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南堂] 북인도의 민중원(閔中原)-①, 광무제 전략, <太和池>
북인도의 지리는 한자(漢字)의 <공(工)>자처럼 생겼습니다.
두 이(二)의 윗변이 히말리야산맥이 되고, 남인도와 북인도를 구분하는 빈디야(Vindya)산맥이 아랫변으로 되어
있다면, 서(西)쪽의 아라비아 해(海)로 흘러나가는 인더스 강 수계(水系)와 동(東)쪽의 인도양(印度洋) 쪽으로 흘러
갠지스 강 수계(水系)를 수직(垂直)으로 막는 곤(丨)자 모양의 고원(高原)지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산맥과 고원(高原)이 <공(工)>자처럼 생긴 북인도 지형에서 남인도와 북인도를 구획하는 빈디야(Vindya)
산맥은 우리 말 감각으로 들어보면, 꼭 납작한 곤충인 ‘빈데’처럼 들립니다.
굳이 인도어(印度語)를 우리 말 감각으로 들어보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이는 인도어 가운데, ‘드라비다 언어’가 우리 말에 깊게 투영(投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의 ‘얼(정신(精神))’을 드라비다 언어로 역시 ‘얼’이라 하고, 또 아버지를 드라비다 언어로 ‘아파치’라하고, ]
엄마를 암마, 남(타인)을 역시 ‘남’, 또 우리말의 ‘님’을 역시 ‘님’이라고 하는 등 ‘드라비다 언어’는 깊게 우리 말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곡(哭)할 때 “아이고~”라고 말하는 것도 드라비다 어인 것입니다.
(*) 참고: 드라비다 어(語)와 우리 말의 상관성을 논한 글
http://cafe.daum.net/junbees/53vZ/412?docid=1APXW|53vZ|412|20110413225849&q=%B5%E5%B6%F3%
BA%F1%B4%D9%20%BE%F0%BE%EE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조(朝鮮朝) 초기(初期)에는 왜어(倭語)와 일본어(日本語)를 구분해 준 적이 있는데,
이 때의 왜어(倭語)라는 것은 바로 ‘드라비다 어’를 뜻하는 것입니다.
‘드라비다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놀라운 해양(海洋)인’으로써 아시아(Asia)는 물론 아메리카(America)대륙에
삼한인(三韓人)들과 함께 까마득한 고대에서부터 왕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말에 드라비다 어(語)가 스며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한자(漢字)의 왜(倭)라는 말의 본 뜻은 ‘빙~ 멀리 돌아가다’라는 의미인데, 실제로 ‘드라비다 어’ - 즉 왜어(倭語)를
쓰는 인도인들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빙~ 멀리 돌아다니는 항해력’을 갖춘 왜인(倭人)의 주류(主流)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왜(倭)가 곧 청령열도(蜻蛉列島)에 있었던 나라와 사람들이다.”라는 잘못된 선입관(先入觀)에
묶여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청령열도(蜻蛉列島)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 - 즉 일본어(日本語)에 대해서 조선조(朝鮮朝)
초기 때까지 역관(譯官)들 사이에도 극소수 였음이 드러납니다.
즉 태종 실록 [太宗 28卷, 14年(1414 甲午 / 명 영락(永樂) 12年) 10月 26日(丙申) 2번째기사] “일본어를 익히도록
사역원에 명하다.”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 태종실록 원문(原文)및 해석 옮김.
○命司譯院習日本語。 倭客通事尹仁甫上言: “日本人來朝不絶, 譯語者少, 願令子弟傳習。” 從之。
: 사역원(司譯院)에 명하여 일본어(日本語)를 익히게 하였다.
왜객 통사(倭客通事) 윤인보(尹仁甫)가 상언(上言)하기를,
“일본인(日本人)의 내조(來朝)는 끊이지 않으나 일본어를 통변하는 자는 적으니, 원컨대,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전습(傳習)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즉 위 태종실록을 보면, 청령열도(蜻蛉列島)에 사는 일본인(日本人)들이 내조(來朝)함이 급증한 태종 때에 ‘일본어
(日本語)에 대한 통역자가 적어서(譯語者少)’ 이를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고 품의(稟議)를 올리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이는 조선 태종(太宗)때까지 왜어(倭語)와 일본어(日本語)를 구분해주고 있었음이 잘 드러나고 있고, 태종(太宗)
이전(以前)까지의 왜어(倭語)의 정체는 ‘드라비다 어(語)’임을 반증(反證)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인도(印度)의 말을 우리 말 감각으로 들어보는 것은 정확한 어원(語源)이 아니라도,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드라비다 어(語)’의 공명(共鳴)현상 때문에,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빈데’와 같은 느낌을 주는 ‘빈디야(Vindya) 산맥’은 오늘날 북인도와 남인도를 구획(區劃)하는 경계로 여겨지고 있
습니다.
흥미있는 것은 이 ‘빈디야(Vindya)산맥’이 ‘히말리야 산맥’보다 훨씬 낮게 된 까닭 - 즉 ‘빈데’처럼 납작한 산맥이 된
까닭에 대한 신화(神話)가 인도 신화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북두칠성의 성선(聖仙: Sapta Rishi)들을 낳은 가우리(Gauri)여신에 대한 신화는 우리 신화와 인도(印度)가 공유
하고 있는 신화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우리(Gauri) 여신과 사법신 바루나(Varuna) 사이에서 태어난 ‘맞이’는 북두칠성의 각 별(星)을 맡고 있는
삽타리쉬(Sapta Rishi)가 아니라, 칠성(七星)과 무관한 아가쓰띠야(Agastya)성선(聖仙)입니다.
삽타 리쉬(Sapta Rishi)들이 북두칠성의 성선(聖仙)으로써 배달화백에서 7개의 영성문(靈星門)을 관장하는 성선
(聖仙)으로 그 역할이 있었다면,
아가쓰띠야(Agastya) 성선(聖仙)은 ‘신시(神市)-장자(長者)로써 자리 매김 될 수 있는 성선(聖仙)입니다.
아가쓰띠야(Agastya)성선(聖仙)은 인도 신화에서 ‘스케일(Scale)의 광변(廣邊)무대(無代)함’의 상징으로써 자주
거론되는 성선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왕(魔王)들이 태평양 해저(海底)에 숨어들자, 신(神)들이 “이 해저(海底)에 숨어있는 마왕(魔王)들을
어찌 퇴치(退治)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난색을 표명할 때에, 아가쓰띠야(Agastya) 성선(聖仙)께서는 인도양과
태평양을 모두 마셔버려서 간단히 이를 퇴치(退治)시킬 정도로 그 스케일(Scale)은 큰 것입니다.
따라서 아가쓰띠야(Agastya)성선(聖仙)을 조각은 이를 기념키 위해서 배가 약간 불룩하게 조각합니다.
