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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4) 사학(邪學)이 아니고 정학(正學)입니다
“경전의 가르침이 서학과 한 치 어긋남이 없는데 어찌 사학인가”
- 조아생 부베의 「천학본의」 중 “하느님은 임금이요 아비며 스승으로 명령의 권세가 있다”는 교리를 고대 유교 경전의 말로 이어서 설명한 내용이다. 각 구절 끝에 출전을 적었다. 밑줄 친 부분이 홍교만이 공초에서 대답한 인용과 일치한다.
유가 경전으로 사학을 설명하다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801년 2월 의금부로 잡혀갔을 때 나이가 64세였다. 「추안급국안」에 2월 14일과 2월 15일, 「추국일기(推鞫日記)」에 2월 20일의 공초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 속에 홍교만이 심문관과 서학이 사학(邪學)이냐 정학(正學)이냐를 두고 벌인 논쟁이 나온다.
2월 14일에 심문관이 “네가 이미 이 책을 보아 이 학문이 바른지 삿된지를 변별할 수 있을 테니, 네 견해에 따라 사실대로 대답하라”고 하자, 홍교만이 대답했다. “그 학문을 삿되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학문은 대저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데, 어찌 삿되다 말할 수 있습니까?” 경천외천(敬天畏天)은 유학에서도 중시하는 가르침으로, 유학이 정학이면 서학도 정학임에 분명하다고 맞받아친 것이다. 경천외천의 말은 「시경」에서 ‘경천지노(敬天之怒)’와 ‘외천지위(畏天之威)’를 말한 것에서 가져왔다.
이튿날인 2월 15일에 그가 다시 끌려 나오자, 심문관은 첫마디부터 전날의 발언을 문제 삼았다. 홍교만이 또 대답했다. “천지는 대부모(大父母)이니 큰 부모로 섬기지 않는다면 이는 부모를 부모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선 공초에서 이른바 사학이라 할 수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부모를 부모로 섬기는 것이 어째서 사학인가? 말이 짧았지만 힘이 있었다. 그는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었다.
심문관이 다시 다그쳤다. 그가 한 번 더 소리 높여 말했다.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오고, 또 천명(天命)을 일러 성(性)이라 하며, 또 유황상제(惟皇上帝)께서 하민(下民)에게 참마음을 내려주시는 것이 똑같이 경천(敬天)의 뜻에서 나왔습니다. 어찌 사학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道之大原, 出於天. 又天命之謂性, 又惟皇上帝, 降衷于下民, 同出敬天之意, 豈可謂之邪學乎)”
홍교만의 이 대답은 경전의 말을 짜깁기한 것이었다. 천지가 대부모란 말은 「주역」의 풀이에서 “건곤대부모(乾坤大父母)”라 하고, 「시경」 「교언(巧言)」에서 “아득한 하늘을 부모라 한다(悠悠昊天, 曰父母且)”라 한데서 끌어왔다. ‘도지대원(道之大原), 출어천(出於天)’과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은 「중용」 구절의 인용이며, “유황상제(惟皇上帝), 강충우하민(降衷于下民)”은 「서경(書經)」의 한 대목 그대로였다. 이렇듯 경전의 가르침이 서학의 그것과 한 치 어긋남이 없다. 그런데 어찌 사학이라 하느냐는 것이 대답의 요지였다. 그는 이 대답으로 64세의 고령임에도 이날 곤장 20대를 맞았다.
삼경(三經)에 나오는 예수 강생의 이치
닷새 뒤인 2월 20일에 겨우 몸을 추스른 그가 다시 끌려 나왔다. 심문관의 첫 마디는 “네가 기꺼이 사학을 하면서 감히 경전을 가지고 그 주장을 꾸며 끝내 사학이 사학됨을 깨닫지 못하였다”였다. 앞서 경전의 말로 사학의 가르침을 옹호하려 든 괘씸죄를 묻겠다는 뜻이었다.
홍교만이 다시 대답했다. “저는 일찍이 이 학문의 종지(宗旨)가 대월(對越)을 존경하는 뜻과 같은데, 지금 세상에서 이것을 사학으로 여기는 것은 존경의 도리에 어긋날까 염려합니다. 그래서 사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나오는 존경대월(尊敬對越), 즉 대월을 존경한다는 말은 「시경」 「청묘(淸廟)」에서 “하늘에 계신 분을 우러러, 신속히 달려와 사당에서 신주를 받든다(對越在天, 駿奔走在廟)”는 말에서 나왔다. 대월은 본래 마주하여 높인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그 뒤에 나오는 ‘재천(在天)’ 즉 하늘에 계신 신령의 의미로 썼다. 그러니까 서학의 종지는 하늘을 존경하자는 것이거늘, 이것을 사학이라고 한다면 이야말로 존경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 것이다.
자꾸 경전을 들이밀자, 짜증이 난 심문관이 화제를 돌렸다. “이 학문을 삿되다 하는 것은 그것이 예수가 강생했다는 주장에 가탁하여, 혹세무민으로 사람들을 이적금수의 죄과에 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네가 감히 존경이란 두 글자를 쉬 꺼낸단 말이냐?” 존경대월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강생의 이단을 숭배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라는 힐난이었다.
