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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1장 닫힌 세상의 그림자
네가 잘 되어야 나도 잘된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가 배운 것 중 하나는 ‘네가 잘 되어야 나도 잘된다.’는 사실입니다. 나 홀로 백신을 맞고 마스크를 쓰고 소독을 해도 어디선가 방역의 둑이 터지면 내 일상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내가 만날 사람이 감염이 됐거나 가려던 카페나 식당이 문을 닫으면 원치 않은 독거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남의 사정은 아랑곳 않고 경쟁하듯 자기를 앞세우던 삶은 그렇게 파국을 맞았습니다.
교황님은 사회 회칙 「모든 형제들」의 제1장에서 ‘너와 내가 함께 잘 되는 삶’에 걸림돌이 되는 현대 세계의 경향을 짚어주십니다. 보편적인 형제애를 배반하고 너를 없애야 내가 잘된다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 닫힌 세상의 그림자를 살펴봅시다.
부서진 꿈들
「모든 형제들」 회칙은 먼저 구시대적 분쟁과 극우 민족주의가 되살아나는 한편 조절되지 않는 경제 권력이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문화를 획일화시키고 개인과 나라를 갈라놓는 ‘분할 통치’의 현실을 지적합니다. 민족이나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세대 간의 연대, 다양한 공동체를 통한 수평적인 연대가 시장의 전횡 앞에 꼬리를 내립니다. 누구도 뿌리 없는 사람은 없는데 오늘의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경시하고 세대를 넘어 전수된 영적 인간적 풍요로움을 거부’(13항)하게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수직적 연대가 허물어지는 가운데 ‘시장은 늘어나지만 개인은 소비자나 구경꾼’(12항)으로 전락하면서 고독에 내몰립니다.
모든 이를 위한 계획의 부족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과장과 극단화와 양극화의 정치 메커니즘이 동원되면서 모든 이의 발전과 공동선을 위한 장기 계획에 관한 건강한 토론으로서의 정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최근 선거에서 여실히 드러난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정치는 그저 이기려고 다투는 저열한 싸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길 수만 있다면 어떤 수단이나 과정이라도 상관없다는 듯 모략과 흑색선전을 퍼뜨리고 무책임한 말을 쏟아내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스스로는 지키지도 않을 명분을 내세우며 폭력적인 언사를 내뱉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요.
생태 문제나 사회적 불평등 문제처럼 함께 대처해야 할 문제들도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 간의 세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전쟁, 테러, 인종적 종교적 박해, 인권 침해 같은 문제들은 특정 이해관계에 적합한지에 따라 달리 판단됩니다. 한 권력자에게 편리할 때는 참이던 것이 그의 이득과 무관해 지면 더이상 참이 아닙니다.(25항) 이제 ‘내로남불’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만연한 현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눈앞의 이득에 급급하니 사람이든 자원이든 쓰고 버리는 일이 너무 쉽게 일어납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 태아 같이 ‘아직 쓸모없는’ 존재, 노인처럼 ‘더이상 쓸모없는 존재’를 버리고 갑니다. 이윤 때문에 사람의 일자리를 없앱니다. 결과적으로 ‘부는 증대되지만 평등은 없었고’,'새로운 형태의 빈곤이 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21항)
공동 항로 없는 세계화와 진보
현대 세계에서는 한 인류라는 소속감이 약화되고, 정의와 평화를 함께 건설하려는 꿈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상향으로 여겨집니다.(30항) 공동 항로 없이 내달리는 세상에서 과학과 기술 혁신의 성장은 평등과 사회적 포용을 뒤로 한 채 고립과 대립의 방법으로 악용됩니다.