(*) 배(腹)가 불룩하게 조각된 아가쓰띠야(Agastya)성선(聖仙)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b/Agastya.jpg
(*) 아가쓰띠야(Agastya)성선(聖仙)께서 대양(大洋)을 마시는 그림
http://www.nilacharal.com/news/specials/images/agastya.jpg
흥미있는 것은 가우리(Gauri)여신(女神)께서 낳은 친자식의 성선(聖仙: Rishi)들은 자미수(紫薇樹) 즉 매끈한 속껍질
때문에 원숭이가 미끌어진다는 ‘백일홍(百日紅) 나무’를 두른 곳을 바로 태(胎)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 신화에서 신(神)들의 계보(系譜)를 보면, 북두칠성의 5번째 별인 염정성(廉貞星) ‘거북’이라는 의미를 지닌
카시아파(Kashyapa)성선(聖仙)이 가장 오래된 신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전쟁을 좋아하는 아수라(阿修羅)와 평화를 사랑하는 천인(天人)들과 선신(善神)의 조상이 이 카시
아파(Kashyapa)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아가쓰띠야(Agastya)성선(聖仙)이 가우리(Gauri)여신의 ‘맞이’가 될 수 있는 것은 여신의 태(胎)인
자미수(紫薇樹) 속에 가장 먼저 들어가서 나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가우리(Gauri)여신은 ‘우주(宇宙) 민주주의 여신(女神)’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고구리(高句麗)를
중국어 발음으로 읽으면 ‘가우리’가 되기 때문에, 인도(印度)와 고구리(高句麗)의 깊은 상관관계를 가우리(高句麗)
라는 국명(國名)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인도신화에 의하면, “히말리야 맥과 빈디야 산맥이 누가 빨리 자라나는가?” 내기를 벌렸는데, 아가쓰띠야
(Agastya)성선(聖仙)께서는 북인도에 계시다가, ‘빈디야(Vindya) 산맥에게, “내가 남(南)쪽으로 넘어갔다가 되돌아
올 때까지만, 자라남을 잠시 멈추어 주게..”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빈디야 산맥을 훌쩍~ 뛰어넘어서 어디론가 갔는데, 영영 되넘어오지 않기 때문에, 산높이의 성장(成長)
이 멈추어서 히말리야 산맥에 비해서 ‘빈데’처럼 낮은 빈디야(Vindya)산맥의 높이를 지니게 되었다는 신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가스띠야(Agastya)성선(聖仙)이 빈디야(Vindya)산맥을 넘어서 간곳은 어디인가?!
이는 부상국(扶桑國) 이전(以前)의 환국(桓國)이 분명합니다.
미지(未知)의 3환국(桓國)인 [1]⑦객갈한국 (客賢汗國) [2]⑧구모액국 (句牟額國) [3]⑩사납아국 (斯納阿國) 가운데,
고대 인더스 문명을 일군 ‘각가르 한(Ghaggar Han)국’이 한자(漢字)로는 객갈한국 (客賢汗國)이기 때문에, 결국
구모액국 (句牟額國)이 아니면, 사납아국 (斯納阿國)이 되는 것입니다.
즉 아가스띠야(Agastya)성선(聖仙)이 빈디야(Vindya)산맥을 넘어서 도착한 곳이 바로 미주(美洲)대륙에 있는 부상국
(扶桑國)의 모태가 되는 환국(桓國)이 구모액국 (句牟額國)과 사납아국 (斯納阿國)의 둘 중의 하나이지만,
“어느 환국(桓國)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잠정적으로 이를 <아가스띠야(Agastya) 성선(聖仙)의 환국(桓國)>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는 고대 인더스-문명을 이룬 드라비다 인들이 남인도 지역에는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지만, 북인도 지역에서
홀연히 사라진 것은 바로 이들이 부상국(扶桑國)의 전신(前身)이 되는 <아가스띠야(Agastya) 성선(聖仙)의 환국
(桓國)>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빈디야(vindya)산맥은 오늘날 북인도와 남인도를 구분짓는 산맥으로 유명하지만, 우리 역사와 관련해서는
남왜(南倭)의 북방 한계(限界)와 서부여(西夫餘)인 비리(卑離)네트워크(Network)의 남방 한계(限界)를 구획짓는
산맥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인도의 산세(山勢)는 한자(漢字)의 <공(工)자>처럼되어 있는데, 두 이(二)의 아랫 변(邊)이 ‘빈디야(Vindya)산맥’
이라면, 이 <공(工)자>에서 인더스-강과 갠지스-강의 수계(水系)의 분수령(分水岺)이 되는 산을 고구리(高句麗) 때
에는 민중원(閔中原)이라고 칭하였음이 <고구리 초략>을 분석해보면 들어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고구리 4대왕인 민중왕(閔中王)4년(A.D 47년) 조(條)를 보면, 민중원(閔中原)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 삼국사기 원문(原文)및 해석 옮김.
四年 夏四月 王田於閔中原
: 4년(47) 여름 4월 왕이 민중원(閔中原)에서 사냥하였다.
秋七月 又田見石窟 顧謂左右曰 吾死必葬於此 不須更作陵墓
: 가을 7월 또 민중원(閔中原)에서 사냥하다가 한 석굴(石窟)을 발견하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이곳에 장사지내고 다시 능묘를 만들지 말라.”하였다.
九月 東海人高朱利獻鯨 魚目夜有光
: 9월에 동해(東海) 사람 고주리(高朱利)가 고래를 받쳤는데, 밤에도 눈에서는 빛이 났었다.
- 즉 위 기록을 보면, 민중왕(閔中王)의 ‘주검’이 모셔진 석굴(石窟)이 있는 민중원(閔中原)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정보(情報)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당(南堂)유고 <고구리 초략>을 보면, 민중제(閔中帝)가 사냥한 민중원(閔中原)의 위치를 ‘찾게 하는 단서
(端緖)’가 들어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남당유고(南堂遺稿)는 일서(逸書)이긴 하나, 그동안 사서(史書)의 기록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지리비정(地理比定)
을 할 수 있는 ‘정보’와 관경사국(管境四國)의 제도(制度)를 추정할수 있는 ‘정보’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다는 점
에서 그 가치(價値)가 높다고 봅니다.
<고구리 초략>제4세 민중제기(第四世<閔中帝>紀)를 보면, ‘민중원(閔中原)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하는 특이한 기록이
민중원(閔中原)에서 사냥한 4년의 한 해 전(前)인 3년 조(條)에 후한(後漢)을 연 광무제(光武帝)의 아들인 명제(明帝)
인 유양(劉昜)과 동모제(同母弟)인 유형(劉荊)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바로 이것이 민중원(閔中原)의 위치를
알게 하는 결정적인 정보인 것입니다.
(*) 제4세 민중제기(第四世<閔中帝>紀) 3년 조(條) 원문(原文) 발췌(拔萃)및 해석 옮김.
(참고: 관련된 부분 전후(前後)를 (*******)로 표기합니다.)
◎ 三年丙寅, 七月, 與<烏>皇后, 東狩. 獲白獐, 飼之. <濟>, 取<蛙山>, 置戌二百人, 尋失. 「東都」無雪.
: ○ 3년(단기2399년/AD66)병인, 7월, <오>황후와 함께 동쪽으로 몰이사냥{군사조련 사냥}을 나갔다.
흰 노루를 잡았기에 먹이를 주어 길렀다.
<백제>가 <와산>을 {<신라>로부터} 빼앗고 수자리 200명을 두었으나, 다시 빼앗겼다. 「동도」에 눈이 오지 않았다.
*************************************************************************************
<漢><昜>殺其弟<荊>. <荊>, 以皃類於<秀>, 言三十得天下, 欲起兵而伏罪. 弟莫好佛■■助<■>.
以后弟<烏希>為, 中畏大夫, <麻勁>太輔, <松宝>左輔.
