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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의 말 순수종합문예지 《한국문학시대》 ‘권두에세이’ 원고 청탁을 받고서 종합문예지 ‘권두에세이’라는 부담스러운 글을 쓰게 됐다. 문예지 발행인 겸 편집주간으로부터 갑작스럽게 받은 원고청탁이었다. ‘권두에세이’란 글은 과거 대전수필문학회 연간 동인지 《수필예술》誌에 회장 임기 2년과 연임 2년을 더해 4년 동안 전담하여 쓴 적이 있다. 이때는 문학 모임 대표가 ‘권두언’을 쓰는 것이 관행이었다. 회장으로서 의무적으로 의당 써야 하는 글로 여겼으니, 마감일에 쫓기지도 않았다. 이번엔 달랐다. 우선 종합문예지 ‘권두에세이’를 쓸만한 자격이 되느냐 자문해 보았다. 그동안 종합문예지 권두 글을 집필한 문인들의 면면을 볼 때 문단의 단체장이거나 고문(顧問)이거나 저명 원로 문인들이 집필하는 것이 관례였다. 문단의 큰 어르신들이 경륜과 권위를 가지고 쓰는 귀한 지면인 것이다. 그런 일반적인 관행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원고청탁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문예지 발행인은 “이미 편집회의에서 중지를 모아 결정한 일이고, 권두언을 쓰실만한 분이니 집필해달라”고 했다. 권두언(卷頭言)이나 권두사(卷頭辭)는 문자 그대로 책의 맨 앞에 실리는 글이다. 요즘 문예지에서는 ‘권두언’이란 말은 왠지 경직되고 권위주의적인 뉘앙스가 풍긴다고 해서 ‘권두 에세이’로 바꿔 쓰는 추세다. 다른 책과는 달리 문학지만큼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 부드럽고 자유로운 소재(素材)를 권두에 담자는 뜻이기도 하다. 편집자는 ‘책의 얼굴’과 같은 글이 ‘권두에세이’라고 했다. 그만큼 정성을 들여 써달라는 뜻이지만 필자로선 부담스러운 주문이다. 그렇다고 더는 사양할 구실을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그처럼 귀한 지면을 내게 제공해 주는 것만도 특별한 배려이고, 문단 이력을 존중해 주는 것이라 여겨져 기꺼운 마음으로 승낙하고 말았다. 문단 경력 30여 년 동안 주로 수필을 써 온 사람이다. 수필이란 글은 뜬구름 잡은 이야기가 아니다. '구체적 사실의 의미화'라는 말에 공감한다. 평범한 일상에서 느끼는 진솔한 이야기가 주로 글감이 된다. 원고청탁은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자유로웠다. 어떤 제약이나 조건에 구애됨이 없이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도록 전적인 권한과 재량을 주었다. 필자에 대한 편집진의 과분한 신뢰가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글을 쓰면서 자신을 돌아다 보는 일이었다. 결국, 필자 자신에 대한 성찰의 글을 쓰고 있었다. 나 역시 그동안 사랑을 받은 만큼 제대로 보답했는지, 베풀어주신 따뜻한 성의에 걸맞은 답을 과연 했는지, 보답은커녕 서운하게 해드린 일은 없는지, 자문자답(自問自答)하면서 이 글을 썼음을 고백한다. ■ [필자 윤승원] ※ 본 졸고 에세이는 문단에서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필자의 블로그, 카페 독자와도 공유한다. |
권두에세이
문인들의 흥을 돋우는 추임새
- ‘나눔과 베풂의 미학’ 讀後記 댓글로 功德 쌓기 -
윤승원 수필가, 前 대전수필문학회장
고수(鼓手)의 북 장단은 음식으로 말하면 맛이다. 옷차림새로 말하면 멋이다. 기분으로 말하면 흥이다. 판소리꾼이 창을 할 때, 고수가 ‘좋다’, ‘좋지’, ‘얼씨구’, ‘으이’ 따위의 추임새를 넣어주지 않으면 어찌 될까. 맛과 멋과 흥이 사라질 것이다.
소리꾼이나 글을 쓰는 사람이나 입장이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활동 무대만 다를 뿐 ‘추임새’가 필요하다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SNS 시대는 페이스북,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을 통한 의사소통에서 댓글로 반응한다. 글에 대한 독자의 반응도 ‘고수의 추임새’와 같다. 글쓴이를 소리꾼처럼 신명 나게 하는 것은 따뜻한 댓글이다.