홍교만의 대답은 단호했다. “저는 예수의 학문을 정학(正學)으로 여깁니다. 이제 만약 예수를 삿되다고 한다면 저는 감히 공초를 바치지 않겠습니다.” 예수를 삿되다고 할 경우,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어진 신문관이 다시 물었다. “예수가 강생했다는 주장을 네가 어떻게 분명히 알아 이처럼 독실히 믿느냐?” “예수가 강생했다는 주장은 예로부터 중국의 성현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나, 제가 이 책을 익히 보았던지라 그 주장을 독실히 믿습니다. 그 지극한 이치의 소재를 말한다면 「시경」과 「서경」, 「주역」의 주장이 모두 이것과 합치되니, 어찌 사학이라 하리이까?” 예수 강생의 주장마저 「시경」과 「서경」, 「주역」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한발 더 나아갔다. 심문관은 성현의 말과 서양 오랑캐의 말은 합치될 수가 없으니, 양단간에 분명하게 한쪽을 택하라고 다그쳤다.
홍교만이 다시 대답했다. “제가 이 학문에 대해 수십 년 동안 공부를 쌓아 시간을 보낸 뒤에 비로소 얻었습니다. 이제 어찌 한마디 말로 억지로 뉘우쳐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미 강생하신 예수를 아는지라 이제 갑작스레 뉘우쳐 예수를 삿되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마태오 리치의 적응주의를 넘어서는 색은주의(索隱主義)적 해석 시각
국청에서 벌어진 이같은 문답은 다른 죄수의 공초와는 그 성격이 확실히 달랐다. 그는 유학을 버리고 서학을 믿겠다거나 그 반대로도 말하지 않았다. 유학에 이미 서학의 정신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서학을 믿는 것은 유학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다는 논리로 나왔다.
이는 달레가 「조선천주교회사」에서 강완숙의 공초 장면을 묘사하면서, “옥중 관리들 앞에서까지도 천주교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끊임없이 주장하여, 공자와 그 밖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들의 글에서 증거를 끌어내어 자기 말을 뒷받침하였다”고 한 것을 연상시킨다.
홍교만과 강완숙이 심문관의 추궁에 한결같이 유가 경전에서 근거를 끌어대어 서학 옹호의 논지를 펼친 것은 당시 교회 지도부에서 서학의 논리를 유가 경전의 가르침에 접속시키기 위한 학습 활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해 왔다는 뜻이다.
실제로 중국 교회에서도 이같은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프랑스 국가도서관에 소장된 서학책을 모은 「명청천주교문헌」(대만 利氏學社, 2009) 제26책에 수록된 「천학본의(天學本義)」와 「고금경천감(古今敬天鑑)」, 「천학총론(天學總論)」, 「경전중설(經傳衆說)」 같은 책들은 모두 유가 경전과 중국 고전에서 천주교의 교리를 뒷받침할만한 구절들을 발췌하여, 경전 구절의 인용만으로 편집해 천주교 교리의 설명을 시도한 책자들이다.
특별히 「천학본의」와 「고금경천감」은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조아셍 부베(Joachim Bouvet, 중국명 白晋, 1656∼1730)가 편집한 것으로, 1707년에 부베의 서문은 앞서 본 홍교만의 설명과 핵심 용어뿐 아니라 논리까지 똑같아 놀랍다.
부베가 쓴 「고금경천감」 서문의 첫 단락만 소개하면 이러하다. “예로부터 제유(諸儒)가 모두 전적에 실려 있는 수신제가치국의 도리를 중시하여, 경천(敬天)을 본연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 앞뒤로 유자들의 경천의 뜻은 크게 서로 같지가 않은데, 상고 적의 유자들은 천학(天學)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들의 경천은 지극히 존귀하고 비할 데 없이 전능하사 지극히 신령하고, 선을 상주고 악을 벌주시며, 지극히 공변되어 사사로움이 없는 분이 만물의 근본 주재(主宰)가 되심을 분명히 알아, 아침저녁으로 조심하고 삼가서, 하늘을 두려워하고 하늘을 공경하여 섬겼다.”
이후 전국시대에 분서(焚書)의 횡액을 만나고, 진한진당(秦漢晋唐)을 거치면서 진도(眞道)가 실전되어 만유의 주재를 모르게 되었고, 이후 송유(宋儒) 들이 유일진주(惟一眞主)의 뜻을 모른 채 억지 주장을 펼치면서 경전의 뜻이 완전히 어두워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고대 경전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 경전 원문 속에 숨어버린 진의(眞義)를 찾아 정리하였다는 주장이다. 이들 글 속에는 앞서 홍교만이 인용한 모든 문장들이 순서까지 비슷하게 나열되어 있다.
마태오 리치의 적응주의가 고대 유교 경전으로 그리스도교 교의를 탑재하는 시도를 보여, 「천주실의」에도 초기 경전을 활용한 설명이 나오지만, 부베는 이를 더욱 극단으로 밀어붙여 이른바 색은주의(索隱主義, figurism) 또는 부베주의(Bouvetism), 에노키즘(Enochism)으로 불리는 해석학적 태도를 도입한 사람이다. 색은주의란 「주역」 등 고대 전적에서 천주교의 신비를 찾아 예언서적으로 간주하여 해석하려는 학술적 흐름과 연계되어 있다. 「천학본의」와 「고금경천감」 등의 저작은 마태오 리치의 보유론적 적응주의가 극단적 색은주의로 넘어가는 중간 지점에 놓여있다.
