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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 위의 별천지, 카시미르
1) 서, 북천축국(西, 北天竺國)을 경유하여…
2) ‘가라국’은 어디인가?
중국 승려가 열반한 곳에서 보름을 걸어서 혜초사문은 카시미르에 도착한다. 혜초는, "이 나라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 길이 험하여 외국의 침략을 받지 않는다." 고 하였지만 그러나 현재는 그렇게 평안한 곳이 못된다. 근대에 들어와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중국의 삼파전의 분쟁지역인데다 인도 정부군과 분리주의 테러리스트가 뒤엉켜 싸움을 일삼고 있기에 툭하면 대낮부터 총알이 날아다니는 곳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인의 통행이 쉽지가 않았지만 혜초의 일정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관계로 나도 수차례 검문검색을 당하는 곤욕과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와하르(Jawarhar)라는 2,5㎞되는 긴 터널과 큰 고개를 몇 개나 넘어 2백㎞에 달하는 카시미르 대협곡을 거슬러 올라가 카시미르의 주도(州都) 스리나가르(Srinagar)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혜초는 이 나라의 이름을 ‘가라국’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이곳에서 북쪽으로 15일을 가서 산 속으로 가면 가라국(迦羅國)에 이른다. 이 나라 역시 북천축국에 속하는데 이 나라가 조금 크다. 왕은 3백 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고, 산중에서 산다. 길이 험악하여 외국의 침략을 받지 않는다. 백성이 매우 많은데 가난한 자가 많고 부자는 적다. 왕과 수령과 여러 부자들은 의복이 중천축국과 다를 것이 없으나 그 밖의 백성들은 모두 담요를 덮어쓰고 몸의 추한 곳을 가렸다.… (하략)」
『왕오천축국전』을 읽을 때마다, 혹 카시미르에 가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집들은 판자로 지붕을 덮었고 짚이나 기와는 쓰지 않았다[屋並板木覆 亦不用草瓦].」라는 구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통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는 구시가지를 들어가야만 했는데, 그곳은 현재도 반군들의 본거지라 대낮에도 총알이 날아다닌다는 곳이다.
그래서 우선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카메라를 숨긴 다음 시내를 관통하는 제럼(Jhelum)강에 걸쳐 있는 고풍스런 목조다리를 건너 인파와 차량과 온갖 물건이 섞여 혼잡스런 광장시장인 바자르를 헤집고 들어갔다. 시장바닥이야 민초들의 삶이 서려있는, 볼거리나 찍을 거리 ‘0순위’이기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2, 3층의 낡은 목조 건물이 늘어서 있는 구시가지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 정말 혜초의 기록대로 목조기와-‘너와’로 지붕을 이은 건물들이 있었다. 그것도 한두 채가 아니었다.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과연, 과연, 내가 이 맛에 인도대륙을 헤맨다니까!” 란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사실 결손된 『왕오천축국전』을 나침판 삼아 아시아대륙을 떠돌면서 때로는 너무나 불충분한 기록과 애매한 표현 그리고 정확하지 못한 방향과 노정(路程) 등으로 곤란을 겪을 때도 많았지만 때로는 너무나 정확하게 사실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을 맛볼 수가 있었는데, 이번 경우는 그 중 백미에 속했다.
현재, 카시미르지방은 주민의 90%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어서 인도의 기타 지방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이곳이 인도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우선 여자들의 옷차림부터 확연히 차이가 드러난다, 대개의 인도 여인처럼 배꼽을 내놓은 사리 대신에 카시미르의 여인들은 눈만 내놓고 전신을 가린 ‘부루커’라는 옷을 입어야하며 가정과 사회에서 철저히 차단된 생활을 해야만 한다.
또한 현재도 능력만 되면 카시미르의 남자들은 합법적으로 여러 부인을 거느릴 수 있다. 단 남편은 새 부인을 맞아들일 때 먼저 부인의 허락을 구해야 하며 또한 모든 부인들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여인들은 남편 이외의 외부 남자와 말을 해서도, 얼굴을 보여서도 안 되기 때문에 차안이나 음식점에서도 별도로 격리된 방과 좌석을 배정 받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요즈음은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에 의해 학생들과 미혼녀들은 조금씩 개선되어가는 중이기는 하나 이 보수적인 남녀불평등 정책은 종교적 계율에 의해 여전히 지켜지기를 강요받고 있는 것 같다. 혹 초행길의 나그네가 이런 이채로운 풍속이 흥미롭다고 해서 함부로 여인들에게 말을 걸거나 카메라를 들이대었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게 마련이다.