예컨대 먹거리에서부터 연예인, 심지어 방역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에 ‘K’를 붙여가며 우월감을 즐기던 우리 사회에서 인류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보다 더 비싼 백신을 내놓으라며 아우성치던 성난 사람들은, 아스트라제네카가 이윤을 포기하고 기술을 공개하는 그 의도를 따라 하려는 마음은 품지 못했습니다. 화장실 물 내리는 작은 동작조차 귀찮아서 자동화하는 첨단 산업국가 대한민국 국민은 자신들이 엄청난 탄소를 배출하는 환경 재해의 주범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내가 편한 만큼 누군가는 고생해야 한다는 단순하고 확실한 진리 앞에 애써 눈을 감고 귀를 막는 것입니다.
감염병의 전 세계 확산과 역사상 또 다른 재앙들
한편 우리는 ‘가상 현실의 죄수가 되어 현실의 맛과 풍미를 잃었습니다.’(33항) 인간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열광적 소비주의와 이기적 자기 보호’(35항)에만 빠져 감염병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번 감염병 사태는 앞서 말씀드렸듯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단순하고도 강력한 교훈을 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교훈을 무시하면서 여전히 소비와 자기애의 쳇바퀴를 돌립니다. ‘각자도생’을 거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변질된 문화는 구체적인 현실과의 접촉을 잃고 그 자리를 가상 현실로 갈음한 우리가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소비적이고 안락한 고립에 안주하면서 대면 접촉에서는 있을 수 없는 공격성을 서로에게 표출하는 오늘의 병리적 현상, 신앙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도를 지나친 비방과 폭언이 난무하며 모든 도덕 기준과 타인의 명예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는’(40항) 현실에 신앙인들 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이렇게 소개 하십니다. ‘뿌리가 없다는 느낌, 아무 데도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보다 더 나쁜 소외의 형태는 없습니다.’, ‘땅이 비옥해지고 민족이 결실을 맺으며 미래를 창출하려면, 구성원들 사이에 소속감을 증진하고, 세대 간 통합의 유대, 그리고 다양한 공동체 간 통합의 유대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서로 멀어지게 하고 무감각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53항)
희망
이렇게 무시할 수 없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짐에도, 교황님은 어두운 경고가 아니라 희망의 메시지를 보여주려고 하십니다. 감염병 사태 속에서도 세상을 지탱해 온 평범한 사람들, 그 누구도 혼자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계속해서 인류에게 좋은 씨를 뿌려 주셨지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내린 열망, 삶을 더욱 아름답고 품위 있게 해 주는 위대한 이상을 추구하는 열망이 인간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좁은 시야와 눈앞의 안전이나 이익에만 매달리는 협량한 태도를 넘어서 참되고 옳고 아름다운 것을 갈구하는 인간의 이 근본적인 열망을 교황님은 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순 시기를 지나 부활 축제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것을 바라고 뭇사람에게 어떤 희망을 보여줄 수 있을지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2장 길위의 그림자
희망의 싹
현대 복지 국가의 기틀은 영국에서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를 담은 베버리지 보고서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영국이 복지 국가로 나아가는 청사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사회 보장의 지도 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보고서가 국민적 지지를 받아 국가 정책의 근간이 된 데에는 영국 국민의 공동 경험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세계 대전 이전의 영국은 최강의 자리를 다투는 부국이었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깊듯 빈부의 격차도 엄청났고, 그만큼 사회적 갈등도 심각했지요. 그런데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공평하게 먹거리를 나누는 배급제를 실시하면서, 영국 사람들은 서로 나누면 아무도 굶주리지 않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뼛속 깊이 체험합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을 제도로 운영해 보고 체험하면서, 미래 사회에 대한 희망을 함께 키워 가는 일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적이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보려는 노력은 뛰어난 행정가의 신묘한 비책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게 하는 희망의 싹, 공동의 비전 없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대개 이런 공동의 비전은 고난과 시련의 시기를 서로 도우며 극복하는 가운데 만들어지지요.
