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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권하는 사회의 필독서 - 『우리말의 탄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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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정류장에서 한 할머니가 차편을 묻습니다. “702A번이 가는데요.” “응?” “702A번이요.” 다시 말씀드렸지만 할머니는 영 석연치 않은 표정입니다. 왜 그러시나 생각하다가 뒤늦게 알았습니다. A가 문제였던 겁니다. 영어를 모르시는 할머니는 702‘에이’번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질 않으셨던 거지요. 다행히 제가 탈 버스가 오기 전에 702A번이 와서 할머니를 태워드릴 수 있었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았습니다. 영어를 모르면 버스도 타기 힘든 세상을 사느라고 그분이 얼마나 노심초사할지,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한국은 문맹률이 낮기로 전 세계에서 첫 손 꼽는 나라입니다. 한글이라는 배우기 쉬운 문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얼마 전에는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공식 표기문자로 채택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찌아찌아족이 한글의 본고장에 온다면 한글보다 더 많은 영어 알파벳에 놀라지 않을까 싶습니다. STARBUCKS, HOLLYS, COFFEE BEAN, PASCUCCII… 영어를 모르면 커피 한 잔도 마실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워킹푸어, SSM, 그랜드바겐, 뉴스를 보노라면 매일 쏟아져 나오는 영어 신조어들에 어지럼증이 느껴집니다. 대학교육을 받은 제가 이럴 때 영어를 배운 적 없는 저희 부모님이 느끼실 막막함과 소외감이 어느 정도일지… 무식하다고 여길까봐 말씀도 못하신 채 고스란히 그 불편을 겪으실 걸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쓸데없이 영어를 남용해서 위화감을 조성하고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분들에게 권합니다. 『우리말의 탄생』, 권장도서가 아니라 필독서입니다. 국어학자 최경봉이 쓴 『우리말의 탄생』은 최초의 국어사전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우여곡절의 역사를 다룬 책입니다. 지금이야 국어사전이 당연한 것이지만 백여 년 전만 해도 그것은 하나의 꿈이었습니다. 1897년 최초의 근대 문법연구서인 『국문정리』를 펴낸 이봉운은 ‘자주독립과 문명에 제일 요긴한 국문을 널리 알리고 정확하게 쓰기 위해서는 언문 옥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같은 해에 주시경도 “국문으로 옥편을 만들어야” 한다는 글을 독립신문에 발표했습니다. 근대 자주국가를 꿈꾸던 대한제국 시기에 우리말 사전 편찬은 민족의 꿈이요 시대적 과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주국가 수립은 실패로 끝나고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의 국어(國語)도 일본어가 되었지요.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가르쳤고 조선어는 선택과목이 되었다가 나중엔 그마저 폐지되고 사용도 금지 당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어를 정비하고 교육하여 민족국가 수립의 기초로 삼겠다는 열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요 어문 운동가인 주시경(1876-1914)이 선봉에 섰습니다. 주시경은 말이란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민족의 얼 그 자체”라고 보았습니다. 민족의 발전은 말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달렸다고 믿었던 그는 국문연구소 등에서 연구 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조선어강습원을 만들어 조선어 교육에 매진했습니다. 훗날 조선어 사전 편찬의 기초를 닦은 김두봉을 비롯해, 조선어학회를 이끈 신명균, 장지영, 권덕규, 이병기, 정열모, 최현배 등이 모두 강습원에서 그의 강의를 들었던 이들입니다. 주시경은 또 사전 편찬을 위해서도 힘을 쏟았습니다. 1910년 조선광문회에 참여한 그는 제자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과 사전 편찬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4년 가까이 계속된 작업으로 최초의 조선어사전 『말모이』의 원고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설 무렵, 주시경은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고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지요. 사전 편찬의 꿈이 현실화되기 시작한 것은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결성되면서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광문회, 계명구락부, 조선어학연구회 등이 주축이 되어 사전 편찬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펼쳤지만, 조선어사전편찬회처럼 사전 편찬을 전면에 내세운 단체는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어연구회에서 활동하던 이극로는 언어생활의 표준이 될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권위가 필요하다고 보고, 발기인만 108명에 이르는 사전편찬회를 조직했습니다. 덕분에 사전편찬회와 조선어연구회(1931년 조선어학회로 바뀜)는 우리말 연구의 중심기관으로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지요. 