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희야』(김희갑 작사/작곡)는 1965년 「박일남」이 발표하여
히트 한 곡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확인을 해보니 「박일남」은 193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할아버지가 일제 때 세무 공무원이어서
세 살 때 창원으로 전출돼 전 가족이 부산으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진주사범에서 미술교사를 하셨다는데 일찍 돌아가셨고 두 동생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고등학생 때까지 노래를 전혀 못하는 음치였고 권투만 배웠는데,
고2때 지독한 감기에 걸려 자다 말고 피까지 토해 고모들이 “우리
집안의 독자 죽는다”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탁성의 찢어질 것 같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고 갑자기 노래도 잘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새로 연주법을 익힌 기타를 연주하며 허스키 보이스로
'Nat King Cole'의 곡 등 팝송을 노래하기 시작했고, 1958년 동국
대학교 인도철학과에 입학해서도 공부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레슬링을 배우러 다니다가 유랑극단에 이끌려 노래를 부르기 시작
했는데, 유랑극단 무대에 서기 시작한지 6개월이 지난 1963년 어느 날
'킹 박'이란 사람이 찾아와 “레코딩을 해볼래?”라고 제안을 하여
얼결에 취입을 했는데 바로 "갈대의 순정"(오민우 작사/작곡)이었습니다.
'킹 박'이 어떻게 홍보를 했는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 30만장이
팔렸다고 하며, 그해 신인가수상을 받으러 가야하는데 폭력사건으로
수배령이 내려 도망 다니는 처지여서 신인상은 '유주용'에게 돌아
갔습니다.
레코딩은 꾸준하게 계속돼 1964년 "엽서 한 장"(마상원 작사/작곡),
1965년 『그리운 희야』 (김희갑 작사/작곡) 등 발표하는 노래마다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수배령 때문에 각종 가요상은 '배호' 등에게 돌아갔고,
「박일남」은 폭행사건으로 세 번에 걸쳐 형무소에 수감된 경력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형무소에서 나온 게 1998년이었다네요...
1968년 도민증이 주민등록증으로 바뀔 때 「박일남」의 어머니는
동사무소를 방문해 호적에 당신의 둘째아들과 막내아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으로 기재된 것을 발견하고 사망처리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그게 잘못돼 큰아들과 둘째아들이 사망처리 되고 막내아들이 살아 있는
것으로 기재되었는데 그는 그걸 모르고 있어서 1939년생 「박일남」이
1945년 생으로 둔갑한 셈인데 나중에 그게 월남파병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1958년 동국대에 입학하기 전 해병대에 입대해 훈련을
받다가 도망친 일이 있는데, 나중에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해병대
헌병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강기천 해병대사령관'이 '차중락'과 '배호'를 좋아해 둘을 해병대로
스카우트해 월남에 파병시키면 해병대 홍보에 좋겠다고 생각했다는데
두 가수 모두 환자여서 고민하다가 「박일남」과 '남진'을 그 대타로 입대
시키려 했다고 합니다.
입소를 며칠 앞두고 맹장이 터져 입원을 했고, '문주란' 등이 면회를 와
술을 마시다가 맹장이 다시 터지는 바람에 '남 진'만 먼저 입소하고
「박일남」은 한 달 뒤 입소했다고 합니다.
1969년 8월 훈련이 끝나고 자대에서 근무하는데 선임하사가 부르더니
“왜 나이를 속였냐?”면서 닦달하자, "막내 동생과 호적이 바뀌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노라고 설명하니 30세를 넘으면 월남을 못 간다"고 했습니다.
결국 「박일남」은 월남 파병에서 제외되고, 가수로는 혼자만 가게 된
선임 병 '남 진'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인천아이러브색소폰클럽대표 윤양로)
요즘에는 나이 때문에 부르는 곳이 별로 없어서 양로원 등지에서 봉사
활동을 많이 하며,아침에 일어나면 푸시업을 2백번 하고, 한 시간 걷기로
건강관리를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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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야 희야 나를 두고 어디갔나
무정하게 버리고 간 외로운 이 마음
이밤도 슬피 울었다 세월이 흘러가도
그대만은 어이 잊으리
희야 희야 너를 두고 내가 운다
희야 희야 너만 홀로 어디 갔나
몰아치는 비바람에 전등도 꺼진 밤
나 홀로 슬피 울었다 내마음 울리고 간
그대만은 내가 못잊어
희야 희야 너를 두고 내가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