 어떡하지?'하는
두려움이 일어나고,
자신의 몸을 사랑하면
죽음이나 병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돈을 사랑하면
돈을 잃거나 탐욕스럽다고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한다.
무엇을 생각하든
두려움이 따른다.
자동차를 사랑하면
교통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난다.
이처럼
두려움에 빠진 사람은
모든 것에 두려움을 갖다 붙이기 때문에
생각나는 모든 것이
두려움의 에너지 장속으로 들어가
두려움으로 물든다.
사는 것도 두렵고
죽는 것도 두려워라는 노랫말처럼
심지어는 삶 자체까지 두려워진다.
두려움의 에너지 장이
모든 것을
오염시켜버린 것이다.
이 에너지 장의 근원이 우리라면,
당연히 우리의 모든 경험이
두려움의 장의 속으로 빠져들어
삶의 모든 일이
두렵게 여겨질 것이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면 어떡하지?
늙으면 어떻게 사나?
내몸을 어떻게 될까?
경제 상황은 어떻게 되는거지? 관계는? 가족은?
은행잔고는?
우리나라는, 세계는 어떻게 되는거지?
모든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지구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핵무기가 가져올지 모를
인류의 전멸이나 은하계의 전쟁,
유성, 격변하는 말세에 대해
두려움을 토로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이 확장돼도
이것은 여전히 두려움에 불과하다.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두려움을
아무리 미화시키고
극적으로 들리게 만들어도
두려움이 두려움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은하계의 전쟁이나 인간의 파괴, 인류의 멸종에 대한 두려움도 아이가 어둠을 무서워하는 것이나 강아지에게 물릴지도 모른다고 겁내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경험상 두려움은 언제나 똑같은 감정이다.
이 모든 것을 특징짓는 것은
두려움이라는
에너지 장이다.
두려움의 대상은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생각에서 눈을 돌려
느낌을 바라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사실은
느낌이 생겨나는 곳이
에너지 장이므로
느낌 저변의 에너지 장을 바라보고
다루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러면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두려움을 직접 다루는 법도 깨닫기 시작한다.
어렵지 않은 기법들에 익숙해지면
사실 두려움은
아주 간단하게 다룰 수 있다.
세상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지배한다.
개인들의 삶을
주로 지배하는 것이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에 긍지로 몰리지 않는 법을 터득하면,
희생자라는 생각은 물론이고
세상도 뛰어넘을 수 있다.
세상이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무기는
오로지 두려움 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은행계좌를 차단하든,
회계감사를 실시하든
우리에게서 달아나든
우리를 떠나거나 해고시키든,
우리의 머리를 겨누는 총은
언제나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똑같은 총이다.
물론 몸의 한 부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끝없이 이어지겠지만,
두려움과 두려움의 희생자가 되는 어리석음에는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그리고
두려움의 희생자가 더이상 아님을
도처에 만연해 있는
두려움에 휘둘리는
벌레같은 존재가 아님을 깨달으면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을
버릴 수 있다.
이런 과정을 즐기며
자신을 진심으로
긍정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문제는
두려움 자체가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에너지 장이다.
그러나 이 에너지 장도 통제할 수 있다.
두려움의 근원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다스리려면 먼저
"내 두려움의 근원이 바로 나"라는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기분이 달라지면
무섭게 느껴지던 것도
더이상 두렵게 다가오지 않는다.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저게 두려워"라고 말했다가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거나
기분이 달라지거나 깔깔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보면
더이상 두려움이 일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려움의 근원은
바깥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
자신의 두려움에 종지부를 찍기위해
세상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나 법률, 규칙들을 바꿀 수도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의 근원은
우리 내부에 존재한다.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상상해보자. 두가지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사건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다.
사건 현장에 경찰이 많이 나타나면 물론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아파트에 강도가 들었을때 경찰들은 실제로 어디에 있었을까? 당연히 다른 곳에 있었다. 요컨대 두려움을 다루는 일은 정말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우리 자신이 두려움의 근원이며, 우리의 의식속에서 두려움이 일어난다는 것을 자발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해결이 시작된다. 두려움이 실제로 경험되는 차원에서 두려움을 다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으로 얼마간 두려움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두려운 경험을 다룰 때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두려운 느낌은
말 그대로
무수한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두려운 생각에는 끝이 없다.
두려운 생각은
두려움 자체의 에너지 장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 장이
일련의 무수한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특정한 생각들을 다뤄도
그 효과는 제한적이다.
두려움이
나중에 더 많은 생각들을
불러올 뿐이다.
그러므로
두려움 자체를 다루는 기법을
사용해야 한다.
삶에서 두려운 어떤 것,
이미 일어났거나 일어날 것 같은
두려운 일을 상상해보자.
철로에 묶여있는데
기차가 자신이 몸을 짓누르고 지나가는 것같은
끔찍한 일을 그려볼 수도 있다.
이럴 때 생각을 넘어서
자신이 경험하는 것을
잘 들여다보면
몸에서 먼저 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근육이 긴장되고 배속이 메슥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며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입술이 바싹 마른다. 어떤 이들은 위경련이나 호흡곤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어떤 증상이 나타나든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 알려면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
곧 근본적인 진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경험에 대한 생각이나
경험에 투사시킨 개념들은
절대 진실이 아니다.
경험에 붙은 딱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
진실이다.
내면을 들여다볼 때는
경험되는 것을 경험하지 않으려는 저항을
내려놓아야 한다.
예를들어 입술이 마르는 것에 대한 저항도 내려 놓는다. 입술이 말라도 그대로 인정하고 기꺼이 맞아들인다. 배속이 뒤집어지거나 팔다리가 떨리는 느낌에 대한 저항도 내려놓는다. 그러면 경험되고 있는 느낌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릴 수있다.
완전히 내려놓고
이런 느낌들에 순응하는 것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가 되는 것과도 같다.
도교의 오래된 지혜를 따르면
바람에 저항하는 떡갈나무는
부러지기 쉽다.
하지만
바람을 따라 휘어지는 버드나무는
살아남는다.
버드나무처럼
우리도 다가오는 경험에 따라
휘어질 줄 알아야 한다.
