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 속의 서울>
판자집 3층, 고기 뛰노는 청계 의류 멬가
丘 仁 煥
세월은 쉬지 않고 흘러간다. 하루하루가 더딘 것 같으면서 세월은 화살같이 흘러간다. 하
지만 그 세월은 그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크고 작든 간 어떤 흔적을 남기고 흘러가는 것
이 세월이다. 이런 흔적이 치열한 삶이 남긴 흔적일 수도 있고 세상이나 문화의 변화일 수
도 있다. 사실은 그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는 바로 이 세월이 남긴 흔적이다. 10년이면 강
산도 변한다는데 해방의 소용돌이에서 6.25전쟁, 4.19, 5.16 등 수많은 격동의 송요돌이를 겪
은 한국이 얼마나 변했는가는 불과 4대 문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서울이 인구 천만의 대도
시로 변모한 것만 보아도 세월의 흐름 속의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가를 알 수 있다. 1
이러한 세월의 흐름 속에 이루어지진 살아가는 풍속이나 도시는 내 작품에 수용되어 당시
의 생생한 도시의 삶의 환경과 삶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 많은 작품에 수용된 서울의
옛 모습을 되새기면서 현재의 서울을 바라보면 역시 세월은 발전이라는 동력에 의해 수많은
흔적을 남겨 수도 서울의 오늘의 번영에 의한 국제도시로서의 면모에 놀라게 된다.
내 작품 속에 서울의 많은 곳과 삶의 양상과 그 절규가 수요되어 있다. <동굴주변>과 <
판자집 그늘>의 청계천, <산정의 신화>의 서울역, <푸라하의 겨울>의 여의도, <동트는
여명>의 명월관을 주심으로 한 종로, <불타는 서울>의 종각 뒤의 돌담 주변, <숨쉬는 영정
>의 남산 적십자사 주변, <뒹그는 자화상> 답십리, <용두골 신화>의 용두동, <그 뒤 20년
>의 명동 등 많은 작품에 서울의 당시의 양상이 수용되어 있다. 그 가운데 작품의 어제를
보면서 오늘의 서울을 바라본다.
먼저 방산 사장 근처 장 청계천 가에서 리아카 장사를 하여 살아가는 발을 젖는 상이군인
이 철거반에 쫓는 <판자집 그늘>의 절규에서 50녀대 말의 청계천을 볼 수 있다. 광교부터
청계천에 지은 2층짜리의 나무 판자집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처절한 군상 속에서의 절규에
가슴이 저려 온다.
청계천 건너편 하꼬방에서도 연기가 소복소복 오르고 있다. 갑자기 눈이 부신다. 전기가 들어 온
모양이다. 학교에서 넘어오는 불빛이다. 형식은 그저 멀거니 허공을 응시했다. 청계천! 맑은 물이 흐
르고 가로수가 늘어서고 가로등이 조는 연도를 젊은 쌍쌍이 아베크하는 동경의 냇가이어야 할 게
아닌가. 체! 방은 어둡기만 하다. 불야성을 이루는 거리는 전설 같은 얘기고 촛불도 과하다는 거다.
이렇게 차별이 많아서 되겠느냐 말이다. <판자집 그늘>
'청게처! 맑은 물이 흐르고 가로수가 늘어서고 가로등이 조는 연도를 젊은 쌍쌍이 아베크
하는 동경의 냇가가 할 게 아닌가.'의 절규가 현실화되기 까지 50년이 걸려 복개되고 3.1고
가도로로 먹칠된 천계천이 한 상인궁인의 절규가 실현된 꿈의 청계천으로 변모되어 서울의
숨통이 되고 의류의 멕카에 서울 사람의 안식처가 되어 있다.
세월 따라 변한 것은 어디 청계천뿐인가. 여의도는 또 국회와 금융가 중심의 신천지로
변해 있다.
뒤에 온 친구가 더 급했다. "다 드릴 테니 건너가요. 어서……"그때서야 사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가에서 멀어지자 남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강북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걱정할 사이도 없이
무사히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이 고마웠다. 여의도 백사장에 내렸다. 뱃사공은 재빨리 배를 돌려 돌아갔
다. 그 친구와 바삐 걸어갔다. 갈대 숲이 제법 우거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이 안 보일 정도이
다. <프라하의 겨울>
1950. 6.28일 오후 4시경 이미 붉은 색으로 뒤덮인 장안을 빠져 마포 종점에서 배를 타고
건넌 여의도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유진오의 <창랑정기> 그대로이었다. 그 뒤 50년
여의도는 정치와 금융의 중심이 되어 서울의 심장부가 되어 있다.
1979년10월에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 혼란이 거듭되어 전두환을 주로 한 신군부의 권력
쟁취의 와중에 학생과 노동자 시민이 들고일어나 서울역 광장에 10만이 넘는 군중이 운집하
여 계엄령해제와 자유선거를 부르짖는 군중대회가 열리는 서울역 광장의 한이 그려져 있다.
17일 오후부터 각 대학생이 서울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울에 있는 학교는 물론 시골의 대학
생도 올라오고 동대문 남대문의 상인들과 시민들이 모두 생업을 접어 두고 서울역으로 서울역으로
모여들었다.……저녁때가 되자 학생과 시민이 서대문 방향과 남대문 방향, 퇴계로 방향, 남산 방향
의 도로까지 점령하여 민중의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14일 영등포역전 10만명보다 훨씬 많은 민중
이 모여온 시민의 궐기로 서울이 훨훨 불타는 것 같았다. <불타는 서울>
예술적인 서울역은 그대로 서 있고, 지금은 KT가 달리는 신청사가 들어서 현대적인 역이
면서 각종 집회가 여전히 열리고 있는 광장에는 1.4호선 지하철 승객들로 넘치고 있다. 그
건너 이문희의 <흑맥>에 점철 된 양동 사창가는 대우호텔을 위로 대우빌딩과 경찰서 벽산
빌딩으로 둘러 싸여 남산탑을 멀리 바라보고 있다.
중앙극장과 명동은 예나 이제나 젊음이 약동하고 예술적 고풍이 풍기고 있다. 모니카 빗
디와 아랑 드롱의 성과 증권의 와중의 <태양은 외로와>나 새로운 영화 기법으로 사랑을
성취해 가는 <남과 여> 등의 명화의 전당(殿堂) 중앙극장은 대형극장에 밀리고는 있지만
새롭게 신축하여 젊은이의 광장이 된 명동과 같이 옛 영화를 되새기고 있다.
좁기는 하지만 화려한 거리. 중앙극장 뒷길을 지나 성당 앞을 지나갔다. 꽤 행인이 많다. 때 이른
눈이라도 기다리며 걷고 있는 젊은이들인가. 미스 오는 연방 입을 놀려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
스 오가 도어를 밀고 들어갔다. 조그마한 맥주집이었다. <흔들리는 바위>
전후에 다 파괴된 폐허에 의연히 서 있던 명동성당은 옛 그대로 서 있고, 예술극장이 증
권회사로 바뀐 명동 사거리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넘나들고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던 '돌체'
'나 '청동' '예술회관' 등은 고금 양화점으로 변하여 강남으로 이동한 상권을 되살려 남대문
시장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 뒤 이십 년>의 충무로 '커피 하우스'는 새로운 모습으로
그 이층을 지키고 있다.
첫댓글 60년대. 신학기가 되면 청계천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헌책방에서 교과서도 사고 참고서도 사고... 어려웠지만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이 넘치던 시절이었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