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과 임진강 도보(세 번째-2)
(운산전망대∼전곡한탄강유원지, 2022년 9월 24일∼25일)
瓦也 정유순
다시 마을 쪽으로 올라오면 벼 이삭이 노랗게 익어가는 논길이 보이는 순간 이미 몸은 논두렁 한가운데로 향한다. 어릴 때 밭두렁 논두렁 헤집고 다니며 메뚜기 잡던 추억이 되살아난다. 하릴없이 서있는 것 같아도 참새를 막아주던 허수아비는 어디로 갔을까? 짧은 논두렁 길이지만 이미 추억은 아주 오래된 옛날 꼭꼭 숨겨 놨던 기억을 다 끄집어낸다.
<논두렁 길>
추억에 잠겨 한참을 걸어가다가 다시 강변 길로 접어든다. 강변에는 논으로 물을 공급하는 배수관이 강바닥을 향하고 언덕 아래에는 양수장이 때를 기다린다. 현무암 용암대지는 보수력(保水力)이 약해 농사짓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은 양수시설의 발달과 함께 한탄강 주변에는 60여 개의 양수 시설이 가동되어 주로 논 농사를 위해 한탄강 물이 이용된다. 그 옆으로는 보(洑)로 가둔 물을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소수력발전소가 세상의 빛을 만들어 낸다.
<농업용수펌프장>
<소수력발전소>
조금 앞으로 걸어 나가면 강변의 주상절리 틈새에는 말벌들이 집을 지어 놓았다. 말벌은 몸길이는 20∼25㎜이다. 몸 색깔은 흑갈색이며 황갈색과 적갈색의 무늬가 있다. 말벌 무리에는 말벌, 땅벌, 쌍살벌 등이 속하며 장수말벌은 말벌 무리 중 가장 크고 힘이 세다. 말벌의 암컷은 생식기능을 가진 여왕벌과 가지지 못한 일벌로 구분되며, 산지의 집 처마 밑이나 바위 벼랑에 집을 만들고, 집 모양은 종에 따라 다르지만 내부는 층층구조로 통풍이 잘 되는 특징을 가진다.
<말벌집>
이 곳에 분포하는 한탄강 현무암은 지금으로부터 약 50~15만 년 전에 용암이 한탄강을 따라 형성된 제4기에 해당한다. 휴전선 이북의 오리산(해발 452m)과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24㎞ 떨어진 680m 고지에서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이 한탄강을 따라 평강, 철원지역의 하천과 저지대를 모두 덮고, 연천군 전곡일대를 지나면서 비교적 규모가 작은 주상절리가 만들어졌으며 은미정질(隱微晶質) 또는 세립질 (細粒質)로 구성된다. 이들 용암이 쌓일 때까지 상당기간 부정합(不整合) 관계가 지속되었다.
<현무암 주상절리>
바로 옆에는 <백의리층>이 있다. 현무암 절벽 아래 아직 암석화 되지 않은 퇴적층을 백의리층이라 부르는데, 이는 연천군 청산면 백의리(白蟻里) 한탄강변에서 처음 발견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약 6,500만 년 전 화산폭발로 인해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생성된 지층이며 현무암 아래 눌려있으면서 아직 암석화 되지 않은 지층으로 자갈들이 많은 역암층(礫巖層)으로 구성되어 있어 한반도 지질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백의리층>
<한탄강 여울>
발길은 다시 데크 길을 따라 한탄강 하류로 향한다. 강변 양안으로는 한탄강 특유의 주상절리대가 단애(斷崖)를 이루고, 가운데로 흐르는 강물은 쪽빛이다. 옛날 신랑과 신부가 결혼할 때 썼다는 사모와 비녀를 닮은 사모바위와 비녀바위(신부바위)가 있다는 안내판이 보이는데, 실물은 잘 보이지 않고 그 옆으로 대신 물봉선이 붉게 피었다. 물봉선은 쌍떡잎식물 무환자(無患者)나무목 물봉선화과의 한해살이풀이다.
<한탄강 쪽빛 여울>
<물봉선>
또한 길 옆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석묘(支石墓) 같은 고인돌도 보인다. 고인돌은 말 그대로 ‘돌을 고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고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 무덤 속에는 주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토기나 석기, 청동기 등의 다양한 유물을 넣기도 하므로, 무덤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 된다. 더군다나 고인돌은 박물관의 전시실이 아닌 자연 현장에서 뚜렷하게 대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고조선 시대 유적이다.
<고인돌>
한탄강을 따라 연천 땅으로 들어오면 세월을 낚는 강태공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잡히는 어종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쏘가리를 낚는다고 한다. 쏘가리는 민물에 서식하는 농어과 어종으로 종류가 많지 않으며, 맛잉어라고도 한다. 한자로는 궐어(鱖魚), 금린어(錦鱗魚)라 하는데, <재물보(才物譜)>에는 살맛이 돼지고기처럼 좋다하여 수돈(水豚)이라고도 하였다. 양식은 힘든 반면 수요가 늘어, 무분별한 어획으로 최근에는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낚시>
쓸데없는 사족(蛇足)을 달며 도착한 곳은 <아우라지배개용암>이 있는 곳이다. 아우라지는 ‘두 갈래 이상의 물이 한데 모이는 물목’을 말하는데, 이곳은 영평천이 흘러들어 한탄강과 만나는 곳이다. 영평천(永平川)은 길이 약40km로 이동면(二東面)에 있는 자등현(自等峴)과 광덕현(廣德峴)에서 발원하여 연천군 청산면(靑山面) 궁평리(宮平里)에서 한탄강으로 흘러든다. 영평천에는 영평팔경의 대부분이 모여 있어 경승지로도 유명하다.