다가오는 경험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기꺼이 맞이 하는 것이다.
그래 더 겪어보자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단히 놀랍게도
이 감각의 양도
제한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의 양이 한정되어 있는 것같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마치 어린시절부터
평생 억압해온
온갖 두려움들이 들어있는
압력탱크와 같다.
스스로 경험하거나
표현하지 못한,
혹은 표현을 허용받지 못한 두려움이
모두 이 안에 들어있다.
예를들어 군대에 복무중인 남자에게 두려움의 표현은 용납이 안된다. 남자답지 못하거나 비겁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의식 중에 두려움을 억압하고
누르고 속에 쌓아둔다.
이렇게
자각하지 못하는 두려움은
평생 수도없이 생겨난다.
두려움이 일면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의식바깥으로 두려움을 밀어낸다.
또는 책상에 대고
드럼을 치듯
손가락을 두드려 댄다.
이처럼 재빨리
두려움을 억눌러 버리기 때문에
두려움이 거기 있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두려움의 에너지는
쌓여간다.
그러다 두려움 이면에 있는 에너지의 압력이 증가해서 일정한 주위에 이르면 다시 말해 계기판의 붉은 선에 바늘이 다다르면 두려움의 에너지는 스스로를 표출하기 시작한다.
두려움이
우리의 경험위로 흘러넘쳐
경험을 물들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럴 때
잘 관찰하지 않으면,
세상이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고 착각하고
세상을 탓하게 된다.
저기 바깥에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투사된 두려움이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쌓아둔 두려움들이
두려움의 근원임을
인정해야 한다.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이 두려움을 모두
흘려보낼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두려움에서
근본적으로 해방되는 길은
마음 깊이 순응하는 것이다.
자신이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두려움의 내적인 경험과 감각은
그대로 존재한다.
누군가
우리의 심장에 총을 겨누고
"가진 돈 다내놔!"라고 소리친다면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입이 바싹 마르고 무릎에 힘이 없어지고 속이 뒤집히는 것같은 그 익숙하고 오래된 느낌이 되살아 날 것이다.
적의 탱크가 다가와
집을 부수고 포신을 돌려
우리의 이마를 조준한다면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누군가 우리의 머리위에서 쥐를 흔들어 댈때와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입이 마르고 속이 메스꺼워지고 장이 경련을 일으키고 근육들이 파르르 떨리는 느낌이 들 것이다.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것은
이런 감각들 뿐이다.
이 기법을 실천해보면
우리가 정말로 다루어야 할 것은
의식속에서 경험하는 것뿐임을
알 수 있다.
몸이나 어디 다른 곳에서
두려움의 증상이 나타나도
마찬가지다.
명상을 하며
이 기법을 시행하다보면
두려움의 경험이
사실은 어디에서나 널리 퍼져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근육이 불안하게 떨리거나
속이 뒤집어지거나
입술이 타들어 가는 현상들 모두
모호하게 널리 퍼져서
어디서나 경험한다.
이런 경험들에 저항하지 말고
경험들이
그냥 거기 존재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이런 현상들에 집중하면
더 이상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되어
두려움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생각자체는
두려움을 더욱
부추긴다.
두려움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는 기법을
부지런히 실천했다면,
이제 에너지 장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두려움 이면에 있는
에너지의 점진적인 해방과
방출에 저항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 버린다.
더이상 한밤중에 끔찍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눈을 뜨지 않아도 된다. 두려움도 내면의 정서적 경험에 불과함을 깨닫고, 두려움에 대한 감각도 쉽게 다룰 수 있다. 정말로 이 타들어가는 입술을 스스로 다룰 수 있을까? 물론 난 그럴 수 있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제거하는 다른 기법은
이런 감정들과 관련된 심상 즉
부정적인 감정들을 끌어당기고 확대시키는
심상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 이미지들을 부정하고
이런 이미지들을
탐닉하고 싶은 유혹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이 구체적인 기법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동안,
지금 설명하고 있는
원칙들 가운데 하나를 입증해줄 만한
경험을 했다.
평생 나는 고소공포증에 시달렸다. 고소공포증이 얼마나 심한지 그랜드캐니언에 처음 갔을때 벼랑 끝 30미터 이내의 자리에서 발도 뗄 수 없었다. 그때 가능할때마다 이 기법을 실천하면서 점진적인 진전에 뿌듯함을 느꼈다. 사실 이전까지는 내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는 작업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온갖 경험들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극복하는 작업에는 열심이었으면서도 말이다.
약 2년후 다시 그랜드 캐니언을 찾았을때는 대단히 놀랍게도 벼랑끝에서 약 6미터도 안되는 곳까지 가볼 수 있었다. 다음 1-2년동안 나는 계속 이 기법을 훈련했다. 그러다 다시 그랜드 캐니언을 방문했는데 정말 놀랍게도 이번에는 벼랑끝까지 갈 수 있었다. 이후로는 열기구를 타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평생 쌓아두었던
온갖 두려움의 에너지와 압력을
풀어버렸음을 확인하자
기분이 날라갈 것 같았다.
압력탱크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풀어 버릴수록
내 삶의 경험들 속에 흘러 넘치던
두려움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내면의 저항을
내려놓는 방법은
아주 효과적이다.
저항이
우리를 꼬드겨서
특정한 의식상태에
가둬두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100의 부정적인 에너지이며,
우리를
두려움의 에너지 장에
가둬버린다.
이 두려움의 장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두려움의 근원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자신이 만든 두려움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근원이
저기 바깥에 있다고 합리화하는 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자임을,
상황이나 일을 경험하는 방식을 세운 것이
바로 자신임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상황을 다룰 수 있다.
그러면
자기존중감도 생겨나고
더이상 두려움에 희생되거나
휘둘리지 않는다.
우리와 두려움은
같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의식속에서 일어나는 경험에 불과함을 알기 때문에
무엇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식으로
딱지를 붙여서
두려움에 실체을
부여하는 일도
더이상 하지 않는다.
이렇게
실체를 부여하다 보면
두려움은 끝도없이 이어진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세상 모든 것에
두려움을 갖다 붙인다.
세상을 변화시켜도
이런 두려움은
해결할 수 없다.