그런데 우리 한국 사회가 기억하는 시련의 경험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함께 어려움을 견디면서 함께 위기를 벗어나는 경험보다, 정말 위험한 순간에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좌절의 경험이 더 크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IMF 경제위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각자도생’이 공공연하게 입에 오르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내 몫 찾겠다고 악다구니 쓰는 사람은 많아도, 먼저 양보하고 함께 살길을 찾아보자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보면 더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가운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공동의 비전을 가질 수 있도록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모든 인간의 창조주 하느님, 모두가 형제로 창조된 인간
우리가 함께 읽고 있는 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은 희망의 싹이 사람을 가리지 않는 형제애에 있다고 알려줍니다. 교황님은 내 편, 내 사람만을 챙기지 않는 보편적인 형제적 사랑의 본보기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를 묵상 해 보자고 초대하십니다.(『모든 형제들』,56·86항)
어떤 형태의 편가르기도 뛰어넘는 사랑은 구약 성경의 창세기부터 신약 성경까지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고 물으실 때 욥이 “어머니 배에서 나를 만드신 분이 그도 만드시고 바로 그분께서 우리를 모태에서 지어 내지 않으셨던가?”(욥기 31,15)라고 고백할 때 모든 이가 같은 창조주에게서 나와서 서로 보살피는 형제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마태 5,45) 하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고 예수님께서 명하셨고, 초대 교회 공동체는 그분의 명을 따라 폐쇄적이고 고립된 집단을 이루려는 유혹과 싸웠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은 한계를 모르고, 우리 신앙인은 그 사랑을 닮도록 불리었다는 점을 상기시킨 다음에, 우리가 근본적인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많은 고통과 상처 앞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되든지, 아니면 길가에 쓰러진 사람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편, 심지어 강도의 편이 되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약함을 자기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배척의 사회가 건설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와서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고 회복시켜 공동선을 이루게 합니다.”(『모든 형제들』, 67항)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된다는 것은 “사랑 안에서만 달성되는 충만함”을 선택한다는 것이고, 누구도 ‘삶의 길가’에 머물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인간 존엄성의 의미입니다.(68항)
되풀이되는 이야기
교황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오늘날에도 되풀이되는 이야기라고 지적하십니다. 비유 속의 강도는 오늘날 “권력, 축재, 분열의 삿된 이익에 동원되는 폭력과 무관심의 짙은 그림자”(72항)로 나타납니다. 비유 속에서 다친 사람을 보고도 멈추어 서지 않고 지나쳐 가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해서 다른 이들을 도외시하고 그들의 역경에 무관심한 현대인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지나쳐 간 사람’으로 지목한 이들은 사제와 레위인 같은 종교인이었지요. 하느님을 믿고 경배한 다는 사실이 하느님 마음에 드시는 삶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참으로 열려 있음을 드러내는 보증은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인의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공경하고자 합니까? 그분께서 헐벗으셨을 때에 모른 척하지 마십시오. 바깥에서는 그분께서 추위와 헐벗음으로 고통받으시도록 내버려 두면서 성전 안에서는 그분을 비단옷으로 공경하지 마십시오.”(74항)
고통받는 사람들,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 그 고통 앞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인간 사회에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어도 타인의 고통, 약자의 고통에 무관심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고통의 악순환을 이루는 한 부분이 되고 맙니다.
새롭게 시작하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되풀이되는 이야기라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기회도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기회, 새로운 가능성을 얻습니다. … 우리에게는 새로운 과정과 변화를 계획하고 실현하는 공동 책임이 필요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상처 입은 사회를 되살리고 지원하는 데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형제자매라는 것을 표현하고, 증오와 분노를 조장하는 대신 다른 이들의 역경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습니다.”(77항)
최근 사회교리를 실천하는 것과 특정 정당이나 정파를 옹호하는 것을 혼동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다친 사람은 뒷전으로 물린 채 증오와 분노를 조장하고 편을 가름으로써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적 이해를 편드는 것은 사회교리와 거리가 멉니다. 사회교리는 다른 이들의 역경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데 필요한 첫 번째 척도는 타인의 굶주림과 아픔을 함께하려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어느 집단에, 어느 정치인에게 유리한 일인가를 따지는 것과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일인 것입니다.