이런 복장과 보수적인 풍속뿐만 아니라 사원들도 온통 모스크뿐이어서 여기가 인도라는 사실이 선뜻 수긍이 가지 않지만 분명 이곳은 ‘잠무-카시미르’란 이름의 주(州)로서 인도에 속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이웃인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 편을 드는 주민들이 많기 때문에 지금도 분리독립운동이 가끔 일어나고 있고 또한 히말라야와 이웃한 중국과도 국경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 마디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인 셈이다.
3)- 용왕(龍王)의 전설 어린 스리나가르(Srinagar)
카시미르의 중심지 스리나가르는 ‘동양의 베니스’라는 애칭이 대변하듯이 호수의 도시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제럼 강과 달 호수(Dal lake)가에 넓게 자리 잡은 이 도시는 뭍에 있는 집보다 물위에 즐비하게 떠 있는 ‘보트하우스(Boat House)’라는 수상가옥들이 더욱 유명하다. 따라서 이곳의 유명한 호텔들도 대개 물위에 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최고급의 디럭스 급(級)에서 디(D)급에 이르기까지 수천여 개가 떠 있다고 한다.
이 수상가옥의 연원은 ‘카시미리’ 즉 카시미르의 주민들의 자존심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비가 많고 무더운 여름 한철을 보내어야 하는 인도본토의 상류층들에게는 서늘하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스리나가르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휴양지이다. 그래서 14세기 무굴제국 때부터 피서지로 개발되기 시작되었는데 지금도 시내 도처에 자리 잡은 ‘박(Bag)’이란 이름이 붙은 넓고 아름다운 이슬람풍의 정원이 바로 그것들이다. 근대에 들어서 이번에는 인도를 집어삼킨 영국나리들이 옛 제왕들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카시미르는 명색은 독립국이었기에 원주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외지인에게는 땅을 팔지 않았다. 그래서 개발된 방법이 호텔보다 훌륭한 시설을 갖춘 배를 건조하여 호수에 띄우게 된 것이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인도인은 모두 가난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수억의 인도인들 중에서 상류계급들은 엄청난 부를 자랑하고 있다. 그들은 캐스트제도의 사회적 기득권과 주체 못할 정도의 재력으로 마치 중세의 제왕처럼 군림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옛 제왕들이나 영국나리를 흉내 내어 여름이면 이곳으로 날아와 수억의 동족들이 굶주리고 있는 조국의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살맛 나는 인생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수상도시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시카라(Shikara)라는 보트에 의해서인데, 길고 날렵하게 생긴 이 보트는 옛 무굴시대의 술탄들이 했던 것처럼 온갖 색과 멋진 문양으로 치장하고 커튼을 드리우고 고급 카펫까지 깔아서, 그 화려함만으로 달 호수의 유명한 명물이 되어 있다. 승객들은 이 요란한 배를 타고는 하불바부- 물담배를 돌아가면서 피우며 달 호수 주위를 돌아다니며 풍광을 만끽하면서 쇼핑도 즐긴다. 관광객이 탄 시카라에는 잡화상들이 노를 저어 다가와 꽃목걸이를 비롯한 카시미르의 특산품인 카펫, 실크, 꿀과 온갖 생필품을 팔려고 야단들이다.
이런 법석으로 낮은 낮대로, 밤은 휘황한 전등이 켜지는 멋진 야경으로 달 호수는 북적거리지만 뭐니 뭐니 해도 달 호수의 백미는 역시 하루를 여는 새벽 수상시장이다. 밤을 드리웠던 어둠이 물러가면 이번에는 원래 이 호수의 원래 주인이었다는 용왕의 입김 같은 신비한 새벽안개가 드리우기 시작하는데 그 속에서 수많은 시카라가 홀연히 나타나며 한 곳으로 모여든다. 살 물건이 있는 사람, 팔 거리가 있는 사람, 또 살 것도 팔 것도 없지만 그냥 구경나온 사람까지- 모두 시카라를 타고 장터로 모여든다. 일종의 ‘벼룩시장’ 같은 이 수상 시장에는 이렇게 모여든 배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오랜 전쟁으로 찌든 ‘카시미리’, 즉 카시미르의 사람들도 이 시간만큼은 전쟁의 공포를 잊고 즐겁게 떠들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런 정경이야 예부터의 민초들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하루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각기 자기의 잉여산물을 들고 부모가 했던 대로, 할아버지의 또 할아버지가 했던 그 대로 새벽에 배를 저어 수상시장에 몰려들어 필요한 물건과 바꾸어가는 것이리라.