매우 안전한 상황에서도
끔찍한 두려움을 느낄수도 있지만
상당히 위험할 것같은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들어 노상에서 강도를 당했다고 하자.
그러나
강도를 당한 것과
강도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다른 문제다.
강도를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실제로 강도를 당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삶에서 아주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도
두려움을 전혀 경험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사건의
증인에 불과한 것처럼
느낄수도 있다.
근교에 있는 산 정상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방울뱀을 만났을때 이런 일을 경험했다. 통나무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는 찰나 문간 바로 앞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방울뱀을 보았다. 방울뱀을 타고 넘기 위해 발을 올린 순간 녀석은 머리를 홱 들어 올리고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나를 물 태세를 취했다.
그 순간 퍼뜩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방망이를 들어서 뱀을 후려칠까? 그냥 냅다 줄행낭을 칠까? 도와 달라고 소리칠까? 지금 나한테는 총이 없지만 누군가 총으로 뱀을 쏴 죽여줄지도 몰라. 사회적인 의식이 내 안에 깔아놓은 온갖 방어적인 생각들이 스쳐갔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도 당시 나는 이 기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게 됐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이 기법의 사용여부에 나의 생명이 달려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이 기법을 정확하게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 두려움에 무언가 조처를 취하고 싶은 욕망을, 무언가를 바꾸거나 다루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았다.
그 대신
내 안의 큰나 안으로 들어가
어떤 저항도 없이
내면의 경험이
스스로를 풀어내도록 내버려 두었다.
심지어는
이런 경험을
더욱 많이 반기기도 했다.
우리의 의식의 경험속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의 생존이 이것에 달려있으며
모든 것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나도
얼마나 잘 내려놓고
신에게 순응하며
이 경험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풀어버리느냐에
나의 생존이 달려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저항을 내려놓고 순응하자
두려운 생각들도 즉시 사라져 버리고,
나와 방울뱀 모두에게
깊은 평화의 상태가 찾아왔다.
마치 내가 증인이 된것 같았다.
그러나
이 증인은 몸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의식속에도 있었다.
그리고
이 형체도 크기도 없는 의식은
평화의 현존을 경험하는
경험자였다.
이 심오한 상태는
그 힘이 아주 강력해서
뱀은 물론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의 인격까지 압도했다.
뱀은 30cm도 안되는 거리에서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 보았다. 평생에 나같은 인간은 아마 본적이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커다른 호기심을 안고 방울뱀을 바라보면서 녀석을 형제처럼 받아들였다.
이렇게
우리는 같은 공간속에서
깊은 친밀감과 함께
하나로 결합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이런 상태에서
일종의 내적인 기쁨이 솟아오르면서
두려움의 에너지 장이 사라지고
뱀을 향한 사랑이 일어나는게 느껴졌다.
의식지도를 보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수 있다. 그 방울뱀은 아마 부정적인 에너지 장을 지닌 나의 두려움과 분노, 자기를 후려치고 싶은 욕망까지 즉각 감지했을 것이다. 뱀의 에너지 체계를 통과하는 반응은 워낙 빠르기 때문에 내가 정강이를 피하기도 전에 나를 물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심각한 위협을 느끼자마자
내려놓기를 진심으로
온 마음으로 실천했다.
다 내려놓은 것이다.
이런 자발적인 내려놓음 덕분에
수용과 사랑, 기쁨을 통해
깊은 평화의 상태로
곧장 들어갈수 있었다.
이 경험의 에너지 장 변화를
수치로 표현한다면
100에서 시작해
거의 600으로
즉각 올라갔다고 할 수 있다.
그 순간
무한하고 깊고 고요한 현존이
널리 퍼지면서
경험 전체를 통제해 주었다.
이로써
뱀과 나 모두
두려움에서 벗어나
시간을 초월한 침묵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뱀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헤어짐으로
이 마법에서 풀려나는게
아쉬웠다.
그러나 방울뱀은 이내 스르르 사라져버렸고, 방울처럼 생긴 꼬리에선 더이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가치있는 이유는
두려움이
안전의 근원이라는 믿음체계가
거짓임을 입증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체계도
풀어버려야 할 것 중의
하나이다.
마음은 마치
모종의 작은 신이라도 되는 양
두려움을 숭배한다.
마음속의 프로그램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이유는
두려움 덕분이야.
두려움이
내가 할일을 정해주었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는 거라고"
내면을 조금만 성찰해보면
이런 믿음체계가
계속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음 늙어서 가난해지는게 두렵지 않다면 보험을 안 들었을거야. 자동차 사고가 두렵지 않다면 운전도 조심해서 하지 않겠지.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자신의 생존과 생명의 근원을 두려움으로 보기 시작한다.
이들의 삶에서는
두려움이
곧 신인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두려움을 숭배한다.
위의 예를 놓고 보면 진실은 정반대다.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은
두려움의 부재와
두려움이 아닌
신중함, 현실을 직시하는 상식이다.
두려움 덕분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이다.
우리는
두려움의 방해를 받지 않고
본래의 큰나에서 생겨나는
가치와 지식, 합리적인 선택을 기초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하루 종일
특별히 두려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실제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토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필요하다. 그런데도 두려움이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두려움이 유익하며, 드러나지 않은 온갖 신비로운 가치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이런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고 두려움 덕분에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합리화한다. 이런 이들에게 내가 할 수있는 말은 안타깝다는 것 뿐이다.
자신이나 동료,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생명자체에 대한 사랑이나
그들 자신의 삶 혹은
몸에 대한 사랑에서
그 일을 한게 아니라니
얼마나 슬픈가?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사랑때문에
우리의 몸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심근경색같은 병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몸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해서
몸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살피지는 못하는 걸까?
이런 두려움을 더욱 많이 내려놓는 또 다른 기법이 있다.
내가
최악의 시나리오라
부르는 기법이다.
두려움을 살펴보며
왜 나는 이것을
두려워하는가? 하고 자문하다 보면,
이런 질문의 끝에서
또 다른 두려움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들어 차를 운전하는게 왜 두려운가?
아마 사고를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사고를 당하는 것은 왜 두려운가?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를 입으면 어떻게 되기에 두려운 것일까?
