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42,1-4.6-7; 사도 10,34-38; 루카 3,15-16.21-22
+ 찬미 예수님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어요? 지난주에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감기와 독감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요, 모두들 건강에 유의하시기를 빌고, 편찮으신 분들은 빨리 쾌유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까지 성탄 시기를 보내고 내일부터는 연중 시기가 시작됩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 주심을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공현은 세 가지 신비를 일컫는데요, 첫째는 동방박사들의 방문이고, 두 번째는 주님의 세례, 세 번째는 카나에서의 첫 번째 기적입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세례받으심으로 인해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신 신비를 기념하는데요, 복음 말씀을 유심히 보시면, 예수님만 세상에 드러나신 것이라 성부와 성령께서도 드러나셨습니다. 성부는 어떻게 드러나셨을까요?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로 드러나셨습니다. 성령은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심으로써 드러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만의 공현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죄인들과의 연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인들과 함께하는 이 강렬한 연대의 순간에 삼위일체의 공현이 일어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아버지의 마음에 들게 한 것은 바로 죄인들과 연대하여 서 계시려는 아드님의 의지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말씀 안에 구약성경의 세 가지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첫째,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라는 시편 2장(7절)의 말씀입니다. 둘째,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 때 하신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창세 22,2)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이사악을 제물로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주십니다. 셋째,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이사 42,1)
이 세 가지 말씀이 하나의 말씀으로 모아져,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 옵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주님의 소리 물 위에 머무네. 주님이 넓은 물 위에 계시네. 주님의 소리는 힘차고, 주님의 소리는 장엄도 하네.”
오늘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십자가 위의 마지막 고난과 죽음이라는 궁극적 세례로 당신께서 성취하고자 하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례는 당신이 겪으셔야 할 수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과 함께하신 완전한 연대로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시는 ‘공현’을 완성하실 것이고, 결국 하느님 아버지께서 오늘 하신 말씀을, 이방인인 로마 군인이 반복할 것입니다.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셨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혼돈의 물 속으로 내려가시어 우리의 죄를 영원히 물에 빠뜨리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으로 죽음의 물에서 끌어올려지시며 부활하실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분들 또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죽음에서 부활로 끌어올려질 것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두실 수 없으셨던 것처럼,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딸인 우리 역시 죽음 가운데 두지 않으십니다.
저는 재작년에 우리 본당에 부임한 후 첫 번째 사순 특강 시간에,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나누어 드린다면서 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40일 피정 중에, 하느님 아버지께 저를 정말로 사제로 부르셨다면, 저를 아들이라고 불러달라고 청했던 이야기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가겠다고 말씀드린 이후, 신자가 아니셨던 아버지와의 갈등 안에서 가족 전체가 보낸 8년간의 힘든 시기를 떠 올리며, ‘과연 하느님께서 나를 사제로 부르셨는데 이렇게 힘들어야만 했을까, 혹시 내가 부르심을 받지도 않았는데 내 욕심에 신학교를 가고 사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이 일어서였습니다.
‘저를 사제로 부르신 게 맞고, 앞으로도 제가 사제로 살기를 원하신다면 아들이라고 불러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드리고는 하루 종일 메마름의 상태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날 마지막 묵상 주제로 받은 성경 말씀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때 저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느꼈고, 그냥 ‘아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불러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 앞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말씀을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딸인 우리를 절망과 죽음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말씀이고,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영원하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 중에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뭘까요? ‘공정’이라는 단어인데요, 세 차례 나옵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라.”
이 ‘공정’은 히브리어 ‘미슈파트’라는 단어를 번역한 말인데요, 이 단어는 일차적으로, ‘모든 이가 같은 법의 적용을 받는 공평한 사회 질서’를 의미합니다. 공정하지 않은 사회는, 사람에 따라 적용되는 법이 다른 사회입니다. 또한 ‘미슈파트’는 올바른 재판을 통하여 정의를 수호하는 임금의 역할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창조 때 세우신 생명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는 것”이 야훼의 종의 사명이라고 말하며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라”고 예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사명에 참여하도록 초대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하느님 마음에 드는 하느님의 아들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명에 참여하면서 중요한 것은,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예수님의 사명에 참여하기 위해 애쓰고 기도하는 수많은 하느님의 아들딸들과 함께,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이 말씀과 관련한 2023년 사순 특강 영상을 인터넷, 우리 본당 다음 카페에 오늘 강론 원고와 함께 올려드릴테니 참조하셔도 좋겠습니다. 녹음 상태가 좋지 않은 점 미리 죄송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불어 넣어주신 숨을 의식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숨을 내쉬며 기도하겠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이 말씀을 마음으로 반복하며, 이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에 귀 기울여보시겠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https://youtu.be/k3CwDoolEUU?si=9bpKxp7PEcPPO3m4
* 2023년 노은동 성당 사순특강 1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
프라 안젤리코, 세례 받으시는 그리스도, 1438-1445년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