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사건이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기쁨으로 받아들여지듯 저의
다시 살아남이 저를 아는 많은 지인들에게 기쁨으로 받아들여진 듯 느껴져 ' 나의 부활사건'이란 제목을 감히 붙여보았습니다.
저는 2000년 1월 1일 중앙병원에서 수술을 해서 지금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간이식수술을 통해 다시 새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과가 좋아서 지금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의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간이식수술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가 대개 비슷하겠지만 나름대로의 사연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1992년부터 가능하면 헌혈을 할 정도로 건강해서 1999년 9월까지 11회의 헌혈을 했습니다. 또 99년 11월에도 중앙병원 가정의학과에서 건강진단을 받았을 때도 수치상으로 건강하다고 하여 6개월 후로 예약을 하고 오기도 했었습니다.
저는 1950년도 생으로 1999년 8월까지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정년이 갑자기 3년 줄어들면서 여러 학교교육의 황폐화 현상이 나타났을 때 학생들의 생활은 사회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을 앞서 갑니다. 전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즐겁게 생각하며 지내던 편이었는데도 수업을 밀도 있게 하기가 어려워지고 학생들과 일치된 교감을 얻기 힘들어 명예퇴직을 했습니다. 또 성격적으로 남에게 싫은 일을 시키지 못하고 모두 끌어안고 하며 마음이 넓지도 못해 속을 끓이는 소심한 면이 있기도 합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오늘 끝내야 잠을 편하게 잘 수 있는 일 중독증인 편이라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듯 싶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또 여학생교육분원에 계약직으로 취직을 해서 다녔습니다. 여자고등학생들의 생활관으로 학생들을 책임지고 위탁 교육하는 곳으로 전통 예절 및 성교육, 여학생들에게 필요한 심성을 지도하는 곳이었습니다. 가정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제가 아이들에게 주부역할을 지도하는 것도 스트레스를 받았던 듯 싶습니다.
그러던 중 11월 말부터 입맛이 없어지면서 몸이 피곤하여 일상생활을 하는데도 힘이 들었습니다. 12월 초 얼굴색이 이상하다고 하여 경찰병원에 검사를 받기 위해 갔었는데 의사선생님께서 당장 입원을 하라고 하여 황달로 입원을 했습니다. 2월말쯤까지 치료만 잘 받고 쉬면 될 것이라고 하여 시간만 보내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입 맛없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던 사람이 밥 먹는 것이 고욕으로 느껴져서 식사시간에는 냄새가 너무 역겨워 1층 로비에 가서 있으면서 이 기회에 다이어트를 하자는 한가한 생각까지 했었습니다. 의사선생님께서는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찾아 먹으라고 말씀을 하시는데도 먹고 싶은 것이 없었습니다. 12월 26일부터는 먹으면 토하기도 하여 더 먹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제가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 것은 12월 29일인데 낮의 일은 생각이 나는데 저녁에 아는 이가 와서 30분 정도 와서 이야기를 나누다 갔다고 하는데 아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그 날 의사선생님께서 복수가 생겼다며 다른 병원으로 가서 간이식수술을 받아야 할 것 같다고 하여 중앙병원 응급실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 남편은 제가 묻는 말에 나름대로 합리적인 대답을 하여 제가 간성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12월 30일에 의사선생님께서 전격성 간염으로 이틀밖에 살 수 없다는 선고에 가족들은 온 힘을 다 해 저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간을 주겠다고 친정 두 동생이 오고, 막내시동생이 와서 주겠다고 하고,
다른 시동생은 친한 건강한 친구를 데리고 왔었다고 합니다. 너무 고마운 이들입니다. 올케들은 모두 동생들에게 시누이에게 간을 줄 수 있으면 주라고 해서 결정하던 밤 집에서 울다가 왔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혈액형이 달라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군대에 간 아들(23살)이 30일 밤12시가 넘어 외출을 받아 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오고. 31일 아침부터 제게 간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모든 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또 y2k로 컴퓨터 기능의 문제 때문에 종합병원에는 1월 1일 수술 계획이 없어 그나마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수술을 받을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또 휴가라고 기뻐하셨다가 저를 수술하기 위해 근무하셨던 모든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님들 그 외의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12월 29일 이후의 일은 어떤 것은 기억되고 어떤 것은 제가 혼자 생각으로 만든 기억들도 있습니다. 무균실 중환자실에 있을 때 문병을 오는 사람들이 가족들은 환한 웃는 얼굴로 오는 반면 친구들은 모두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와서 울먹여 저를 당황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11층 간이식병동으로 올라왔던 1월 6일인데 그것도 제대로 맞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곳에 와서도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확실하게 기억되는 것은 1월 8일부터입니다. 그때 거울을 보며 낯선 얼굴에 얼마나 놀랐던지!. 그것이 제 얼굴이라고 느낀 것은 한참을 쳐다본 후부터였습니다. 한 달을 못 먹어 눈이 큰 낯선 얼굴이 얼마나 당혹스럽던지. 간호사들은 제게 와서 운동을 하라고, 가래를 뱉으라고 하며 등을 두들기던 때 어찌나 야속하던지.... 아플 때는 친절한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남편은 남에게 아내를 맡기고 싶지 않다고 하여 딸이 수술복을 입고 와서 간병을 했습니다. 늘 웃으며 간병을 했던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싸하게 아파 옵니다. 채혈을 할 때마다 아프지 않게 한번에 해달라며 부탁을 하며 늘 어깨를 꼬집어 고통을 분담시키려고 노력했던 슬기로운 딸. 자다가도 아프다면 일어나 온몸을 마사지를 해주며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력했던 딸.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닐장갑을 껴서 손에 물집이 생겼으면서도 언제나 웃으며 간병을 했었던 딸, 현경. 시누이와 제가 휠체어만 타고라도 살아나면 좋겠다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정신이 들면서부터는 나이 드신 부모님과 시부모님들에게 저 때문에 편찮으실 까 봐 걱정이 되어 의사선생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철저하게 지키며 생활을 했습니다.