<한>의 <양>이 동생 <형>을 죽였다. <형>은, {아비인} <수{광무제}>와 모습이 비슷하였으며, 나이 삼십이면 천하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기병하려 하였다가 죄를 받았던 것이다. 동생...(**)이하는 해독 번역 불능...(**)
<오>후의 남동생 <오희>를 중외대부로, <마경>을 태보로, <송보>를 좌보로 삼았다.
************************************************************************************
위 민중제(閔中帝) 3년 조(條) 기록을 보면, ‘김성겸 선생’께서 원문(原文) {弟莫好佛■■助<■>}에 대해서 (**)이하는
해독 번역 불능...(**)이라고 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선생께서 워낙 해석(解釋)의 엄격함을 중시여기기 때문인데, 사실 판독(判讀)이 안되는 글자가 ■■와 <■>로
주어졌지만, 이를 짐작 못할 바는 아니지만, 김성겸 선생께서 ‘엄격한 해석(解釋)’을 본지(本旨)로 하기 때문에
<이하 해독 번역 불능>이라고 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원문(原文)은 구문(構文)상 두 부분 - 즉 ①弟莫好佛■■ ②助<■>로 나뉘어 볼수가 있습니다.
①은 “동생(=제(弟))인 유형(劉荊)이 불교(佛敎)가 ■■ 함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또 ②는 <■>을 도왔다(助)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②의 <■>을 좌계는 <仙>에 해당하는 글자라고 추측을 합니다.
즉 유형(劉荊)은 후한(後漢=동한(東漢))의 2대 명제(明帝)에 대해서 “나이 삼십이면 천하를 얻어야 한다고 말하고
기병(起兵)하려 한 이유(理由)”가 원문(原文) {弟莫好佛■■助<■>}로써 <고구리 초략>은 설명하려 했던 것으로써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漢)나라는 전한(前漢) 한무제(漢武帝) 사이(四夷)개척을 하는 무리수(無理數)를 두다가, 멸망의 위기에 봉착하자,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이라는 <해외(海外)에의 투자 중재 배달화백을 하는 특별구역>을 두고서, 북부여와 타협을
하였는데, 북부여를 승계한 고구리(高句麗)를 중심으로 하는 관경사국(管境四國)과의 유대관계를 맺음으로써
전한(前漢)은 경제적 위기와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게 되는 현명한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즉 한사군(漢四郡)은 관경사국(管境四國)의 소도(蘇塗)를 통해서 ‘중국의 황제(皇帝)가 제후국(諸侯國)으로 부터
세금을 징수해서 해외(海外)에 투자하는 조공(朝貢) 공정(工程) 플로우(Flow)를 통해서 투자를 하고, 그 반대급부로
별도의 제권(帝權)체제 유지비용의 웃돈(프리미엄(Premium))을 따로 받게 함으로써 봉건체제와 순방체제 상호간의
체제갈등을 승화(昇華)시키는 장치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관경사국(管境四國)이 중국대륙에 천년 동안 공존(共存)할 수 있었던 것은 “관경사국이 중국의 제권(帝權)투쟁에
중립(中立)을 지키는 대신에, 해외(海外)의 관경사국에 대해서 중국대륙의 투자를 받는 대신에 제권(帝權)체제 유지
비용을 ‘웃돈’으로써 보장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전한(前漢=서한(西漢))체제는 왕망(王莽)이 신(新)나라를 세움으로써 무너지게 되는데, 이때 중국대륙의 각지
역의 군웅할거(群雄割據)한 것을 다시 후한(後漢)으로써 통합을 하기 위해서는 광무제(光武帝)입장으로써는 두 가지
전략이 가장 핵심적이었던 것입니다.
첫째는 정벌대상의 우선순위(優先順位)입니다.
이는 중국황제의 기반인 중원(中原)을 먼저 도모하고, 해외(海外)로 나가는 길목을 나중에 정벌대상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전략이 됩니다.
치지도외(置之度外)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있는데, 이를 직역(直譯)하자면 “내버려 두고(=치지(置之)) 문제(=도
(度) 밖(=외(外))으로 한다.”는 말인데, 이는 광무제의 전략에서 유래하는 용어인 것입니다.
즉 광무제는 중원(中原)의 군웅(群雄)을 먼저 정벌하지만, 즉 당시 실크-로드(Silk road)로 나가는 하서회랑(河西
回廊)쪽을 농서(隴西)지방이라고 했는데, 이곳에는 외효(嵬囂)가 장악하고 있었고, 또 사천(四川)지역에는 공손술
(公孫述)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를 “내버려 두고 문제삼지 않는” 치지도외(置之度外)전략을 구사(驅使)하였던
것입니다.
후한서(後漢西) 광무제기(光武帝紀) 6년 조(條)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六年, <關東>悉平. 帝積苦兵閒, 以<囂>子內侍, <公孫述>遠據邊陲, 乃謂諸將曰:且當置此兩子於度外耳.
: 광무(光武) 6년 관동(關東)지역이 다 평정되었지만, 광무제(光武帝)는 병사들의 쌓인 고통때문에 정벌을 ‘틈(=한
(閒)’을 두고 져 했다.
외효(嵬囂)의 아들이 궁중(宮中)에서 (인질(人質)로써) 시봉(侍奉)하고 있고, <공손술(公孫述)>은 멀리 변추(邊陲)
에서 거점(據點)을 지니고 있으니, 이에 제장(諸將)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당면(當面)한 두 세력은 두고 문제삼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치지도외(置之度外) 전략이 가능하였던 것은 당시 중국대륙에서 씰크 로드(silk road)로 나가는 외효
(嵬囂)가 장악하고 있었던 농서(隴西)지방은 전통적으로 부여(夫餘)지역으로 치다가 <신라(新羅)사초(史抄)>에
기록되어 있듯이 ‘제2번국(藩國)’인 복암주(覆岩州)와 소라주(召羅州)가 있는 곳이고, 따라서 서로군사(西路軍事)가
있었던 곳인 것입니다.
또한 <공손술(公孫述)>이 자리 잡고 있는 오늘날 사천(四川)지역은 전통적으로 중국에서 촉(蜀)이라고 일컫는 지역
이지만, 이곳은 사천(四川)-맥제(百濟)가 공존하고 있었던 곳인 것입니다.
즉 광무제(光武帝)의 치지도외(置之度外) 전략이 가능한 까닭은 신라(新羅)의 복암주(覆岩州)와 소라주(召羅州)
속에 외효(嵬囂)가 장악하고 있었던 지역이 공존(共存)하고 있고, 또 <공손술(公孫述)>이 장악하고 있었던 곳은
사천(四川)-맥제(百濟)가 공존(共存)하고 있으면서, 이런 관경사국(管境四國)이 중국의 제권(帝權)경쟁에 ‘엄정중립’
을 하고 있음을 광무제(光武帝)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시간(時間)차(次) 정벌’이 가능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지역에 대해서 치지도외(置之度外)하던 광무제(光武帝)는 결국 나중에는 농서(隴西)지방의 <외효(嵬囂)>
세력을 먼저 정벌하고 그 다음에 촉(蜀)의 <공손술(公孫述)> 세력을 정벌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사자성어(四字成語)가 된 것이 “농서(隴西)를 얻게 되니 촉(蜀)을 바라보게 된다.”는 득롱망촉
(得隴望蜀)이란 말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광무제(光武帝)의 치지도외(置之度外) 전략이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병진(竝進)되어야 하는 전략
이 있어야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한(前漢)때 속칭 한사군(漢四郡) 지역에서 산출되는 경제력(經濟力)을 후한(後漢)이
이를 승계해서 이를 바탕으로 관경사국(管境四國)에의 ‘조공(朝貢) 공정(工程) 플로우(flow)’에 올인(oll in)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력 투자하지 않으면, <외효(嵬囂)>와 <공손술(公孫述)>이 오히려 관경사국(管境四國)에 투자를 하게
되어서 제권(帝權)경쟁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대무신왕(大武神王) 27년(A.D.44년) 조(條)를 보면, 광무제(光武帝)가 이러한 시도를 하였음이 나타
납니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해석 해석에서 가장 잘못 해석되고 있는 것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 삼국사기 대무신왕(大武神王) 27년(A.D.44년) 조(條)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 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 屬漢
: 27년(A.D.44년) 가을 9월에 한(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병력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서 낙랑(樂浪)을 토벌(討伐)
하여서 그 땅을 군현(郡縣)으로 삼았다. 살수(薩水)의 이남(以南)은 한(漢)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일단 위 해석에서 낙랑(樂浪)은 최리(崔理)의 낙랑국(樂浪國)이 아닙니다.
