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봉변
임병식 rbs1144@hanmail.net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고향 집을 방문하는 날이다. 무거운 짐을 벗어서인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하다. 그래서 옮기는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 고향집은 내가 출향(出鄕) 하고 다른 형제들도 제각기 대처로 떠난 이후 지키는 사람이 없어 빈집으로 남아있다. 한동안 노모께서 홀로 지키셨지만 자식들이 거주하는 도회지로 따라 나오신 후로 비워두게 되었다. 그래선지 빈집이 마치 새끼들이 떠난 날짐승의 빈 둥지만 같다.
고향집을 방문하면 늘 마음이 애틋하다. 집에 들어가기 전 고향마을 들머리에 잠들어 계신 선친의 묘소가 눈에 밟혀서인지 모른다. 묘소에 들러 먼저 선친께 인사를 드리면 어떤 표정으로 맞아 주실까. 그간 고생했다고 말해 주실까. 떠나와 산 세월의 두께 탓인지 감회가 여간 새롭지 않다. 돌이켜보면 나는 꽤나 먼 길을 돌아온 것 같다. 그 세월이 저장된 필름처럼 뇌리를 스친다. 내가 타관에서 떠돌며 보낸 공직생활은 늘 고달프고 힘겨웠다. 그야말로 매일 매일 가슴을 졸이고 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1970년에 처음 직장을 잡은 이후, 33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야말로 허리띠 한번 풀어놓지 못하고 긴장 속에 보낸 나날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풍파도 많이 겼었다. 고달픈 일이이라도 적성에 맞으면 좀 나을 텐데 그렇지 못하여 늘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신고 산 것처럼 불안하고 불편했다. 그런 까닭에 번민에 사로잡혀 지내는 날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중도 하차도 할 수 없었다. 생업이 걸리기도 했지만 애초에 자신과의 약속을 그리 했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중도에 스스로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고 다짐을 했다. 내가 직장으로 경찰직을 택하자, 나의 적성과는 무관하게 다른 이유로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선입견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를 들면서 왜 하필 많고 많은 직장 중에서 경찰직이냐고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많은 직종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 마음대로 골라갈 수 있는가. 어쭙잖은 학력에 따로 시험 준비도 할 형편이 아니었다. 해서 도둑 잡은 것이라면 군대에서 헌병생활을 했으므로 경찰업무는 사전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성격을 감안하지 않고 주저 없이 지원하게 되었다.
성은 비록 차지 않지만 바르고 정직하게 적응해 가다보면 이름 석 자의 명예는 더럽히지 않고 지킬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명예의 문제는 하나의 계기가 있다. 내가 직장을 잡을 무렵, 우리마을에서 형님이 이장을 맡고 있었다. 한데 보니 공직자들의 민폐가 이만 저만 심한 것이 아니었다. 면이나 지서에서 직원들이 출장을 나오면 으레 집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어떤 때는 노골적으로 닭을 잡자는등 수작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런 행동이 심히 역겹고 거슬렸다. 돈을 내고 잡아달라는 것이야 누가 말할 것인가만 무작정 공짜를 요구했던 것이다.
내가 입문당시는 경찰의 인식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봉급도 쥐꼬리만큼 적은데다, 남에게 군림한다고 낙인이 찍혀 있었다. 나는 이런저런 일을 보면서 입문 초기에 두 가지를 지키겠노라고 다짐을 했다. 우선 근무하며 절대로 민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것과 부정불의와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한데, 그러한 결심을 시험받는 사건이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경찰이 된지 2년째였다. 눈앞에서 범법의 현장을 목격했던 거다.
사건 개요는 이러했다. 하루는 담당부락에 진출을 했더니 주민이 신고를 했다. 지금 허가받은 산판에서 불법이 자행되고 있는데, 산림계 직원의 묵인아래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초 허가 면적보다 초과하여 남벌이 이루어지는데, 그 두 배가 넘은 나무를 베어 내고 있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확인이 필요해서였다. 현장에 도착하니 목상과 담당 공무원이 거기에 있었다.