수시로 와서 불을 키며 처치를 하셨던 분들! 그때는 어찌나 짜증스러웠던지. 정맥을 찾지 못해 정맥 팀이 와서 주사를 놓거나 약을 연결하던 것. 처음에 약을 여러 개 달고 갔었는데 간호사님에게 물어 어떤 것을 먹으면 안 맞게 되냐고 물어 먹기 싫은 음식을 꾹 참고 먹었더니 그 다음날로 떼던 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비타민은 과일을 먹으면 된다고 하여 과다섭취로 당이 높아져 한동안 인슐린을 맞기도 했습니다. 물론 건강이 허락해서였겠지만 의지력으로 빨리 퇴원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하루에 네 번 이상 무균실을 30분 이상을 걸었습니다. 병실에 들어오면 산소호흡기를 끼면서도 나가서는 마스크를 하고 가족들에게 걱정을 주고 싶지 않아 숨이 막힐 듯 아프면서도 노력했던 것이 제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변을 봐야 된다고 의사선생님께서 어찌나 창피를 주시든지 밤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30분 이상 아무 춤이나 추던 것이 지금은 추억으로 기억되지만 그때는 이렇게까지 해야되나 하는 회의도 생겼습니다. 또 남을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밴 것이 짜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또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제가 가래를 뱉어야 아들의 간이 좋아진다는 생각으로 목이 아플 정도로 가래를 뱉었습니다. 제게 간을 준 아들은 군대에 가기 전에 지방간이라 쫓겨왔다가 4개월 10일이 지나 다시 갔을 때도 수치가 높아 군대에서 피검사 후에 남아도 좋고, 나중에 다시 들어와도 좋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냥 들어가겠다고 하여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애를 생각하면 간이 나쁘다는 생각만 갖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군대의 규칙적인 생활로 간이 좋아져 제게 간을 줄 수 있었음에 운명적인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예정된 운명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아들은 저 때문에 제대를 한달 여 남겨놓고 의가사 제대를 하였습니다. 지금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의사선생님도 저의 빠른 쾌유를 아들의 좋은 간 때문이라고 하시며 아들에게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전 중환자실에 있으면서도 아들을 가깝게 느끼긴 했지만 그 애에게 간을 받았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습니다. 또 가족들이 그런 소식을 들으면 제가 쇼크를 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말해 주지 말자고 했다고 합니다. 전 건강한 것이 몸에 밴 사람이라 간이식병동에 있으면서도 간이식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수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수치에 대해서 하나도 기억되는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께 매달리면 살려주시겠지 하는 믿음과 병원에서 의사선생님들께서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겠지 하는 믿음을 갖고 지냈습니다. 아플 때는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아픔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빨리 쾌유될 수 있었던 것은 병원의 적절한 처치와 친절한 간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기도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남편은 제가 운동을 할 때마다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면서 동그라미를 그리며 핼쓱한 얼굴로 지켜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또 밤을 세우며 가게를 보시다가 걱정이 되어 몇 번씩이나 올라오셨던 시부모님. 언제나 주기만 하고 살았다고 생각하며 억울해했던 제가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주변 사람들의 기도와 사랑 때문임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부모님께서는 당신들이 갖고 계시던 현금을 모두 저에게 주시며 제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냐고 하시며 과부의 헌금처럼 몽땅 제게 보내주셨을 때의 느낌! 그것은 사랑자체였습니다.