홍교만은 예수 강생의 신비조차 「시경」, 「서경」, 「역경」의 이치와 합치된다며, 수십 년간 이 연구에 몰두해 얻은 결론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천주실의」의 보유론적 경전 적용 시도를 넘어서는 색은주의의 환원론적 해석 시도의 흔적과 만나게 되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5) 충주의 사도 이기연 형제와 충주 교회
충주의 사도 이기연, 북도로 귀양 가서도 천주교 씨앗 퍼뜨리다
- 충주목의 관아골이 있던 충주시 성내동 ‘관아공원’에 건립된 천주교 ‘순교자 현양비’. 충주에서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장소는 충주시 봉방동의 옛 무학당 주변(현 충주우체국 부지)으로 알려졌다. 이곳에서 충주의 사도 이기연과 이부춘·이석중 부자, 권아기련 등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임성빈 제공.
충주의 최고 명문 가문
조선 교회 출범기의 지역 교회사에서 그 실체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 바로 ‘충주 교회’이다. 충주 교회에는 충주의 사도 이기연(李箕延, 1739~1801)과 그의 아우 이최연(李最延, ?~?)이 있었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이기연이 1801년 고문을 못 이겨 배교했다가 다시 신앙을 증거하여 63세의 고령으로 사형을 당했다는 짤막한 정보가 나올 뿐이다. 하지만 초기 교회 창설에서 신유박해에 이르는 시기까지 충주 교회에서 그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앞서 이기연이 아버지 제사 때만 되면 집을 나가, 그 형 이세연(李世延, 1721~1804)이 통곡했다는 「송담유록」의 이야기를 짧게 소개했었다. 이기연은 권득신(權得身)의 외아들 권상익(權相益)에게 딸을 시집보내, 권철신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 「송담유록」은 이기연, 이최연 형제가 충주의 남필용과 포천의 홍교만, 그의 서종제 홍익만 등과 함께 권일신에게 서학을 배워 인근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휩쓸리듯 따랐다고 썼다. 이기연 형제는 청백리로 이름 높은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 1552~1627)의 6세손으로 충주 지역에서 명망이 우렁찬 최고의 명문이었다.
「송담유록」의 기록을 한번 더 찾아 읽으면 이렇다. “충주의 사족인 이최연과 이기연 형제가 권일신에게서 배워 오로지 사학에다 마음을 쏟았다. 그의 큰 형인 이세연은 근후하고 이름이 알려진 선비였다. 한번은 부친의 기일이 되었는데, 두 아우가 참석하지 않자 이세연이 통곡하였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사족들과 무지한 백성을 가르쳐서 꾀니, 당시에 사학의 소굴로 일컬어진 곳은 내포의 여러 고을과 충주와 양근, 여주와 이천이라고 한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임금께서 몰래 사람을 시켜 이들 고을을 염탐케 하여 사학이 더욱 심하다는 것을 밝게 아셨다. 특별히 이가환을 충주목사에 보임하고, 정약용을 금정찰방에 앉혔다. 임금의 뜻은 그들의 무리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고, 또 사학하는 무리에게 두려워 그만두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1795년 7월 25일에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보낸 이유가, 이곳이 이기연 형제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 세력이 특별히 기승을 부리므로, 이가환을 시켜 이들을 일망타진케 하려 했다는 것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뿐 아니라, 1795년 주문모 실포 사건 직후에도 충주는 사학이 창궐하는 핵심 소굴의 하나로 지목된 곳이었다.
1795년 이가환이 충주목사로 있을 당시, 이가환은 금육일을 골라 자기 집에 선비들을 초대해 고기를 대접해서 천주교 신봉 여부를 알아보았다는 얘기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나온다. 천주교도에게 도둑을 다스릴 때나 쓰는 주리형을 처음 적용한 것도 이가환이었다. 황사영의 「백서」에 나온다. 당시 이가환이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이기연 집안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 규장각본 「남보」에 실린 이기연 집안의 계보. 이기연은 빠진 채 이최연만 보인다.
이기연 이최연 형제
교회사 기록에 이기연의 이름은 있어도 그 아우 이최연의 존재는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 「사학징의」에도 그의 이름은 없다. 하지만 「송담유록」에서는 이최연이 형 이기연과 함께 충주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
현재 연안 이씨 삼척공파(三陟公派) 족보에는 이기연과 이최연 두 사람의 이름을 모두 파낸 상태다. 맏형 이세연과 둘째 이혜연(李惠延, 1732~1775), 셋째 이제연(李濟延, 1736~1767)의 이름만 있고, 넷째였을 이기연과 다섯째 이최연의 이름이 없는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최연이 사학에 연루된 것은 일단 분명한 사실이다. 규장각본 「남보(南譜)」에는 이기연은 여전히 빠진 채 이최연의 이름만 올랐다.
이기연이 충주 교회를 세우고 중심 역할을 한 것은 1785년 조선 교회 창설 직후부터의 일이다. 박종악이 1791년 12월 11일에 정조에게 올린 보고서의 별지에는 “충주에 사학하는 자들의 무리가 실로 많다”는 말이 나오고, “이기연은 「이십오언(二十五言)」 1책, 「성세추요(盛世芻)」 1책의 책자를 지니고 자수하여 관청 뜰에서 불태웠다고 합니다. 허물을 고치겠다는 공초를 받고 풀어 주었습니다”라고 썼다.
