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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수사적 차원과 인문학의 과제 장경렬 서울대 교수·영어영문학과 |
1. 철학적 언어와 수사적 언어 인문학의 전통에서 '수사'(rhetoric, trope, figure)는 수사학이라는 학문 분과의 기초를 이루는 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로 일련의 부정적 함의를 지닌 개념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즉,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해 확립된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을 따르는 경우 '수사'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우리는 수많은 '이항 대립'(binary opposition)의 관계를 상정할 수 있는데, '수사'와 '진리,' '수사'와 '논리,' '수사'와 '이성,' '수사학'과 '철학' 등의 예에서 보듯이 이 개념은 진리, 논리, 이성, 철학과 같이 인문학에서 '중심'을 이루는 개념들과 대립 관계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다. 다시 말해, '수사'라는 개념은 거의 예외 없이 인문학적 탐구의 영역에서 수사란 극복되어야 할 주변적 요소로 이해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수사적 인간'(homo rhetoricus)과 '진지한 인간'(homo seriosus)이라는 개념 구분이 암시하듯이 '수사'는 성실성을 결여한 인간의 특징으로 이해되기까지도 하고, 나아가서 도덕적 타락을 암시하는 무책임한 궤변과 연결되기도 한다. 필연적인 귀결로 이 개념의 주변에는 앞서 언급한 부정적인 함의 이외에도 온갖 타기와 비판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의미를 대변하게 되었다. 예컨대, 비논리와 논리, 반진리와 진리, 반이성과 이성, 감성과 지성, 타락과 선, 주변과 중심, 궤변과 철학, 불투명 혹은 반투명과 투명, 왜곡과 정직, 허위와 진실, 환상과 현실, 지류와 주류, 피상과 본질, 외부와 내부, 표면과 심층, 우연과 필연, 편파성과 공정성, 파당적임과 공평 무사함 등등--끊임없이 이어지는 일련의 이항 대립의 개념들 가운데 수사는 극복되어야 할 쪽을 대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이항 대립의 관계와 함께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수사란 원래 '말' 혹은 '언어'와 관계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수사'에서 '수사적 언어'로 논의의 초점이 이동될 수 있거니와, '수사적 언어'라는 개념이 지니는 함의를 보다 선명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이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철학적 언어'를 상정할 수 있다. 이러한 대응 관계를 상정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수사적 언어와 달리 철학적 언어는 투명성을 본질로 하며, 이 투명한 언어를 통해 진리에 대한 규명과 전달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수사적 언어는 꾸밈과 장식을 본질로 하는, 단순히 상대방을 '설득' 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언어로는 본질적으로 진리의 규명과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수사적 언어와 철학적 언어를 구분하는 전통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소크라테스에서 시작되었으며, 바로 그 전통이 몇 천 년의 서구 인문학사의 주조를 이루어 왔음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 사이에 벌어졌던 당대 학문 사회의 주도권 쟁탈전에 눈을 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쉽게 수사적 언어와 철학적 언어 사이의 이분법 이면에 놓인 모순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수사적 언어와 철학적 언어를 구분하고 이를 논증하는 행위 자체가 수사적 행위는 아닐까. 바꿔 말해, 철학적 행위란 본질적으로 수사적 행위가 아닐까. 플라톤의 글들이 반증 자료가 되고 있듯이, 수사적 언어에 대한 철학적 언어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언어 역시 본질적으로 상대방을 '설득' 하기 위한 언어일 수 있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의 잘못됨과 열등함을 지적하고 그리하여 우리들이 그렇게 믿도록 '설득' 하였다면, 이는 그가 진리를 말했기 때문일까? 물론 진리의 편에 서있음으로써 그와 같은 설득이 가능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리에 의한 설득과 수사에 의한 설득이 이처럼 구분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이며 경계선은 어디에 놓이는가? 소크라테스의 이른바 '문답법'조차 본질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하여 자신이 믿는 바를 믿도록 하기 위한 수사적 전략이 아닐까? 만일 이와 같은 수사적 물음에 대해 누군가가 반론을 제기하고 우리를 설득하여 소크라테스가 '수사적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믿도록 유도하였다면, 그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상대방과 달리 자신은 진리의 편에 서있다는 투의 주장 자체가 '신념'에서 나온 것이며,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까지 수사적 전략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를 믿게 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항은,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투의 어떠한 철학자의 주장도 끝까지 지탱되기 어려운 일종의 환상이라는 점이다. 