[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3장, 열린 세상을 상상하고 이룩하기
열린 세상, 닫힌 세상
우리나라에서 세계화라는 말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지 서른 해쯤 됩니다. 그간 우리 사회의 변화는 괄목상대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외국 문물이라고 해 봐야 AFKN 방송이나 미군 부대 물건들, 일본에서 보따리장수들이 들여온 것이 고작이었는데, 지금은 미국산 콘플레이크로 아침 요기를 하고, 점심에는 프랑스산 밀가루로 만든 디저트를 즐기며 저녁에 호주산 고기로 식사를 하는 범세계적 밥상을 보게 되었지요. 휴가에 고향집을 찾아 일손을 돕던 풍경은 옛이야기이고, 전 세계 좋다는 곳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국 관광객을 드물지 않게 봅니다. 이런 면만 보면 세상이 점점 더 열리고 있는 듯한데 실상 그 저변에는 ‘그들만의 리그’, ‘패거리’를 꾸리면서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벽들이 점점 높아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 예를 볼까요.
첫째,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 각지의 도시에서 일어난 큰 변화 중의 하나입니다. 게이티드 커뮤니티는 ‘공공 공간이 사유화되어 출입이 제한된 주거단지’를 말하는데, 단지 입구에 게이트와 이를 통제하는 게이트 컨트롤 시스템, 그리고 단지 주변을 두르는 담장에 의해 폐쇄적인 공간을 이룹니다. 이 커뮤니티 내부에는 주거 건물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편의시설이 함께 배치되어서 비슷한 사회계급/계층의 사람들끼리 살 수 있게 하지요. 미국에서 현대적인 게이티드 커뮤니티가 최초로 등장한 이후 중남미같이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큰 곳, 또 인도나 호주처럼 다른 문화와 인종, 계급에 대해 경계심이 있는 곳까지 날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도시에도 각 아파트 단지마다 벽을 치고 외부인의 접근을 막으며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는 모습을 쉽게 봅니다. 골목길에서 이른바 ‘있는 집’ 아이들, ‘없는 집’ 아이들 가릴 것 없이 함께 노는 것은 옛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유달리 학군 따지는 세태는 학교마저도 어울림의 공간이 아니라 끼리 끼리만 모이는 자리가 되었음을 방증합니다.
둘째,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책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개념입니다. 먼저 사다리를 걸친 이가 위층으로 올라간 다음에는 그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 그러니까 어떤 분야에서 성과를 낸 사람이 뒤따라 올 경쟁자를 방해하고 견제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 국가 차원에서도 이런 일은 쉽게 볼 수 있지요. 한편 지대 추구(rent-seeking) 행위는 기존의 부에서 자신의 몫을 늘리는 방법을 찾으면서도 새로운 부를 창출하지 않는 활동(위키백과)을 말하는데, 쉽게 말하면 여러 가지 장벽을 만들어서 자기 몫을 늘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지대 추구 행위가 사다리 걷어차기와 결합하면 부의 원활한 순환을 가로막고 먼저 자리를 잡은 사람들만 ‘노나는’ 상황이 발생해서 사회적 낭비를 초래합니다.
이런 현상의 핵심은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태도입니다. 세대 간 갈등이나 주택 문제 같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곳곳에 널린 재개발 현장들을 보십시오. 공사장마다 극단적인 말로 뒤범벅된 현수막을 걸고 돈이라도 받아 내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공사로 인한 불편을 어떻게 이해하고 양보하며 합리적으로 해결할지 고심하지 않고, 남들 다 뜯어가는 돈을 나만 안 받으면 손해라는 피해의식, 나중에 그렇게 올라간 비용 때문에 젊은 세대와 가난한 이들의 주거 확보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몰염치함이 전면에 드러납니다. 이렇게 지금 당장 내 것만 챙기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세상을 갈라놓고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닫힌 공간으로 몰아갑니다.