그들은 카시미르에 태어난 이유 하나만으로 ‘알라’라는 신을 믿어야 하고 관습에 의해 타종교를 배척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의 것을 무조건 파괴해야하는 신성한 의무를 지니고 살아야 한다. 이런 가치관은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의식이 싹튼 다음에 스스로 판단해 선택한 결과가 아니고 오직 전통이라는 환경에 의한 학습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요즈음 ‘문명의 충돌’이라는 단어가 자주 들먹이고 있다. 세계전쟁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배경에는 종교란 형체 없는 괴물체가 교묘하게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어느 심리학자의 말- “모든 증오는 반복되는 학습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 처럼, 모든 증오의 뿌리는 종교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다시 한번 비약하자면 일반적으로 가장 큰 범죄로 꼽히는 ‘살인’도 자기 종교를 위해서라면 그 집단에서는 칭찬 받을 미덕이 된다. 더구나 대량살생일수록 한쪽에서는 영웅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종교란 것이 생기기 그 이전 세상의 싸움질이 오히려 순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때가 있다. 그들은 오직 먹거리와 종족번식을 위해서만 싸웠으니까…….
각설하고, 호숫가에 자리 잡은 언덕이 조망대로써 유명하다기에 올라갔더니, 정말 그 곳에서 내려다본 스리나가르는 온통 물에 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도시는 나가(Naga)용왕이 살던 호수였다. 이에 대하여는 혜초를 비롯한 여러 구법승들이 하나 같이 용왕에 얽힌 개국전설을 채록하여 기록하고 있다.
『나라 안에는 용지(龍池)가 하나 있는데, 그 못의 용왕이 매일 1천명의 나한승(羅漢僧)을 공양한다. 아무도 나한이 음식을 먹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 재(齋)가 끝나면 곧 물 속에서 떡과 밥이 어지럽게 물위로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어 이것으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공양이 계속됨을 알 수 있다. 』
대개의 여행자가 그러하듯이 나도 보트하우스에 여장을 풀었다. 모든 가이드북에 이곳의 ‘바가지’가 상상을 초월한다기에 방 값과 기타 사항을 여러 번 확인하고 나서 짐을 풀었다. 그리고 내일 하루는 조그만 시카라를 빌려 타고 드넓은 호수를 노 저어 다니며 때로는 황혼의 노을 속으로 들어가기도, 때로는 흐드러지게 핀 연꽃 속으로 들어가는 풍류를 즐기면서 그냥 하루 정도는 푹 쉬리라 생각했다. 나도 20년간 강가에서 갈고 닦은 뱃사공 실력이 있지 않은가 하면서…
그러나 하루 만이라도 그냥 쉬려던 계획은, 마치 그런 사치가 아랑곳한 일인 양 궤도수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이곳 상인들의 상술에 대해 충분한 예비지식으로 무장한지라, 카시미르의 특산품을 팔려는 장사꾼들이 간헐적으로 덤벼들어 근사한 물건을 내놓고 안사도 좋으니 그냥 보기만 하라고 해도, 마치 피해망상증 환자처럼 무조건 “노 생큐”나 “노 잉글리시”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손님이라곤 나뿐이라는 핑계로 주인이 직접 말을 걸어왔다. 역시 판에 박은 듯한 술법이었다.
“카시미르는 위험한 곳이고, 여기에는 친절이나 우정을 가장하여 당신을 속여서 돈을 뺏어 가려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차피 여기에 왔으면 당신은 정보가 필요할 것이고 그리고 누군가 당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으면 아무 구경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누군가 한 사람 정도는 믿어야 할 것이다. 이왕 한 사람을 믿으려거든 그 사람 이외의 다른 사람은 믿지 말아야 한다.” 라는 요지였다.
뭐 어차피 한가한 저녁이라 나 역시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사기를 당해 돈이 달랑달랑해서 선물을 살 수가 없으니 토산품의 강매만 아니라면 좋다고 하면서 이야기 끝에 불교유적지에 관해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무조건 그런 곳은 없다고 하더니 잠시 뒤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만에 책 한 권을 꺼내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 책의 유래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바로 자기 부친 대에 가끔 그 호텔을 찾는 프랑스의 학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인연으로 저자가 직접 친필 사인하여 선물한 불교에 관한 책이라고 하였다. 한 눈에도 희귀한 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내 서점을 아무리 뒤져도 ‘불(佛)’자 하나 찾을 수 없어서 난감해하던 내게는 그것은 행운정도를 넘은 기연(奇緣)이었지만, 그런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는 나는 나대로 그 책을 싸게 뺏을(?) 작전을 구상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그 책은 지금도 뉴델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한 책인데, 모슬렘인 당신이 왜 그런 이교도책을 갖고 있느냐?”