제프 메이슨(Jeff Mason)이 지적하고 있듯이, "철학적 탐구를 인도하고 이끄는 진리란 그 진리가 탐구되는 담론의 바깥에 놓여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이러한 상황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와 담론 사이의 형이상학적 거리는 결코 무화(無化)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진리란 담론의 바깥에 놓여 있다"는 말 자체가 화석화된 은유이며,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수사적 전략일 수 있다. 다만 은유가 은유로 의식되지 않을 뿐, 철학적 언어 세계란 화석화된 은유로 가득 찬 수사적 언어의 세계일 수 있는 것이다. 쟈끄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백색의 신화]("La mythologie blanche")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은유는 더 이상 은유로 의식되지 않고, 원래 그 말이 지니는 고유의 의미인 양 받아들여지게 된" 상태가 바로 우리의 언어 현실이며, 철학적 언어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또는, 니체가 말하고 있듯이, 진리를 논하고 전하기 위한 투명한 언어로 믿어졌던 철학적 언어란 일군의 "은유, 환유, 의인화"일 뿐이며 "환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한사람이 갖는 환상"인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요즈음 수많은 철학자와 문학 이론가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는 수사적 언어에 대한 일련의 논의를 단순한 반철학적 말장난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사실 이전에도 이소크라테스, 롱기누스, 시드니 등 수많은 철학자나 문학 이론가들이 수사적 언어의 필연성과 긍정적 의미를 추구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논의가 부정론에 대해 방어적 입장을 취하는 소극적인 것이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바로 이런 식의 방어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적극적으로 수사적 언어에 옛날의 영광을 되살리려 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폴 드 만(Paul de Man)이다. 드 만은 [은유의 인식론]("The Epistemolgy of Metaphor")이라는 글에서 철학적 담론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언어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철학, 역사 편찬, 문학 작품 분석 등등 모든 분야의 인문학적 작업이 언어의 수사적 차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한다. 은유, 비유, 수사적 언어는 일반적으로 철학적 담론과 관련하여, 또한 범위를 넓히자면 역사 편찬 및 문학 작품 분석을 포함한 모든 논증적인 언어 사용과 관련하여, 하나의 고질적인 문제이어 왔고, 때로는 누구나 공인하는 낭패의 원인이어 왔다. 철학은 자체의 언어가 갖는 수사적 경향과 타협하기 위해 스스로 존재 이유로 내세웠던 엄밀성을 포기해야 하거나, 아니면 수사적 표현에서 자신을 완전히 해방시켜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만일 후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면 적어도 철학은 수사적 표현을 통제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했다. 말하자면, 수사적 표현이 이른바 제자리를 함부로 벗어나지 않도록 함으로써, 또는 영향력이 미치는 한계를 어느 선 안으로 정해 놓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 수사적 표현이 야기할 수도 있는 인식론적 손상을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이를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철학적, 과학적, 신학적, 그리고 시적 담론 사이의 경계를 세밀하게 나누어 놓으려는 노력이 되풀이된 이면에는 바로 이런 시도가 있었고, 이런 시도에 주목하게 되면 왜 학파와 대학교에서 분과 체계를 확립하는 것과 같은 제도적 문제가 제기되었는가의 이유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또한 철학사나 문학사를 기술하고자 할 때의 여러 가능성에 대해 제기된 공인된 의견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파의 철학 사상, 철학적 시대와 전통 사이의 차이에 대해 제시된 공인된 의견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을 지배하는 상식이 모종의 대륙 철학이 보이는 과도한 형이상학보다 우세하다고 가정하는 것이 관례이다. 경험주의 철학을 지배하는 상식은 자체의 문체나 격식이 증명해 주고 있듯이 수사적 언어가 지니는 잠재적 파괴력을 우회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최근 어떤 한 문학 비평가는 비꼬는 투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즉, "하늘에 붕 떠 있는 상태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헤겔과 대륙 철학의 깃발 아래 보무도 당당히 행군하는 동안, [문학 비평계의] 상식학파 쪽의 사람들은 기껏해야 록크의 철학 또는 손수 만들어낸 유기체론 정도로 만족할 뿐 철학이 없더라도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 물론 위의 인용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국 경험주의 철학의 대부인 존 로크(John Locke)는, 드 만이 지적하고 있듯이, "언어보다는 경험이 우선한다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에"(AI, 35), 애초에는 언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가 {인간 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을 집필할 때 보인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즉, "이 오성론을 처음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말의 문제를 고려하는 일이 이 일에 결국 