아마 통증으로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다 보면,
모든 두려움이 궁극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즉 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또는
타인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거나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두려움을 살펴보면서,
이 두려움이
어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이 두려움의 저변에
어떤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자문하면
드디어 최악의 시나리오를,
즉 궁극의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들어 돈이 완전히 바닥나 살곳도 음식이나 옷을 살 돈도 없이 거리 모퉁이에서 치료도 못받고 반벌거숭이로 추위에 오들거리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일어난다고 하자.
이럴 때
우리가 할 일은
이 두려움의 느낌에 저항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내려놓으면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그려보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가난한 농장에서 머물거나 노숙자가 되어 거리 한구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한밤중에 친구도 없이 가방을 옆에 끼고 추운 거리의 모퉁이에 앉아있는 모습 말이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두려움이 무엇이든,
이것을 상상하고 내려놓는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내면에서 떠오르는 두려움들에 대한
저항을 계속 내려놓으면
곧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두려움도
바닥이 나고 만다.
이런 훈련을 충분히 오랫도안 계속하다보면
가만히 앉아서
"가장 큰 두려움"
즉 나는 관속에 누워있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관옆을 지나쳐가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드디어 다룰 수 있게 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리는 것이
다른 아닌 신체적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곧 우리이며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라는 믿음때문이다.
이런 믿음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한다.
이럴때는
다른 두려움이 일어날때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자리에 가만히 앉는다.
그리고 하나의 딱지, 생각, 개념에 불과한 죽음을 내려놓는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환상이나 생각, 믿음만 갖고 있을 뿐, 죽음의 실체를 경험한 적은 없다. 마음속에서 하나의 환상처럼 죽음에 딱지를 붙일 뿐이다. 죽음을 떠올리고 죽음의 느낌과 감각에 대한 저항을 내려놓으면 정말로 놀라운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을 겪어내고
전체 경험보다 더욱 큰 존재가 되었을때
비로소 최악의 시나리오 속에서도
살아남았음을 깨닫는 것이다.
먼저 노숙자가 된 자신을 상상해보자. 두려움이 바닥날 즈음이 되면 이런 상상도 즐길 수 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출근을 할 필요도 없고 돈을 내야 할 청구서도 하나 없고 건강보험료나 자동차 보험료를 낼 필요도 없이 그저 하고 싶은 일만 하는게 정말로 신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하고 싶은 일만 하는게 정말로 신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피해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도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
게다가
삶의 다른 경험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경험이기도 하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는
두려움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도 곧 사라져 버린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거리 한구석에서
위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삶에 대한 두려움도 시들어 버린다.
물론 이런 삶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삶이 닥쳐도 두려움으로 가득차지는 않는다. 이런 삶에 대한 두려움에 더이상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밤에 침대에 누워 어느 날 돈이 다 떨어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지도 않는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이런 두려움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은행에 쌓아두면 된다는 생각도 소용이 없다.
내가 아는 사람중에는 6억달러 상당의 재산을 갖고 있다가 결국은 파산해서 빛을 갚기 위해 소유물들을 전부 팔아치워야 했던 이도 있다. 6억달러만 있으면 두려운 것으로 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돈은 우리를 전혀 보호해 주지 못한다. 장벽을 쳐도 문에 열쇠 6개를 채워도, 경찰을 더 많이 고용해도 마찬가지다.
유일한 보호책은
우리 경험의 근원이 바로 자신임을
우리 경험의 지배자가 바로 자신임을,
자신이 두려움보다는
더욱 큰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우리의 두려움을
정당화시키려 한다.
음, 노상강도가 많이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까 내 두려움은 당연한 거야 하고 꼬드긴다.
그런데
당연한 두려움 따위가
왜 있어야만 하는가?
도대체
누구에게 이런 것이
필요하겠는가?
공격을 당하지 않을 방법을 선택해서
집으로 돌아올 수는 없은 걸까?
자신에 대한
충분한 사랑으로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는 걸까?
이런 위험성을
더 이상 끌어당기지 않을 정도로
삶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즉 자신의 선택으로
이런 길을 가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생존 여부를 결정하는 건 노상강도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생존은 두려움을 모르는 마음이 한 이전의 선택에 달려있다. 오늘 내가 살아있는 건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덕분이다.
한발짝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방울밤이 나를 물지 못하게 저지한 것은 바로 두려워 하지 않는 내 마음이었다. 두려움을 버리고 내려놓은 덕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2차 세계 대전과 같은 대단히 심각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기쁨과 행복, 신뢰만을 경험할 수도 있다.
나는 한 무리의 흉악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 본적이 있다. 내가 두려움을 느꼈다면 그들은 고소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선뜻 공격했을 것이다. 실제로 나같은 사람이 무시무시한 총과 사슬, 칼을 쥐고 있는 그들을 곧장 뚫고 지나가자, 그들은 흥분을 하기도 했다. 내가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했다면, 그들은 아마 나의 대담함에 딴지를 걸고 나를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을 내려놓은 덕에 나는 안전할 수 있었다.
내가 두려움이나
허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도 감정적으로
폭발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내려놓는 것은 아주 유익한 방법이다. 이 방법을 실천하면 무언가 우리 내면에 두려움을 키워오고 있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나도 이것과 더불어 지낼 수 있다.
한번은 나도
꼬박 2주동안이나 두려움을 안고
돌아다닌 적이 있다.
온몸을 타고
오싹한 전율을 느꼈지만
일을 보러 다니며
두려움이 그냥 계속 흘러나오도록 했다.
언젠가는
두려움이 바닥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다보면
원래의 두려움 저변에
또 다른 원인이 있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바로 죄책감이다.
이제 세상에서 영적인 의식 혹은 이 비슷하게 부르는 작업의 가치를 살펴보겠다. 용서의 가치에 집중하는 기법들의 이점을 알 것이다.
자신과 타인들을 용서하고
모든 판단을
신에게 맡기고 나면
자신과 타인들을 질책하는 마음을
내려놓은 덕분에
무의식적 죄책감과 더불어
두려움도 사라지기 시작한다.