이 기록에 함께 등장하는 충주 지역 인물에 홍장보(洪章輔), 홍계영(洪桂榮), 최종국(崔宗國) 등이 더 있다. 특별히 홍장보의 집에서는 모두 16종의 사서가 쏟아져 나와 이목을 놀래켰다. 이들은 모두 한문으로 된 높은 수준의 교리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1791년 당시 충주 지역 교회가 내포와 달리 양반 지식인층이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이기연의 배교는 그때뿐이었고, 이후 그는 다시 충주 교회의 확장에 온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충주 교회의 교세는 그 어느 곳보다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이기연의 이름이 관변 기록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신유년(1801) 3월 10일, 「일성록」의 기록에서다. 형조판서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이 말했다. “지금에 사학하는 자들 중 물든 것이 조금 가벼운 자는 마땅히 먼 지방으로 내쳐야 합니다. 하지만 이기연을 북도(北道)에 정배한 일로 볼 때, 그가 있는 곳에서 접촉하는 데마다 독을 끼치니, 이는 깊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짧은 언급은 1801년 3월 이전 이기연이 북도에 정배되어 있었고, 그곳에서도 그가 부지런히 전교하는 바람에 해당 지역 백성 중에 천주교 신자가 생기는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려준다.
형제의 뒷바라지
그런데 4년 뒤인 「순조실록」 1805년 8월 2일 기사에 나오는, 함경도 종성(鍾城)에서 동몽(童蒙) 교관을 하던 채경갑(蔡慶甲)이 올린 상언(上言) 때문에 이기연, 이최연 형제의 1801년 당시의 동선이 한 가지 더 포착된다. 1801년 부친 채홍득(蔡弘得)이 집 앞에서 타작을 하고 있는데 웬 사람이 들어와 밥을 달라고 청하므로 점심밥을 대접한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은 그날 종이 묶음까지 팔고 돌아갔다. 그 뒤 종성부사가 돌연 그 아비를 감영의 감옥에 가두고 사학죄인 이최연에게 곡식을 대주고 밥을 먹였다는 죄목으로 금화현(金化縣)으로 정배 보냈다. 채경갑의 상언은 아비인 채홍득이 밥을 먹인 것이 이최연이 아니므로, 부친의 귀양이 억울하니 특명으로 석방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해당 부서에서 유배안을 가져다 서류를 확인했다. 정작 채홍득은 사학죄인 이기연을 유배지까지 찾아가서 쌀 포대를 건네주어, 죄인끼리의 연통 금지를 범한 죄목으로 귀양을 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채홍득이 유배를 간 것은 1801년 3월 이전의 일이었다.
이 묘한 상황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확인되는 팩트는 이렇다. 당시 이최연도 사학죄인으로 함경도 종성 땅에 머물고 있었다. 이최연은 그곳 사람 채홍득에게 부탁해서 종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유배가 있던 형님 이기연에게 곡식과 생필품을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이 일이 탄로 나는 통에 엉뚱하게 채홍득이 그만 유배를 가게 되었다. 「순조실록」에는 “구석진 먼 지역까지 사학이 점점 물들어가니, 조금이라도 의심할만한 단서가 있거든 사실을 자세히 살펴 조사케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죄인끼리의 연통 금지를 범했다고 한 것은, 이최연이 형 이기연을 도우려고 사람을 중간에 두어 연통했다는 뜻이다. 부탁 당사자인 이최연은 당시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알 수가 없다. 그에 관한 기록이 온전히 부재하는 것은 실로 비정상적이다.
당시 이최연은 형 이기연을 돌보기 위해 일부러 종성까지 올라갔던 걸까? 아니면 그 자신 또한 유배객의 신세로 종성에 있었던 걸까? 후자라면 기록이 없는 것이 이상하고, 전자라면 인근 고을로 가서 간접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보내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어쨌거나 채경갑의 상언으로 인해 충주 명문 형제의 사학 관련 행적 하나를 보탤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필자의 생각은 후자 쪽이다.
이기연은 함경도 꼭대기까지 귀양 가서도 근신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역 주민에게 포교하여 천주교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었다. 이최연이 종성 사람 채홍득에게 부탁하여 형님을 도우려 했던 것 또한 채홍득이 이최연 또는 이기연을 통해 서학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이들 형제가 충주 교회의 핵심이었음에도 유배형에 그쳤다면 그것은 배교의 다짐과 집안의 배경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1801년 10월 23일 「순조실록」 기사에 충청감사 윤광안(尹光顔)의 보고가 더 나온다. “사학죄인 충주의 이기연은 권일신과 체결하여 사학에 깊이 미혹되어 집안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집안으로부터 이웃 마을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속여 꾀어 한 고을을 그르쳤습니다. 스스로 와주(窩主)가 되어 기꺼이 사학의 괴수가 된 증거가 이미 드러나 자취를 가리기 어렵습니다.”
그는 유배지인 북도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주변에 접촉한 사람들에게 포교하다가 문제가 되어 다시 충주 관아로 끌려와 계속 갇혀 있었고, 이때 복심(覆審) 절차를 진행했다. 결국 그는 1801년 12월 17일, 집안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요언과 요서를 만들어 대중을 미혹시킨 죄로 목이 잘려 죽었다. 그의 나이 63세 때였다. 「순조실록」에 나온다. 충주 교회에 대해서는 한 차례 더 쓰겠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6) 충주 교회의 저력
신분 · 직능 · 성별 역할 분담 효율적으로 이루어진 ‘충주 교회’
- 프랑스 국가도서관 소장 「성교공과」 아침 기도 오배례(五拜禮) 부분. 신유박해 때 충주 지역 신자로 순교한 이부춘은 최후 진술에서 십계와 오배를 쉬지 않고 강습했다고 자백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이기연 집안의 신앙
이기연 형제가 선두에서 이끈 충주 교회는 교회 창립기부터 다져온 저력이 있었다. 충주 교회는 당시 전국의 거점 지역 중에서 가장 기반이 단단하고 균형이 잡힌 차진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충주 교회의 출발은 이기연 이최연 형제가 권일신 집안과 사돈을 맺고, 그에게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충주에 살던 권철신의 처남 남필용(南必容, ?~1801)과 권철신의 사위 이재섭(李載燮) 등이 충주 교회의 출범을 함께 도왔다. 이기연의 사위인 권상익(權相益)도 충주에 근거지를 마련해 가세했다.