필요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록크에게도 언어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우리의 눈앞에 안개를 드리우고 우리의 오성을 미망에 빠뜨리"는 "불투명성과 무질서"는 경험주의 철학조차 우회할 수 없는 질곡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드 만도 인용한 바 있는 다음 구절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갖는 '관념'(idea)들의 근원과 조직에 대한 논의를 거친 다음 우리의 지식의 범위와 확실성에 대해 검토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 문제가 말과 너무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 관계가 너무도 밀접하여, 말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가와 말이 어떤 방식으로 의미화하는가를 우선 제대로 관찰하지 않고서는 지식과 관련하여 명료하고도 적절하게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지식이란 진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면서 끊임없이 무언가 명제(proposition)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비록 우리의 지식은 사물로 종결되지만, 말에 의해 너무도 간섭을 받기에 말과 우리의 지식 사이의 관계는 거의 끊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말은 우리의 오성과 오성이 사유하고 파악하는 진리 사이에 너무도 깊숙이 관여하기 때문에, 가시적인 대상을 투시하는 '매개물'(medium)과도 같이 말이 지닌 불투명성과 무질서가 우리의 눈앞에 안개를 드리우고 우리의 오성을 미망에 빠뜨리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겠다. 이처럼 심지어 로크조차도 수사적 언어가 지니는 잠재적인 파괴력을 우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철학이든, 문학이든, 영역 구분과 관계없이 모든 분야의 인문학은 인간의 언어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수사적 차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따라서 철학과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과제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새롭게 정립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본고에서는 언어의 수사적 차원과 관련하여 드 만이 전개한 논리를 먼저 살펴보고, 언어의 수사적 차원을 인정함에 따라 야기될 수 있는 인문학의 위기를 역시 드 만의 논의를 따라 재구성해 보기로 한다. 끝으로 이러한 검토 과정에서 도출될 수 있는 인문학의 과제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의해 보기로 한다. 2. "시간성의 수사학"과 언어의 수사적 차원 드 만이 언어의 수사적 차원과 관련하여 전개한 논리를 살펴보는 일은 언어의 특성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정리하는 일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언어에 대한 드 만의 입장은 언어의 두 구성 요소인 '기표'(記表,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é) 사이의 관계가 서로에 대해 임의적일 뿐만 아니라 일대일의 고정된 대응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쪽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드 만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과 달리 언어란 불안정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드 만은 특히 "기호들 사이의 관계에는 시간적 구성 요소가 필연적으로 포함될" 뿐만 아니라, 의미란 기호들이 "순수한 시공간적 선행 관계"(pure anteriority) 속에 놓임으로써 생성되는 것임에 주목한다. 즉, "우리가 웃음 뒤에 분노나 증오의 감정을 감추듯이, 엉뚱한 기호 뒤에 의미를 숨길 수 있는 특권을 지닌 것이 바로 언어"이며, 이로 인해 "언어를 해석하는 일은 일종의 시지포스적 과제, 말하자면 끝도 없고 진전도 있을 수 없는 과제"라는 것이다. 요컨대, 언어의 의미란 특정한 기호에 각인되어 있는 것--즉, '현전'(présence)의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지워지는 일종의 '흔적'(trace)에 불과한 것이라는 논리가 상정될 수 있다. 결국, 드 만에게 언어란 그가 [시간성의 수사학]("The Rhetoric of Temporality")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공간적 제약을 초월한 "상징"의 세계가 아니라, "시간이 원초적으로 구성 개념"을 이루는 "알레고리"의 세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징이란 "언어의 표상 기능과 의미 기능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지 않는 언어 표현"--또는 "외면(기호)과 속(의미)의 일치"를 보장하는 기호--으로 정의되는 반면, 알레고리는 "자체의 구성 요소가 아닌 [특정한] 의미를 임의적으로 지시함"으로써 "일단 의미의 해독이 완료되면 잠재적인 암시적 의미 기능이 소진되는 기호"로 이해된다. 드 만은 상징이 알레고리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경향을 "아름다운 영혼"의 현현에 대한 낭만주의자들의 꿈과 연결시키면서, 이를 "낭만주의적 미망(未忘)"이 빚어낸 일종의 "낭만주의적 신화"라고 규정한다. 즉, 상징이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초월적인 합일(synthesis)을 인식 행위의 이상으로 여기던 낭만주의자들이 헛되이 추구하던 신화라는 것이다. 드 만은 이와 같은 신화의 허구성을 밝히고 아울러 우리의 언어 현실이 본질적으로 알레고리적이라는 점을 규명하기 위해 낭만주의 시인들이 직면했던 딜레마에 논의의 초점을 맞춘다. 