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요한삼서 1장 3절 교회를 통해 일하는 진리의 능력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와 말씀을 받고 순종할 성도들을 교회로 부르시고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말씀을 받는 사람이 진리보다 다른 것에 관심을 더 가지고 있다면 그는 진리의 말씀이 들리지를 않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생각은 다른데 가 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가서 해야할 일이 그의 마음을 꽉잡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염려와 걱정거리가 마음을 사로잡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들이나 자기와 가까운 누군가가 힘들게 한 일 때문에 마음이 어두운 사람도 있습니다. 또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금전관계 때문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몸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지만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 빼앗길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것을 네 가지 밭으로 구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길가입니다. 밭에 곡식을 뿌리다 보면 씨앗이 길가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씨앗들은 새들이 차지합니다. 새들은 밭에 있는 것도 먹으려 들지만, 길가에 있는 것은 더욱 쉽게 먹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새들의 먹잇감입니다.
오늘날 의외로 새들의 먹잇감이 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만 말씀을 듣는 즉시 잃어버리는 사람은 생각이 세상에 나가 있기 때문에 듣는 즉시 마귀가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물론 연세가 드신 분들은 예외가 되겠지요.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감소하니까요.
둘째는 돌 밭입니다. 밭에 가서 고구마나 감자나 옥수수나 다른 곡식들을 심는데 얼마동안 자라다가 이상하게 시들시들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마른 곡식 순들을 뽑고 거기에 손가락을 넣어보면 조그만 돌멩이가 뿌리 밑에 있는 것을 알게 되어 그 돌멩이를 빼내고 거기에 다른 곡식 씨앗을 심으면 얼마 안있어 싹이 나오는데 잘 자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뿌리가 자라는 것을 막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돌멩이였던 것이지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밑에 숨겨져 있는 돌멩이 때문에 조금은 자라는듯하다가 말씀으로 인한 환난과 박해가 오면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진리가 뿌리내리지 못해서 환난과 박해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의 탓을 많이 합니다. 자기 속에 나약하게 하는 원인인 돌을 제거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셋째는 가시밭입니다. 가시밭은 일반 밭과 똑같아 보입니다. 초기에는 가시나무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뿌려놓은 씨앗이 잘 자랍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자라다보면 그 밑에서 가시떨기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가시떨기는 성장발육 속도가 무척이나 빠릅니다. 그래서 그 강한 가시는 곡식이 먹어야 할 모든 좋은 양분들을 다 빼앗아 갑니다. 그로인해 곡식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가로막혀 진리가 사라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리가 그 안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넷째는 옥토 밭입니다. 옥토는 기름지고 좋은 밭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곡식이 자라기에 가장 적당한 환경입니다. 그래서 그 씨앗이 싹을 내고 자라서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 진리가 역사하고 있습니다.
여기 요한삼서 1장 3절을 보면 옥토인 마음에 진리가 역사하여 열매를 맺는 모범된 성도가 나옵니다. 그 이름은 가이오입니다. 그 가이오에게 사도 요한은 복을 빌어줍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이오는 가이오 안에 진리가 있다는 것과 가이오가 그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도 요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형제들과 가이오를 만났던 복음을 전하는 모든 형제들이 가이오를 생각하면서 매우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교회를 통해 일하는 진리와 그 능력에 대하여 들으시게 됩니다. 그 능력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역사합니다.
가이오를 만났던 믿음의 형제들은 가이오에게서 진리가 역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이오 안에 있는 진리가 섬김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주에 여러분들이 들은 사도 바울의 고백도 역시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안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들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0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진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사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받은 성도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성도 안에서 역사합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역사가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밭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옥토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있습니다. 진리는 옥토의 마음을 가진 사람 안에서 일하며 진정한 사랑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가이오가 바로 그 옥토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옥토의 마음에 진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진리는 자랐고 또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옥토로 가꾸시기를 축복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이시며, 또한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진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신 예수님이 몸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진리가 자기 속에 있는 사람이며 그런 교회는 진리가 역사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삶이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고, 진리 안에 있는 교회는 그렇지 않은 교회와 확연하게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삼서를 읽어보셔서 알겠지만 요한은 가이오가 소속된 교회에서 대표적인 세 사람을 언급합니다. 이 교회는 이 세 사람이 주축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 사람은 가이오고, 두 번째 사람은 디오드레베이며, 세 번째 사람은 데메드리오입니다.