1월 22일 퇴원을 하고 집에 왔을 때도 가족들의 보살핌으로 병원의 무균실과 같은 환경으로 지냈습니다. 방에 있는 가구를 다 다른 방으로 보내고, 매일 소독을 하고, 시간이 되면 밥과 약을 갖다 주고, 남편은 문병 오신 고마운 분들을 현관에서 보내기까지 했고, 가까운 이들은 베란다의 유리창을 통해 문병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철저함이 저를 빨리 건강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야 된다고 하여 하루에 4번씩 거의 40분씩 걸었습니다. 물도 의식적으로 많이 마시고, 음식도 균형 있는 식사를 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몸에 좋다는 음식을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퇴원하고 집에 와서는 하루하루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생활로 저를 통해 하느님의 기적을 보여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체적인 여러 변화가 기적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가족들과 주변사람들은 하느님이 계심을 저를 통해 본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걸어 제가 살아나 고맙고 기쁘다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저를 가슴 벅차게 합니다. 또 얼마 전에 세상을 달리한 혈액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며 글을 쓰던 친구가 저를 위해 '하느님 친전'으로 글을 써 주었습니다. 퇴원하는 날 가족들의 눈을 피해 문병을 와서 기도를 해주던 친구. 다 같이 죽음의 문 앞까지 다녀 온 사람이니까 건강해지면 하느님 사업을 하자고 다짐하며 서로 기운을 북돋았던 친구. 다시 볼 수 없는 세상으로 간 친구가 지금 몹시 보고 싶습니다. 자다가도 일어나 얼굴을 내려다보며 '정말 살아있는 거지?'하며 눈물을 흘리던 남편의 얼굴은 죽을 때까지도 기억해야할 사랑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중앙병원이 저를 살린 곳이라며 산책을 자주 가며 기뻐합니다. 또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수술실로 보내놓고 보냈을 남편의 심정을 생각하면 어떻게 해도 그 사랑을 갚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간을 준 아들은 제가 피곤해 할 때마다 '또 줄 간도 없는데...'라며 저를 자제하게 합니다. 막내시누이는 아들과 저를 간병하기 위해 수술을 받았을 때가 방학이라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우리 집에 와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중앙병원에 다니기 편리 하라고 병원 가까이 이사를 와서 한시적으로 같이 살며 저를 보살펴주고 있습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또 저를 간병하기 위해 영양주사까지 맞아가면서까지 보살펴주시고 계신 아줌마. 너무 고마운 사람들뿐입니다. 예탁금을 걸어야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을 때 정기예금 통장을 가져와 우선 쓰라고 하셨던 정년 퇴직하신 교장 선생님! 거액의 현금을 가져와 저를 살려야 한다고 하셨다는 남편 친구들. 너무 고마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희 가족에게 너무 많은 사랑들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습니다.
투병생활을 하며 크게 아프진 않았지만 작은 일은 몇 번 있었습니다. 작년 6월 혼자 올림픽공원으로 산책을 갔다가 넘어져 가슴을 다쳐 응급실에 가서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단순한 타박상으로 진단이 내려졌지만 몸을 잘 추슬릴 수 없는 상태에서는 같이 다니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트레스가 병을 부릅니다. 추석스트레스로 고열이 나서 간이식병동에 전화를 걸었는데 그때가 파업중이라 힘이 들었습니다. 어름으로 열을 내리는데도 내리지 않으면 오라고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또 12월에 대상포진에 걸렸었는데 같이 사는 시누이 남편이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더니 그 다음날로 발진이 돋아 한달 동안 병원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스트레스와 과욕이 병을 부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트레스도 과욕이 원인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편히 가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시 살아난 사람이 또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투병생활은 자기 성찰의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고독과의 싸움이며 자기의지와의 싸움입니다. 투병생활을 통해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가족이 아프면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은 가족입니다. 퇴원하고 나서는 가장 먼저 가까운 가족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겠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은 믿거니 하는데 가장 감사의 말이 필요한 사람이 가족들입니다. 다시 생명을 얻은 우리들은 남을 위해 살아가는 슬기로움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건강은 의사선생님의 말씀과 약을 제시간에 복용하고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함으로써 지켜지는 것입니다. 조금 건강해지면 방심하기가 쉬운데 얼마나 어렵게 얻은 새 생명입니까? 또 아픔에서 벗어나 새 생명을 얻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스러웠던 초심(처음 마음)을 늘 기억하고 살아가도록 스스로를 일깨우며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간이 나빠 힘들어하는 사람이나 간이식을 해서 투병중인 사람에게 희망으로 보여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빚을 갚는 의미에서라도 밝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의지적인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
저에게 새생명을 갖게 해준 의료진 모두에게 또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며 지금 투병 중이신 모든 분들의 빠른 쾌유를 빕니다.
첫댓글 글잘읽었읍니다 정말고생하섰읍니다 저는지금수술받은지8개월 된사람입니다 저는지근 담도때문에 고생하고있읍니다 처음생각 하면참을만합니다 늘건강하시고자매님가정에 주님의은총이가득하시길빕니다 幸福하세요^^*
하느님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 흐르는 눈물을 가릴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저는 현재상태에서 더이상 나빠지지 않고 그대로이기를 기도합니다. 매일 조배하는 잠시지만 하느님 사랑을 그렇게 느낍니다. 늘 조심하시고 행복하시길....
한줄 한줄 마다에 마음 속 깊은곳에 와 닿습니다. 저는 2004년 11월에 이식수술을 받아 지금까지 별일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이 늘 함께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