바로 이러한 논의를 거쳐 드 만은 주체와 객체 사이에 잘못 설정된 변증법에서 해방되어, 우리의 "진정한 시간적 운명"을 직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즉, 상징이라는 수사적 장치에 의해 오도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의 언어 행위는 언어가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시간성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 세계는 결코 상징적 기호 세계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존의 의미가 지워지고 새로운 의미라는 환상이 덧붙여지는 알레고리적 기호 세계라는 것이 드 만의 결론이다. 드 만의 논의와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언어에 대해 사람들이 이제 까지 지녀 왔던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즉, 알레고리에 대응되는 상징을 추구하는 시인들에 대한 드 만의 비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어느 곳에서도 기호와 의미가 초월적인 합일을 이루는 '현전'의 언어란 찾을 수 없을는지 모른다. 결국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 드 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를 암시하게 되는데, "일상의 언어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문학에도 지배적으로 존재하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불일치를 밝히"거나, 또는 "[문학에 의해] 주장되는 자체의 언어가 갖고 있는 고상한 지위"라는 신화를 깨뜨리는 작업이 이에 해당된다. 아마도 이러한 작업을 우리는 '해체구성'(déconstruction)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모든 언어가 본질적으로 진리의 개진을 불가능하게 하는 '수사적 세계'일 뿐이라면, 또한 그 세계에 접근하려 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방도가 수사적 언어일 뿐이라면, 그 세계가 어떤 진리를 개진하고 있는가라든가 그 세계가 과연 의도한 대로 모종의 진리를 개진하고 있는가 따위의 물음은 애초부터 무의미한 것이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만 그 수사적 세계 뒤에 숨겨진 허위와 자기 모순을 수사적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요컨대, 우리는 다만 '수사적 제스처'를 취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마치 자신의 입장을 숨긴 채 소피스트들의 말을 되받아 그들에게 자기 모순을 깨닫게 했던 소크라테스처럼. 수사의 세계를 부정하면서도 스스로 치밀한 수사의 세계를 구축했던 소크라테스처럼. 드 만이 [기호학과 수사학]("Semiology and Rhetoric")이라는 논문에서 "수사와 문법"을 대비시킬 때, 다시금 언어의 수사적 차원은 문제된다. 특히 드 만은 케네스 버크와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이론에 주목하고 있는데, 먼저 버크의 "일탈"(deflection)이라는 개념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버크에 의하면, "문법적인 패턴 안에서는 기호와 의미가 일관된 관계를 유지"하지만, 그 관계는 "변증법적 전복"의 과정을 거칠 수 있다는 것이다. 버크는 그러한 전복의 과정을 "일탈"이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이 바로 수사적 언어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문법"과 "수사" 사이에 이항 대립의 관계가 정립된다. 드 만은 또한 동일한 개념 구분을 시도하고 있는 퍼스에 주목한다. 퍼스의 논의에 의하면, "기호가 전달하고자 하는 개념(idea)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호가 해석되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해석"(interpretation)이란 "암호 판독"(decodage)이 아닌 "의미 이해"(reading)를 가리킨다. 즉, 해석이란 "암호 판독"과 같이 일회적 작업으로 완료되는 행위가 아니라, 얼마든지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에 노출되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퍼스에 의하면, "이해된 의미는 여전히 새로운 기호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호가 기호를 생성하는" 바로 이 같은 과정--또는 기호가 새로운 기호를 요구하는 과정--을 퍼스는 "순수 수사"라고 명명하여, 이를 "명백하면서도 이원적인 의미 체계의 가능성을 상정하는 순수 문법," 또는 "보편적 진리를 갖는 의미의 가능성을 상정하는 순수 논리"에 대응시킨다. 결국, 드 만의 진단에 의하면, "[문법 고유의] 논리를 극단적으로 유보시킨 채, [문법적인] 의미 지시 기능을 무한하게 전복시킬 가능성, 그 아찔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이 다름 아닌 "수사적 언어"인 것이다. 이처럼 '수사'와 '문법'의 개념을 대비시킴으로써 수사적 언어의 특성을 진단하는 드 만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작업이 요구된다. 즉, 그는 "문법적 구조와 수사적 구조가 명백히 공생 관계"에 있으면서도 양자가 서로에 대해 "긴장"을 유지하는 경우를 거론하고 있거니와, 이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드 만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수사 의문문"으로서, 그는 비문학적인 예와 문학적인 예를 각각 하나씩 들고 있다. 비문학적인 예로서,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그게 무슨 차이가 있지?"