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내용 |
경남 창원(昌原)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웅동면 소사리(熊東面 所沙里)에 살고 있으면서 마천리(馬川里)의 주기용(朱基溶)·배종인(裵鍾仁) 등과 주동하여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세우고 태극기를 준비하는 등 거사준비에 힘썼다. 이들은 1919년 4월 3일을 의거일로 약정하고 웅동면 마천리 면사무소 앞에서 봉기하여 읍에 이르러 웅천리(熊川里)의 시위행렬과 합류하기로 계획하였다. 예정된 4월 3일 의거 장소인 마천리 면사무소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오전 11시에는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주동인물들은 재빨리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부한 후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곧이어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웅천리로 향하여 물밀 듯이 행진해 갔고 연도 주변의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호응하니, 시위군중의 수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한편 웅천의 합류계획은 연락도중 사전에 일헌병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어서 그는 주동인물 32명과 함께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그는 이해 5월 2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犯罪人名簿 ·內務部請願에 對한 回信(1989. 5. 25) ·受刑人名簿索出簿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251·252·253面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