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인
도 대인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전남 구례에 들어설 수 없다.
도 대인은 구례 제일의 천석꾼이면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수전노다.
고래 대궐 같은 일흔여섯칸짜리 기와집에 하인이 우글거리고,
둘째 아들은 과거에 급제해 순천 원님이 되었고,
데리고 있는 장남의 쌀 같은 손자·손녀들의 웃음소리가 집 안 가득해 도대체가 모자라는 게 하나도 없다.
그러나 도 대인의 탐욕은 끝없었다.
봄이면 장리쌀을 놓아 가을이면 빈농들의 목줄이 걸린 몇뙈기 토지를 잔인하게 빼앗아버리고
가난한 채무자 집 열대여섯 된 처녀를 첩실로 삼는다.
요즘은 약아빠진 거간꾼 배 생원을 아예 집사로 들여놓아 십리 밖의 돈이 될 만한 것도 냄새를 맡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문을 챙긴다.
어느 날 밤, 술 냄새를 풍기며 배 생원이 사랑방에 들어와 “나리,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요”라고 한다.
도 대인의 귀가 쫑긋 섰다.
“오 목수라고 있잖습니까.” “어험, 그놈 잘 알지.”
그는 올봄에 곳간을 달아내느라 거의 두달을 도 대인 집에서 일하고 노임의 반을 못 받아 울고 간 목수다.
도 대인 집에서 일하고 웃으며 나간 사람은 없다.
찬모가 나갈 땐 접시·사발 깬 것을 값으로 쳐서 다 제하고,
머슴이 나갈 땐 아파서 일을 못한 날을 미주알고주알 적어놨다가 새경에서 뺐다.
목수가 곳간 달아내느라 두달을 일하고 품삯을 고스란히 받았을 리가 없다.
“그놈이 왜?”라고 도 대인이 물었다.
“연곡사 위로 피아골이 이어져 있잖습니까.
그 피아골에 다 쓰러져가는 흉가가 한채 있는데 유 처사라는 백발 도인이 이사를 와서 집수리하려고
수소문 끝에 데려간 목수가 그자였지 뭡니까.”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하고 성질 급한 도 대인이 다그쳤다.
“골방 벽이 퉁퉁 비어 있어 살짝 헐어봤더니 글쎄 진주목걸이·금반지·은팔찌…
보물창고여서 얼른 닫아버렸답니다.”
부글부글 욕심이 끓어오른 도 대인이
“오늘 밤 우리 아이들을 데려가 처사인지 도인인지 하는 그놈을 묶어놓고…”라고 말하는데
“그건 안됩니다”라며 배 생원이 단호하게 막았다.
“오 목수가 궁금해서 망치를 들고 온 집 안을 두드려봤답니다.”
“그랬더니?” “아차 싶었던지 오 목수가 입을 닫더라고요.”
이튿날, 꾀가 졸졸 흐르는 배 생원이 연곡사에 들어가 늙은 조실 스님께 큰절하고 그 흉가에 대해 물었더니
거기가 산적들의 산채였는데 단 한채 남아 있는 그 집이 두목 집이었다는 것이다.
“그 집을 아예 사버려야 됩니다”라는 배 생원의 말에 도 대인은 무릎을 쳤다.
원래 거간꾼이었던 배 생원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도 대인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갔다.
“집 옆을 지나가다가 들렀소이다.” 유 처사는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도 대인은 툇마루 난간에 기대어 콸콸 흘러내리는 피아골 물길을 보고 넋이 나갔다.
차를 한잔 얻어먹고 도 대인과 배 생원은 피아골 정사에서 나왔다.
이튿날, 배 생원은 혼자서 피아골 정사로 가서
“처사님, 우리 주인 나리께서 어제 이 집을 보고 홀딱 반했습니다요.
혹시 이 집을 파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후하게 쳐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유 처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배 생원이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찾아갔더니
유 처사는 “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혹시 판다면 얼마까지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삼백냥까지….” 배 생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느 날 오 목수를 피아골 정사 초입에서 만났다.
배 생원이 집으로 돌아가 도 대인에게 보고하며 오 목수도 집을 사러 왔더라 했더니 도 대인이 달아올랐다.
오백냥, 칠백냥, 일천냥…. 자꾸 오르다가 삼천냥에 도 대인에게 낙찰되었다.
구례의 일흔여섯칸 고래 대궐도 천냥이면 살 수 있는데 피아골 산속의 일곱칸 너와집을 삼천냥에 사버렸다.
도 대인은 구례에서 목수 둘을 데려가 삼천냥짜리 궁궐(?)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골방 벽 속에서 방물가게 장난감 사기목걸이, 백통팔찌, 황동반지 몇개가 나왔다.
몇년 전인가,
구례 장터 길가 가마니때기에 앉아 사주팔자를 보는 꾀죄죄한 영감 앞에 술 취한 도 대인이 앉았더니
“십이년 후에 큰 손재수가 있을 것이요.”
도 대인이 가마니때기를 확 잡아당기자 그 늙은 역술인이 뒤로 발랑 굴렀다.
그 역술인이 바로 피아골 백발 도인 유 처사다.
손꼽아보니 12년 전 일이다.
머나먼 벌교 땅 기생집에 세 사람이 킬킬거리며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유 처사와 오 목수, 그리고 배 생원이었다더라.
첫댓글 투전꾼 의 설계에 넘어가서 집구석 망한 놈과 같은 꼴
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