어느 문학단체의 카페에는 방문객 수는 많은데, 댓글에는 인색하다. 한두 개 댓글이 달리면 괜찮은 반응이고, 전혀 댓글이 달리지 않는 게시물도 많다. 이른바 ‘눈팅 방문객’이다. 일부 문학단체 카페는 참여도가 낮아 개점휴업 상태로 방치돼 있다.
문학작품이 재미없어서 그런가. 남의 글에 칭찬이 인색한 것은 근본적으로는 손뼉 칠 만한 ‘긍정의 요소’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의 글에 맞장구를 쳐 줄만 한 흥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 '추임새'를 받을 만한 글인가?
그렇다면 ‘추임새는 어느 때 나오는가?’ 문인들도 고민해 봐야 한다. ‘내 글이 과연 추임새를 받을 만한 글인가?’ 자문해봐야 한다.
SNS 시대에는 고수(鼓手) 아닌 고수(高手)들이 도처에 숨어 있다. ‘좋은 글 감별사’와 같은 매서운 눈들이다. 추임새 받을 만한 ‘좋은 글’이란 단순히 따뜻한 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화제를 불러 일으킬만한 문제작도 포함한다.
좋은 글에 목말라 하는 고수(高手) 독자들은 문인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추임새 넣을 준비는 돼 있으니, 감동을 달라’는 주문이다. 감동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추임새 받을 만한 작품은 남모르는 고뇌와 진통 속에서 꽃처럼 피어난다.
어떤 이는 사이트 특성과 분위기도 모르고 자기도취 성 글을 도배하다시피 게시하는 사례도 있다. 독자가 제목만 ‘눈팅’하고 나가는 이유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다면 작가들이 먼저 반성해야겠지만, 독자나 문단의 구성원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댓글은 자유로운 의사 표시의 한 수단이다. 댓글에는 따뜻한 댓글과 불쾌한 댓글이 있다. 인정 넘치는 따뜻한 글, 남다른 관심을 표명하는 성의 있는 댓글, 모르던 사실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지식을 담은 댓글도 많지만, 예를 갖추지 않아 불쾌감을 주는 댓글도 있다.
◆ 댓글은 잘 쓰면 약(藥), 잘못 쓰면 독(毒)
무례한 언사나 부적절한 언어가 댓글에 섞이면 불쾌감을 준다. 그런 글이라면 차라리 댓글을 달지 않는 것이 글쓴이 또는 게시물의 주인공을 돕는 일이다. 심히 불쾌감을 주거나 인신공격성 댓글은 폭력이나 살인의 고의(故意)와 같다. 댓글로 인하여 심적 고통을 겪다가 죽는 사람도 생긴다. 댓글은 잘 쓰면 약(藥)이요, 잘못 쓰면 독(毒)이다.
댓글은 해당 글에 대한 ‘보충의 성격’도 띤다. 글에서 오류를 바로잡아주거나 작가가 미처 언급하지 못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도 한다. 남의 글에서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면 댓글로 지적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신중해야 한다. 잘못을 지적해 줄 때는 예의에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견해를 달리할 때도 정중히 예를 갖추면 글쓴이가 고마워하지만, 직격탄 날리듯 가슴에 던져주면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마치 창을 던지듯 모질 게 가슴에 꽂아주면 그 아픔을 배겨날 사람이 없다.
회원제로 운영하는 문학단체의 사이트에서 댓글은 ‘품앗이’다. ‘오는 정 가는 정’이다. 내 글에 누군가가 따뜻한 댓글을 달아주었으면 그의 글에도 댓글을 달아주는 게 기본적인 예의이다. 비록 짧은 한마디, 정으로 오가는 ‘품앗이’ 성격의 의사 표시일지라도 침묵이나 무관심보다는 낫다.
댓글 한 줄 쓰기가 글 한 편 쓰기보다 어려울 때가 있다. 댓글을 성의 있게 잘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남모르는 고민을 하게 된다. 실수나 흠을 줄이기 위해 해당 댓글난에 즉흥적으로 곧바로 쓰지 않는다. 스마트폰 노트 기능이나 컴퓨터 메모 작업 공간에 초안을 작성하여 오·탈자 없이 정교하게 문장을 다듬어 올리기도 한다.
