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 (2) 신화, 철학에서의 신 문제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하느님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존재라는 사실이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까'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죽음이라는 것은 돌아간다는 것인데, 어디로 돌아가는 걸까'…. 끊임없는 질문이 하느님을 발견하게 해준다.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철학을 했고, 철학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철학의 중요한 대상으로 삼았다. 철학은 신과 인간, 자연의 문제를 다룬다. 철학의 시작은 자연이었다. 만물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자연도 중요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게 더 중요하다. 철학의 큰 주제는 하느님ㆍ인간ㆍ자연으로, 이 주제들은 계속 번갈아가면서 철학의 중심 주제로 다뤄졌다. 자연철학이 나오기 전에는 신화에서 신의 문제를 다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올림푸스의 신 제우스, 바다의 신 포세이돈, 부부 사랑을 관장하는 헤라 여신, 불을 다스리는 헤스티아, 지하세계를 다루는 하데스 등…. 인간이 희망하는 것을 투사시켜서 신들 모습을 그렸다.
만약 소나 돼지들이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신의 모습을 소나 돼지로 그렸을 것이다. 인간들이 그림을 그리고 생각할 줄 알기에 신의 모습을 사람 모습으로 그렸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여러 신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신들은 죽지 않지만 인간처럼 잠도 자야 하는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신의 세계에도 신들 운명을 지배하는 최고 존재가 있다. 결국 신화는 다신론을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서 그들을 지배하는 절대적 힘을 가진 유일신론을 지향한다.
한편 철학에서도 신의 존재를 다룬다. 소크라테스 제자였던 플라톤은 이데아 세계를 그렸다. 플라톤의 사고방식에서 플라톤적 사랑은 이데아적 사랑을 의미한다. 물질ㆍ육체적 사랑은 저질적으로, 이데아적 사랑은 높게 평가한다.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인간 개념을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서 물려받았다.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교회에 가져오기 전까지 이데아적인 것, 즉 정신적인 것은 고귀한 것이고 인간의 육신은 저질이라고 생각해왔다. 교리에서 보면 우리가 물리쳐야 할 원수는 세속과 육신, 마귀다.
사실 육신은 물리쳐야 할 원수가 아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이 물질적인 것을 죄악시한 경우는 없었다. 예수님은 먹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오히려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시기와 질투, 증오라고 했다. 이 세상 모든 물질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게 창조된 것이다. 플라톤의 사고방식과 달랐다.
플라톤은 이데아 세계가 신의 세계이기에 이데아 세계가 참되고 옳은 것이라고 봤다. 죽음은 이데아에서 온 우리 영혼이 물질적 악의 세계에서 온 육신과 결합해 인간으로 살다가 육신으로부터 해방돼 영원히 다시 이데아 세계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도 죽음은 우리 영혼이 죄스런 육신에서 벗어나 본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꿈은 시간을 초월하는 정신세계로, 하느님이 존재하는 초월적 세계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을, 플라톤은 정신세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의 모든 합리적 사고방식의 기초를 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플라톤 철학의 영향으로 교부들은 사람을 영혼과 정신, 육신으로 구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해 존재하거나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인다고 했다. 예를 들면, 성모상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성모상을 제작한 작가는 부모에 의해 존재하고, 그 부모는 할머니ㆍ할아버지, 증ㆍ고조부에 의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소급과정이 무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시작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만물의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고 봤다. 결과를 통해 최종 원인으로서 하느님을 이야기한다. 토마스 데 아퀴노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접목해 인간이 이성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다며 하느님 존재를 5가지 방식으로 증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증명한 것 같이,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최종 운동자인 '제일운동인(第一運動因)'을 하느님이라 부른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예를 들어 내가 존재하는 데는 나를 있게 한 부모가 있고, 부모에게는 또 그 부모가 있듯이 부모를 계속 거슬러 올라갈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소급할 수는 없다. 그 시작이 되는 '제일작용인(第一作用因)'이 하느님이다.
세 번째는 우연적인 것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전개돼 가는 과정에서 하느님을 증명한다. 우연적인 것은 없다가도 있지만 필연적인 것은 반드시 존재한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세상 모든 사물은 우연적이다. 100년 전에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존재하고 있다. 우주 역시 200억 년 전에 빅뱅이라는 사건으로 생겼지만 300억 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사물이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우연적 존재라면 어느 순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이 존재를 하느님이라고 한다.
네 번째는 이 세상에는 목적 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주 질서가 하느님을 증명한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과 겨울이 오듯이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조화롭게 움직이는 것이 있다. 결론적으로 목적을 부여하는 이도 하느님이고, 그 마지막 목표도 하느님이다.
