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쌓이는 계절, 누구에게라도 가을 편지를 보내고 싶은 날에 찾아간 팔공산 올레길.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한 템포 쉬어가고 싶은 사람이 편하게 찾아갈 수 있는 도시 외곽 산길이었다.
첫 번째 코스로 잡은 신숭겸 유적지. 견훤이 이끌던 후백제군에 포위된 고려 왕건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신숭겸 장군을 기념하는 표충재가 있는 곳이다. 평산 신씨 종친회가 매년 신숭겸 장군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표충재 앞에는 보호수라는 팻말이 붙은 고목이 있다. 신숭겸 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진 배롱나무다.
견훤에 쫓긴 왕건의 피땀 서린 길
전사한 신숭겸 장군 기린 표충재
걸음마다 구국·충절의 혼…
임란 때 큰 공 세운 의병 최휘인
만년에 은둔했던 원모재도 볼거리 신숭겸 유적지 뒤편으로 계곡 길이 열린다. '왕건 길'이라 불리는 올레길이다. 팔공산 전투에서 패배한 왕건이 신숭겸의 옷을 입고 달아났다는 길이다. 왕건의 입장에선 '치욕의 현장'인 셈이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신숭겸 길'이라 부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 대곡지에는 주홍빛 산 그림자
|
대구시가 보호수로 지정한 신숭겸 나무. |
낙엽이 수북이 깔린 길을 20분가량 걸어가면 대곡지가 나온다. 산 아래 주민들이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저수지라고 했다. 최근 가뭄으로 수량이 줄었지만, 주홍빛 산 그림자가 비치는 물결은 한 폭의 유화를 연상케 한다.
대곡지 옆으로는 나무 덱이 조성되어 있다. 덱을 따라 걷다 보면 포토존이 나온다. 단풍나무 숲과 어우러진 저수지. 사진작가들이 보았다면 환호성을 울릴만한 풍경이다. 대곡지에서 15분 걸어가면 '원모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웠다는 최휘인이 살았다는 집이다. 돌담 속에 정갈하게 자리 잡은 기와집. 몸가짐이 단정한 선비가 살았을 것 같은 분위기다. 원모재 앞에는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최휘인이 만년에 은둔했던 집을 복원했다."는 안내문이 적혀있다.
|
대곡지 옆으로 조성된 나무 덱 길. |
순수한 뜻으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선비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일이 수시로 벌어졌던 당시 조정 풍토에 환멸을 느낀 최휘인이 팔공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정치 풍토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원모재를 지나 20분가량 고바위길을 걸어가면 '소원 만디'가 나온다. 올레길의 정상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소원 만디에는 포토존을 겸한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팔공산 안쪽 계곡 길과 분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원 만디를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들면 과수원길이 이어진다. 손을 대면 톡 터질 것 같은 홍시가 푸른 하늘을 수놓고 있다. 감나무가 지천으로 늘어선 마을 길이다. 감나무는 풍성한데 인적이 드물다. 도대체 이 마을에선 감나무는 누가 지키고 수확은 누가 하는지….
|
원모재. |
왠지 인심이 넉넉할 것만 같은 마을 안쪽에는 커피와 차를 파는 전원 카페들이 있다. 하지만 인적이 드물기는 마찬가지다. 호기심에 들러본 카페. 10년 전에 촌집을 사두었다가 2년 전에 카페로 고쳐서 귀촌했다는 50대 여성이 반갑게 인사한다.
전원생활이 적적하지 않으냐는 질문에는 "남편이 부지런해서 어려움이 없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한다. 하나에서 열까지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하는 전원생활을 낭만적으로만 생각해선 안 된다는 말로 들린다.
■100일 기도로 영조가 태어났다는 파계사 과수원 마을을 지나 10분가량 걸어가면 노태우 전 대통령 생가가 있다. 군사정권 시대에서 문민정부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라를 책임졌던 노 전 대통령. 비록 인기는 없었지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꾸민 것 같은 촌집이다. 노 전 대통령 생가 마루에는 붓으로 쓴 글씨가 걸려 있다.
"소나무는 항상 푸른빛을 잃지 않는다. (松無古今色)."
|
파계사 원통전. |
'처음처럼' 투명한 마음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담은 글이다. 군인의 길을 걷다 총칼을 앞세운 쿠데타에 가담한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해 대통령 자리에 오른 사람. 군에 입문하던 초심을 잃지 않았더라면 비자금 사건 등으로 구속되는 불행은 없었을 텐데….
발길을 돌려 마지막 코스로 찾아간 파계사. 신라 애장왕 때 건립됐다는 고찰이다. 조선 시대 숙종의 부탁을 받은 현응 스님이 100일 기도를 한 끝에 훗날 영조가 된 왕자가 태어났다는 설화가 깃든 절이다. 1979년 관음보살상에서 영조가 입었던 옷이 나오면서 설화에 신빙성이 더해진 사찰이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도착한 파계사. 방문이 열린 원통전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절 마당을 밝혀 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찾아간 산사에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가 새롭다. 세파에 찌든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잠시나마 경건해진 가슴을 안고 일정을 마무리하는 발걸음 앞에는 땅거미가 진하게 깔려 있었다. 글·사진=정순형 선임기자 junsh@busan.com
여행 팁
■교통편 -고속버스; 부산종합터미널(노포동)에서 동대구로 가는 고속버스가 오전 6시 25분부터 오후 10시 30분까지 수시로 운행한다. 요금 6천700원. 1시간 10분 소요.
-열차; 부산역에서 동대구역으로 가는 열차가 오전 5시 13분부터 오후 11시 10분까지 수시로 있다. 운행시간 45분. 요금(KTX 기준) 2만 3천900원.
-자가운전; 부산~대구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수성나들목에서 달구벌 대로로 들어가면 된다. 1시간 40분 소요. 통행료 1만 400원.
■먹거리 팔공산 올레길에서 맛보는 햄 치즈 바게트(사진)가 별미다, 프랜차이즈 제품과 달리 주문받는 즉석에서 굽는 이 빵은 20분이 지나야 맛볼 수 있다. 갓 구운 바게트 특유의 고소함에 졸깃한 식감이 입맛을 돋운다. 7천 원. 다연 053-986-0106. 정순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