하고는 대충 뒤적이는 척 하다가 주인에게 일단 돌려주었다.
이튿날, 역시 그 작전이 주효하였던지 그는 그 책을 내게 건너주면서 '푸리센트'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짐짓 관심없다는 투로 물어보았더니 그가 하는 말이. 먼 곳에서 온 동방의 친구에게 주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족으로는 "우리 모두 수염을 기른 친구라는" 이유를 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니다다를까 역시 본론이 이어졌다.
"그 대신 짐이 안 되는, 가벼운 카시미르 제품이나 몇개 가져가서 사랑하는 부인에게 둘러주시게나. 그러면 그날 밤이 황홀해 질 것을 내가 장담하이~"
하면서 윙크까지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마지못하는 척 그 책을 받아들고 스카프 한,두 장을 골라 가격을 악착같이 깎는 연기력 동원하면서. 속으로는 지금까지 수많은 나그네들에게 사기친 업보라고 고소해하면서 음흉하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인과응보는 역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왜냐하면 그 스카프는 역시 가짜였기 때문이었다. 그 이틑날 뱃전에서 이별할 때 그윽한 작별인사를 하면서 짓던 그 친구의 미소의 의미가 못내 마음에 걸려서, 시내로 나와서 큰 가게에서 그 스카프를 감정해본 결과였지만...
그래도 그날 이후 카시미르에서 계속 사기를 당하면서도 난 행복할 수 있었다. 남을 사기치는 맛도 괜찮았기 때문이었기에....후후후
4)- 마지막 불경의 결집처(結集處), 하르완
예정되었던 달콤한 휴식도 포기하고 아침부터 그 책에 쓰인 불교유적지 답사에 나섰다. 물론 콧노래도 부르면서 말이다. 먼저 책을 들고 시내에 있는 박물관으로 달려갔다. 불교유적의 현황과 출토품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허름한 창고 같은 박물관은 총을 든 정부군만이 우글대었는데, 근무시간이긴 하지만, 사람을 입장시키지 않았다. ‘알라’에게 기도드리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몇 시간을 기다렸으나 종무소식이었다. 속이 끓어올랐지만 총을 든 벽창호 같은 군인을 상대로 뭘 어찌하겠는가?
대신 “인 샬라!” 운운하는 중얼거림으로 불만을 대신하고 심기일전하여 근교의 유적지 판드레탄으로 달려갔다.
B.C 2세기의 불교왕국의 도읍지였던 곳인데 그러나 이곳도 역시 군인들이 막고 들여 보내주지 않았다. 근처가 군인들의 주둔지여서 특별허가가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뒤에 들으니 이곳도 불교사원 위에 힌두사원이 다시 건립되었기에 불교적 유적이 대개 사라졌고 그 나마 남은 불상들을 표적으로 병사들이 사격연습을 했기 때문에 모두 부셔졌다고 한다. 불교 유적들이 특히 모슬렘 손에 많이 파괴된 일은 불보살 상이 모두 우상이라는 이유하나 때문이라는 것이어서 힌두신보다 더욱 피해가 많았다는 것이다. 하기야 자칭 고등종교라고 자처하는 유일신 체계의 종교들이 종교와 고유한 전통 그리고 역사적 유물을 구분하지 못하는 행위는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11> 있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하겠다.
고대로 올라가면 카시미르는 가람과 탑이 즐비했던 불국토였었다. 쿠샨왕조의 한때의 수도였고, 불경의 ‘제4차 결집’이 열렸던 곳이고 또 쟁쟁한 논사들이 활약했던 명실상부한 인도대륙의 불교학의 중심지였다.