타인들에 대한 공격으로
보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복수나 반격에 시달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인들에 대한 모든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생각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타인들에게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은
육안으로는 볼수 없는
정신과 영혼의 차원에서
곧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올 것을
쌓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타인들을 비난하는
생각과 비판, 적대감, 화를
내려놓으면,
우리 자신의 두려움도
줄어듬을 느낀다.
그러면
타인들을 안좋게 판단하는 생각들을
내려놓은 것이
가치있는 일임을 깨닫고
타인들을 있는 그대로
그들의 존재자체로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자신을 그냥
타인과 다를 뿐인 존재로 보기 때문에
타인들도 나와 다른 존재로 인정한다.
이로인해
타인들을 기꺼이 용서하고
관대하게 바라봐주게 된다.
더불어 타인들에게서 찾아낸
모든 단점들이
사실은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자신과 타인들에게서
비난했던 점이
사실은 자라면서
무엇이든 들리는 대로 믿어 버린
우리 안의 작은 아이가 지닌
순진무구함, 인간적인 면모였던 것이다.
아이 때 우리의 의식은 순진무구했다. 그렇지 않은가? 부모를 믿고 따랐다. 어머니를 사랑했다. 아이의 순진무구함이 프로그래밍된 것도 그래서다. 순진무구하기 때문에 부모와 교사들의 말을 듣는대로 다 믿어버리고 텔레비전 탓에 사회정치적으로 프로그래밍되고 국가의 믿음체계도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 마음속의
온갖 믿음체계를 받아들인 것은
무엇일까?
혹은 누구일까?
우리가
지금 믿는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는
누구일까?
바로 우리안의 순진무구한 마음이다. 어린 아이같은 순진무구한 마음, 즉 의식자체의 본질은 우리가 태어난 이래로 바뀐적이 없다.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난 이걸 믿어. 내 안에 이걸 받아들여야지'라고 말하는 존재도 이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의식이다. 이 순진무구한 아이는 결코 죽지 않는다. 여전이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역설적이게도 종교때문에 누군가를 증오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무지하고 예민한 젊은이들도 있다. 이들은 순진한 사람들을 증오하거나 살해하는 짓을 좋은 심지어는 성스러운 일이라고 믿는다.
본래의 순진무구함을 이해하고 나면,
잘못된 것인데도
이제까지 그 모든 것들을 흡수한 이유가
진실을 모르는 순진무구한 상태탓이거나
진실이 아닌 것을 학습했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이로 인해
타인과 자신을 향한 비난을
기꺼이 내려놓는다.
자신과 타인들의
순진무구함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잘못된 정보들이 순진무구한 마음속에 들어온 것은 불행하고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마음이 컴퓨터의 하드웨어라면 믿음체계는 소프트웨어와 같다. 다섯살짜리 아이가 부모나 조부모 혹은 유치원 또래 친구들이 설명해준 정치체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결국 원인은 아이의 모름에 있다. 아이가 잘못된 믿음체계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순진무구한 모름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들을 기꺼이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비난하는 대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연민은
이런 이해에서
생겨난다.
연민의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내면의 회복을 통해
우리 자신이 경험한
연민의 근원이 되었는데,
연민 가득한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자신과 타인들의
순진무구함을 깨달은 이상,
세상도 연민 가득한 따스한 곳으로
느껴진다.
더이상
두려움에 떨며
돌아다니지 않는다.
내면에서 이제는
더이상 두려움을 창조해 내지 않고
자신이 두려움의 근원임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요컨대
세상은 결코
두려움의 근원이 아니다.
두려움은 근원은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창조해
끝없는 죄책감으로
두려움을 퍼뜨리는 일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런
죄책감을 만들어 낸 건
사회적인 조건화가
우리에게 부여한
끝없는 판단이다.
이렇게
내려놓으면
무의식의 죄책감도 줄어든다.
그리고
무의식적인 죄책감을 내려놓으면
우리 인식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대신
이해하려고 노력할때마다
우리가 쌓아 두었던
무의식적인 죄책감이 줄어든다.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누군가 확 죽어버리기를 바라면
무의식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갑자기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 여러분 물론 '아무개가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와 같은 생각이 심장마비에 대한 두려움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관련이 있다. 다른 누군가의 급사를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정말로 신기하게도 심장동맥에 문제가 있다거나 병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줄어든다. 이로 인해 음식물 섭취에 미리 조심해야 한다는 강박증도 수그러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아주 평화롭게 받아들이게 된다.
마음을
내려놓느냐에 따라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또
두려움이 아닌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생명의 소멸가능성에
더 이상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래서
삶과 자신의 본질을
다르게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런 경험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십우도가 묘사하는 것처럼 소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의지와 달리 구겨진 옷을 입고 무릎에 피까지 흘리며 끌려가는 대신, 소를 나무에 묶어둘 수 있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소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은 덕분에 이제는 자신이 주인이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소들에 올라타게 되고 소는 고분고분해진다. 우리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큰나와 하나가 되면 더 이상 희생자가 되지 않는다.
희생자적 태도는
무자각에서 비롯된다.
마음안에서 작동중인
이 게임의 구조를
아직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자각하기만 해도,
이미 이것에서 벗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책을 다 읽을 즈음이면
여러분도 희생자적 태도를 떨치고
일어나게 될 것이다.
소를 나무에 묶어두기 위해 애쓰고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설명한 기법들을 실천하다보면 곧 소위에 올라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두려움이 일어나도 이렇게 맞아들인다. "좋아! 두려움을 더 많이 내려놓을 좋은 기회야!" 평생 쌓아두었던 두려움이 줄어들 때 어떤 이득이 주어지는지 이제는 충분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나서야, 자신이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두려움을 안고 있었는지 인식한다.
그래서
두려움이 줄어들면
놀라 소리친다.
제가 그렇게
두려움이 많은 사람인지
정말 몰랐어요.
세상을 경험하는 태도와 에너지 장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의식지도를 참조하면, 이 점을 더욱 쉽게 이해할 것이다.
마음이
경험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실제로 우리의 경험은 달라진다.
그만큼
마음은 강력하다.