[평화신문, 2011년 6월 12일, 정리=이지혜 기자]
※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는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에서 매 주일 오후 6시 5분에 방송되며, 평화방송TV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전 8시(본방송)에 이어 수요일 새벽 4시와 저녁 9시, 금요일 오후 4시, 주일 오후 6시에 재방송된다.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 (3) 무신론과 신 존재 증명
인간 이상의 존재 분명 있으리라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시대가 됐다. 하느님에 대한 체험 없이 하느님을 말하는 이들은 표정 없이 연기하는 배우들과 같다. 이들은 신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자보다 더 위험한 존재로,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더 멀어지게 만드는 이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에도 여전히 하느님은 인간과 철학의 중요한 주제다. 캔터베리의 안셀모(1033~1109) 성인은 '개념'을 통해 하느님 존재를 증명하려 했는데, 이를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한다.
안셀모 성인의 존재론적 증명
우선 안셀모 성인에 대해 알아보자. 안셀모 성인은 이탈리아 북쪽 아오스타 지방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방탕한 생활을 했다. 이후 1056년 프랑스 수도원에 입회해 1063년에는 수도원장이 됐고 1093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에 올랐다.
안셀모 성인은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독백론」과 「대화록」이 유명하다. 이 저서들에는 안셀모 성인이 하느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열망이 잘 드러나 있다.
안셀모 성인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머릿속에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 물론 어떤 것이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과 실제로 그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한 건축가가 설계를 완성했다고 가정해보자. 설계를 했을 때 건축물은 아직 없지만 건축가 머릿속에는 건축물이 들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실재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그 개념을 이해했다면 이는 개념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들었을 때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개념으로만 있다면 가장 완전한 개념이 될 수 없다.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큰, 완벽한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이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다는 개념 자체가 하느님을 의미할 때 하느님은 그 개념을 들은 사람들 이해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하나의 개념만으로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안셀모 성인의 존재론적 증명이다.
이 논증은 훗날 많은 이들에게 비판받았다. 특히 철학자 칸트는 개념은 개념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확인될 수 있고 검증될 수 있는 것만 철학의 대상으로만 삼아야 한다며 형이상학을 배제했다.
칸트는 개념에서 존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있음으로써 개념이 나오게 됐다고 말한다. 칸트는 존재론적 증명뿐만 아니라 신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논증도 비판했다. 우주론적 증명은 경험을 바탕으로 원인, 결과를 도출해 하느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칸트는 하느님 세계는 인과성 원리를 적용할 수 없다고 했다.
칸트의 비판처럼 철저하게 검증할 수 있는 것만 철학의 범주에만 넣는 사조는 무신론의 발판이 됐다. 이와 함께 과학과 기계문명의 발달도 하느님을 거부하게 된 배경이 됐다.
정의채 몬시뇰은 현대 무신론의 출발을 데카르트(1596~1650)에서 찾았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볼 수 있듯 사람들은 존재에서 생각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서 존재가 나오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를 적용하면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인간 생각에서 하느님 존재가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하느님 죽음 선언까지
본격적으로 무신론이 대두된 것은 포이에르바하(1804~1872)에 의해서다. 포이에르바하는 '신이란 결국 인간의 자기 투사'라면서 신에 대한 인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인간들의 신이라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가 데카르트 명제에 근거해 이론적 입장에서 무신론의 바탕을 세웠다면 칼 마르크스는 사회적 입장에서 무신론을 적용했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 피조물의 탄식이라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사회 원리들은, 천국에서 모든 비리가 공정하게 다뤄질 것이라고 내세우면서 지상에서는 이 비리들을 정당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어나 대항하라고 가르치는 대신 하늘나라에서 모든 것을 보상받을 테니 현실에선 참고 견디라고 설득한다는 것이다. 교회 윤리는 결국 부자를 편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무신론은 한걸음 나아가 하느님 죽음을 선언한다. 니체(1844~1900)는 신의 죽음을 선포했다. 니체에 따르면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가장 해로우며 인간 생명력에 치명적이다.
왜냐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마땅히 인간으로서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며 해달라고 조르기 때문이다. 니체가 하느님 죽음을 이야기하며 이를 비판한 것은 일면 타당하다.
천지 보면 천지 만든 분 계시리라
무신론자들 이야기처럼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일까. 자기 욕심껏,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최선이다. 가장 힘있고 권력있는 사람이 가장 잘 사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든 말든 내가 가장 편하고 즐거운 것이 최고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도덕이 있고 인권이 있다.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랑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인간 이상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정약종 선생이 우리 신앙 선조들에게 하느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르쳤던 「주교요지」의 한 대목을 소개하겠다.
"작은 집도 절로 되지 못하여 반드시 건축한 목수들이 있어야 되거늘, 이 천지 같은 큰 집이 어찌 절로 되었으리요. 분명히 지극히 신통하시고 지극히 능하신 이가 계셔서 만들어야 될 것이니, 목수들을 보지 못해도 집을 보면 집 지은 목수들이 있는 줄은 알 것이요, 천주를 보지 못해도 천지를 보면 천지를 만든 임자가 계신 줄을 알 것이라."
[평화신문, 2011년 6월 19일, 정리=박수정 기자]
※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는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에서 매 주일 오후 6시 5분에 방송되며, 평화방송TV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전 8시(본방송)에 이어 수요일 새벽 4시와 저녁 9시, 금요일 오후 4시, 주일 오후 6시에 재방송된다. 인터넷 다시 보기 www.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