「사학징의」 작배질(作配秩)에는 1801년 당시 신유박해로 유배 간 23인의 명단이 나온다. 이중 이기연 집안만을 따로 추려내면, 이기연의 아들 이중덕(李仲德)과 연풍(延)에 살던 둘째 형 이혜연의 아들 이항덕(李恒德), 셋째 형 이제연의 아들 이종덕(李宗德: 족보명은 種德)이 더 보인다. 명단에 들지 않은 이최연 부자도 포함해야 마땅하다. 여기에 여종 덕춘(德春)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집안 여성들까지 포함한다면 온 집안이 천주교 신자였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충주 이기연의 집안에서 주목되는 또 한 사람은 이관기(李寬基, 1771~1831)이다. 그는 이기연의 큰형인 이세연의 장남 이문덕(李聞德, 1754~1827)의 맏아들로, 삼척공파 대종중의 종손인 이행덕(李行德)에게 입계되어 종가의 종손이 되었다. 그도 신유박해 때 사학의 혐의로 장흥에 귀양 갔다.
「사학징의」에 실린 1801년 10월 11일 자 사헌부의 이첩 공문에 “서부(西部)에 사는 유학(幼學) 이관기(李寬基)는 흉적 이기연(李箕延)의 종손(從孫)인데, 사학을 전습하여 이미 지목된 바가 있다. 그의 아비 이문덕(李聞德)이 미혹되어 믿고 높이 받들어 세상이 지목하자 그의 늙은 조부(李世延)가 이를 금하였지만 안 되니, 밤낮으로 호곡하였다는 이야기가 경향 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라고 썼다. 이로 보아 이문덕 부자도 천주교 신자였다.
이렇게 보면, 이기연의 부친 이지계(李之啓, 1703~1778)의 다섯 아들 중 장남 이세연과 일찍 죽은 차남 이혜연(1732~1775), 3남 이제연(1736~1767)을 제외하고는, 이기연 이최연 형제 및 5형제의 자식들 대부분이 천주교에 입교한 상태였고, 이들 집안을 중심으로 충주 교회가 터전을 닦아 나간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이관기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쓰겠다.
충주 교회의 양반층 신자 그룹
충주 교회는 초기부터 이기연 집안 외에 양반층 신자 그룹의 존재가 확인되는 안정적인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1791년 12월 11일 박종악의 「수기」에 이름을 올린 홍장보(洪章輔, 1744~?), 홍계영(洪桂榮, 1746~1826), 최종국(崔宗國, ?~?) 등도 초기부터 이기연 형제와 서학서를 읽으며 함께 공부한 양반층 신자들이었다.
먼저 홍장보와 홍계영 두 사람이 당시 관아에 자수하며 바친 책자는 「성년광익(聖年廣益)」 제1책, 「문답(問答)」 1책, 「칠요(七堯)」 1책, 「석판진본연해(石板眞本演解)」 한글본 1책, 「일과(日課)」 한글본 1책, 「구은축문(九恩祝文)」 1책, 「여미사규정(與彌撒規程)」 한글본 1책, 「천주십계(天主十誡)」 한글본 1책, 「성사문답(聖事問答)」 1책, 「이십오언(二十五言)」 1책, 「점성수경(點聖水經)」 2책, 「만물진원(萬物眞原)」 1책, 「칠극(七克)」 2책, 「성모괴고경(聖母魁告經)」 1책, 「인진주(認眞主)」 1책 등 무려 15종 17책에 달해 눈길을 끈다.
1791년에 지방의 개인이 이 정도의 서학서를 보유했다는 것이 우선 놀랍고, 언해본이 다수 포함된 것은 집안에 여성 신자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특별히 미사 전례와 기도문, 예비 신자 교육에 필요한 서책들이 대부분이어서, 1791년 당시 충주 교회가 이미 첨례와 교리 교육이 대단히 활성화된 상태였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최종국은 「성교일과」 1책, 「천주십계」 한글본 1책을 바쳤고, 이기연은 「이십오언」 1책과 「성세추요」 1책을 더 바쳤다. 기본 교리서 공부에도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홍장보는 「수기」에 직위가 참봉으로 나온다. 그는 풍산 홍씨로 충청도의 사학을 이끌던 홍낙민(洪樂敏, 1751~1801)과 한집안이었다. 홍장보는 1790년 선릉참봉을 지냈고, 1795년에 감역(監役), 1799년 아산현감, 1800년 옥천군수를 지낸 인물이었다. 또 같은 집안인 홍계영(洪桂榮, 1746~1826)은 홍낙증(洪樂曾)의 아들로, 족보에는 홍정모(洪鼎謨)란 이름으로 올라 있다. 자는 주빈(周賓), 호는 월도(月島)다. 최종덕은 따로 알려진 사실이 없다.
족보의 기록이나 이후 홍장보의 벼슬 이력으로 볼 때 두 사람은 1791년 서학책을 바치고 배교를 선언한 뒤에 천주교와는 발을 끊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충주 교회는 1785년 출범 당시부터 이기연 형제를 정점에 두고, 남필용, 이재섭, 권상익, 홍장보, 홍계영, 최종국 등 충주 지역 유력 가문의 자제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가운데 서학서를 깊이 연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1775년 홍유한이 순흥으로 이사 가자 그와 좀더 가까운 곳에 살겠다며 1776년 여사울에서 충주로 이주했던 홍낙민 집안도 초창기 교회 형성에 가세했을 것이다. 홍장보, 홍계영이 다 그의 집안인 점에서 그렇다.