이는 서한(西漢)시절 ‘해외 투자 특별구’인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낙랑군(樂浪郡)을 그 대표(代表)로 ‘낙랑(樂浪)’
이라고 표기한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한사군(漢四郡)이 있었던 지역을 뜻하는 것입니다.
낙랑(樂浪)이란 용어는 비교언어학자 강길운(姜吉云) 선생께서 명확히 규명하였듯이 ‘몽고어’ 향찰(鄕札)입니다.
즉 향찰은 앞 글자를 훈(訓)으로 읽고, 뒷 글자를 음(音)으로 읽는 것을 뜻하는데, ‘몽고어’로 음악(音樂)을 ‘박달’이
라고 합니다.
이 ‘박달’의 뜻은 <영웅(英雄)들의 회의>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또 랑(浪)은 고음(古音)에서 이응(ㅇ)받침이 강하게 붙지 않기 때문에, ‘나라’를 뜻하는 라(羅)와 음가(音價)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낙랑(樂浪)은 ‘박다라’로 읽어야하는데, 이는 결국 ‘배달화백(倍達和白)’의 이칭(異稱)인 것입니다.
또 “바다를 건넜다.”라고 하는 것은 황해(黃海)를 가로질러서 오는 월해(越海)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중국대륙 동해안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해외 투자 조정 배달화백 특별구역’인 한사군(漢四郡) 지역에서는 원래 ① 중국 황제의 대리(代理)천독(天毒)인
사람들과 ② 투자를 받는 해외(海外)의 관경사국(管境四國)사람들이 일종의 ‘투자(投資) 시장(市場)’을 하는 곳인데,
제권(帝權)이 바뀌게 되면, 이 대리(代理)천독(天毒)들은 이를 군웅할거(群雄割據)하는 지방세력에 경제적 자원
으로 내놓는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잘 관리하고 있다가, 제도(帝都)를 장악한 사람에게 인계하는 철칙(鐵則)을
지켜왔던 것입니다.
또한 관경사국(管境四國) 역시 이 무주(無主)의 ‘투자 재원(財源)’을 절대로 무력으로 점거하지 않고 오히려 잘 보호
해주는 것을 철칙(鐵則)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대륙의 제권(帝權)이 아무리 바뀌어도 중국대륙 안(內)에서
管境四國은 중립(中立)을 유지하면서 천년동안 공존(共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래 지도는 ‘운영자 컬럼’에서 ‘한서(漢書= 중국의 사서(史書))의 기록으로 본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를 현실지리에
대입(代入)한 지도입니다.
이 지도를 보면, 사기(史記)의 경우는 오늘날 ‘청장하(淸漳河)-자아하(子牙河)’인 고대의 패수(浿水)가 발해(渤海)로
들어가는 해구(海口) 즉 오늘날 천진(天津)을 중심으로 산동반도를 포함해서 크게 원(圓)을 그리는 지역 속에 주로
한사군(漢四郡)이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반면, 한서(漢書)의 경우는 태행형(太行陘) 주변을 - 이는 전통적인 중국의 제도(帝道)인 장안(長安)과 낙양 쪽으로
새외(塞外)에서 접근할 수 있는 여량(呂粱)산맥과 태행(太行)산맥이 나란히 별별(丿丿)자 모양으로 된 곳 사이에 있는
지구대(地溝帶)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 세로로 세워진 타원형(橢圓形) 안에 한사군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나는 까닭은 북부여(北夫餘)에게 패전(敗戰)한 한(漢)이 ‘투자시장’으로 내놓은 땅이 사기(史記)에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한서(漢書)는 사서(史書) 자체가 서한(西漢)때의 기록을 담고 있는데, 서한(西漢)은 ‘한사군(漢四郡)을 통
해서 중국 황제가 해외(海外)에 <조공(朝貢)-공정(工程)-플로우(flow)>를 통해서 투자하는 것을 고구리(高句麗)가
총괄하는 慣例를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써 정리하였기 때문입니다.
태행산맥 동록(東麓)에는 오늘날 수많은 댐(Dam)이 설치되어 있는데, 고구리(高句麗) 시절에는 중국사서에는 이를
‘궁실(宮室)의 지(池)’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갑문을 설치해서 선박이 들락거리기 때문에,
이 태행산맥 동록(東麓)의 전체가 ‘투자 시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지(周知)하다시피, 배달화백은 ‘작은 공동체의 통합’과 ‘큰 공동체의 통합’이 병행되면서 이 두 회의(會議) 사이
에서 ‘말발’이 오가면서 진행됩니다.
‘투자 조정 배달화백’을 일어나는 한사군(漢四郡)의 개념 역시, 중국 황제가 그중에서 고구리(高句麗)가 관장하고
있는 해외(海外)지역에 - 이는 중국대륙을 에워싸는 사해(四海) 밖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 중국 황제가 제후국(諸侯國)으로 부터 세금을 거두어서 투자하는 것을 전담하는 것이 바로 고구리 평양이 있었던
대륙택(大陸澤)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배달화백에서 ‘작은 공동체의 통합’을 하는 호수(湖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한(前漢=서한(西漢)) 때의 역사를 기록한 한서(漢書)에서는 “왜 산동반도를 한사군 영역에서 제외했는가?!”
이는 서한(西漢)이 해외(海外)에 투자할 경우, 고구리(高句麗)가 관장하는 해외지역에 대해서는 태행형(太行陘)에서
주로 ‘투자 시장(市場)’을 형성하면서도 그 ‘투자 조정 배달화백’을주로 대륙택(大陸澤)에서 했지만, ,
맥제(百濟)가 관장하는 해외지역에 대해서 중국 황제가 투자할 경우에는 ‘투자 조정 배달화백’을 고대의 대야택
(大野澤)이라고 칭한 산동(山東)맥제 - 다시 말하면 맥제(百濟)사해(四海) 가운데서 서해(西海)라고 칭한 곳, 오늘날
산동(山東) 남사호(南四湖)인 - 여기서 남(南)자는 “남(南)쪽으로 향하는”이란 의미입니다.
- 남양호(南陽湖), 독산호(獨山湖), 소양호(昭陽湖), 미산호(微山湖)를 통해서 하는 것으로 점차 변해 독립시켰기
때문입니다.