라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명백히 이를 수사적으로 이해하면, "아무런 차이도 없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반문을 상대방이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고지식하게 이해하여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니 설명을 좀 해 주시오"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요컨대, "하나의 문법적 패턴이 서로 배타적인 두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 대화의 경우, 이 같은 혼란은 "외적인 의도의 개입"--즉,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니라" 등의 말--에 의해 쉽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외적인 의도의 개입이 불가능한 경우, 통제불가능한 언어적 의미 구조로 인해 우리 모두는 단순한 짜증스러움 이상의 것, 즉 일종의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드 만은 이 같은 상황을 "수사적" 상황으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문법적 의미가 다른 한편으로는 수사적 의미가 동시에 주어졌을 때, 그러나 문법적이든 또는 그밖에 어떤 언어적 장치에 의해서도 서로 상치되는 두 의미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지배적인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불가능할 때, 문법적인 질문 유형은 수사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 (AR, 10) "주저하지 않고 나는 언어의 비유적, 수사적 잠재력을 문학 그 자체와 동일시하고자 한다"라는 그의 발언에서 확인되듯이, 드 만은 통제불가능한 "수사적" 상황을 문학의 필연적인 운명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이츠(W. B. Yeats)의 시,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Among School Children")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저 유명한 수사 의문문, "어찌 우리가 춤추는 사람과 춤을 나눌 수 있겠는가?"에 대한 드 만의 논의가 이루어지게 된다. 오 밤나무여!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꽃피우는 나무여, 잎이 그대인가, 꽃이 그대인가, 아니면 줄기가 그대인가? 오 음악에 맞추어 흔들리는 몸이여, 오 빛나는 시선이여, 어찌 우리가 춤추는 사람과 춤을 나눌 수 있겠는가? 해석상의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이 시의 마지막 물음은 수사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형식과 체험 사이의 통일성,' 또는 '존재의 유기적 통일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왔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해석에 대해 드 만은 나름의 특유한 방식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만일 이 귀절을 "어찌 우리가 춤추는 사람과 춤을 나눌 수 있는지, 나에게 말해다오"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즉, 이 물음을 "기호와 지시 대상이 너무도 정교하게 가상적인 '현전' 속에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거니와, 양자를 분리함으로써 이러한 오류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을까"의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물론 이 같은 새로운 접근 방법은 일반적인 해석과 관계없이, 또는 일반적인 해석에도 불구하고, 또는 일반적 해석에 반(反)하여 가능하다. 심지어 예이츠의 시적 의도가 전자의 해석 편에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후자의 해석은 있을 수 있다. 또한 그러한 판단에 근거하여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에 대해 전혀 다른 종류의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 시에 대한 기존의 해석과 더불어 이 시는 "아찔할" 정도의 무한한 방향으로 해체되고 또한 재구성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예이츠의 시적 언어에도 "일상의 언어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 . . 기표와 기의 사이의 불일치"는 존재한다. 따라서 그의 시적 언어가 아무리 기호와 의미 사이의 신비롭고도 초월적인 합일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는 여전히 '탈신비화'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즉,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라는 이 시의 언어가 표면상 내세우는 의미--만일 그런 의미가 있다면--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 언어의 본래적인 의미라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텍스트의 언어가 자기도 모르게 깨뜨리고 전혀 엉뚱한 의미를 드러내는 순간을 우리는 여전히 포착하고 또한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이다. 3. "이론에의 저항"과 인문학의 과제 모든 언어가 수사적 차원을 갖고 있고, 인문학의 모든 담론이 언어의 수사적 차원에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 이에 따른 전통적인 인문학적 체계 자체가 와해될 수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의미와 기호 사이에 간극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투명한 언어가 존재할 때 비로소 보편적 진리나 객관적 지식이 바로 그 언어를 통해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러한 언어가 존재할 때 비로소 진리든 지식이든 이에 대한 '객관적'인 표현과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녕코 진리나 지식에 도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를 '객관적'으로 전달하기도 불가능하다면, 문학이든 철학이든 역사든 이들은 인문학으로서의 존재 근거를 상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인문학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진리와 지식이 자기편에 있다는 믿음 아래 구축되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인 객관적 지식인가에 대한 논란은 이제 까지 있어 왔고, 논란의 과정에서 발흥하거나 쇠퇴한 주장과 학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제 까지의 논란이 '국지적'(局地的)인 것이었다면, 언어의 수사적 차원을 인정하는 가운데 야기된 인문학의 위기는 '총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무언가 보편적 진리나 객관적 지식을 전할 수 있을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게 된 마당에, 무엇을 위한 인문학인가라는 반문이 어찌 나오지 않을 수 없겠는가? 