이 중 최종국의 경우는 신유박해 당시 그의 아들 최길증(崔吉曾)이 이기연에게 사학을 배운 죄로 언양(彦陽)에 도배(徒配)되었고, 이기연과 종유한 죄로 신천(信川)으로 귀양 간 최종해(崔宗海) 또한 아마도 최종국과 형제간이거나 사촌 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 중 익산(益山)으로 도배된 최조이(崔召史) 또한 최종국 집안의 여인이었을 것이다.
- 1912년 민아오스딩 감준 <텬쥬셩교공과>
교회의 허리를 떠받친 이부춘 부자와 여성 지도자 권아기련
신유박해 때 충주 지역 신자로 사형에 처한 사람은 이기연, 이부춘, 이석중, 권아기련 등 네 사람이다. 작배질(作配秩), 즉 유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은 무려 23명이어서, 전국 지역 단위에서 가장 많은 숫자였다.
이기연과 함께 충주 교회의 허리를 받쳐준 잊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이부춘(李富春, 1734~1801) 이석중(李石中, 1773~1801) 부자였다. 이부춘은 이기연보다 다섯 살 위로, 충주 감영의 아전이었다. 뒤에 비장 노릇도 했다. 그는 이기연에게 사학을 배워 충주 지역 풀뿌리 신앙의 선봉장이 되었다. 「사학징의」 결안초(結案招)의 최후 진술에서 이부춘은 “이기연과 뒤얽혀 사설에 미혹되어 믿었고, 십계(十戒)와 오배(五拜)를 그치지 않고 강습하였습니다. 주일의 모임에 어지러이 함께 참여하면서 먼저 집안에서부터 이웃 마을의 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 더러움에 물들게 하지 않음이 없어, 문득 와주(窩主)가 되었습니다. 집안 제사에 참여하지 않아 윤리와 기강을 없애 끊어버렸습니다”라고 자백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위 진술 중 십계와 오배를 쉬지 않고 강습했다는 대목에 눈길이 간다. 이 두 가지를 신자 교육의 바탕으로 삼았다는 얘긴데, 이중 오배는 다소 낯선 내용이다. 이는 천주교 신자들이 날마다 행하는 조과경(早課經), 즉 아침 기도의 제1양식 중 오배례(五拜禮)를 말한다. 아침마다 다섯 가지를 다짐하며 절을 올리는 의식이다. 첫째는 “천주를 믿어, 일체의 삿되고 망령된 일을 모두 끊어 버리나이다(信天主, 一邪妄之事俱棄絶)”이고, 둘째는 “천주께서 보우하사 나의 모든 죄를 온전히 사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望天主保佑全赦我諸罪)”이다. 셋째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선하신 주님을 만유의 위에 사랑하고 공경하나이다(愛敬至尊至善之主于萬有之上)”이고, 넷째는 “한마음으로 제가 지은 죄와 허물을 통회하고, 다시는 감히 천주께 죄를 얻지 않을 것을 다짐하나이다(一心痛悔我之罪過, 定心再不敢得罪于天主)”이며, 다섯째는 “성모께서 천주께 전구하사, 내게 항상되이 마치는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비나이다(懇祈聖母轉求天主, 賜我恒終恩佑)”이다.
여기에 십계와 오배의 각 조목 마다에는 구체적인 행동 지침들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그 내용과 방식은 최해두의 「자책」에 상세하다. 이는 당시 충주 교회의 신자 교리 교육이 대단히 실천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특별히 여성 신자 그룹에서는 충주 아전 집안 출신 과부 권아기련(權阿只蓮, ?~1801)의 역할이 우뚝했다. 그녀는 이부춘의 처 이조이(李召史)와 이부춘의 사돈댁 황조이(黃召史), 이부춘의 며느리인 이조이(李召史), 정조이(鄭召史)와 함께 충주 교회의 여성 사목을 이끄는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모두 신유박해 때 한몫으로 귀양 가서 뿔뿔이 흩어졌다.
이 같은 면면은 충주 교회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첫째, 이기연을 정점으로, 깊은 교리 지식을 갖춘 양반 지도자층이 중심에 존재했다. 둘째, 이기연, 최종국, 이부춘 등 부자간 또는 며느리로 대를 이은 교우 가정이 여럿 있어 가족 신앙의 모범적 형태를 갖추었다. 셋째, 양민과 신분이 낮은 백성을 이끈 아전 출신 이부춘 부자의 리더십이 있었다. 이들은 십계와 오배례 같은 실천적 신앙 지침을 교리 교육의 근간으로 삼아 포교에 매진하였다. 넷째, 권아기련을 중심으로 여성 조직의 일사불란한 활동 체계가 작동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충주 교회는 신분별, 직능별, 성별 역할 분담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졌고, 교리 이론뿐 아니라 신앙 활동에 있어서도 대단히 활성화된 안정적인 교회였음이 확인된다. 이들은 똘똘 뭉쳐 하나 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다. 하지만 신유박해의 충격파로 충주 교회의 기간 조직은 한동안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와해되고 말았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47) 세례명 이야기
초기 교회 신자들, 겉으로 표나지 않게 세례명 바꿔 불렀다
- 초기 교회 신자들은 원래 여러 글자로 된 세례명을 두 글자나 세 글자로 축약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사진은 「사학징의」- 정법죄인질에 보이는 보이는 세례명(왼쪽)과 「사학징의」- 조혜의의 공초 기록 중 세례명 부분(오른쪽).
