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宜嬪 成氏, ? 년경 ~ 1786년)는 조선 정조의 후궁으로,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를 낳았다.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어렸을 때 궁에 들어왔다. 이후 정조의 후궁 화빈 윤씨의 처소에서 일하는 나인이었으나 정조의 눈에 들어 성은을 내리고 내명부 정5품 상의(尙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하다가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성씨가 왕자를 낳자 "궁인(宮人) 성씨가 태중(胎中, 임신)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 내명부 정3품)으로 삼는다"며 심경을 밝히고 그해 12월 28일, 정3품의 후궁인 소용(昭容)의 지위를 내린다. 그리고 1783년(정조 7년) 2월 19일에는 의빈의 칭호를 내린다.
그 뒤,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에는 의빈 성씨가 딸을 낳지만 그렇게 얻은 옹주는 첫돌을 넘기기도 전에 사망하고, 1786년(정조 10년) 9월 14일 의빈 성씨는 세번째 아이를 낳다가 운명을 달리한다. 그리고 이미 전에 낳았던 아들도 정비인 효의왕후에게 후사가 없자, 문효세자(文孝世子)로 책봉되었지만 어머니가 죽던 해에 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의학에 정통한 정조가 성씨의 사인을 의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세자와 성씨의 죽음은 정조의 명목상의 할머니지만 오랜 정적(政敵)이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의 음모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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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에서 혜경궁 홍씨가 승은 후궁이었던 의빈 성씨를 반대하거나 좋아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없다. 조선이란 나라의 체제 안에서 왕이 선택한 승은 후궁을 왕실 웃어른들이 개입해 막고 나서는 예는 없다. 의빈 성씨는 정조의 3번째 후궁이자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이었다.
정조가 효의왕후(박은혜)와의 사이에서 14년이 넘도록 후사를 보지 못하자 조정과 왕실이 후궁을 들일 것을 권유했고 가장 먼저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를 후궁으로 들였지만 1년 만에 병사, 다음으로 들어온 후궁이 판관 윤창윤의 딸 화빈 윤씨였다.
정조는 원손을 보기 위해 화빈 윤씨의 처소를 자주 드나들던 차에 윤씨의 시중을 들던 나인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녀가 바로 후에 의빈 성씨가 되는 성송연이다. 결국 정조의 첫 아들은 의빈 성씨의 몸에서 태어나게 됐고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왕자의 탄생이기에 이를 기념하는 대규모 별시가 실시되기도 했다.
의빈 성씨는 집안이 한미하고, 당파가 없던 까닭에 아들을 낳고 3개월 후 왕자의 세자책봉이 거론되면서 정3품 소용으로, 다시 3개월이 지난 이듬해 2월 정1품 의빈으로 책봉됐다. 월화드라마 '이산'에서도 혜빈의 반대로 인해 송연이 승은을 입고도 오래도록 특별상궁의 지위에 머무는 것으로 그려질 예정인데 실제 역사에선 임신을 하지 않은 궁인을 후궁으로 책봉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오히려 정조였다. 당쟁에서 의빈 성씨를 보호하기 위한 처사로 보는 해석이 많다.
또 의빈 성씨는 '이산'에서처럼 정비인 효의왕후와도 사이가 깊었으며 혜경궁 홍씨 등 왕실 어른들에게도 두루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왕자를 낳아 후사 문제에 대한 왕실의 근심을 덜어주었을 뿐 아니라 타고난 성품도 곱고 욕심이 없었던 의빈 성씨를 좋지않게 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