먼저 가이오에 대하여 알아보면 그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진리 안에서 진리를 행함으로써 교회에 진리가 살아 역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성도입니다. 이런 성도를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교회 안에는 이런 진리가 그 안에 있고, 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런 성도는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그를 아는 신실한 성도들에게도 역시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교회와 성도에게 복을 주시기를 즐거워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진리 안에서 역사하는 그 교회가 되며 여러분들이 바로 그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가이오에 대한 사도 요한의 칭찬은 예수님의 칭찬과 같습니다. 사도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교회의 형제 자매들을 대하며 이웃들을 대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게 됩니다.
가이오를 향한 사도 요한의 칭찬을 보면 우선 그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합니다. 그런 후에 크게 칭찬을 합니다. 요한삼서 1-2절입니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가이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하며 복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우면 이런 표현을 쓸까요? 마치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온통 마음을 거기에 빼앗긴 것 같은 표현방법입니다.
요즘 아내의 마음을 온통 빼앗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저였으면 좋겠지만 저보다 더 아내의 마음을 빼앗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미 짐작을 하셨겠지만 바로 우리의 손자입니다. 이제 100일이 지난지 얼마 안되었는 데, 아내의 눈에는 손자가 하는 모든 행동들, 옹알이, 그리고 얼굴 표정들이 다 이쁜가 봅니다.
최근에 작은 딸이 핸드폰으로 찍어 큰 딸에게 보냈는데 그 사진을 카톡 상태 이미지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보고 배꼽을 잡고 웃는데 보니까 꼭 아이가 “왜 내가 요구하는 것은 안들어주고 사진만 찍고 그래요”하면서 곁눈질하면서 약간 울상을 하는 그런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100일도 안된 아이가 그런 표정을 지었다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어하며 웃어대는데 그 사진을 볼때마다 그런데다가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또 사랑스러워합니다.
이 아이는 할머니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부모를 위해서도 해준게 전혀 없습니다. 그냥 성장의 과정을 따라서 자라면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들일 뿐인데도 아내의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내가 가지고 있는 손자에 대한 사랑때문에 스스로의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아내가 다른 집 손자에게 그렇게 마음을 빼앗긴 경우가 없습니다. 물론 다른 손자를 둔 할머니들도 역시 자기 손자에 대하여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 역시 가이오에 대한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이오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이오가 사도 요한에게 뭘 잘 해줘서가 아닙니다. 그가 형제들에게 보여준 착한 행동이 그를 만나고 온 형제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가이오가 사는 그 도시로 들어간 형제들을 가이오는 마음을 다해 영접하고 깍듯이 대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곳곳으로 순회하면서 다니는 전도자들에게 자기 집을 안식처로 제공한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가 역사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는 순간에 선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선포하신 말씀들이 마태복음 25장 34-3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이 묻습니다. “언제 우리가 그런 일을 했다고 하시는지 기억이 전혀 안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가이오는 창세 전부터 예비된 복을 하나님께 받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 도시에 찾아오는 전도자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고 그들을 극진히 대접한 것입니다. 이것은 가이오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얼마나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는 것을 얼마나 소중한 지와 그 진리의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사람들의 사역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그들을 영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사람은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41-42절입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런 가이오에게 환영과 영접과 대접을 받았던 전도자들이 요한을 만나게 되었을 때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는 길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다가 가이오의 집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에 화색이 돌고 그들이 받았던 감동을 이야기하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 기뻐하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가이오의 영혼을 잘되게 하신 것처럼 그의 범사에 하는 일들이 다 잘되게 하시고 또 강건하게 하셔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믿음의 형제들을 잘 섬기게 하여 주옵소서”
이 말씀이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인데 오늘날 수많은 교인들이 이런 가이오의 섬김은 도외시한 채 이 복만을 받으려고 삼박자 축복이라고 하면서 이 복을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이오는 이 복을 구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가이오를 위해 이 복을 하나님께 달라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선교사나 전도자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성도의 극진한 섬김을 보고 복을 빌어주는 형태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자기가 극진히 대접을 받다보니 마음에 감동이 와서 복을 빌어준 사례도 있습니다. 엘리사를 영접하고 대접했던 수넴 여인의 경우입니다. 엘리사는 수넴여인의 행동에 감사해서 무슨 복을 빌어줄까 하다가 생각이 나지 않아 언제나 함께 동행하며 수종드는 게하시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게하시는 이 집에는 아들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자 엘리사는 여인을 불러 축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들으시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그 집에 아들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진리가 있고 진리가 역사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생애는 복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들을 위해 비는 복이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정에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심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삼서 1장 3-4절입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그리고 예수님의 심정으로 축복을 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5-6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왜 이런 삶이 중요하다고 말합니까? 