전통적 인문학자들이 느끼는 바로 이와 같은 위기 의식을 드 만은 "이론에의 저항"으로 요약한 바 있다. 그는 [이론에의 저항]("The Resistance to Theory")이라는 논문에서 "저항"의 발단이 된 "이론"의 성립 배경을 밝히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이론"이란 "문학 텍스트들에 대한 접근이 더 이상 역사적 고찰이나 미학적 고찰과 같이 비언어적인 측면에 대한 고찰에 근거하여 이루어지지 않을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 "특정한 의미와 가치를 더 이상 논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의미와 가치를 정착시키기에 앞서 바로 이 의미와 가치의 생산 양태라든가 수용 양태를 문제삼을 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제의 "이론"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수사적 차원을 문제삼는 가운데 성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이론"의 "어떤 측면이 그렇게 강력한 저항과 공격을 촉발시킬 만큼 위협적인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는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이제 까지 모든 형태의 창작, 비평, 이론적 논의에 흔들릴 수 없는 바탕이 되었던 명증한 언어, 그 자체의 안정성과 투명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언어에 대한 신뢰감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실로 기존의 모든 인문학적 작업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과 맞먹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와중에 정립된 이른바 "이론" 자체의 난해함과 잠재적 파괴력이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끈 것도 사실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강력한 저항과 공격을 촉발시켰던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깐 역사적인 것이든 미학적인 것이든 모든 탐구의 성패는 탐구 수단뿐만 아니라 탐구 대상이 얼마나 안정적인 것이고 신뢰할 만한 것인가에 달려 있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모든 종류의 탐구는 탐구 수단과 탐구 대상에 대한 신뢰와 확신 아래 이루어진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탐구 수단인 언어뿐만 아니라 탐구 대상인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언어에 대해 지니고 있던 신뢰감을 뿌리째 뒤흔드는 논리 앞에 어찌 강력한 저항과 공격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요컨대, 언어 자체를 문제삼는 이론에 대한 강력한 저항과 공격은 필연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뿌리깊은 이념들이 어떻게 효력을 발휘하는가의 동작 원리를 폭로함으로써 그 이념들의 근본을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며, "미학이 두드러진 역할을 하던 강력한 철학적 전통에도 반발"하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 작품과 관련하여 이미 확립된 정전을 무너뜨리고, 문학적 담론과 비문학적 담론 사이의 경계선을 흐려 놓"기 때문이며, "암암리에 이념과 철학 사이에 어떤 연계가 있는가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같은 이론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소수의 연기자들이 펼치는 자극적이고도 파괴적인 연기에 빠져든 관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이들의 연기를 어설프게나마 흉내내는 가운데 그들도 동일한 연기를 펼치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들게 된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이론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자극적이고 파괴적인 연기에 혐오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이를 흉내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멸의 시선을 보낸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열광하던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저항하던 사람들에게도 역시, 대부분의 경우, 문제의 이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이 문학 내적으로 어디에 있었던가를 정확하게 파악할 기회도 능력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열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문제가 되는 이론의 핵심에서 비껴나 엉뚱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반대편의 사람들 역시 적지 않은 경우 열병에 전염되지 않으려는 듯 문제의 이론에 대한 이해 자체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드 만의 주장대로, "오늘날의 문학 이론과 전통적인 문학 연구 사이의 긴장된 관계가 단순한 역사적 갈등, 말하자면 우연히 동시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두 유형의 사상 사이의 역사적 갈등"만으로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문제의 이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던 내적 필연성에 대한 검토가 요구되는데, 드 만이 문법, 논리, 수사라는 고전적 "삼과목"(trivium) 사이의 긴장 관계로 논의의 초점을 옮기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기능 면에서 볼 때 "문법"과 "논리"는 서로 "자연스러운 친화 관계"를 유지하지만, 비논리적인 동시에 비법칙적인 "수사"와는 불편한 관계에 있다. 