참다운 관계와 충실한 유대 위에 세워진 삶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회 회칙「모든 형제들」의 제3장에서 인간이 왜 홀로 살 수 없는지, 왜 타인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지 먼저 설명하십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을 통해서 왜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지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는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지 않으면 살아가고 발전하며 충만에 이를 수 없도록 만들어졌습니다.”(87항)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거인의 정원』(원제:The Selfish Giant)에 나오는 ‘저만 알던 거인’처럼 많은 사람이 담벼락 속에 갇힌 삶 속에 만족을 누리려고 합니다만, 그 끝은 분명합니다. 옆도 돌아보지 않고 내 자식 출세하게 하는데 모든 것을 쏟아부은 다음, 노년에 이르러 전화 한 통 없는 자녀를 하릴없이 기다리는 분들을 더러 봅니다. 능력도 많고 재산도 많지만 타인을 위해서는 조금도 내어놓지 못하는 영적 초라함도 자주 봅니다. 사람은 주고받으며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 안에서 존재의 성장을 찾는 일종의 ‘탈아(脫我, ekstasis)’의 법칙이 있습니다.”(88항)
그런 면에서 교황님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하는 정체성을 고수하는 사회 집단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성장하는 오늘날 세상(109항)을 진단하면서 개인주의를 우려하고 패거리에 안주하는 경향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개인주의는 우리를 더욱 자유롭게 더욱 평등하게 더욱 형제답게 만들지 않습니다. 단지 개인들의 이익이 모인다 해서 온 인류 가족을 위한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없습니다.”(105항) 강자든 약자든 나름의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은 나를 위협하고 내 패거리의 이득을 갈취하는 적이 아닙니다. 이른바 능력주의(Meritocracy)를 신봉하는 입장에서는 “뒤처진 이들이나 힘없는 이들, 능력이 모자란 이들을 돕고자 투자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보일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209항) 그리하여 “사회가 시장의 자유와 효율성을 우선 기준으로 삼아 운영된다면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없으며 형제애는 그저 또 다른 막연한 이상으로만 남을 것입니다.”(「모든 형제들」, 109항) 교회는 이런 경향에 맞서서 열린 세상을 지향합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마태 23,8)라고 일깨워 주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돌보는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소명의 씨앗을 받은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당신의 심장은 누구를 위해서 뛰고 있습니까?
소설『빙점』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 여사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맥박이 전혀 안 움직이는 것이다. 죽으면 숨도 멈추고 심장의 맥박도 멈춘다. 그러나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인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그러므로 일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폐결핵과 척추골양, 직장암에 파킨슨병까지 중병에 시달리면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뭇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향년 77세로 귀천한 아야코 여사는 다른 사람을 위해 뛰지 않는 심장은 죽은 심장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내 심장은 누구를 위해 뛰고 있는가?” - 누구나 스스로에게 한 번쯤은 물어봐야 할 질문이 아닐까요?
[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4장, 온 세상을 향하여 열린 마음 (1)
영역 지키기
유럽의 한 동물원에 천산갑이라는 동물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이야기입니다. 난생 처음 보는 동물을 수입해 왔으니 극진히 보살핀 것은 당연했지요. 먹이와 물을 충분히 주고 우리도 청결하게 관리했습니다. 그런데 천산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체로 발견되고 맙니다. 부검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심한 탈수로 죽었다는 겁니다. 물을 안 준 것도 아닌데 왜 탈수 현상을 일으켰을까요? 답은 천산갑의 영역 표시 본능이 대단히 강한 것에 있었습니다. 천산갑은 오줌으로 자기 영역을 표시하는데, 동물원 측에서는 귀한 동물이 오줌을 눌 때마다 바로바로 청소를 해 버렸던 거죠. 온몸의 수분을 짜내서 필사적으로 자기 영역을 표시하려던 천산갑은 결국 탈수로 죽었습니다.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본능이 얼마나 강한지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사례입니다.