(*)참고: 남사호(南四湖)는 남쪽으로 향하는 호수이기 때문에, 속해있는 4개의 호수를 그 중 하나의 호수(湖水)로
대표적으로 칭할 경우, 맨 남(南)쪽의 미산호(微山湖)로써 총칭(總稱)합니다. (*)
한편, 서한(西漢)이 신라(新羅)가 관장하는 해외지역에 중국 황제가 투자할 경우에는 이를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
지에 있듯이 신라(新羅)3경(京) 가운데서 금성(金城) - 즉 <합비(合肥)-경주(慶州)가 있는 오늘날 소호(蘇湖)에서
주로 ‘투자 조정 배달화백’을 합니다.
이 역시 배달화백에서 투자-조정을 하는 ‘작은 공동체의 통합’을 하는 호수(湖水)였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중국 황제가 제후국으로 세금을 거두어서 삼국(三國)이 ‘해외(海外)지역’에 투자 조정을 하면서도,
중국황제의 투자가 관경사국(管境四國)에 ‘평등한 분배’가 되는 까닭은 배달화백이 ‘작은 공동체의 통합’이 ‘큰 공동
체의 통합’과 병행되면서 말발이 오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큰 공동체의 통합’을 하는 것이 고구리의 대륙택
(大陸澤) -이를 삼국사기에서는 대동강(大同江)이라고 표현합니다. - ‘위’에 태화지(太和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태화지(太和池)는 삼국사기에는 언급(言及)이 되어 있지 않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언급이 된 대택(大澤)인
것입니다.
즉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제사(塔像第四) 대산오만진언(臺山五萬眞身) 조(條)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
니다.
이 기록이 중요한 까닭은 한사군(漢四郡)은 급속하게 낙랑(樂浪), 대방(帶方)의 2군(郡)으로 정리되는데,
중극측 기록을 보면, 대방(帶方)의 위치는 대륙택(大陸澤)의 서(西)녘인 오늘날 석가장시 근처로 표현되고 있는
반면에, 낙랑군의 위치는 그 위치를 확실하게 잡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투자-조정 배달화백’은 호수(湖水)에 ‘배달화백을 할 때 타는 선박’인 태(兌)를 타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대방군(帶方郡)의 기초가 되는 호수(湖水)는 대륙택(大陸澤)이 있지만, 낙랑군의 기초가 되는 호수(湖水)가
사서(史書)와 고지도(古地圖)에서 잘 발견이 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대산오만진언(臺山五萬眞身)
按山中古傳 此山之署名 眞聖住處者 始自慈藏法師 初法師欲見中國五臺山文殊眞身 以善德王代 貞觀十年丙申(唐僧
傳云十二年 今從三國本史) 入唐
: 산중고전(山中古傳)를 살펴보면, 이 산(山)이 - 한한도(韓閑島) 강원도의 오대산(五台山)을 뜻합니다.
- 대산(臺山)이란 이름을 하게 된 까닭은 자장법사(慈藏法師)때부터라고 한다.
처음에 자장법사가 중국(中國) 오대산(五臺山)의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진신(眞身)을 뵙기를 바라서 선덕왕(宣德王)
대(代)인 정관(貞觀)10년 병신(丙申)에 [좌계주: A.D. 636년으로써 선덕왕 5년에 해당함 ]
- 이는 (당승전(唐僧傳)에는 12년이라고 하였으나 삼국본사(三國本史)이 따른다. - 당(唐)나라에 들어갔다.
初至中國太和池邊石文殊處 虔祈七日 忽夢大聖授四句偈
: 처음에 중국(中國)의 (오대산(五臺山)) 근처의 태화지(太和池) 주변에 석불(石佛)로 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있는
주변에서 경건(敬虔)히 기도를 7일 동안 하였는데, 홀연히 대성(大聖)이-문수보살을 뜻함- 꿈속에 나타나 4 구절
(句節)의 게송(偈頌) 주었다.
[해설(解說)]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삼국사기가 쓰여진 후에 집필(執筆)된 사서(史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삼국유사>를 ‘삼국이 남긴 역사’로 착각을 하지만, 제목의 원래 의미는 ‘삼국(三國)이 남긴 일거리
(=사(事))입니다.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쓴 김부식 선생께서 유목제국인 요(遼)와 금(金)의 교체과정을 겪으면서, 유목제국주의
의 피해(被害)를 관경사국(管境四國) 때부터 물려받은 <국가적 기밀>을 숨기기 위해서 ’명확히 기술할 수 없는 부분‘
을 일연(一然)스님께서 ’외부(外部)사람 - 즉 고리인(高麗人) 이외에는 잘 눈치 채지 못하도록 기술한 것이 있음‘을
암시(暗示)하기 위해서 서명(書名)을 일부러 ’남겨진 일거리‘로 한 것입니다.
즉 대산오만진언(臺山五萬眞身)의 내용은 ‘한한도(韓閑島) 강원도의 오대산’에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서술(敍述)
하고 있는 것인데, 실제 일연(一然)스님이 이 대산오만진언(臺山五萬眞身)을 쓴 까닭은 중국(中國)의 오대산 남
(南)녘에 태화지(太和池)가 있었음을 거론(擧論)하면서 “이곳이 바로 관경사국(管境四國)시절 낙랑(樂浪) 즉 ‘박다라’
하는 호수(湖水)인 태화지(太和池)가 있었던 곳이다.”를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일연(一然)스님은 도입부분에서 슬쩍 태화지(太和池)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에, 잘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썼으나 “태화지(太和池)가 어떤 강(江)들을 연결하여서 어느 정도로 규모가 큰 지?”를 살펴보는 것이 ‘남겨진
일거리(遺事’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태화지(太和池)의 화(和)는 한문(漢文)에서 ‘더한다. 붙인다’는 개념 즉 플러스(plus)의 개념이기 때문에,
여러 강(江)들을 크게 덧붙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화(太和)한 강(江)들이 어떤 강들인가?
아래 ‘운영자 컬럼의 지도’에서 중국 산서성의 오대산(五台山) 주변 지도를 보면,
(1) 고대의 살수(薩水)인 오늘날의 호타하(滹沱河)는 오대산 서록(西麓)에서 연원해서 영어의 씨(C)자처럼 돌아서
동류(東流)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北)쪽의 오대산(五台山)과 그 밑의 정남(正南)쪽의 계주산(系舟山)은 마치 둘 다 별(丿)자 모양으로 놓여
있는데, 계주산(系舟山)의 의미는 ‘배(舟)가 잇닿아있는(=계(系)) 산(山)’이란 의미입니다.
이는 계주산(系舟山) 북록(北麓)의 오늘날 하변(河邊)이란 마을에서 동류하는 호타하(滹沱河)를 막는 갑문(閘門)에
쳐져있었음을 추정할수 가 있게 하는 지명(地名)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호타하(滹沱河)의 물을 가로막는 갑문 이름을 <하변(河邊)갑문>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변(河邊)갑문> 서(西)쪽에 태화지(太和池)가 형성되는 관계로 수많은 선박들이 별(丿)자 모양의 계주산(系舟山)
의 서록(西麓)에 배(舟)를 대는 부두(埠頭)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산 이름이 계주산(系舟山)으로 아직도 그 명칭
이 전(傳)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돌(石)로 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있었던 위치는 아래 지도에서 하변(河邊)마을 북녘의 남선사(南禪寺)가 위치한 것
으로 추정합니다.