이렇게 댓글을 달아줘도 어떤 작가는 반응이 없을 때가 있다. 혹여 ‘문단 권위주의’는 아닐까. 조선 시대 ‘에헴’으로 거드름 피우던 정이품 이상 벼슬아치 ‘대감(大監) 권위주의’를 연상케 한다. 자기 글만이 최고라는 착각 속에 빠졌다. 댓글 정도는 우습게 안다.
댓글 수(數)가 워낙 많아 일일이 답례하지 못할 정도라면 이해한다. 그렇지 않은 데도 ‘답례 댓글’을 전혀 달지 않는다. 남이 귀한 시간 내어 공들여 댓글을 달아주면 ‘답 댓글’을 달아주어야 하는 기본 도리와 예의조차 모른다. 이처럼 네티켓(netiquette)을 지키지 않는 작가의 글에 올린 댓글은 당장 ‘삭제’하고 싶어진다.
여기서 사소한 감정을 배제하고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해 본다. 네티켓을 몰라서가 아니라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원로 문인도 많다. 카페나 블로그에서 ‘답 댓글’을 다는 방식을 아예 모르거나, 그냥 넘어가도 두루 양해되는 줄 아는 원로 문인도 있다.
◆ 훌륭한 댓글 '장원'으로 뽑아 지인들과 공유하기도
댓글은 타이밍도 중요하다. 꼭 필요할 때 적시타(適時打) 같은 시원하고 명쾌한 댓글은 게시물을 올린 이나 게시물을 읽는 제삼자나 모두를 즐겁게 한다. 댓글 한 줄로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도 있다. 긴장하면서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미소짓게 할 수 있다.
어느 유력 언론사 사이트에서 수많은 댓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자칭 ‘백일장 심사위원’이 된 적이 있다. 정작 본문 기사보다 독자 댓글 반응이 흥미로워 자연히 ‘댓글 평가자’가 되는 것이다. 댓글에 담긴 내용이 기사를 쓴 기자나 칼럼을 쓴 필자의 시각을 능가한다.
이 같은 훌륭한 댓글은 혼자 읽기 아까워 많은 이들과 공유한다. 수많은 댓글 중 가장 잘 된 댓글을 나름대로 선정하여 스마트폰 노트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를 친 뒤 ‘장원’이라 표시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복사하여 지인들에게 카톡으로 돌리기도 한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인들 간 ‘공감 능력’을 확인하는 적극적인 방식이다.
멋진 댓글 한 줄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 희망을 주는 선량한 사람들이 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다. 용기를 주는 댓글, 힘들어할 때 손잡아 주는 따뜻한 댓글은 혈육과 같은 정을 느끼게 한다.
댓글로 생명을 살릴 수도 있다. 극단적인 선택을 막을 수도 있다. 긴박한 순간, 일선 경찰관이나 119구급대원의 수고로움을 덜어 주는 ‘수호천사’ 역할을 진심 어린 따뜻한 댓글 한 줄이 해낼 수도 있다.
댓글은 그 사람의 인격이다. 격조 있는 댓글 한 줄로 그 사람의 인품이 드러난다. 댓글로 지력(知力)이 드러날 수도 있다. 간혹 동문서답형 댓글을 보면 안타깝다. 내용 파악이 덜 된 상태에서 핵심을 잘못 짚은 댓글이다. 어설픈 댓글 한 줄로 그 사람의 지적 수준과 한글 독해력까지 의심받게 된다. 게시물을 깊이 있게 살펴보지 않고 성급하게 댓글을 달면 댓글에도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남의 글에 댓글을 달려면 먼저 글을 정밀하게 읽어야 한다.
