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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방에 정말 돈 많은 부자가 살았습니다. 이 부자가 낮잠을 자는데 꿈 가운데 이상한 음성이 세 번씩이나 들려 왔습니다.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이 지방의 제일 큰 부자가 죽을 것이다”
부자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식은 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이 지역에서 부자는 나 말고 누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내일 아침에 죽는다 말인가?”
그는 병원에 가서 진찰과 정밀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그는 밥을 먹지를 못했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깜박 졸다가 친구의 방문으로 잠을 깼습니다. 벌써 동편에는 해가 떴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cls구가 말했습니다.
“자네, 간밤에 동네에 초상난 줄 아는가? 가난한 아무개가 죽었다네. 그러나 그는 참으로 마음은 부자였지”
그때서야 부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부자는 내가 아니라 진짜 부자는 그 사람이었구나”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진짜 부자의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믿음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부자입니까? 예 저는 부자입니까? 3부자입니다. 아들 둘을 두고 있거든요.오늘 본문에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은 자부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16)라고 했습니다.
멸망의 직전에 놓인 북쪽 이스라엘도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는 실로 부자라 이제는 한 밑천 톡톡히 잡았는데 모두가 내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이다 누가 나더러 부정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말하겠는가?”
라오디게아교회가 바로 스스로 부요하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도시 라오디게아는 정말 부유했습니다. 세 개의 큰 도로가 관통하는 교통 요충지로 양모산업으로 부요한 상업 도시이며 금융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제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웅변가인 키케로가 주전 51년 경에 동방의 나라를 여행하다가 자기 신용장으로 현금을 바꾼 도시가 바로 라오디게아였습니다.
로마 역사가 타키터스는 라오디게아에 대하여 기록을 남겼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우리에게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재력에 의해서 폐허로부터 일어났다”
무슨 말인가 하면, 주 후 17년과 60년경에 두 번의 큰 지진으로 도시 라오디게아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두 번째 지진 때에는 로마 제국에서 원조를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도시는 원조를 거절하고 자기들의 재원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를 복구해 낼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민들은 ‘우리가 가진 돈이면 우리가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교회 교인들까지도 자만심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다. 우리는 무슨 일이던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부심에 빠지면 주변의 사람에게서 도움을 원하지 않는 독불장군이 됩니다. 나아나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돈만 있으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스스로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간절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는 미지근한 상태로 빠지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생활을 하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조심해야 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 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 8:12-14).
공원에 아주 든든하게 굿굿하게 서 있는 느릅나무가 어느 날, 큰 나무 가지가 우직직하게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날은 그렇게 비바람이 치지도 않았고, 눈비가 내린 날도 아니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원 정원사가 이 나무 가지가 부러진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아무리 눈이 많이 와도 나뭇가지가 찢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는 고요한 날에는 여기저기에서 많은 나뭇가지들이 찢어집니다.’ 라고 ….
성도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는 겸허하게 자신을 낮춥니다. 그러나 조금 형편이 나아지고, 계획했던 일들이 이루게 되면 자만심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꽤 성공한 것을 자신이 인정할 수 있고, 또 나아가 주변 사람이 인정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미지근한 상태로 빠져있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완전한 실패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한심한 자기 평가를 할 때에 그들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7).
자기 평가와 주님의 평가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자신의 인식과 실제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 져서 느근해진 것이 영적으로도 꽤 괜찮은 자리에 선 것처럼 쉽게 착각해 버립니다. 온 세상이 돈 돈 하면서 ‘부자 되세요’ ‘돈이 최고예요’라고 외치고 있으니깐 사업이 확장되고, 돈을 좀 만지니깐 마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증거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물질적인 부족을 모를 때에 최대의 비극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15)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들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네가 부자로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데, 내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아느냐?
(1) 곤고하다. 비참하여 불행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2) 가련하다. 불쌍하고 품위가 없고 천하다는 말씀입니다.
(3) 가난하다. 네가 경제적인 부는 누릴지 모르나 영적으로 지지리궁상이다는 것입니다.
