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은 욥의 변론을 들은 나아마 사람 소발의 비판입니다. 소발은 욥에게 먼저 2절에서 말이 많다고 합니다. 욥은 그저 수다쟁이 일뿐입니다. 특히 소발은 욥이 자신의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 말을 비웃고 있습니다. 소발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무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순전함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소발을 포함해서 엘리바스도, 빌닷도 이런 욥의 말을 단지 자신이 죄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발은 그의 연설에서 욥이 하나님에 대해 참 무지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혜의 오묘함으로 욥의 무지함을 깨우쳐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물론 우리도 하나님의 오묘함을 측량할 만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둘째 소발은 11절에서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다 보신다고 했습니다. 지금 욥의 숨겨진 악을 다른 이는 못 보았어도 하나님께서 욥의 악을 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벌어진 이 고통은 그것에 대한 징계라는 것입니다. 욥이 현재보다 더 큰 벌을 받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이 말이 욥에게 위로가 되겠습니까?
소발이 내린 결론은 12절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들나귀 새끼가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저기 날뛰듯이 허망한 사람은 그 모습이 이런 들나귀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발은 욥에게 충고하기를 네 마음을 바로 정하라 합니다.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고 합니다.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15절에서 네가 반드시 흠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16절에서는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소발도 욥에게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과 협상하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협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물질적 부귀를 위해 회개라는 것은 협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물론 허망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들나귀 같이 좌충우돌하는 사람도 될 수 없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룀함으로 온전함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임을 선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