인간도 생물인지라 영역을 지키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비어 있는 다른 자리를 두고 하필이면 내 옆에 낯선 사람이 앉을 때 느끼는 불편함을 떠올려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영역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것도 자기 영역을 침범당하지 않으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영역에 대한 애착이 지나쳐서 집착이 되면,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내 영역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내 것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굳은 마음은 우리 삶의 중요한 한 면을 가려 버리고, 남을 막으려고 세운 장벽에 도리어 자기를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회칙 「모든 형제들」 4장에서 말씀하시는 난민 문제, 더 넓게는 이주민 문제가 그런 예입니다.
난민 문제에 대한 대응
통계청이 제공하는 통계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 난민은 2,635만 명에 이릅니다. 원래 난민 문제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제1,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유럽을 중심으로 벌어진 현상이어서 우리나라와는 크게 관계가 없었습니다. 물론 한반도 역시 단일 민족 국가라는 통념과 달리 다양한 민족이 섞이고 흥망성쇠를 겪었던 공간입니다만, 최근까지 대다수 사람들은 단일 민족, 단일 문화라는 정체성을 받아 들이고 있었지요. 외국인을 볼 일도 그만큼 적었습니다.그런데 세계화와 기후 변화 때문에 살 길을 찾아 고국을 떠나 새 거주지를 찾는 발길이 대폭 늘어나면서 난민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고, 또 한국이 문제 해결에 기여할 능력과 위상을 가지면서 난민 문제를 더이상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존에 난민을 받아들이던 국가들이 빗장을 잠그고 있는 추세라서 대신 우리나라를 향하는 이들도 늘어납니다. 미국은 감염병 사태 속에 연방 공중 보건법(Title 42)을 통해 난민을 막고 있고, 유럽도 역내 국가 간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던 솅겐 조약을 수정하고 아프리카 인접국에 지원금을 주면서 난민 유입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의 경제적 위상에 맞게 이 문제에 대해서 일정한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는 압력도 높아집니다.
우리나라의 난민 대응
지금껏 우리나라는 난민 수용을 몹시 억제해 왔습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매년 1조원 가량을 공여하는 나라로 돌아섰고,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난민을 받아들이는 데는 대단히 인색합니다.
우리나라 난민법 2조 1항은 ‘난민을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보호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외국인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하기 전에 거주한 국가(이하 “상주국”이라 한다.)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무국적자인 외국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난민법이 근본적으로 난민을 내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려는 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법의 보호를 받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출입국 외국인 정책본부 통계에 따르면 1994년부터 2021년 11월까지 누적 난민 인정 신청 건수는 73,185건이며, 누적 난민 인정 건수 1,141건, 인도적 체류자 인정 건수 2,409건으로 전체 난민 인정 비율 평균은 2.8%에 불과합니다. 2021년 경우에는 난민 인정 비율이 0.7%로 더 떨어지지요. 유럽이 난민 수용을 꺼리면서도 41%에 육박하는 1차 난민 인정 비율을 보이는 것에 비하면 매우 박한 처사입니다. 지난 2018년 예멘 난민 사건을 계기로 난민 수용 반대 여론이 높아졌고, 대구 북구의 이슬람 사원 신축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도 걱정스럽습니다.
