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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6. 주일설교말씀. (요한일서1:1~10절)
제목 :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한 사귐
할렐루야! 오늘도 말씀으로 충만하여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주님만 의지하기 위하여 새생명교회를 방문하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요한일서1장1-10절까지 말씀으로 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요절말씀1장3절“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사귐이라”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귐이 있습니다.
축구와 함께 한 사귐은 축구 동호회라고 합니다.
낚시와 함께 한 사귐은 낚시 동호회입니다.
몫돈을 만들고자 하는 사귐은 계모임입니다.
같은 학교를 나온 사람들끼리 한 사귐은 동문회가 있습니다.
같은 학년 끼리 한 모임은 동창회가 있습니다.
직장인들끼리의 사귐도 있습니다.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 사귐은 향우회도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사귐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1a절을 보십시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생명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태초는 영원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생명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신이란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의지하기 위해 허구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명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가졌지만 죽습니다.
병들어 죽을 수도 있고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장정이라도 나아기 들면 노쇠하고 다 죽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생명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불완전한 생명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썩어지지 않고 약하지 않는 영원히 살아계시는 생명입니다.
완전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에는 완전한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신 성령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일하시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계신 말씀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말씀으로 일하시는 생명입니다.
동물도 생명이 있으나 인격이 없습니다. 인격은 즉 영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은 희로애락을 가진 인격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때론 슬퍼하며 괴로워하고,때론 기뻐서 춤을 추기도하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아 이들로 인하여 우셨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자 성령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한손마른 자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고소하자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픔과 피곤함을 느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대할 때 인격적으로 대해야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예수님이 인격적인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사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컵이나 책상과는 사귈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애완견, 새, 뱀, 등 짐승들을 엄청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는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지으심을 받았지만 모든 동물들은 우리가 다시리고 정복할 대상이기 때문에 그 짐승들은 우리에게 다스림을 받을 의무가 있어서 말은 못하지만 순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24~28절까지 말씀을 모두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애완견은 인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스릴 대상으로 하나님이 만드시고 허락하신 것이지 우리와 절대 다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절대 아닙니다. 이것들에게는 우리가 절대 영혼과 같은 사람으로 보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인격을 가진 생명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와 인격적인 사귐을 갖는 분이십니다.
태초에 계신 생명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우리가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
1절 하반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육체를 갖고 살면서 삶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체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도요한의 오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음성을 청각으로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시각으로 보았습니다. 사도요한은 공동생활하며 예수님을 촉각으로 만져보기도 하였습니다. 후각으로 냄새도 맡았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인 육신을 갖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육체를 갖고 오셨습니다.
2000년 전에 유대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셔서 제자들과 사귐을 가지셨으며, 예수님은 육체를 가진 우리의 몸에 성령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는 형제자매의 육체에 들어오신 에수님을 삶 속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2절에 보시면.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예수님은 태초에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제자들에게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바 되었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갈릴리 땅에 나타나신 바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생명이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자고 함께 목욕을 갔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본 그 예수님을 성도들에게 증거하여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증인의 삶을 살라는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영지주의를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당시1~2세기 헬레니즘 시대 로마에는 영지주의자(그노시스학파)들이 널리 퍼졌습니다.
이들은 신령한 것을 추구하였습니다. 육체를 천시하였습니다. 이들은 육체와 영혼을 나누는 이원론을 주장하여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일부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구약의 말씀을 믿지만 신약에 말씀대로 성육신으로 이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마치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할 때 우리 신앙에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면 우리의 신앙이 관념적이고 이상적으로 되어 말씀과 생활의 분리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영과 육체를 이원적으로 대립시기키 때문에 육적으로 아주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런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 세리, 창기,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시고 복음을 전하여 인생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구원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말하지만 또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심)
둘째로 예수님은 육체로 오셔서 죄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오셔서 인간의 고통을 똑같이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령에 인도되어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40일 동안 굶주리며 인간의 육체가 가진 고통을 이해하셨습니다. 끊임없는 사단의 시험을 받으시며 사단의 유혹이 주는 괴로움을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때로는 질병에 걸려서 질병이 주는 고통을 아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는 심히 놀라고 슬퍼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죄인들의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을 가진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십니다. 우리가 간염이나 우울증으로 고통하고 있을 때,부족한 가정환경 때문에 힘들어 할 때,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을 때,여러 번의 실패로 인해 일어설 힘이 없을 때도 예수님은 우리들을 다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마음으로 이해하실 뿐 아니라 그 몸으로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모든 물과 피를 다 흘려죽으셨습니다.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다 치르셨습니다.예수님이 죄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사귐을 가져야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도요한이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째,성도들 간에 예수님을 통하여 사귐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귐을 가졌으면 성도들과 예수님 안에서 사귐을 가져야합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축구를 좋아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껴 호감을 갖고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잘 알지 못해도 예수님 안에서 동질감을 느껴 호감을 갖고 사귐을 갖습니다.믿는 자들의 사귐은 예수님이 함께한 사귐입니다.우리는 우리의 육체에 들어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도 육체로 서로 사귈 수 있습니다.
◆ 이로 인하여 우리의 사귐의 목적은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둘째,기쁨이 충만케 하려함입니다.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인간은 홀로 있을 때 고독하고 슬퍼집니다.