「사학징의」 속 정체 모를 세례명들
초기 교회 신자들은 세례명을 어떻게 정했을까? 그들은 성인 성녀의 이름과 행적을 어떤 경로로, 어느 범위까지 알 수 있었나? 세례명은 왜 이렇듯 쉬 알기 어렵게 다양한 형태로 표기되었을까? 이런 궁금증에 대해 두 번에 걸쳐 살펴보겠다.
유관검은 「사학징의」에 수록된 공초에서 세례명이 “서양의 도가 높은 사람의 이름을 본떠 짓는 것”이라고 했고, 정복혜(鄭福惠)도 공초에서 “사호를 부르는 것은 죽은 뒤에 좋다고 해서” 짓는 것이라고 한 대답을 보면, 서양에서 신앙으로 모범을 보인 성인 성녀의 이름을 따서 이들의 신앙을 자신의 표양으로 삼는 한편, 수호 성인으로 여겨, 살았을 때와 죽은 뒤까지 자신을 지켜주는 후광 같은 존재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사학징의」와 「추안급국안」의 죄인 심문 과정에 여러 사람의 세례명이 나온다. 백다록(白多祿: 최필제 베드로), 보록(保祿: 이국승 바오로), 다묵(多: 최필공 토마스), 갈륭파(葛隆巴: 강완숙 골룸바)처럼 비교적 익숙하고 널리 알려진 이름도 있지만, 다목이(多木伊: 주문모), 투다(投多: 여종 구월), 이사발(二四發: 성조이), 이사우(以柶于: 충주 이생원), 이로수(二老: 강완숙 시모), 다슬아(多瑟阿: 김순이), ᄲᅡ을이(조혜의), 윤아(閏阿: 김염이), 갈오사(乫於沙: 유덕이), 오소랄(吳蘇辣: 김녀), 발라소(發羅所: 김이우), 마달(馬達: 최조이), 강량(姜良: 노비 낙선) 같은 처음 듣는 낯선 세례명도 여럿 있다. 이들은 대부분 지금껏 제대로 된 이름을 찾지 못한 상태다.
세례명은 어떻게 정했을까? 세례식을 집전하는 주례자나 해당 신자 본인이 희망하는 삶의 모범을 두어 정하거나, 그의 생일이나 기념일에 해당하는 주보 성인으로 정했을 것이다. 여성들의 경우 부르기 좋은 예쁜 이름을 선호한 경향도 보인다. 당시 성인에 대한 정보는 365일 날짜마다 주보 성인을 정해 생애를 정리, 소개하고 있는 「성년광익(聖年廣益)」의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밖에 「성교일과(聖敎日課)」에 수록된 성인 호칭 기도 속의 명단이 더 있지만, 대부분 「성년광익」과 중복된다. 실제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세례명은 칸디다, 우르슬라 등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까지 10년의 기간 중 초기에는 유일한 영세자인 이승훈이 세례를 주었고, 이후 가성직 제도 아래서는 10인의 신부가 세례명을 정해 주었다. 주문모 신부가 오고 나서 세례는 신부에 의해서만 이루어져, 세례명을 정해준 사람도 주문모 신부였다.
초기 신자들의 세례명은 어떤 기준으로 정해졌을까? 조선은 신분 사회였으니, 해당 성인 성녀의 신분이나 지위가 작명의 제약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천한 노비가 교황이나 주교 학자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취할 수는 없었겠고, 나이 들어 입교한 기혼 여성이 젊어서 순교한 동정녀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짓지는 않았을 터이다. 형제가 나란히 세례를 받을 경우, 그에 걸맞은 형제 성인의 이름을 취하기도 했다. 손경윤, 손경욱 형제가 나란히 제르바시오와 프로타시오 치명(致命) 형제의 이름으로 세례명을 삼은 경우가 그렇다.
어쨌거나 「성년광익」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음을 전제한다면, 유추하기 어려운 낯선 세례명 또한 「성년광익」에 수록된 성인 성녀 중 한 사람일 것이 틀림없다. 다만 표기 방식이 생소하고, 조선식 생략과 조선 한자음을 반영한 표기로 인해, 중국과는 동떨어진 형태가 되는 바람에 누구인지 모르게 된 것일 뿐이다. 이 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검토해 보겠다.