그 이유가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에게 나가서 전도했지만 그 보수를 하나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런 사람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그들과 함께 사역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번 7월의 월삭예배때 여러분들에게 전했던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자와 드리는 자와 만드는 자의 사역이 결국 하나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교회가 알고 참여해야 하는 진리의 복음에 헌신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이렇게 복음에 헌신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가 온전히 세워나가는 것을 훼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이스라엘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려는 것을 알고 건축하는 일을 방해했던 대적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에스라 4장 4-6절을 보면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하면서 방해를 놓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을 이야기 합니다.
또한 느헤미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느헤미야 4장 1-3절을 보면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서있지 못한 자는 하나님 나라 일을 방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에 서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그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에 되는 것입니다.
여기 디오드레베에 대하여 사도 요한이 뭐라고 하는 지 들어보십시오. 9절입니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뭐라고 합니까?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진리로 섬기는 일은 대체로 교만한 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에게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겸손한 섬김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교만한 자들의 훼방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그럴듯하게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합니다. 잘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사역을 하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하나님이 하시는 일,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방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진리가 없는 그들은 진리를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는 마음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향하여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 없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런 가라지같은 사람을 교회 안에 들여보냅니다. 교회가 하는 하나님의 일을 훼방놓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이 마귀에 속해 있다는 사실 자체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의 악행을 잊지 않고 벌하실 때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마태복음 25장으로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41-43절입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런데 그들 역시 자기들이 예수님을 대접하지 않은 기억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병든자들을 고치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내쫓고, 선지자의 노릇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의아해 하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45절입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여러분 곁에 작게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특히나 어려운 교회의 목회자가 보입니까? 열심히 섬기고는 있는 데도 목회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결과가 드러나지 않는 전도자나 목회자가 있습니까? 그 사람이 바로 우리 교회가 섬겨야할 형제들입니다.
세 번째로 교회 안에는 데메드리오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데메드리오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간략하지만 그가 진리 안에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칭찬을 합니다. 요한삼서 1장 12절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여기서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진리의 복음을 믿어 구원받았다는 것을 같은 교회의 성도들도, 그리고 진리의 말씀도 증거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이오처럼 확연하게 진리가 역사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신앙이 어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양육하면 가이오처럼 성숙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진리 안에 있는 교회의 특징 중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계속적으로 신앙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어우러지고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로부터 양육을 받으며 성령의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사역으로 인해 교회는 계속적으로 성장하며 교회의 지체인 여러분들의 신앙도 역시 데메드리오 신앙에서 가이오 신앙으로 성장해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 안에서 복된 교회입니다.
여러분 앞에 가이오와 디오드레베, 그리고 데메드리오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진리에 대하여 반응하면서 살고자 하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진리로 하여금 크게 역사하게 할 수도 있지만,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밭처럼 조금은 일하는듯 하다가 시작만 해놓고 열매도 맺지 못한 채로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이오처럼 옥토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어 예수님에게도, 복음전도자들에게도, 또 성도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주로써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6절입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사도 요한도 여러분들에게 권고합니다. 요한삼서 1장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가이오, 디오드레베, 데메드리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고, 우리 교회는 과연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교회를 통해 진리가 역사하도록 온전히 자신을 예수님께 내어드리며 하나님께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는 창세 전에 예비하신 복받을 자라고 예수님께서 증거하시는 그런 복된 교회, 복된 성도가 다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