아무튼 오대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좌대(座臺)가 되는 산이란 뜻인데, 이는 “왜 호타하(滹沱河)를 고구리 시절에
살수(薩水)라고 불렀는가?”와 관련된다고 봅니다.
‘문수(文殊) 보살(菩薩)의 물(水)’이 곧 살수(薩水)인 것이지요.
또한 호타하(滹沱河)가 브이(V)모양으로 ‘고구리 평양성(=현 하북성 안국시)’을 중심으로 꺽어 올라갈 때에 이를 브이
(V)자처럼 받쳐주는 산맥의 흐름을 자비령(慈悲嶺)이라고 칭하였던 것입니다.
‘보살(菩薩)의 물(水)’을 바쳐주는 산맥이니깐 당연히 자비(慈悲)스런 연산(連山)(=령(嶺))인 것이지요.
(2) 그런데 호타하(滹沱河) 본류가 씨(C)자처럼 동류하는 곳의 남(南)쪽에 흔주시(忻州市)가 있는데, 이 흔주시를
지나서 계주산(系舟山) 서록(西麓)을 타고 동북류(↗)하는 호타하 지류가 있는데, 산서성 군사지도(軍事地圖)를
보면 ‘마목하(馬牧河)’로 나옵니다.
흔주시(忻州市)의 흔(忻)은 흔쾌(欣快=忻快)라는 말에서 보다시피, “기뻐하다.”라는 의미로 주로 쓰이지만,
“열다(=開)”라는 뜻도 있습니다.
흔주(忻州)는 서(西)쪽에 ‘운중산(雲中山=云中山)’과 동(東)쪽에 계주산(系舟山)이 곤별(丨丿)모양으로 된 한가운
데의 협곡(峽谷)에 있는 도시인 것입니다.
‘산서성 군사지도’를 보면, 이 흔주시(忻州市) 정남(正南)에는 석령관(石嶺關)이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를 넘어서
남(南)쪽으로 보면, 분수(汾水)가 기역(ㄱ)자 처럼 꺽여서 나가는 곳의 정북(正北)이 바로 석령관(石嶺關)임이 드러
납니다.
그런데, 운중산(雲中山) 서(西)쪽은 여량(呂粱)산맥이 있는데, 이 여량(呂粱)산맥과 운중산(雲中山) ‘사이’에서 분수
(汾水)가 니은(ㄴ)자 모양으로 나오다가 바로 석령관(石嶺關) 정남(正南)쪽에서 기역(ㄱ)자처럼 껵여서 나가는 것입
니다.
이 기역(ㄱ)자 처럼 꺽이는 곳에서 석령관(石嶺關)쪽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지류(支流)’가 서남류(↙)하는 ‘두물머리’
에 양곡(陽曲)이란 도시가 있습니다.
이 한학(漢學)에서 양(陽)은 ‘수지북(水之北)’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결국 양곡(陽曲)은 ‘수지북 곡(水之北 曲’으로
환원(還元)할수 있고, 이는 ‘물(水)이 북류(北流)하게 하는 구비(=곡(曲))이란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양곡(陽曲)에 갑문을 쳐주게 되면, 수위(水位)가 올라가서 이윽고 서(耳亇)를 타고서 석령관(石嶺關)을
넘어서 마목하(馬牧河)-호타하(滹沱河)는 하나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양곡(陽曲) 정남(正南)에 있는 도시가 바로 태원(太原)입니다.
그런데, 분수(汾水)는 태행형(太行陘)을 -이는 태행산맥 지구대(地溝帶)라는 뜻입니다.
- 타고 남류하다가 황하(黃河)가 궤(几)자처럼 돌아서 나가는 궤(几)자의 우하단(右下端)쪽으로 서남류(↙)하게 됩
니다.
즉 마목하(馬牧河)를 소류(遡流)시키는 <흔주(忻州)갑문>과 또 분수(汾水)를 석령관(石嶺關)쪽으로 서(耳亇)를
타게 하는 <양곡(陽曲)갑문>은 분수(汾水)와 마목하(馬牧河)를 연결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오늘날 호타하
(滹沱河)와 분수(汾水)가 이어져서 태화지(太和池)에 ‘크게 덧붙여지는 .즉 태화(太和)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 ‘운영자 칼럼’의 산서성 지도
http://www.coo2.net/files/od111114-1.jpg
(*) 산서성 군사지도(軍事地圖)
http://www.coo2.net/files/san090203-1.gif
그렇다면 태화지는 분수(汾水)와 호타하(滹沱河)를 연결하는 한 가운데의 대택(大澤)만으로 머무는가?
그렇지 않다는데 그 중요성이 있습니다.
(3) 호타하(滹沱河)의 흐름은 서(西)쪽에 항산(恒山)이 동(東)쪽에 오대산(五臺山)이 별별(丿丿)로 되어 있는 사이로
해서 대현(代縣)을 지나면서 서남류(↙)하게 됩니다.
항산(恒山)산맥의 별(丿)자 처럼된 서록(西麓)을 타고 상간하(桑干河)가 동북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항산(恒山)의 서남단(西南端)(↙)은 운중산(雲中山)의 동북단(東北端)(↗)은 서로 직선(直線)으로 이어져
맞물려 있긴 하나 등고선(等高線)의 높이가 낮은 관계로 작은 계곡이 동류하게 되는데, ‘운영자 컬람의 산서성 지도’
를 보면, 북(北)쪽의 대현(代縣)과 남(南)쪽의 평원(平原) ‘사이’에서 니은(ㄴ)자 모양으로 흘러서 호타하(滹沱河)에
합류 장량구(長梁泃)가 있습니다.
장량구(長梁泃)의 의미는 ‘긴 징검다리(=량(梁))여울’이란 의미인 것입니다.
이런 이름은 상간하(桑干河)와 호타하(滹沱河)를 이 장량구(長梁泃)가 서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함을 의미
하는 것인데, 놀랍게도 ‘운영자 컬람의 산서성 지도’에서는 호타하(滹沱河)와 상간하(桑干河)가 자연적인 상태에서
장량구(長梁泃)를 통해서 ‘하나’로 이어지게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서성 군사지도에서 보면, 장량구(長梁泃)가 호타하(滹沱河)와 이어지는 ‘두물머리’에 흔구(忻口)라고 적혀
있습니다. 흔(忻)에는 ‘열다’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는 고대에 갑문이 쳐진 어떤 흔적을 담고 있는 이름임이 분명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흔구(忻口)갑문>이라고 이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 산서성 군사지도에서 장량구(長梁泃)가 상간하(桑干河)와 이어지는 곳을 ‘주정해서 찾아보면’
- 오늘날 철도(鐵道)가 지나가는 관계로 군사지도에서는 하천(河川)표시가 겹쳐서 나타나지 않게 그려져 있습니다.
- 고대 성곽(城郭)이 동서(東西)로 되어 있는 곳에 양방구(陽方口)란 지명이 나타납니다.
이 양방구(陽方口)는 ‘수지북 방구(水之北 方口)’로 환원(還元)할 수 있는데, 그 의미는 ‘물(水)이 북방(北方)으로
가는 입구(入口)’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명 자체가 고대에 갑문이 쳐졌던 기억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양방구(陽方口)갑문>이라고 이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호타하(滹沱河)는 <흔구(忻口)갑문>과 <양방구(陽方口)갑문>을 통해서 장량구(長梁泃)라는 여울을 대하(大河)
로 만들었기 때문에, 상간하(桑干河)와 호타하(滹沱河)가 거대 선박들이 서로 자유롭게 연결되게 한 것입니다.