카시미르가 인도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B.C 2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 시대였는데, 당시 카시미르에도 여러 곳에다 거대한 사원을 세워 스투파를 세웠다. 이는 7세기, 현장이 여기에 2년간이나 머물면서 그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4개의 대탑이 있는데 각기 여래의 사리가 한 되 남짓 들어 있으며 모두 아소카 왕이 세운 것이다.’ 라고 할 정도로 이곳은 연화문 후성이었다. 뒤이어 쿠샨왕조의 카니쉬카 왕 시대를 거치며 불교는 더욱 번성하였다.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이어지며 만개했던 카시미르는 ‘대승의 완성지’라는 자체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북방불교의 전파거점으로 중국, 티베트, 중앙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시 발길을 불경이 마지막으로 결집된 ‘제4차 결집지’라고 알려진 하르완으로 향했다. 하르완 수원지댐에서 길잡이 삼아 아이들을 앞세워 산길을 한참 오르니 사드나르산의 중턱 숲 속에 과연 절터로 보이는 넓은 유적지가 나타났다. 둥근 스투파와 가람이 있었던 유지가 완연하였다. 현재도 군데군데 흙과 돌로 쌓은 벽과 토기파편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2세기 초 북인도를 통일하여 간다라지방을 중심으로 쿠샨왕조를 세운 카니쉬카 왕은 당시 협존자(脇尊者)의 건의를 받아드려 5백 명의 사문을 모아놓고 7일간 불경을 새로 편집하여 적동판(赤銅板)에 새겨 석함(石函)에 넣고 스투파를 세워 그 안에 안치했다고 한다. 현장은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제자들의 부파에 따라 이론이 서로 다릅니다.” 라고 말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비탄하여 말하기를 “여래가 입적하신 후 시간은 지났습니다만 아직 유법을 들을 행운은 있습니다. 나는 불법을 중흥시키고자 합니다. 스스로의 부파에 따라 삼장(三藏)을 주석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이에 7일간에 거쳐 사사공양(四事供養)을 행한 후에 5백 명의 아라한과를 얻은 비구를 선발하여 (중략) 이에 전30만 송이 완성되었다.』
1천7백여 년 전, 5백 명의 쟁쟁한 학승들이 모여 진리를 토론했을 하르완!
그러나 이미 아무도 찾지 않는 폐허로 변해버린 가람 터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땀을 식히며 망연히 허무삼매에 들어있는 나그네에게 길잡이를 해주었던 아이들이 손을 잡아끌더니 으슥한 곳으로 가서는 그곳에서 파낸 것이라며 신문지에 싼 물건을 보여준다. 간다라풍이 완연한, 목이 잘린 불상과 헬레니즘 냄새가 나는 엽전 등이었다. 얼마 전 고고학발굴이 있어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은 박물관으로 옮겨졌는데 그 때 자기들이 이것들을 주었다고 한다. 대개의 유적지에서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한 터라 거절했지만, 아이들은 막무가내였다. 할 수없이 몇 푼을 쥐어주며 한두 개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그래 뭐 흙으로 빗은 부처님이 진짜가 어디 있고 가짜가 어디 있으랴. 이곳에서 이렇게 이리저리 뒹굴고 계실 바에야 차라리 해동으로 가시는 것도 괜찮지 않으실지?”
<가이드 포인트>
뉴델리에서도 직통으로 연결되는 버스도 있긴 한다지만, 대부분 북인도의 거점도시 잠무(Jammu)에서 출발하는 293㎞ 거리의 스리나가르 여행은 인도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로 버스 등급에 따라 10시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된다. 인더스 강을 낀 카시미르계곡을 따라 올라가기에 경치는 환상적일 정도로 아름답지만, 대신 위험부담도 크다. 현재도 카시미르는 분쟁지역이어서 검문이 심한데, 상황에 잘 대처해야 한다.
스리나가르에서 다시 리틀티벳이라 부르는 고원도시인 라닥(Ladakh)지방의 레(Leh)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해발고도 3,529m의 조리라(Zoji-La)고개를 넘는 아찔한 여행을 감수해야 한다. 버스 외에도 두 구간을 전문으로 뛰는 사륜구동 지프도 많은데, 조금 비싸기는 해도 조금은 안전하고 정말로 ‘찍을 거리’를 만날 때 기사를 미리 포섭해두면 사진을 몇 장 찍기 편하다.
필자의 라닥의 레(Leh) 방문기는 역시 이 책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불광>지에 실려 있기에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다.
<혜초따라 오만리>1995년 글에서 부분 발췌>.
첫댓글 음~
.....().....
좋은 정보 ㄳ~~^^
요즘 연재되는 산머루님의 스리나가르의 좋은 사진과 연결하여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즐감즐감~ 정말 고급스런 정보. 요새 하도 허접스런 정보 투성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