그들에게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말하고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볼게 있느냐"며 한사코 옷소매를 잡아 끄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절대로 허가면적을 초과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였다. 나는 그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 베어낸 나무 등걸 수를 차례차례 확인해 나갔다.
보기에 따라서는 좀 미련한 방법이지만, 확증을 잡으려면 어쩔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세어보니 남벌이 확인됐다. 그것도 두 배에 가까운 면적이었다. 당연히 산림법위반으로 입건조치를 취했다. 그런 나를 보고 어떤 사람은 적당히 용돈이나 좀 받고 봐주지 그러냐고 말하기도 했지만 나는 내 자신을 속일 수 없고, 당초 다짐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하나, 그 일로 인하여 그들이 퍼뜨리는 갖은 악평에 한동안 시달렸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또 한 번은 방위병과 관련한 사건이었다. 지서장의 지시에 따라 어느 도서지방의 방위업무를 인수받고 보니 근무하고 있어야할 자원이 8명이나 부족했다. 어떤 일인가 싶어 추적해 보니 그들은 공부상에만 적을 두고는 학교를 다니거나 , 외항선을 타거나, 아니면 타 지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그런데도 이들의 병적부는 근무를 하고 있는 양 일보가 잡히고 있었다. 나는 즉각 이 사실을 지서장에게 보고하고, 본인과 가족들에게 즉시 복귀 할 것을 통지했다.
그런데, 그날 밤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은밀하게 청탁이 들어온 것이다. 관내 예비군 책임자 3명이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로 찾아와 전임자도 봐주었던 일이니 한번만 눈감아 달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그러면서 돈이 든 비닐 가방 하나를 꺼내놓았다. 그걸 보고 내가,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장 거져 가세요"하니, " 몇 달 동안만 좀..."하면서 물러나지 않았다.
나와 그들 사이에 한참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들은 돈 가방을 내게 안기려고 들고 나는 절대로 받을 수 없다고 맞서는 국면이었다. 그들은 내가 끝내 단호한 모습을 보이자 포기하고 물러났다. 한데, 그 일이 있고 난 바로 다음 일이 벌어졌다. 담당한 마을에 진출하여 업무를 보고 돌아오는데. 후미진 고개에서 누가 나를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일전에 집으로 찾아왔던 중대장 중 한명이었다.
"너 여기서 잘 만났다. 오늘 너 죽는 날인 줄 알아라"
그 어간에 내 안면으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한대 맞고 당황한 내가 왜 이러냐고 하니,
" 네가 그렇게도 깨끗한 놈이냐"
라고 하고선 또다시 주먹을 내뻗는 것이었다.
복수를 하겠다는 단단히 벼른 모양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그대로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민 그의 손을 비틀면서 업어치기로 땅바닥에 패대기를 쳐버렸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입은 상처는 내가 훨씬 더 심했다. 그 상태로 지서에 도착하니 차석이 놀라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렇지만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신 그 날로 돈을 쓰고 해택을 누려온 방위병들을 전원 고발조치해버렸다.
그러나 전부를 고발할 수는 없어서 일단 내가 업무를 인수받은 후의 이탈부분 만을 조치했다. 아무튼, 그런 봉욕을 당하고 난 후 나는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며 유혹에 빠져들 개연성이 있는 부서근무는 일부러 기피하게 되었다. 아예 그런 부서에서 근무를 종용해도 손사래를 쳐 버렸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직장생활을 돌아 볼 때, 내가 그렇게 일관되게 견지한 고집으로 인하여 혹여 다른 사람들에게는 선의의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는지 새삼스레 돌아보게 된다.
그런 공직생활이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나, 오늘 따라 내 발걸음이 가벼우니 양지 녘에 누워계시는 선친도 그만하면 잘 마쳤다고 해주지 않을까 싶다.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