◆ 촌철살인 댓글 잘 쓰는 달인,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댓글을 구사하는 언어를 보면 그 사람의 표정이 그려진다. 화가 난 얼굴인지, 온화한 얼굴인지, 슬며시 미소 띤 얼굴인지 파악된다. 부드럽고 인정 어린 댓글을 잘 쓰는 사람, 그런 호인(好人)을 만나면 반갑다. 남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품위 있는 ‘댓글 달인(達人)’을 만나면 세상이 살맛 난다. 지적 충족감을 주는 댓글, 정곡을 제대로 짚은 촌철살인(寸鐵殺人) 댓글을 만나면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
내가 존경하는 한 원로 학자는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 글을 올리면 신속하게 댓글을 달아준다. 단순히 형식적이거나 인사치레로 댓글을 달지 않는다. 학문적 견해까지 곁들인다. 인정과 사랑이 넘친다. 댓글 쓰는 공간[欄]이 부족하면 글의 중간에 <이어짐>이라 쓰고, 그다음 공간에서 1), 2), 3)이라는 숫자를 붙여 댓글을 이어 가기도 한다. 성의가 넘치는 품격 있는 댓글이다. 게시물을 올린 이는 고마움을 가슴으로 느낀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남의 감동적인 옥고를 발견하면 댓글 공간이 부족함을 느낀다. 별도의 형식으로 의견을 쓴다. <소감>, <독후기(讀後記)>, <감상평>이 그것이다. 해당 작품을 또 다른 시각으로 분석하거나 해설한 내용이 담긴다.
이런 독후기는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진지하게 쓴 장문의 댓글은 한 편의 수필이요, 평론 성격까지 띤다. 필자가 그동안 남의 글에서 ‘긍정의 요소’를 발견하고 쓴 <독후기>나 <감상평>이 책 한 권 분량이 넘는다.
학동(學童)이 ‘칭찬을 먹고 자라는 나무’라면 글을 쓰는 이도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남의 글에서 웬만하면 부족한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긍정의 요소’를 찾으려고 골몰한다.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문맥이 턱턱 막히거나 오·탈자가 많아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글은 예외다.
◆ '남의 글 칭찬하는 즐거움!' 문단활동 으뜸의 가치이며 공덕
<소감>을 쓰고 싶은 감동적인 글을 만나면 즐겁다. 칭찬하고 싶은 따뜻한 게시물을 발견하면 엔도르핀이 솟는다. 혹자는 비판보다 칭찬 일색이면 글쓴이가 자칫 오만해질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해당 작가는 칭찬해준 부분에 대해선 겸손하게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대목을 반복하여 음미하게 된다. ‘칭찬의 힘’으로 더 나은 자기 발전을 꿈꾼다. 신명이 나서 더 감동적인 명작 생산을 모색하게 된다. 용기와 힘을 독자의 댓글이 북돋아 주는 셈이다.
이 시대 존경하는 훌륭한 인품의 문인들에게 제언하고 싶다. 순수 문학지 지면이 됐든, 일간지 칼럼이 됐든, 인터넷 카페, 블로그, 페이스북 글이 됐든, 자신이 발표한 작품이나 게시물에 대해 찬사를 듣기를 원한다면 남의 글에 내가 먼저 칭찬을 해보자. 남의 글을 칭찬하는 즐거움! ‘문단 활동의 낙(樂)’ 중에서 으뜸의 가치요, 공덕(功德)이다.
짧은 댓글 한 줄도 좋고, 독창적인 의견이 들어간 <독후감>이나 <감상평>도 좋다. 문인들의 흥을 돋우는 따뜻한 ‘댓글 추임새’야말로 나눔과 베풂의 미학이요, 원고료 못지않은 값진 선물이다. ■
첫댓글 ※ 페이스북 댓글 모셔옴
◆ 김명순(시인, 대전문인총연합회장, 한국문학시대 발행인) 2021.06.15.
SNS시대의 특징은
자신을 커뮤니티(공동체)에 연결시켜
정보를 공유 공감하는 일입니다.
공감하는 일이 바로 추임새입니다.
적극적 공감이
삶의 활력입니다.
윤승원 작가의 권두 에세이 감사합니다.
▲ 답 댓글 / 윤승원 2021.06.15.
오늘 우편으로 배달된 책을 받아 보았습니다.
발행인이자 편집을 총괄하시는 김명순 회장님의 정성과 노고가 듬뿍 밴
종합문예지였습니다.
귀한 지면에 권두에세이를 쓰도록 배려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SNS시대에 독자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고자 이런 소재의 글을 썼는데,
SNS가 익숙하지 않으신 원로 문인들께선 혹여 불편해 해실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합니다.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늘 힘을 주시는 따뜻한 격려 감사합니다.
※ 대전수필문학회 댓글
◆ 강승택 (수필가)
청중 없는 무대가 없듯 독자 없는 글이 성립할 수 없겠지요.
글(작품)과 댓글의 관계를 판소리와 고수의 관계로 비유하신 윤 선생님의 글이
참으로 절묘하고 적절해 보입니다.