두려움도 세상에 대한 시각을 창조해내고
자기충족적인 예언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연구는 물론이고
최근에 대학에서 실시한 연구들도
마음속 생각이
세상에 대한 경험으로
구체화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 마음의 외적인 재현이
곧 세상에 대한
경험인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삶은
거울들로 이루어진
세계와 같다.
우리가
실제로 보고 경험하는 것은
우리 의식수준의
투사물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이런 말이 쉽게 믿기지도 이해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고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학습영역이 될 수 있다.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도 우리가 인식하는 완전한 학습영역이 될 수 있다.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도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환영,
즉 불교에서 말하는 마야maya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제 의식지도를 갖고 각 의식의 단계들과 이 단계들에 동반되는 감정, 세계관, 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교해보자.
의식의 맨아래에는 죄책감(30)이라는 부정적인 에너지 장이 있다.
이 장은
자기 혐오와
자기파괴의 세계다.
이 단계의 사람은 죄책감으로 사로잡혀 있으며 세계를 고통과 죄로 가득한 곳으로 본다. 이런 세상을 지배하는 신을 이들이 어떤 존재로 볼지 짐작이 될 것이다. 집단 무의식 속에 뿌리박혀 있는 죄책감으로 이들은 신을 인간의 궁극적인 파괴자로 본다. 지진이나 화산분출, 홍수, 역병같은 것으로 인간을 징벌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신이 죄와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은 이 안에서 고통을 받다가 지옥불속으로 영원히 내던져진다고 본다. 이것이야 말로 그럴법한 최악의 시나리오다.
희망없음과 에너지 상실의 단계인 무감정(50)의 장으로 올라가면 세상과 삶을 상대적으로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본다.
이로 인해
유명한 철학자 들 중에는
인간은 아무 존재도 아니고,
신은 죽었으며,
이 세상은 희망이 없는 곳이라고
말한 이들도 있다.
이 단계에서는 신은 죽었거나 적어도 인간의 고통에 잔인할 정도로 무관심하다고 본다.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자각의 정도가 향상되면 슬픔(75)의 단계로 올라간다. 이 단계에서도 사람들은 세계와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다. 후회와 상실감, 의존심, 낙담 등의 감정에 빠진다.
슬픔의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은
거리를 걸으면서도
이 세상이 슬픈 곳이라고 생각한다.
노인을 보면 늙는다는 것의 슬픔을 생각하고 어린 아이들을 보면 이 약하고 천진한 아이들이 살면서 겪게될 슬픈 일들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한다. 신문을 펼치고서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슬픈 일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슬픔의 단계에 어울리는 신은 아마 그들을 무시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가치없는 존재라 느끼고 '난 벌레같은 인간이야'. 신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질리가 없어. 신이 존재한다면 아마 나를 무시하기만 할거야라고 말한다.
그럼 두려움(100)의 에너지 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이들은
두려움의 창조자이자
소유자, 근원이다.
걱정과 근심, 공포, 낮은 자기존중감 탓에 세상을 무서운 곳으로 본다. 거리를 걸을 때도 도처에서 위험을 감지한다. 신문도 불안한 마음으로 펼쳐들고 파산이나 살인같은 기사에 집중한다. 거리를 걸을때도 자동차 사고에 초점을 맞추며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처럼 겁에 질린 의식의 장에서는 신도 징벌을 일삼는 존재로 바라본다. 인간을 정말로 증오해서 끝없는 악몽같은 세계속으로 던져버리는 존재말이다. 그리고 이런 악몽의 창조자도 물론 복수와 응징을 일삼는 가혹한 처벌자 즉 신이라고 생각한다.
명치의 영역인 욕망(125)의 단계로 올라가면 갈망과 바람이 강해진다. 새미소사(도미니카 출신의 야구선수)를 달리게 만든 것도 이런 욕망이다. 하지만 욕망을 충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을 얻어도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백만장자도 500만달러를 갖고 있으면 600만달러를, 600만달러를 가지면 700만달러를 원한다. 이런 사람은 결코 끝에 다다르지 못한다. 이들의 욕망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늙어서 일도 안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해도
피해망상증에 걸려
세상이 자신을 적대시한다고 생각한다.
행복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행복은 125가 아닌 500의 단계에서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더욱 많은 것을 갖고 싶은 욕망과 갈망에 갇혀 있다. 그래서 세상을 좌절감을 안겨주는 곳으로 본다. 언제나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세상은 이것을 항상 뒤로 숨기는 것만 같다. 보석상의 진열장을 바라볼때면 이런 갈망이 튀어나와 보석들을 갖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이런 사람들은 결핍감을 오히려 즐기는 것 같다. 보석을 가지면 만족감은 얻지만 행복을 느끼지는 못한다. 일시적인 만족감만 경험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신은 어떤 존재일까? 이들은 신이 있어도 자신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낀다. 자신은 자신대로 신은 신대로 아무 관계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좌절감을 안겨주는
이 욕망의 세계에서는
격앙된 감정이 분노나 증오, 불만, 전쟁,
살인을 낳는다.
분노에 휩싸인 사람의 과도한 팽창은
혈관의 돌출로 나타나며,
내면의 분노한 동물이
불쑥 올라와 벌컥 화를 내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경쟁적인 곳으로 본다. 누군가 자신의 가계 근처에 중고차 매장을 열면 상대가 자신의 가게를 망하게 할 것이라며 분개한다. 아직 화합의 세계로 나가지 못해서 근처에 중고차 매장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도처에서 더 많이 몰려들어 사업이 번창하리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이처럼 화합은 커녕 경쟁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극단적이며 사람들에게 적대적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은 보복을 일삼는 존재이다. 처벌과 응징, 보복을 일삼는 존재로 신을 보는 것이다. 나는 질투와 복수심에 불타는 신, 네게도 필히 복수를 하고 말리라. 신을 이렇게 생각하는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신을 자신에게 복수를 감행하려는 적으로 인식한다.
이런 분노의 에너지 장에서
어떻게 심신을 이완하고
모종의 자각에 이를 수 있겠는가?