주지(周知)하다시피 상간하(桑干河)는 영정하(永定河)와 연결되어서 오늘날 천진(天津)에서 황해(黃海)로 연결됩
니다.
<양방구(陽方口)갑문> 북녘에 회인(懷仁)이 있고, 또 그 북녘에 대동(大同)이란 도시가 있는데, 우리민족은 호수
(湖水)를 중심으로 여러 강이 서로 회통할 때에 이를 대동강(大同江)이라고 작명하는 관습이 있는 것입니다.
대동강(大同江)은 전부 3개가 있었던 것입니다.
(1) 한한도(韓閑島) 평양의 대동강은 회해(回海)를 통해서 임진강과 이어지기 때문에 다른 대동강과 구분할 때에
회해(回海)-대동강이라고 구분해서 칭할 필요가 있습니다.
(2) 또 대륙택(大陸澤) 북안(北岸)에 있었던 고구리(高句麗)의 평양성 주변의 강 역시 대동강이라고 하는데,
이는 호타하(滹沱河)(=살수(薩水))와 패수(浿水)를 연결하는 대동강입니다.
다른 대동강과 구분하고 져 할 때에는 대륙택(大陸澤)-대동강이라고 칭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3) 그런데 태화지(太和池)를 통해서 결국 ①호타하(滹沱河) ②상간하(桑干河) ③분수(汾水)가 회통(回通)하게 하기
때문이, 이 대동강을 다른 대동강관 구분할 때에는 태화지(太和池) 대동강이라고 이름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각설(却說)
아무튼 태화지(太和池)가 중요한 까닭은 ‘투자-조정 배달화백’에서 한(漢)나라가 해외(海外) 고구리에 투자할 경우
에는 대륙택(大陸澤)에 한인(漢人)-대리 천독들을 지휘해서 전담투자를 하고, 또 해외 맥제(百濟)에 투자를 할
경우에는 대야택(大野澤)에, 또 해외 신라에 투자할 때에는 ‘금성(金城) 소호(巢湖)’에 투자하지만, 이런 ‘투자’를
통해서 오늘날 말로 분할(分割)-통치 즉 ‘divide and rule’, 옛 표현으로 말하자면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하지 못
하게 하는 방치책을 내재(內在)하고 있었음이 들어나기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달화백을 진행하면, ‘작은 공동체의 통합’보다 ‘큰 공동체의 통합’이 먼저 이루어지는 특성이 나타나는데,
관경사국(管境四國) 가운데 한 나라에는 ‘투자’를 해주고, 다른 나라에는 투자를 안 함으로써 중국황제가 ‘투자를
통한 이간책(離間策)’이 안 먹히도록 하는 것이 결국 태화지(太和池)였고, 태화지를 중심으로 ‘박다라 군(郡)’ 즉
낙랑군(樂浪郡)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한서(漢書)에 표현된 한사군(漢四郡)의 위치가 ‘태화지(太和池)’를 포함하는 즉 태행형(太行陘) 북쪽 지방이
포함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 ‘한서(漢書= 중국의 사서(史書))의 기록으로 본 한사군(漢四郡)의 위치’
http://www.coo2.net/files/han040330-12.gif
(*) 맥제사해(百濟四海)에서 대야택(大野澤)이 서해(西海)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 곳
http://www.coo2.net/files/sa080525-1.gif
(*) 오늘날 산동성 지도 속의 남사호(南四湖)인 남양호(南陽湖), 독산호(獨山湖), 소양호(昭陽湖), 미산호(微山湖)
http://parkchina.com.ne.kr/map/sandong.JPG
태화지(太和池)에서 중국 황제의 해외(海外)투자가 관경사국(管境四國)에 편중되게 한다고 할지라도 이를 ‘큰
공동체의 통합’의 차원에서 조정할 수 있는 ‘해외 투자의 재분배 기능’이 있긴 하지만, 해외(海外)맥제(百濟)에의
전담하는 것은 여전히 대야택(大野澤)인 것입니다.
아무튼 대야택(大野澤)이 한사군(漢四郡) 안에 속하고, 이는 중국 황제(皇帝)로 부터 맥제(百濟)가 해외(海外)로
투자받았음을 인지(認知)해야만 “왜 동한(東漢)의 2대 때 명제(明帝)의 동모제(同母弟)인 유형(劉荊)이 어떤 식으로
반란(叛亂)을 획책하였는지?”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 삼국사기 기록 가운데서 “광무제(光武帝)가 바다를 건너서 낙랑(樂浪)을 토벌(討伐)하면서 살수(薩水)
이남(以南)의 땅을 군현(郡縣)으로 삼았다.(漢光武帝 遣兵渡海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 屬漢)”는 기록에서
광무제(光武帝)의 행군(行軍)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리의 평양성(平壤城)은 - 오늘날 하북성 진주시(晋州市) 즉 대륙택(大陸澤) 북녘에 있었고, 이 평양성 북쪽으로
오늘날 호타하(滹沱河)라고 칭하는 살수(薩水)가 이런(↘__↗) 모양으로 꺽어나가지만, 동북류(東北流)(↗)하는
살수(薩水)는 고대의 패수(浿水)인 오늘날 자아하(子牙河)와 합류하기 때문에, 결국 하수(河水)의 모양새는 영어의
소문자 와이(y)자 처럼 됩니다.
따라서 광무제(光武帝)가 수군(水軍)을 끌고오는 루트(Roote)를 생각해 보면, ①낙양(洛陽)→②위수(渭水)→③황하
(黃河) 해구(海口)→ ④ 천진(天津)까지 해상(海上)에서 북행(北行) → ⑤ 패수(浿水)를 타고 서남행 → ⑥ 대륙택
(大陸澤) → ⑦ 평양(平壤) 으로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①황하(黃河)-②분수(汾水)-③태화지(太和池)의 보다 빠른 태행형(太行陘) 수로(水路)의 코스(course)
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겅입니다.
만약 고구리(高句麗)와 광무제(光武帝)가 적대적인 입장이라면, 이러한 광무제(光武帝)의 행군(行軍)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漢)의 수군(水軍)은 원래 전투력이 허약한데, 고구리의 중심을 우회해서 들어오기 때문에, ‘독안의 쥐’
꼴로 전멸(全滅)당할 위험성이 있음은 물론, 비어있는 제도(帝都)에 대해서 고구리의 기마군단(騎馬軍團)과 난함선
(欄檻船)-군단(群團)들이 태행형(太行陘)을 통해서 직격(直擊)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광무제(光武帝)가 수군을 이끌고 대륙택(大陸澤)으로 들어온 것은 “우리는 고구리에 대해서 적대적 의사가
없다. 오히려 우리 동한(東漢)(=후한(後漢))은 적극적으로 관경사국(管境四國)에게 투자를 함으로써 새외(塞外)
에서 군웅할거(群雄割據)하면서 한(漢)에 대해서 적대적인 세력들을 고구리(高句麗)가 조정해 달라.”는 청원(請願)
을 하는 거국적 시위(示威) 였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광무제(光武帝)는 두 가지 전략 - (1)치지도외(置之度外) 전략과 (2)낙랑(樂浪)승계(承繼)의 전략을 통해서 관경
사국(管境四國)의 협력을 얻어냄으로써 비로서 후한(後漢)을 안정한 기초 위에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한(漢)나라의 ‘투자-조정 배달화백’ 즉 조공(朝貢)공정(工程)플로우(Flow)의 의미를 태화지(太和池)
와 관련시킨 우리의 지리(地理) 비정은 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언(臺山五萬眞身) 조(條) 이외에는 그 흔적이 사서
(史書)에 전혀 없는 것일까?