사전에 필요한 권위는 얼추 확보되었으나 사전 편찬은 쉽지 않았습니다. 언어 규범을 제정해야 사전 편찬도 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1936년까지는 사전 작업을 중단한 채 철자법과 표준어를 제정하는 데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철자법 논쟁이 가열되면서 사전 편찬이란 대의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조선어학회와 조선어학연구회1) 사이에 벌어진 철자법 논쟁은 해를 거듭하면서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국어학자이며 신문기자였던 홍기문은 이런 사태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철자법을 비롯한 언어 규범은 사회적 약속의 소산이므로, 지나친 이론 논쟁은 불필요하다는 것이었지요. 나아가 그는 조선어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조선어학회의 국수주의적 경향을 경계하고, 조선어학회가 유일무이한 조선어 수호기관으로 자처하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저자는 이후의 역사를 볼 때 홍기문의 경고가 설득력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해방 후 국어정화와 한자폐지 운동에서 나타난 조선어학회의 독단이 우리말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가로막았다는 거지요. 그러나 저자는 조선어학회의 독단에 가까운 사명감과 민족주의가 사전 편찬의 원동력이 된 것 또한 사실이라고 지적합니다. 중일전쟁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권력 언어인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열을 올리고 창씨개명이 줄을 잇는 상황에서 사전, 아니 우리말은 위기를 맞습니다. 사업의 주역이었던 신명균은 비관 끝에 자살을 택했고, 초고가 완성된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회원들이 검거되고 원고도 압수당했습니다. 조선어 사전에 평생을 바친 이윤재가 옥사했고, 이듬해에는 한징마저 옥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러나 이런 엄혹한 현실에서도 조선어를 지키겠다는 열망은 죽지 않았습니다. 해방이 되고 닷새 만에 조선어학회는 조직을 재건하고 사라진 사전 원고를 찾아 나섰습니다. 9월 8일 서울역 창고에서 2만 6천 5백여 장 분량의 원고뭉치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1947년 10월 9일, 꿈에 그리던 『조선말 큰 사전』첫째 권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참으로 긴 기다림 끝에 나온 첫 권, 그러나 완간까지는 다시 십 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1957년 『큰 사전』의 제6권이 나오면서 우리말 사전 편찬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1897년 이봉운과 주시경이 사전의 필요성을 제창한 지 50년 만에 이 나라도 자신만의 사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말이 사라질 뻔한 위기를 딛고 탄생한 우리말 사전에는 다른 나라 사전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근대 사전의 전범(典範)으로 꼽히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어휘의 변천을 꼼꼼히 기록한 데 비해, 우리말 사전은 옛말을 특수한 어휘로 따로 분류하여 수록했습니다. 옛말을 별도의 전문어로 본 것입니다. 또한 편찬자들은 당시 형편상 우리말 사전이 백과사전의 역할까지도 담당해야 한다고 보고 많은 양의 고유명사를 수록했습니다. 사전의 효용성을 높이려는 이런 방침은 한국어 사전이 갖는 주요한 특징이 되었지요. 50년에 걸친 사전 편찬의 역사는 한 권의 사전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수고가 숨어 있는지 새삼 깨닫게 합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완성하는 데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가 있었듯이, 『큰 사전』도 이름 없는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각 지역의 방언을 조사해 사전편찬회로 보내준 많은 사람들이 없었다면 사전의 완성은 기약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뿐인가요. 십 년 동안 9만 개가 넘는 단어를 정리한 피땀 어린 성과물을 기증하여 사전 편찬을 도운 이상춘 같은 이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최초의 사전을 펴내는 명예를 포기한 그가 있었기에 우리말 사전은 더 풍부해질 수 있었지요. 다가오는 한글날, 광화문 광장에 높이 10미터 무게 20톤에 달하는 세종대왕 동상이 들어선다고 합니다. 우러러보기도 벅찬 거대한 동상을 세우는 뜻은 당연히 한글을 창제한 세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함일 겁니다. 기왕 그 뜻을 기리기로 했다면 부디, 영어를 모르고는 버스 타기도, 화장실 가기도, 커피 한 잔 마시기도 힘든 세상까지 바로잡아주기를 바랍니다. 아마 지하의 세종도 번잡한 도심 한복판에 버티고 있는 것보다 모든 백성들이 편안히 읽고 쓰는 세상을 더 바랄 테니까요. 1) 조선어학연구회는 1931년 박승빈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입니다. 이들은 잡지 『정음』을 통해 조선어학회의 형태주의 표기법을 비판하고 표음주의 표기법을 주장했습니다. 표음주의 표기법은 ‘읽으니’ ‘사랑이’ 대신 소리 나는 대로 ‘일그니’ ‘사랑니’로 표기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현행 맞춤법은 형태주의 표기법을 원칙으로 하되 ‘사랑니’처럼 일부 표음주의 표기를 취하고 있습니다 |
첫댓글 고맙게 잘 읽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