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발 딛고 살다가 시인이 파 놓은 구멍을 통해 하늘 언어를 만나고 난 신 새벽이다.
글 한 편을 완성하고 허리를 펴며 찻물을 올린다. 자글자글 물 끓는 소리가 가슴 덥혀지는
소리로 들린다.
오늘은 고흐의 그림이 장식된 투명 유리 잔에 커피를 내린다. 언제나 보아도 기분 좋아지는
커피색에 우유로 안개를 피운다. 잔도 투명하고 사람도 투명하고 커피도
투명하면 조금 무섭다. 어딘가 가려져야 살짝 마음이 편한 법이다.
안개 속에 숨은 진 커피가 맛있다. 참 맛있다.
글은 읽는 사람이 좋다고 해야 좋아지고, 커피는 마시는 사람이 맛있다고 해야 맛이 실재하니
이 세상에 홀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서로 필요로 하는 것들이 맞물려 필요한 관계를
만들어주는 게 세상살이이다.
불볕 더위 운운하지만 나에게 습기 낮은 더위는 건강 다지기에 좋은 계절이다. 5살 때에
차가 나를 치고 지나가는 대형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다친 데는 없고 후유증으로 외상 후
트라우마와 신경통이 남았다. 그래도 당연한 듯 신경통을 달고 살다가 어른이 되었다.
40대에 다시 한 번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 다발 지역인데 건널목에서 멈추어 서지
않은 봉고차에 부딪쳐 나동그라졌다. 이번에도 내 몸에는 흔적이 남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건널목에서 기다리는 우리 차를 뒤에서 대형버스가 받았다. 골프채가 부러지기는
했어도 차에 탄 사람은 이상이 없었다. 그러자 하니 내 몸은 금 간 항아리 테 매서 쓰는 것처럼
늘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게 된다. 나에게 여름은 보약이다. 습도가 낮은 사막성 기후는
신경통이나 관절염 환자에게 굿이다.
몇해 전, 미국여행 중에 라스베가스 집 값이 올랐다는 말을 들었다. 사막에다가 피한용
작은 집을 지어 완판하였다는 이야기다. 필요와 수요가 맞물리면 뭐든 시너지 효과를 낸다.
하지만 기후를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어도 기후에 맞게 살 궁리를 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선물이 될 수 있다.
여름 한 철 벌어서 3계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위가 절호의 기회이고 에어컨을 파는
사람들에게도 더 없이 좋겠지만, 항상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 또한 완벽한 구상이 되기란
요원하기만 하다.
어제 나는 우리나라의 풍경에 대해 특별한 경험을 하였다. 우리나라를 얼마나 보고 알고 사는지에
대해 의심해보았다. 외국으로 관광여행을 다니고 기이한 풍경에 환호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평의 강씨봉 자연휴양림 앞에 펜션을 짓는 지인을 찾아가면서 놀라고 또 놀랐다. 가도가도
차량의 꼬리가 짧아지지 않아서 진을 빼고 도착했는데, 가는 길목이 몽땅 유원지인 거다.
계곡물이 야트막하여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 발 담그고 놀기에 딱 알맞은 곳이 장장 몇
킬로미터까지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길었다. 푸르고 짙은 산은 벽을 두른 듯 높아서
그늘을 만들어주고 시야는 개운하며 공기는 싸아하고 숨통이 트인다.
우리 나라에 언제부터 풀빌라니 고급 팬션이 이렇게 들어섰을까. 조만간에 경제가 성장 둔화되면
업그레이드 된 레저문화가 먼저 타격을 받을 것인데 정부에서 규제를 하기 전에 자각 증세가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문가의 분석이 아니라도 우리는 다양한 사건을 경험한 세대라 흐름이
느껴진다. 상주하는 인구가 적은 골짜기에 멋드러진 건축물이 사용되지 않고 늘어서 있다면
그것은 경관을 해치는 일이고 경비를 축내는 일이 된다. 개를 기르던 사람이 사료를 대지 못해
개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처럼 수요가 모자라면 그러한 고급 팬션들은 인기척을 받지
못해 삭아들고 말 것이라 걱정이 앞섰다. 사는 것에 주력해도 힘든데 평범하지 않은 레저에
쏟아붓는다면 그 경쟁을 이기지 못해서 어떨지 간이 작은 나로서는 걱정부터 앞섰다.
이러한 경쟁을 부추기는 뒤에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통합적 판매를 돕고 가격 오픈으로 경쟁시키는
사업이 곁들여져 있다. 아무튼 나에겐 신천지였으나 거기서 잘 일은 없는 것으로 보아 무심이 답이
다. 계곡이 잔이라면 풀빌라나 고급진 펜션은 고흐 그림일 터, 본질인 자연은 망할 일이 없으나
장식은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고 없어도 아쉽지 않다는 것을 그들이 잊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 곳
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