요즘에 인터넷의 발달과 핸드폰의 발달로 가상 세계에서 서로를 만납니다.
인간은 직접적인 만남보다 간접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서로 간에 오프라인에서 사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사귐이 끊어지면서 사람들은 고독하고 소외감을 느낍니다.우울증 환자가 많아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한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귈 때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한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합니까?
◇ 예수님과 교제해야합니다
첫째, 먼저 나 자신이 예수님과 교제를 나눠야합니다.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을 만나야합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에 있습니다. 성령으로 오십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소감입니다. 저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저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시어 사망권세를 박살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중국에 탈북해서 살 때 이웃집 살고 있던 자매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저와 예배를 드리자고 했는데 저는 예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가 1998년 였습니다. 저는 그분을 따라 교회로 다녔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말씀을 잘몰랐기 때문입니다. 2004.03.16. 북한에 북송되었습니다.
그때도 아직 하나님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힘들고 가장 어려울 때 기도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인 것 같습니다. 저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2004년에 붙잡혀 북송되어 온갖 고생을 다 하고 그해 11월에 다시 탈북하였습니다. 다시 탈북하여 동네에 크로싱영화 주인공....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저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고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와 생명을 건네 줄 만큼의 끈끈한 사랑의 관계성을 맺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단은 항상 우리의 생명을 빼앗고자 예수님과 교제를 끊으려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지속적으로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또 연약하기 때문에 기도하여 성령 충만함을 덧입어야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예수님과 교제를 나눠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성이 끊어지면 생명을 잃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 진실 되게 나의 죄 문제를 들고 나아가고 말씀을 사랑하며 기도하여 성령을 구하는 삶을 통해 예수님과 끝까지 교제를 나눌 수 있길 기도합니다.
◇ 다음으로 성도 간에 교제를 나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성도 간에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동역자 없이 홀로 믿음 지키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음은 이 목자 저의 소감입니다. 영남신학대학교에 다니던 때 이야기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서는 자는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심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영남신학대학교에는 탈북민 신학생이 저 혼자 였습니다. 얼마나 때로는 외로워야 했습니까? 이렇게 외로운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언제 외로울 사이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올인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직 예수로 충만하고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삶이 드려지게 되니까 친구들이 제 옆에 그냥 머물러 있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로 작정하고 마음을 굳게 하면 주변에서 친구들이 저에게 어쩌면 북한에서 와서 이렇게 굳건한....
서로의 믿음에 본이 되어 영향력을 끼치지 위해서 먼저 자신의 믿음이 성장하고 승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동역자를 얻고 좋은 관계성을 맺을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 믿음의 중심을 견고히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더 많은 동역자들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려면 반드시 죄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귐이 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어둠이나 사망권세가 조금도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슬픔도 두려움도 불안도 실패의식도 없습니다.
빛의 속성은 어둠을 물리치고, 생명이 자라게 하고,활동할 수 있게 만듭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의 내면에 어둠이 물러갑니다. 어둠을 이기는 것은 오로지 빛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귀려면 우리의 내면에 죄의 어둠을 드러내고 회개해야합니다.
◇ 우리도 빛가운데 행해야합니다)
6, 7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과 사귀기 위해서는 어둠 가운데 거해서는 안 됩니다.
죄 가운데 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둠 가운데 거하면 우리는 진리를 행치 아니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거하는 자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어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진실한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불신과 교만과 탐욕과 음란의 죄를 드러내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며 그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거룩하신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우리는 거룩하신 성령 안에서 서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 우리는 죄를 고백해야합니다.
8-10절까지를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첫째 빛 가운데 사는 것은 죄를 드러내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진실되게 고백하면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 받게 됩니다. 죄는 빛 앞에 공개 해야 없어집니다. 다윗이 죄를 숨길 때는 여름 가물에 마른 싹과 같이 고통하였습니다.그러나 죄를 회개하였을 때 그의 내면에 빛이 들어오고 진정 행복해졌습니다. 또한 우리는 항상 진실해야합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진실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도 죄없다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속이고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거짓과 위선은 사단이 심는 것입니다. 그 예를 들자면 바리새인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처럼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를 가장 경멸하셨습니다.
가롯 유다도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12제자였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척하면서도 돈을 더 사랑하는 위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회개하지 못하고 비참한 자살로 끝이 났습니다. 거짓과 위선은 사단이 심는 것으로 우리를 고립시키고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 오늘의 말씀을 결론 맺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조금 부족하고 책망 받을 것이 있더라도 예수님 앞에서 진실해야합니다. 우리가 죄를 진실하게 회개하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서로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귐이 세상의 사귐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사귐도 서로에게 슬플 때 기쁨을 주고,힘을 주지만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여 죄사함 받고,예수님을 말씀을 영접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기도하며 영생의 말씀으로 계시는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사랑하며 그 분과 교제를 가져야합니다.
다음으로 동역자와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동역자와 자주 만나야 합니다. 함께 대화도 하고 식사도 해야합니다. 다른 동역자들에게 관심 갖고 이해하고 허물을 감당하고 사랑하며 관계성을 맺어야합니다. 적극적으로 세상 사람들과 관계성을 맺어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한 사귐을 갖으며 믿음 안에서 사랑의 공동체,영향력 있는 공동체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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