<영평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아우라지>
배개용암은 신생대 제4기 추가령 구조선(構造線) 또는 북한의 평강 오리산에서 분출한 현무암질(玄武巖質) 용암이 옛 한탄강 유로를 따라 흐르다가 영평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지점(아우라지)에서 급랭하여 형성된다. 침상용암(枕狀熔岩)이라고도 불리는 베개용암(Pillow Lava)은 물속에서 뿜어져 나온 용암이 물과 만나 냉각되는 과정에서 둥글둥글한 베개 모양으로 굳은 형태를 말한다.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2013년 2월)되었다.
<배개용암>
배개용암을 지나 궁신교 밑 우측으로 굽은 강을 따라 돌아서니 좌상바위가 나온다. <좌상바위>는 연천군 청산면 궁평리 좌측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실제로는 전곡읍 신답리에 위치한다. 좌상바위는 한탄강 주변에 약 60m 높이의 불뚝 솟아있는 바위로 중생대 백악기 말에 화산활동으로 분출한 용암이 굳으면서 형성된 현무암 바위산으로 재질은 제주도의 현무암과 다르게 응회암질 퇴적 현무암이다.
<좌상바위>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였고, 세로 방향으로 나 있는 띠 모양의 굵은 세로줄은 오랜 시간 땅 밖으로 드러나 있으면서 빗물과 바람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생긴 줄이다. 좌상바위 부근에서 고생대 미산층과 중생대 화강암, 응회암 그리고 신생대 제4기 현무암 등 여러 지질시대의 암석과 지질구조 등을 관찰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신생대 제4기>는 약 6,500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시대를 일컫는다.
<한탄강과 좌상바위>
바쁘게 좌상바위를 둘러보고 전곡읍 신답리와 청산면 궁평리를 잇는 궁신교를 건너 버스를 이용하여 창옥병으로 향한다. 창옥병(蒼玉屛)은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영평천변에 있는 벼랑으로 영평8경 중 제3경이다. 창옥병의 폭이 수마정이요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굴곡과 고저가 있고 암혈이 있는가 하면 갖가지 형태의 돌출한 바위들이다. 이 바위에 암각문이 무려 11점이나 새겨져 있어 보물찾기 하듯 찾아 나서는 재미도 쏠쏠하다.
<창옥병-네이버캡쳐>
창옥병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 1523∼1589)이 즐겨 찾던 경승지다. 15년간 영의정에 재직하던 그가 영평으로 거처를 옮긴 때는 1586년(선조 19) 8월로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탄핵을 받았다. 이때 선조는 여러 차례 만류하였지만 스스로 물러나 지금의 옥병동에 거주하면서 창옥병 주변의 경치가 빼어난 8개소에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지었다.
<박순 신도비>
대표적인 암각문(巖刻文)은 사암 박순(朴淳)의 ‘제이양정벽(第二養亭碧)’이라는 글 중 수경대(水鏡臺)라는 시를 1700년경에 김수증(金壽增)이라는 사람이 바위에 새긴 것이다. 그러나 세월의 풍파에 많이 닳았다.
골짜기 새소리 간간이 들리는데
(谷鳥時時聞一箇 곡조시시문일개)
쓸쓸한 침상에는 서책들만 나딩구네
(匡牀寂寂散群書 광상적적산군서)
안타깝도다 백학대 앞 흐르는 물이
(每憐白鶴臺前水 매린백학대전수)
산문을 겨우 나오면 흙탕물 될 것이니
(纔出山門便帶淤 재출산문변대어)
<박순 - 수경대>
또한 이곳에는 선조가 박순에게 내린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조에 맑은 물과 달 같은 정신(松筠節操 水月精神 송균절조 수월정신)’이라는 뜻의 윤음(綸音)이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가 쓴 글을 신이(辛夷)라는 사람이 바위에 새겨 있다. 어느 구멍 뚫린 바위 옆에는 와준(窪樽)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바위에 뚫린 웅덩이 술통’이라는 뜻이다.
<송균절조 수월정신 - 한석봉 글씨>
반석 위로 맑고 푸른 영평천이 흐르고 멀리 보이는 옥병교를 뒤로하고 서둘러 창옥병을 빠져나오면 옥병서원이 있다. 옥병서원(玉屛書院)은 1658년(효종 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순(朴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8년(숙종 24)에 이의건(李義健)과 김수항(金壽恒)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713년에 ‘옥병(玉屛)’이라고 사액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으나, 1926년에 김성대(金聲大)·이화보(李和甫)·윤봉양(尹鳳陽)을 추가 배향하였고, 1980년에 복원하였다.
<옥병서원>
https://blog.naver.com/waya555/222891814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