분노에서 자부심의 단계(175)로 올라가면 부정과 오만, 경멸같은 부정적인 면이 나타난다. 의식속에서는 팽창의 과정이 일어난다. 이런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은 신분을 중시하는 곳이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거리를 걸어도 그는 단순히 누군가의 차가 캐딜락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차의 연식과 모델까지 눈여겨본다. 나는 캐딜락에 여러 모델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캐디(캐딜락의 구어체표현)도 캐디(골프보조)를 가리키는 말인줄 알았다. 지금은 이름을 잃어버렸지만 캐딜락에도 여러 모델이 있으며 등급도 다 다르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만날때 상대의 지위에 관심을 갖는다. 오 그는 어디어디 사장이야 나 그는 육체 노동자에 지나지 않아라는 식으로 판단한다. 부가 이들에게 주는 것도 돈이 아니라 신분이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신을 어떻게 볼까?
선택은 두가지일 것이다.
우선 부정과 지적인 오만으로
이들의 좌뇌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혹은
자신의 입장은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전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들은 회의주의나
심한 편견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내 종교관이 옳아. 그러니까 네가 틀린게 분명해"라는 생각은 모든 종교전쟁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자부심은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대립적인 생각을 갖게 만든다.
또
자부심의 단계에 동반되는 불안은
사람을 방어적으로 만든다.
이 단계의 사람은
이기지 않으면
지는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용기의 단계(200)로 올라가면 처음으로 적절한 태도를 갖는다. 직시하고 이겨내고 해결할 수 있게되며 자신에 대해 진실을 말하기 시각한 덕분에 힘도 얻는다. 용기의 단계에서는 거리를 걸을때도 도전의식을 일깨우는 흥미진진한 기회의 세계를 본다. 성장과 배움, 팽창을 가능하게 해주는 짜릿한 세계에서 타인들의 성장을 지켜봐준다. 이 단계에서는 또 자신의 공간을 확장시키는데서 내적인 기쁨도 맛본다.
미합중국과 서부에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온갖 거대 산업체들과 과학 기업체들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도 이 용기 덕분이었다. 용기는 우리를 달로 인도하기도 했다. 요컨대 이 단계에서는 성장과 팽창이 일어난다.
이런 의식단계의 신은
어떤 존재일까?
이 의식단계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마음을 갖는다.
자신이 답을 안다고
오만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복수심에 불타는 부정적인 태도에 동조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그런게 정말 있는지 궁금해. 개인적인 자기보다 더욱 큰 어떤 존재가 정말로 있는지 알고 싶어. 마음을 열고 이것에 대해 배워야겠어"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세상을 대할 때처럼 신이라는 의문을 즐거운 탐구의 존재로 받아들인다. 영적인 공부가 정말로 재미있는 일임을 깨닫고 공부를 통해 흥미롭고도 유익한 사실들을 발견한다.
다음의 중립단계(250)에서는 무집착을 경험한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일자리를얻어도 좋고 그렇지 못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지배받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힘은 더욱 커진다. 따라서 세상도 더 이상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 사람이 내 삶에 머물러 준다면 정말 좋은 일이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해도 함께 할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더이상
두려움속에 살지 않으며
어느정도 낙관성 속으로 진입했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시각도 낙관적이다.
이런 낙관적인 세상에서는 신도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 신이 있다면 좋은 일이야. 없어도 문제없어라고 여기면서 신에 대해서 온당한 태도를 견지한다. 신이 있다면 그는 공평한 존재일 거야.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그렇지 않아도 문제가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발성의 단계(310)에서는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삶을 받아들인다. 나도 합류할 거야. 나도 동조할거야. 생각을 같이할 거야라고 말한다. 또 도움을 주려는 자발적인 의지와 분명한 행복감을 경험하고 세상을 호의적으로 본다. 거리낌없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세상도 호의적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걸을때도 사람들이 상냥할 것 같다고 느낀다. 할머니에게 다가가 "안녕하세요. 날씨 정말 좋네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아. 아침 내내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어. 정말 좋은 날씨야"
세상을
우호적인 곳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신도 희망을 주는
믿음직한 존재로 여긴다.
호의적인 세상의 신은
호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종교가 없어도
신을 신뢰하기 시작한다.
신을 안믿는 경우에도 호의적인 자세로 이렇게 말한다. "음 신이 있다면 할머니처럼 따뜻할 거야.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이유로 나를 지옥 불구덩이에 던져넣지는 않을거야.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낸 것은 그분이니까. 그분이 직접 손으로 나를 빚어냈으니까 그런 신이 어떻게 그럴수 있겠어? 자신이 만든 창조물을 왜 불행하게 만들겠어?
이렇게
신을 확고히 신뢰한다.
수용의 단계(350)으로 올라가면 자신이 가진 힘의 근원이 자신임을 인정한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행복의 창조자가 된다. 의식의 이런 변화로 스스로 적합한 존재라는 느낌과 자신감을 얻는다. 자연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화롭다. 거리를 걸을때도 모든 것들이 미묘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음을 확인한다. 모든 것들이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본래의 자기로 존재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낀다. 노숙자 여인이 그 자리에 있는 것도 그녀 스스로 노숙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노숙자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지금과 같은 모습을 선택했다. 이런 시각 덕분에 외부의 것들에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세상이 조화를 표현하고 있음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조화로운 세상에서는
신도 자비롭고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존재로 보이기 시작한다.
수용의 결과로
우리를 휘두르던 감정들이 고요해지고 나면,
생존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처럼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키는 느낌들에
방해받지 않고
지속적인 능력과 분별력,
이성을 더욱 활발히 사용할 수 있는 길이
분명하게 보인다.
왜곡과 산만함에서 자유로워진 덕분에 400대의 의식수준에서 나타나는 추상적인 사고와 학술적인 연구같은 고차원적인 학습과 교육의 이점, 논리를 활용할 정도로 마음이 맑아진다. 이 단계는 증거와 입증을 중시하는 뉴턴식 패러다임에 기초한 과학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속해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레이트 북스"와 같은 책과 뉴턴, 아인슈타인, 프로이트같은 유명한 천재들도 이 400대에 존재한다.