은폐의 전략
세례명을 사호(邪號)라 한데서도 보듯, 당시 신자들은 별호의 느낌을 담아 썼다. 신자들은 평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세례명으로 서로를 불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입에 붙어 습관이 되었다가 외교인과 함께 있을 때 ‘마리아’ 같은 세례명이 불쑥 튀어나오면 곤란한 상황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 표나지 않게 글자 수를 줄이거나 우리말 표현에 가깝게 바꿔 불렀다. 별명처럼 편하게 부르다 보면 교우들 사이에 친근감과 결속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는 얼마간 은폐의 전략도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1801년 2월 10일, 의금부 국청에 끌려가 심문받을 때, 정약종의 문서 더미에서 나온 편지 중에 ‘정약망(丁若望)’이란 이름이 나왔다. 심문관이 정약망이 누구냐고 따져 묻자, 다산은 “제 일가 중에는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잡아뗐다. 약망은 다산의 세례명인 요한이니, 정약망을 모른다는 말은 내가 나를 모른다는 말과 같았다. 다산은 심문관이 약망이 천주교의 세례명인 줄 짐작치 못하고, 집안의 돌림자인 약(若) 자 항렬의 어떤 사람인 줄 아는 듯하자, 눈썹 하나 까딱 않은 채 명백한 거짓말로 상황을 우선 모면했다. 이때만 해도 심문관의 서학에 대한 지식은 이처럼 어수룩한 구석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호는 두세 글자로 쓰므로, 원래 여러 글자로 된 세례명의 경우 두 글자나 세 글자로 축약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또 서양 이름의 원래 발음을 조선 한자음으로 반영해 글자를 우아하게 교체하거나 호(號) 같은 느낌이 나게 고치는 이른바 아화(雅化) 현상이 생겨났다. 또 오늘날 확인이 어려운 세례명 중에는 의금부나 형조와 포도청의 심문 과정에서 죄인의 진술을 받아 적다가, 들리는 대로 기록하다 보니 바뀐 예까지 포함되어 있어, 초기 교인의 세례명 표기는 실제 이름과 표기 이름을 연결 짓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른다.
먼저 축약과 교체의 경우를 보자. 「추안급국안」의 공초에서 이승훈을 이백다(李伯多), 권일신을 권사물(權沙勿)로 부른 예가 보인다. 백다는 백다록(伯多祿: 베드로)을, 사물은 방제각 사물략(方濟各 沙勿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서 두 글자만 취해 줄여 썼다. 정철상의 공초에는 주문모가 본국에 있을 때 다목이(多木伊) 또는 백다(白茶)로 불렀다고 한 내용이 나온다. 다목이의 ‘이’는 인명 끝에 붙은 접미사다. 다목(多木)은 중국 발음으로 ‘두어무’니 다묵(多: 토마스)과 발음이 똑같다. 다목이는 토마스란 세례명을 조선식으로 바꿔 적은 이름이다. 백다는 백다록(伯多祿)의 앞 두 글자에서 취했지만, 조선식 한자음을 취해 글자를 교체했다. 백다(白茶)는 중국음으로는 ‘바이차’로 읽지만, 여기서는 반드시 ‘백차’가 아닌 속음인 ‘백다’로 읽어야 한다.
결국 정철상의 이 공초는 주문모가 중국에서는 토마스 또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썼고, 조선에 들어오면서 아각백(雅各伯) 즉 야고보란 세례명을 쓰기 시작했다는 얘기인데, 어떤 의도에서 이렇게 말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사학징의」 중 정인혁의 공초에는 주문모의 세례명으로 ‘약거백(若去白)’이라 표기한 예도 보인다. 이 약거백은 주문모 신부의 세례명 아각백(雅各伯)의 중국어 독법과 조선식 독음이 반반씩 섞여 있는 묘한 방식의 표기다. ‘약거’는 조선음을 취했고, ‘백’은 중국음 ‘보’를 가져와 ‘약거보’로 절충한 형태다.
ᄲᅡ을이와 이로수
한편 중국 현지에서 쓰는 한자 표기 세례명은 알파벳 원어 표기를 중국어 발음으로 음차한 것이어서 우리식 한자음으로는 발음이 어렵거나 기괴한 느낌을 주는 것이 많았다. 예를 들어 성 이냐시오(Ignatius)를 의납작(依納爵)이라 하고, 티모테오(Timotheus)를 제막득아(弟莫得阿)라 하며, 라자로(Lazarus)를 랄잡록(辣祿)으로 표기하는 따위가 그렇다. ‘납작’이나 ‘막득’ 또는 ‘랄잡’은 조선 한자음으로는 어감이 좋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이름들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쓰더라도 글자 수를 줄이거나 한국식 한자음을 반영하여 글자를 바꾸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사정 아래 중국 사람들이 보아서는 가늠조차 안 되는 이상한 표기의 세례명들이 적지 않게 생겨났다.
「사학징의」에 한글로만 적힌 조혜의의 세례명은 ‘ᄲᅡ을이’이다. ᄲᅡ을이란 이름의 성녀는 대체 누구였을까? ᄲᅡ을이는 성녀 ‘바르바라(Barbara)’임에 틀림없다. 한자로는 파이발랄(巴爾拔辣)이라 쓰고 ‘빠을바라’로 읽는다. 빨리 읽으면 ‘빨바라’ 또는 ‘발바라’가 된다. ᄲᅡ을이란 본명은 빠을바라 네 글자에서 앞의 두 글자만 취하고, 여기에 명사형 어미 ‘이’를 붙여 애칭처럼 줄여 부른 것이다. 바르바라는 「성년광익」에 12월 4일의 성녀로 나온다.
별라산 홍지영의 모친이자 강완숙 시모의 세례명인 이로수(二老)도 달리 용례를 찾기 어려워, 그간 추적이 안 된 이름 중 하나다. 이로수는 성녀 아녜스(Agnes), 영어식으로는 아그네스이다. 중국에서는 의닉사(依斯)로 표기한다. 그쪽 음으로 읽으면 ‘이누오스’이고, 이를 줄여 읽으면 이노수가 된다. 이로수는 중국음을 취해 ‘얼라오슈’로 읽어서는 안 되고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어야만 한다. 의닉사라는 이상한 발음보다 이로수라고 써서, 뜻도 점잖고 글자도 평이한데다, 불리는 사람의 나이도 가늠할 수 있는 명칭이 되었다.
이밖에 이제껏 세례명을 특정하지 못한 다른 이름들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마저 살펴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