이렇게 자기 영역을 지키겠다는 태도를 단순히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붙이거나 인권의식이 빈약하다고 폄훼할 일은 아닙니다. 인간의 본능에 대한 문제면서 대단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빛 안에서 진지하게 성찰해보고 사려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할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삶의 무상성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선 난민이나 이주민들에 대해서 공리주의적인 태도로만 판단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고 지적하십니다. 외부인들이 우리 지역에 들어오게 될 때 어떤 득과 실이 있는지만 따지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것 입니다. 그보다는 삶의 무상성에 대해서 깊이 성찰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무상성은 개인적 이득이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다만 그 자체로 좋은 것이기에 어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무상성은 우리에게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방인을 환대 하도록 합니다.”(「모든 형제들」, 139항)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감수 해 가면서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 노력에 대해서 정당한 댓가를 받게 될 때 공청하다 혹은 정의롭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공정함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이면서 함께 추구 해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인간적인 공정함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또 다른 측면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을 하느님께 거저 받았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소유를 늘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성취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생명 자체를 발생 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어린 생명이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또 사회 속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그리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과정에서도 우리 모두에게는 결코 셈할 수 없고 대가를 정확하게 치를 수 없는 은총이 개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십니다.”(마태 5,45) 내 생명, 내 삶이 근본적으로 하느님께서 거저 베풀어 주신 선물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모든 관계를 상거래 하듯 따지고 드는 좁은 시야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적 본능을 넘어 보편적인 형제애로 고양될 수 있는 것도 이 무상성을 깊이 깨닫고 행동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한번을 안 지려는’ 타산적인 태도가 횡행하고, 양보와 희생을 경원시하는 삭막한 곳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거저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과 내가 셈을 치를 수도 없는 수많은 호의와 도움은 생각지도 않고 매사에 득실을 따지는 까탈스러움이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삶의 무상성은 그런 점에서 우리가 먼저 짚어봐야 할 신비입니다. 이 신비를 토대로 다음 호에서는 난민과 이주민 문제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월간빛, 2022년 8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4장, 온 세상을 향하여 열린 마음 (2)
다른 나라에는 왜 어른이 없을까?
말 습관이 잘못 든 것 같습니다. 한 두 사람 이야기가 아닙니다. 점잖은 분, 다른 문화에 익숙한 분들도 그렇게 합니다. 외국인을 지칭할 때 미국 ‘애’들은 어떻고, 유럽 ‘애’들은 어떻고, 일본 ‘애’들은 어떻다고 합니다. 외국인이 죄다 미성년자는 아닐 텐데 무턱대고 애들입니다. 외국인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모조리 ‘놈’으로 부르는 분들도 많습니다. 미국놈, 중국놈, 양놈, 여기에 더한 멸칭을 붙이는 경우도 왕왕 있지요. 한국 사람이면 적어도 ‘씨’나 ‘님’ 같은 호칭을 붙여서 부를 텐데 나이도 사회적 지위도 무시하고 외국인이라면 그냥 이름만 부릅니다. 물론 대다수는 말을 그렇게 할 뿐이지,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우리 사회가 그다지 세련되지 못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 것은 소중한데…
몇 년 전부터 ‘국뽕’이라는 인터넷 신조어가 심심찮게 입에 오르내립니다. 자아도취적인 ‘우리’ 찬양을 일컫는 말입니다. 세계가 한국을 우러러 본다며 집단적 자부심을 한껏 차오르게 하는 ‘국뽕’ 유튜버들은 대체로 비슷한 어휘를 남발합니다. 밥상 위에 반찬 개수부터 시작해서 온갖 신뢰 하기 힘든 자료까지 내세우며 충격, 공포, 화들짝, 경악, 난리, 믿을 수 없다 같은 수식어들을 붙입니다. 한국이 무엇을 생산하면 전 세계가 충격과 공표 속에 벌벌 떨거나 화들짝 놀라거나 경악하며 난리가 난답니다. 일본이 당황하고 중국이 피눈물을 흘린다는 언급은 양념처럼 빠지지 않습니다.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민족이고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 강변하는 이런 현상은 타국이나 타민족에 대한 차별과 혐오심리와 결합될 때 독일의 나치즘 같은 전체 주의, 국수주의로 흐를 위험이 다분합니다.