그런데 만일 "문학성의 문제, 즉 문법적 또는 논리적 기능에 우선하여 수사적 기능을 전경화하는 언어 사용법이 결정적이지만 불안정한 요인으로 끼여들게" 되는 경우, "삼과목의 내적 균형"을 와해되고, "결과적으로 비언어적 세계에까지도 외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문법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한, 문학적인 언어 이론을 포함하여 어떤 언어 이론도 모든 인식적 언어 체계와 미학적 언어 체계의 근본 원리라고 우리가 주장한 것에 대해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문법은 논리학에 봉사하고, 이어서 논리학은 세계에 대한 지식에 접근하는 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만 담론의 수사적 차원이 인식론의 영역으로 끼여드는 것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때 발생"하는데, 문학 텍스트를 읽고자 할 때 그 텍스트에 문법의 차원으로 해결이 안 되는 수사적 차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문학이란 투명한 내용 전달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수사적 또는 비유적 차원은 어떤 언어적 표현에서보다도 . . . 문학에서 한결 더 명료하게 전경화되어 있"지만, "어떤 언어 현상도 텍스트로 읽을 때, 이 수사학적 또는 비유적 차원은 드러날 수가 있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철학을 포함하여 모든 언어 현상은 언어의 수사적 차원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더라도 "텍스트에 대한 문법적 기호 해독은 무언가 불확정한 부분을 남겨 놓"기 마련이다. 만일 모든 텍스트가 필연적으로 "수사적 차원"을 지닐 수밖에 없다면, 또는 "문법적 기호 해독"으로는 도저히 밝힐 수 없는 "불확정한 부분"을 담고 있다면, 이에 대한 탐구가 인문학의 새로운 과제가 될 수도 있다. 드 만이 이야기하고 있는 문제의 "이론"은 바로 이를 탐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자체의 존재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요컨대, 드 만에게 "이론"이란 "기호 해독" 또는 "글읽기"를 통해 텍스트의 "수사적 차원"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글읽기"이다. 드 만이 "이론에의 저항"은 "언어의 수사적 또는 비유적 차원에의 저항"인 동시에 "사실 글읽기에의 저항"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에 의하면, "이론에의 저항은, 오늘날의 연구 풍토에서 보면, 스스로를 글읽기 이론이라고 부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적이라고 내세운 글읽기 기능을 회피하고 있는 방법론에서 아마도 보다 더 힘을 발휘하는 저항"인 것이다. 이 지점에 이르러 우리에게는 드 만이 말하는 "글읽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 요구된다. 그가 말하는 '글읽기'의 개념이 명증하게 드러나고 있는 글은 [문헌학으로의 복귀]("The Return to Philology")로, 이는 원래 1982년도 12월 10일자의 {타임즈 문학 부록}에 게재되었던 것이다. 드 만이 일반 신문 독자들을 의식하고 쓴 것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체로 쉽게 읽혀지는 이 글은 하버드 대학의 영문과 교수 월터 잭슨 베이트(Walter Jackson Bate)의 [영문학 연구의 위기]("Crisis in English Studies")라는 글에 대한 반박문의 형태로 씌어진 것이다. 베이트는 자신의 글에서 인문학이 "자기 파괴의 길로 접어든 채 일찍이 겪어 본 적이 없는 최악의 허약한 상태"에 처해 있음을 개탄하면서, 그 이유를 "문학 이론"에 대한 점증적인 "관심의 집중"에서 찾고 있다. [문헌학으로의 복귀]에서 드 만은 이론에 대한 "관심의 집중" 때문에 인문학이 "허약한 상태"에 빠져들게 된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인문학이 "허약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론에 대한 "관심의 집중"이 뒤따르게 된 것인가를 묻고 있는데,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베이트의 비판은 기득권자의 무책임한 책임 전가일 수도 있고 드 만의 말대로 "공격적인 자기 방어"일 수도 있다. [문헌학으로의 복귀]는 이와 같은 "공격적인 자기 방어"에 대항하여, 문제의 이론이 전통적인 문헌학으로의 복귀를 통해 인문학의 강화를 목표로 하는 것임을 논증하기 위한 글이다. 이와 관련하여 드 만은 무엇보다도 "베이트의 하바드 대학교 동료인 루벤 브라우어(Reuben Brower)가 1950년대에 대학 학부 과정의 일반 교양 과목으로 가르친 '문학 해석'이라는 강의"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학생들이 다른 사람들의 글에 관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되었을 때, 부라우어는 그들에게 고려 대상인 텍스트에서 유도된 것이 아니면 어떤 것도 말하지 말도록 지시를 내렸"으며, "텍스트에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특정 언어에 의해 입증될 수 없는 진술이라면 그 어떤 진술도 하지 말도록 학생들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것에서 시작하되, 인간의 체험이라든가 역사라는 일반적인 맥락 속으로 갑자기 뛰어들지 말도록" 했다는 것이다. 