400대의 의식단계에서는 전전두엽피질의 사용이 극대화되서 개인적인 힘이 현저하게 증가한다. 그래서 이 단계의 사람들은 전전두엽피질을 활용해서 거친 감정보다는 이성과 논리라는 도구로 두려움과 걱정, 불안을 다룬다. 세상도 덜 두려운 곳으로 여기고 아이처럼 거칠게 감정에 휘둘리기보다는 한층 성숙하고 고차원적인 차원에서 세상의 위험을 이해한다. 이로인해 우리의 마음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현실을 검증할 수 있는 능력과 균형에 이르기 위해 안전장치와 제한성을 발견한다.
이처럼
선한 의지와
이성적인 세계관 덕분에
내면의 불안은 줄어들고
두뇌의 생리작용과 목적도 변한다.
따라서 500의 의식단계에서 삶의 주요한 원리로 사랑이 등장한다. 자기도취적인 에고의 핵심에 지배받는 낮은 차원의 의식과는 대조적으로 이 단계에서는 타인들의 안녕과 관계를 가꾸는 일이 가장 주요한 관심사로 떠오른다.
여기에서
더 진화하면
사랑은 이제 무조건적인 것(540)이 된다.
이로써
영적인 지복과 평화를 경험하는
더욱 고차원적인 영적단계(600)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닦인다.
이 세상에 도움이 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속에서 더욱 위로 올라가면 생명을 부양하고 지지해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형태가 나타난다. 기꺼이 용서함에 따라 초 기적인 드러남도 일어난다. 더불어 엔도르핀이 분비되면서 도처에서 사랑을 보기 시작한다. 자연속에서도 동물들의 세계속에서도 사랑을 목격한다.
모든 이들의 내면에서
어린아이 같은
자연스러운 사랑을 본다.
아이처럼
사랑가득한 마음이
모든 이들의 내면에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에 감응하는 법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내면에는 아이같이 순진무구하고 따스한 마음이 살아있다. 이런 마음은 움직일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냉혹한 살인자도 사랑이 깊은 사람앞에서는 무해한 인간이 된다. 반대로 두려움에 떠는 사람앞에서는 공격할 마음이 일어나 실제로 공격을 가한다.
그러므로
사랑이 깊은 사람은
세계를 안전한 곳으로 경험한다.
신도
필연적으로 그의 의식수준과 같은 모습을 띠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랑의 존재로 인식한다.
이런 진실의 경험이
기쁨을 불러일으키고
이런 기쁨은 의식의 변형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우리를 자비속으로 인도한다.
자비로운 사람은 내면의 고요함 덕분에
모든 존재들이 완벽함을 깨닫기 시작한다.
또한 창조자의 무조건적 사랑이 만들어낸 일체성을 모든 존재가 하나님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형태는 달라도 모든 생명들이 신성하다고 생각하고 이런 자각속에서 지복과 무한한 평화를 느끼는 빛비춤과 깨달음의 상태속으로 들어간다.
이 상태에 들어가면
창조물들의 완전한 일체성으로 인해
신을 존재 자체의 핵심으로
자각한다.
산속에서 방울뱀을 마주보고 서있을때 우리 둘을 무한한 평화와 일체성속에 취한 듯 못박아 두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 살아있음의 상태속에서 방울뱀과 나의 생명은 별개의 둘이 아니었다. 우리는 하나인 것 같았다. 일체성의 본질이 우리 둘을 통제해 주고, 둘인것처럼 보이는 방울뱀과 나를 하나의 경험으로 묶어 주고 있었다. 진실로 오로지 하나의 경험만 일어나고 있었다. 하나의 경험이 둘을 통해 경험되고 있었거나 둘이 서로 일체성을 느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격할 생각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경험의 에너지 장이 이미 상위단계로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신적인 평화라고 말하는 느낌이 우리를 감싸주었다.
사실 감정에는
사랑과 두려움 두가지만 존재하며,
사랑 아래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전부 두려움의 변형에 불과하다는
가르침도 있다.
도덕적 잘못에 대한 두려움이나
생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존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행복의 근원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 등
온갖 형태의 두려움이 있다.
감정에는 정말로 두가지 표현밖에 없다.
사랑은 500에서 시작돼 무한히 자라나고
두려움은 100에서 시작돼 아래를 향한다.
그러므로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루려면
이런 내면의 두려움을 다룰 힘이
우리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우리가 두려움의 근원임을 깨달으며
이 두려움을 세상이나 신에게 투사시키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누구도
두려운 세상을 만들지 않았으며
두려운 세상같은 것은 없다.
두려운 세상은
우리안에 있을 뿐이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이제 내려놓아야 한다.
두려움 자체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사랑의 현존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웃으면서 화 낼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ㅋ
아울러
걱정?두려움? 불안감 등이 올라 올 때
입 꼬리를 살짝만 위로 치켜 웃어보세요?
부정적 에너지가 힘을 잃어요ㅋ
웃음이야말로 아주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좋은 훈련같아요
감사합니다_()_
치유와 회복을 읽으면서 호킨스 선생님께서 감정을 다루는 근본적인 방법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듯 합니다.
행복합니다 ㅎㅎㅎ
두려운 세상은 우리안에 있을 뿐이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이제 내려놓아야 한다. 두려움 자체와 두려움에 대한두려움을 내려놓고 사랑의 현존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환자가 내 진료실을 방문하면 나는 먼저 다음 진료까지 알코올은 물론이고 당을 일절 끊으라고 지시한다. 몇해 동안 이렇게 해본 결과 환자의 25%가 치료되었다. 다시 만났을때 그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병의 발병률이 아주 높고 그 형태도 다양하므로 온갖 정서적 장애를 불러오는 요인으로 탐색해 볼 필요는 있다. 저혈당증은 신체적 폭력은 물론이고 정신 이상증세까지 촉발시킬 수 있다. 제대로 진단을 받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폭행이나 다른 폭력범죄로 구치소나 감옥신세를 지는 이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부부사움이나 사회적 논쟁, 가족간 마찰, 행동 장애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우리 마음속의 온갖 믿음체계를 받아들인 것은 무엇일까?
혹은 누구일까?
우리가 지금 믿는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는 누구일까?
의식
깨달음은 의식의 장에서 일어나는 철저하게 주관적인 실상
두려움의 에너지는 한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