보편적 지평
“자기 민족과 문화에 대한 건강한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지역적’ 나르시시즘”을 경고하면서 “그 이면에는 다른 이들에 대한 어떤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자기 보호를 위한 방어벽 쌓기를 선호하는 폐쇄적인 정신이 숨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보편적인 것에 진정으로 열려져 있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다른 문화의 풍요로움에 열려 있지 않으면, 다른 민족이 겪는 비극에 대한 연대 의식이 없으면, 건강한 방식으로 ‘지역적’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지역적 나르시시즘’은 제한된 사고와 관습과 안전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그 안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모든 형제들」, 146항)
겁먹은 개가 크게 짖고 빈 깡통이 요란하듯 건강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데 실패하고 자존감이 떨어진 사람들일수록 허세를 부리거나 이유 없는 우월감이나 열패감에 휩싸이기 마련이지요. 유달리 사치품을 통해서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구가 강하게 표출되는 우리나라지만 공정무역 같은 큰 흐름에서는 비껴나 있습니다. 공정무역은 ‘대화와 투명성, 존중에 기초해 국제무역에서 좀 더 공평한 관계를 추구하는 거래 기반의 파트너십’이라고 정의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의 가격이 4~5천 원쯤 하면 그 커피를 생산한 노동자들의 임금은 3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윤 추구 외에 어떠한 윤리적 고려도 하지 않는 가격 결정 과정 때문인데, 공정무역은 여기에 개입해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하고 유통과정을 투명화해서 신뢰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세계적인 운동을 말합니다. 세계무역기구에 따르면 한국은 무역 규모면에서 세계 8위에 해당하는 무역대국이지만 공정무역 시장은 전체 경제 규모에 비해 너무도 작은 수준입니다.
또 다른 예를 볼까요. 과도한 소비주의와 폐쇄주의에 갇힌 시선은 우리 사회가 다른 사회, 다른 문화와 맺는 관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생산한 물건들이 세계 시장을 석권한다는 뉴스는 우리나라가 2019년 기준 세계 8위의 이산화탄소 배출국이며 탄소 다배출 제조업 국가(맥킨지글로벌연구소)라는 사실을 가려 버립니다.
오직 재물에만 혈안이 되고 재물을 얻는 과정이나 분배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주위의 빈축을 사듯 돈푼깨나 있다고 없는 사람을 우습게 보는 국가나 민족이 과연 바람직한 모습인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인간관계에 실패한 사람이 돈이라도 있어야 대접받을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것처럼, 민족과 국가 관계에 있어서도 상호협력과 우애 대신에 돈으로 판단하고 돈에 의지하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 널리 번져 있습니다.
인종 편견과 인종 차별행위
돈 때문에 사람 보기를 우습게 아는 현상, 달리 말해 돈에 눈이 먼 세태는 한국 사회가 외국인들을 맞아들이는데 있어 강한 영향을 미칩니다. 어느 사회든지 ‘팔이 안으로 굽는’ 현상이 없을 수는 없지만 한국은 교육 수준이나 소득 수준을 고려했을 때 특이하게도 인종 편견이 매우 심한 국가입니다.(2013년 워싱턴포스트 세계 가치관 조사 참조)
2019년 대구교육대학교 배상식 교수의 논문은 생물학적-유전학적 요인에 따른 인종 편견, 사회적-역사적 요인에 따른 인종 편견, 종교적-문화적 요인에 따른 인종 편견과 함께 이른바 ‘GNP 인종주의’를 언급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보다 소득이 낮은 국가출신의 사람들에 대해 인종적으로 무시하거나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황인종, 비슷한 유전적 특성을 가지는 동남아, 몽골, 중국 출신에 대해서 인종 차별적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소득이 낮기 때문입니다. 또 백인이지만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처럼 국민 소득이 우리보다 낮은 국가출신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심지어 같은 민족인 조선족이나 고려인 후손, 북한 이탈주민에 대해서 심한 편견과 차별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매사를 돈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심성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웃 사랑의 가치
“세계를 향한 타당하고 참된 개방은 여러 나라로 이루어진 한 가족 안에서 자신의 이웃을 향하여 열려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이웃 민족들과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통합에 자기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가치를 촉진하는 교육 과정이 수반되어야 합니다.(「모든 형제들」, 151항)
우리가 외국인, 난민과 이주민에 대해 돈으로 평가하고 차별하는 것은 평소 한국 사회 안에서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고스란히 묻어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형제들」 151항이 말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으로 대하는 준비가 되지 않으면 참된 개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현재 살고 있는 외국인의 숫자가 250만을 헤아립니다. 대구 인구에 필적하는 이 이웃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사랑으로 만나는 이웃, 그들은 우리를 차별과 고립의 울타리로부터 풀어주는 고마운 이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