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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Bastille)는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던 1789년 7월 14일 무장 시위대에 의해 습격을 받고 그곳에 감금되어 있던 죄인들이 방면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시위대의 기대와는 달리 고작 일곱 명의 죄인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렇다면 바스티유는 본래 감옥으로 축조된 것일까?
아니다. 감옥이 시위대에 의해 점령되기 약 450년 전인 1370년 ‘백년전쟁’의 와중에 프랑스 왕 샤를 5세는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파리를 보호하기 위해 공고한 요새를 건립하기로 했다. 바스티유라는 명칭 또한 ‘작은 요새’를 뜻하는 ‘바스티드(bastide)’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바스티유가 완성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는데, 방어 보루와 내부 등이 순차적으로 완성되었다. 바스티유는 30미터 높이의 탑 8개가 같은 높이의 벽으로 이어져 있으며, 24미터 너비의 해자가 둘레를 싸고 있다. 해자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 둘레에 만든 인공 연못을 가리킨다.
한편 바스티유를 감옥으로 사용한 것은 루이 13세 아래서 총리를 지낸 리슐리외(Richelieu, 1585~1642) 추기경이었다. 그래도 요즘 감옥과는 달리 썩 많은 사람을 구금하지는 않았다. 리슐리외는 말이 추기경이지 프랑스의 국무장관과 총리를 지냈고, 절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으며 복잡한 역학 관계에 놓여 있던 근대 유럽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도권을 제압하는 동시에 프랑스를 유럽의 중심에 놓기 위해 노력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그는 가톨릭을 대표하는 추기경이었지만 자신이 목표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톨릭 편과 프로테스탄트 편을 넘나들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배신자라는 명칭을 여러 곳에서 들어야 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을 감안한다면 관용을 베풀어야 할 성직자가 바스티유를 감옥으로 처음 전용하여 구체제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게 만든 과정을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바스티유는 그 명성에 걸맞게 볼테르, 디드로 같은 저명인사들을 구금한 경험이 있는데, 이는 국사범을 주로 투옥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감옥은 우리가 생각하는 감옥과는 꽤 거리가 멀었던 듯하다. 자신이 사용하던 가구를 들여놓는 것은 물론 요리사를 고용해 풀코스 요리를 즐기기도 했다니 말이다. 게다가 시종을 부리기도 했다고. 그러다 보니 죄를 짓고 이곳으로 피신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감옥인지 별장인지 혼동할 만하다. 이러한 사정은 바스티유 감옥이 공격을 받던 날에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죄수 일곱 명 가운데 경제사범이 넷, 정신이상자가 둘, 나머지 한 사람은 성범죄자였다고 한다.
한편 금서들도 이곳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역할만으로는 건축물을 유지하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따라서 1784년에는 건물을 폐쇄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789년 바스티유는 군중의 공격을 받았고, 군중들은 감옥 소장 베르나르 조르당에게 무기와 탄약의 반출을 요구했다. 두려움에 질린 소장이 몸을 피하자, 격분한 군중들은 감옥을 점령했다. 이로써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던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즉 구체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바스티유 또한 뒤를 이은 혁명정부에 의해 철거되기에 이른다. 그 후 프랑스에서는 1880년부터 해마다 7월 14일을 ‘바스티유의 날’로 지정해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스티유 감옥 (세상의 모든 지식, 2007. 6. 25., 서해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