모름지기 글을 쓴다는 文人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답댓글 / 윤승원
제가 원고지 25장 분량의 장문의 글에서 언급한 핵심 주제를 강 선생님은
단 몇 줄로 압축하여 필자의 흥을 한껏 돋우셨습니다.
강 선생님 필력과 인품은 鼓手를 뛰어넘어 高手의 경지를 보여주십니다.
무대에서 소리꾼이나 북장단 고수나 호흡이 이만큼 잘 맞는다면
객석의 관중까지 궁둥이를 들썩이며 신명 나게 할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 페이스북 댓글
◆ 조용연(작가, 전 충남경찰청장) 2021.06.16.
편집자는 자신의 분신인 책의 들머리에 어떤 분을 모실까를 고민하는 칼잡이지요.
사채이자 갚는 날보다 더 무서운 마감날을 위해 총구를 닦는 사냥꾼입니다.
선택, 그건 그. 한 사람을 고르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 그의 글’이므로
게다가 긴 글을 이끌어가는 힘은 사유의 끈질긴 추적이 없이는 막막한 일이라 더욱 그러하지요.
주섬주섬 끌어모아 한 보따리 묶어 놓은 대중가요 한담을 일일이 파헤쳐 가지치기까지 해서
버젓이 한 상 차려내시는 실력은 익히 알지요.
장천 윤승원 작가님의 손맛을 아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방송취재를 거절하는 맛집 앞에 줄을 서듯 말입니다.
▲ 답댓글 / 윤승원
조용연 작가님의 차원 높은 문학적 표현에 감탄합니다.
<어떤 분을 모실까를 고민하는 칼잡이>, <사채이자 갚는 날보다 더 무서운 마감날>,
<마감날을 위해 총구를 닦는 사냥꾼>, <사유의 끈질긴 추적이 없이는 막막한 일>,
<방송취재를 거절하는 맛집 앞에 줄을 서듯> … 이 같은 표현이 그러합니다.
제가 일찍이 조용연 작가님을 <‘지식정미소 창안’ 특허권자>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면서,
그분이 바로 제가 몸담았던 직장 <충남경찰청의 총수를 지낸 분>이라고 하면 지인들이나
많은 문인이 놀라워하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문예지에 실린 졸고 권두 글을 소개하면서 숨어 계셨던 이 시대 ‘문장의 高手’
조용연 작가님을 댓글 공간에서 뵙고 문인들에게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단에서 흔히 훌륭한 문장을 구사하는 존경스러운 문사를 일컬어 ‘詞伯’이라 하는데,
오늘 아침 뜻밖에도 그런 어른을 제대로 뵙게 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분한 찬사에 부끄러워하면서도 ‘명문 격려 댓글 추임새’에 감동을 주체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문학시대 65호의 권두언에 해당하는 윤선생의 에써이는 곰곰히 읽으면서 한편의 창작적인 수필이라고 생각했습닏다.
한 잡지의 권두언으로 대표적인 업적이라고 하면 고 이기백교수가 편집하여 만든 한국사 시민강좌를 듦에 아마 이의를 제기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이기백교수는 한권을 책을 출간함에 혼신의 노력을 했습니다. 아마 역사학계에서 이런 수준 높고 공들인 권두언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입니다.
많은 지식인이 이에 감탄을 했습니다.
문학잡지에서 권두언은 역사학잡지와는 다른 것입니다. 새롭고 참신한 스타일의 권두언에 찬사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쓰는 일은 고단한 일입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즐거운 마음으로 써야 하는 것이고, 그런 속성을 지닌 것이 문학의 본령인데 글을 쓰는 과정은 농사꾼이 곡식을 탈곡하는 일련의 작업만큼 수고가 들어갑니다.
탈곡도 찧고 까불고 제대로 방아를 찧어야 양식거리가 되는데 저의 글은 뉘가 많이 섞여 있을 겁니다.
작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뉘가 '좋은 글 감별안'을 가진 독자의 눈에는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글쓰기가 두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경험을 남에게 들려주는 수필이란 글은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기 전에 필자 자신의 성찰이 먼저입니다. 제가 수필이란 글을 隨筆이 아니라 修筆이라고 하는 까닭입니다. 부족한 권두 글을 따뜻한 격려 말씀으로 감싸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