(4) 눈이 멀었다. 세상적인 것은 볼지 모르나 하나님의 세계는 못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5) 벌거벗었다. 온갖 좋은 것으로 치장하고 있으나 영적인 의로운 옷은 입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라오디게아교회에 내린 진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
부요하다고 만족해하는 자들을 향해서 참으로 부요해지는 비결을 권면합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부가 아니라 영원한 부를 추구하라고 권합니다. 좀이나 등록이나 도적이 해하지 못하는 거기에 부를 쌓으라고 권면합니다. 진정한 부요가 무엇인지, 그것을 소유하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을 누구에게서 ‘사라’고 합니까? ‘내게서’ 바로 우리 주님에게서 사라는 것입니다.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에게서 사라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 세 가지를 구입하여 갖추어라는 것입니다.
1. 첫째는 금을 사라고 하십니다.
금, 좋지요. 역사상 최고의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금을 사재기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부자가 되려고 세상은 야단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사라는 금은 세상의 금이 아니라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는 것입니다. 이 ‘금’은 믿음을 말합니다. ‘연단’는 시련을 통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믿음을 소유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부자가 되라는 권면입니다. 이 부자가 진짜 부자입니다.
진짜로 믿음의 부자가 되면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하박국 선지자는 찬양했습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이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돈 부자이기 보다는 믿음의 부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믿음의 부자만이 누리는 부요함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2. 둘째로, 흰 옷을 사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도시 사람들은 옷을 잘 입고 다녔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양모산업이 발달했기에 양털로 원단으로 염색하여 아름다운 옷을 만들었습니다. 경제적인 부를 또한 누렸습니다. 그러니 옷을 얼마나 잘 입고 다녔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잘 입고 다닌다고 생각하십니까? 남들에게 빠지지 않고 잘 입고 다니려고 노력하십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주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을 보았을 때에 벌거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내게서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육체를 가리는 옷, 남에게 보이는 화려한 옷에만 신경을 쓰지 말고, 내면적으로 벌거벗은 영혼을 가리는 은혜의 옷을 입으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사하심을 받은 의의 옷을 입어 벌거벗은 죄악의 수치를 면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권면했습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파스칼은 세상에는 두 가지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죄인시하는 의인과 의신시 하는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날마다 자기의 죄를 고하며 주의 보혈의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기를 죄인시하는 의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잘난 맛에 자기의 의로 살아가는 사람은 의인시하는 죄인입니다. 주님의 의가 없는 죄인입니다.
3. 안약을 사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는 의학이 발달했으며 특별히 안약이 유명하였으며 세계로 수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눈이 밝아서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 사물을 잘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안약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데는 잘하는데,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믿음의 눈은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눈 뜬 영적 장님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게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무엇이 눈에 들어옵니까? 사람은 보는 것에 따라서 관심이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지니,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였습니다. 그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있을 때에 절대로 손대지 말아야 하는 금단의 열매였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 따라서 하나님과 같이 지혜롭게 할만한 유혹의 열매가 되고, 아니면 절대로 손댈 수 없는 금단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주변을 보고 사람들을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는 성령과 은혜가 충만하며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때에 유대인들이 이를 갈며 달려들어 돌팔매질을 했습니다. 그때에 죽어가면서 기도하기를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게 이를 갈면서 원망하고 복수를 외친 것이 아니라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원수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여러분이라면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은 그 비결을 말합니다. 물론, 스데반 집사가 은혜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기도 했지만 그 죽음의 현장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았기에 원수가 원수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삶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어떻게 보입니까? 우리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하지 않습니까? 내 눈을 씻어서 주님의 거룩한 것을 보게 해주시고, 주님의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부자입니까? 부자되십시오. 진짜 부자가 되십시오. 주님께로부터 금보다 귀한 믿음으로 부자가 되십시오. 주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 의롭다 함을 받는 거룩함에 부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사랑으로 부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주님께서 그래 너는 부요한 자다 라고 … 그래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고백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