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희 시인의 시집 『고 씨의 평미레』(푸른사상 시선 211).
자신이 일구어내는 언어의 뜰 안에 사랑하는 존재들을 소환한 시인은 모두들 평화와 안식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작품들에 담았다. 융숭한 잔치를 치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시인의 언어들은 판소리의 장단처럼 흥겹고 춤사위처럼 우아하며 성대한 향연처럼 넉넉하다.
2025년 9월 10일 간행.
■ 시인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2007년 『시평』으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마당 깊은 꽃집』이 있다.
■ 시인의 말
담판한은 시판이라는 등짐을 지고
오늘도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전경인이 땀을 식힐 수 있는
한 뼘 솔개그늘이 되어줄
옥설(玉屑) 한 구절을 마련하려고
■ 작품 세계
이주희의 시집 『고 씨의 평미레』에서 접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는 풍요로움이다. 풍성한 음식과 서로 덕을 나누는 사람들, 자연의 조화와 우주의 생동, 그리고 언어가 풍요로움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서 시인의 시는 융숭한 잔치를 치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의 언어들은 판소리의 장단처럼 흥겹고 춤사위처럼 우아하며 성대한 향연처럼 넉넉하다. 그의 시는 감각의 다채로운 음악을 울리며 그것을 통해 거대한 울타리를 만들어간다. 그 울안에는 그의 가족과 이웃이 있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있으며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온갖 사물과 기억들이 존재한다.
이 모두를 보듬고 감싸 안으며 이들 사이를 종과 횡으로 가로지르는 시인은 그러한 일들을 기쁨인 동시에 노동으로서 행한다. 그것은 그의 시가 단순히 사물에 대한 관조 혹은 읊조림으로서가 아니라 행동이자 실천으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그는 그의 시적 세계 안에 들일 수 있는 사물들을 따뜻하게 품은 채 이들이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온 힘을 기울인다. 『벽암록』에 등장하는 인물 ‘담판한’에 투영시켜 자신의 시적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시인은 그의 시가 누군가의 “땀을 식힐 수 있는 한 뼘 솔개그늘”이 되고자 함을 밝히고 있다. (중략)
시인은 광부가 광산에서 금을 캐내듯이 언어를 발굴해 그것에 그의 소망을 함축시키고는 마치 의식을 거행하듯 그가 사랑하는 존재들을 소환한다. 시인은 그가 만드는 언어의 뜰 안에서 그가 품는 모든 존재들이 평화와 안식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시인의 열망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나아가 구복(救福)적이기도 하다. 이는 시인의 시 세계가 물질적인 동시에 정신적임을, 그의 존재를 향한 사랑이 매우 근원적임을 의미한다.
― 김윤정(문학평론가·강릉원주대 교수) 해설 중에서
■ 추천의 글
이주희 시인의 시집은 전 부치고 갈치 조리고 인삼 대추 등을 넣고 끓이는 삼계탕으로 고소한 냄새가 난다. 소를 빵빵하게 넣은 복만두가 수북하고, 엄마의 명약인 돼지고기콩나물밥이 두레상에 차려져 있다. 소문난 호두과자며 밥알 뜬 식혜, 짭조름한 간장, 토란국, 된장찌개, 보리밥…… 그 음식들을 만들고 나누는 착하고 인정 많은 식구들과 이웃들로 시집은 복작복작하다. 시계꽃을 피우는 아버지, 쌀값과 등록금 걱정에 꽃놀이 한번 못 가면서도 장독대에 정화수 사발 올려놓고 육 남매의 안녕을 비는 엄마가 보인다. 촌수 먼 친척들까지 불러모아 푸지게 치르는 큰올케, 작다리 목도장으로 어린 동생을 진학시키는 큰오빠도 있다. 엄마가 만든 오므라이스를 알밤 본 다람쥐처럼 달려와 먹는 아이들, 돈암동 417번지 이웃들, 신창동 옆방의 딸들, 청주 한 씨 여자, 평미레질하는 고 씨…… 그들의 응원을 받으며 시인이 “뙤약볕 아래 양 소매를 걷어 올린 채/오타를 뽑아”(「피사리」)낸 시집은 풍성하고 푸짐하다.
― 맹문재(시인·안양대 교수)
■ 시집 속으로
고 씨의 평미레
이주희
실개천이 끝나는 곳의 쌀집 주인은
고무줄 자[尺]라는 소문이 자자했어요
평미레를 끝까지 미는 말질에
어쩜 쌀 한 톨까지 깎아버리냐 항변하면
추수 마친 논바닥처럼 밀 뿐이라 대꾸했지요
그래도 손주를 데리고 사는 옴팡집 할머니나
거스러미 같은 아들과 사는 강진댁이
되쌀을 사러 오면
머슴밥처럼 담았고요
도래솔에서 소탱소탱 소쩍새 울던 날
흥부 자식처럼 누더기 차림인
산마루 기찻집 오누이에겐
따끈한 밥을 내주고 너끈하게 덤까지 주었지요
하루는 말쌀을 사러 온
파란 철대문집 아주머니가
다른 이들에겐 후하면서
내게만 야박하냐고 따졌다지요
고 씨의 대답
요즘 세상에 아이들이
배고픈 설움은 없어야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