즉, 부라우어는 "모든 이론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단순한 글읽기," 또는 "언어 구조에 주목하고 이에 반응"하도록 하는 "꼼꼼한 글읽기"를 학생들에게 권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드 만에 의하면, 이처럼 단순해 보이는 "글읽기"라 할지라도 "문학 교육이 신학이나 윤리학, 심리학이나 지성사에 대한 교육의 대체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공격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학을 오로지 역사적이고 인문학적인 주제로 가르치는 대신, 해석학과 역사로 가르치기에 앞서 수사학과 시학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드 만의 주장에서도 확인되듯이, 문제의 이론이 의도하는 바는 바로 이상과 같은 "꼼꼼한 글읽기," 잠재적으로 미증유의 파괴력을 갖는 "꼼꼼한 글읽기"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론으로의 전환이 다름 아닌 문헌학으로의 복귀"이자 "언어 구조가 생산하는 의미에 앞서 언어 구조 자체에 대한 검토로의 복귀"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드 만이 말하는 "문헌학으로의 복귀"는 '신비평으로의 복귀'와 다를 것이 없다는 냉소적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의도한 "문헌학으로의 복귀"는 텍스트에서 멀어진 문학 논의를 다시 텍스트 쪽으로 복귀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드 만이 말하는 '이론'은 결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이론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실제'를 지향하는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이론'에 저항하여 '실제'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주장이 얼마나 자의적(恣意的)인 것인가를 반증해 주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이론'을 거부하면서 '실제'를 옹호하는 어떤 논의도 그 자체가 이론일 수 있다. 또한 '이론'을 떠난 '실제'는 그 자체가 실제일 뿐 이론에 대한 거부일 수 없다. 요컨대, 이론에 대한 거부는 다만 이론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이론에의 저항도 이론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이론에 저항하는 논의가 명시적으로 드러난 이론을 통한 것일 수도 있고 암시적으로만 비쳐진 이론을 통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논의 자체가 이론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모든 이론적 기도(企圖)는 잠재적으로 실제에 대한 염원뿐만 아니라 저항까지도 내재한다. "무엇으로도 이론에의 저항을 극복할 수 없는데, 이론 자체가 곧 저항이기 때문"이라는 드 만의 말을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저항이 어디를 향한 것인가에 있다. 이를 문제삼는 이유는 외부를 향한 저항도 있을 수 있지만 내부를 향한 저항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드 만이 "수사학적 글읽기들"은 "다른 모든 종류의 글읽기와 마찬가지로 이들 자신이 옹호하는 읽기를 여전히 회피하고 또한 이에 저항한다"고 말했을 때, 그가 의식한 것은 다름 아닌 내부를 향한 저항일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내부를 향한 저항을 새삼 들먹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론에의 저항은 이론을 역사적 현실이나 일상의 현실이라는 외부 쪽으로 개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만, 그 저항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타율적 압력으로만 존재하는 경우 이러한 개방은 결코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론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 방어의 전략을 모색하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더욱 더 고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 방어의 전략에 의해 고립되어 가는 이론은 이론다운 이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론다운 이론이라면, 이론에의 저항을 자생적으로 생성해 나갈 수 있는 것, '자기 성찰'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론에의 저항]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고귀하면 고귀할 수록, 또한 방법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문학 이론은 저항으로 변한다"는 드 만의 말에 각별히 유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기 성찰'을 감당해 나가는 이론, 그리고 스스로 '저항'으로 변하는 이론에 대한 드 만의 논의에서 우리는 인문학의 또 하나 새로운 과제를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인문학은 이제 투명하고 명징한 언어를 통해 보편적 진리나 객관적 지식을 성취하려는 꿈을 접어야 할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명징하고 투명한 언어에 대한 믿음이 일종의 미망이라면, 보편적 진리나 객관적 지식의 성취 가능성에 대한 믿음 역시 미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미망에서 벗어난 인문학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과제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리라. 이는 바로 인문학 스스로가 '자기 성찰'과 자기 내부를 향한 '저항'의 장(場)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아닐까. 인문학에서 자기 내부를 향한 저항이란 곧 인간의 '삶' 자체를 자기 비판적으로 되돌아봄을 뜻할 수 있거니와, 인문학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을 다루는 학문 분야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