태화지(太和池)는 결국 상간하(桑干河)가 호타하(滹沱河)를 매개로 해서 결국 분수(汾水)와 이어지게 합니다.
그런데 아래 ‘운영자 칼럼’의 <거란(契丹)지리지도(地理之圖)>를 보면, 상간하(桑干河)가 상류에서 대현(代縣)과
흔주(忻州)를 지나는 오늘날의 호타하(滹沱河)가 꺽음표(>)처럼 북류해서 상간하(桑干河)와 이어짐과 더풀어 그
밑에 분수(汾水)가 지나는 태원(太原)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①상건하(桑干河) ② 호타하(滹沱河) ③ 분수(汾水)가 하나로 이어짐이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래 <거란(契丹)지리지도(地理之圖)>에서 분수(汾水)가 태원(太原)을 거쳐서 궤(几)자처럼 흐르는 황하(黃河)에
연결되게 그리지 않은 까닭은 “이 지도가 모든 물은 중국(中國)제도를 향해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거란(契丹)이
장악한 지역>으로 흐른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떼어놓은 것’입니다.
이런 점을 이해하고 보면, 이 <거란(契丹)지리지도(地理之圖)>는 태화지(太和池)를 통해서 ①상건하(桑干河)
② 호타하(滹沱河) ③ 분수(汾水)가 하나로 이어짐을 표현한 지도인 것입니다.
(*) <거란(契丹)지리지도(地理之圖)>
http://www.coo2.net/files/te090916-1.gif
즉 <거란(契丹)지리지도(地理之圖)>에서도 태화지(太和池)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려져 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 각설(却說)
이제 태화지(太和池)가 실려있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대산오만진언(臺山五萬眞身) 조(條).>를 마주 살펴보기로
합니다.
覺而記憶 然皆梵語 罔然不解 明旦忽有一僧 將緋羅金點袈裟一領 佛鉢一具 佛頭骨一片 到于師邊 問何以無聊 師答以
夢所受四句偈 梵音不解 爲辭
: (꿈에 문수보살이 보여준 범어(梵語)게송(偈頌)을 보고 깨어난 자장법사(慈藏法師)는) 깨어나 기억(記憶)이 있었
으나 모두가 범어(梵語)였기 때문에, 해독치 못하고 망연(茫然)해 했다.
그러던 차에 홀연히 한 승려가 ‘비단에 금박이 점점(點點)이 있는 가사(袈裟)’를 하나와 바릿때(=발(鉢))하나와 ‘부처
님의 머릿뼈 한조각’인 (사리(舍利))를 가지고 와서 자장법사(慈藏法師)에게 주변에 도착해서 “어찌해서 무료(無聊:
=심심하게)하게 지내는가?”하고 물었다.
자장법사는 대답하기를 꿈에 문수보살(文殊菩薩)께 4구절의 게송(偈頌)을 받았으나 범어(梵語)로 된 문장이므로
해독치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僧譯之云 呵囉婆佐曩 是曰了知一切法 達㘑哆佉嘢 云自性無所有 曩伽呬伽曩 云如是解法性 達㘑盧舍那 云卽見盧舍那
: 그 승려(僧侶)가 해석해서 말하기를 “①아라파좌낭(呵囉婆佐曩)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요지(了知)하였다는)는
말이요. ②달예치거야 (達㘑哆佉嘢)는 ’스스로의 본성(本性)은 원래 소유(所有)된 것이 없다.‘라는 것이요.
③낭가희가낭(曩伽呬伽曩)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깨달았다’는 뜻이고,
④달예노사나(達㘑盧舍那)란 (오랜 수행으로 무궁무진한 공덕(功德)으로 나타나신 원만(圓滿)한 부처님)인 ‘노사나불
(盧舍那佛)을 곧 보게 되리라.’라는 뜻이니라.”라고 했다.
[해설(解說)]
위 문단(文段)은 일연(一然)스님이 태화지(太和池)에서 하는 일이 한(漢)나라의 중국 황제가 제후국(諸侯國)으로
부터 받은 세금으로써 ‘투자-조정 배달화백’으로 관경사국(管境四國)에 해외지역에 투자함에 있어서 ‘큰 공동체의
통합’을 함을 ‘4개의 게송(偈頌)’을 빌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화백은 ‘사회적 명상’입니다. 즉 태(兌)를 타고 나간 사람들의 정견(政見)을 - 여기서는 투자(投資)의사와 수용(收用)
의사를 뜻함 - 호수(湖水)가의 천독(天毒)들이 공유(共有)하면서 아이디어(Idea)를 성숙시켜 나가는 회의방식인 것
입니다.
①첫번째 게송(偈頌)에서는 이런 투자(投資)-조정을 통해서 국제적(國際的)거래에 대한 예상결과를 요지(了知) -
즉 ‘끝내주게(=종료(終了) 앎’이 일어남을 표현한 것입니다.
②두번째 게송(偈頌)은 투자(投資)하는 세금이 본래 중국 황제의 소유(所有)도 아니고, 또 투자환수해 주는 댓가
역시 관경사국(管境四國)의 소유(所有)가 아니라, 단지 인류(人類)의 것임을 나타낸 것임을 은유(隱喩)한 것입니다.
③ 세번째 게송(偈頌)은 태화지에서 일어나는 것이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깨달았다’”는 말을 통해서 ‘회의(會議)
과정’의 결과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④ 네번째 게송(偈頌)에 보면, 노사나불(盧舍那佛)이 등장하는데, 지금도 법당(法堂)에 들어가면 삼신불(三身佛)이
모셔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가운데에 ‘빛나는 우주’를 상징하는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가운
데에 모시고, 바라보는 입장에서 왼쪽에 보신불(報身佛)로써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오른 쪽에 응신불(應身佛)로써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모십니다.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중심에 모실 경우도 있음)
보신불(報身佛)은 오랜 수행으로 무궁구진한 공덕(功德)이 원만(圓滿)하게 나타내서 ‘부처(깨달은 자)’로써 중생(衆生)
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나타나시는 분을 뜻합니다.
이는 결국 <투자 조정하는 배달화백>의 호수인 태화지에서 중국황제에게 ‘웃돈’을 되돌려주는 것을 보신불(報身佛)로
상징하는 것입니다.
고리조(高麗朝)때에는 배달화백을 ‘불교적인 풍습’으로 했기 때문에, 일연(一然)스님께서 위와같은 4개의 게송(偈頌)
을 태화지(太和池) 근처에서 자장법사께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직접내린 것을 받았다.”라고 하면, “아~ 이 태화지
(太和池)에서 한 일이 투자-조정 배달화백이 일어난 것을 의미하는구나!!”라고 금시 눈치챌 수 있게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은 불교에서 ‘지혜 제일’로 칩니다.
이는 한사군(漢四郡)의 ‘조공(朝貢) 공정(工程) 플로우(Flow)’를 주관하는 태화지(太和池)의 운영이 ‘중화(中華)제국
주의의 피해’를 승화시키는 ‘세계 경제 운영’의 ‘지혜로운 제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이런 ‘눈치챔’은 어디까지나 “배달화백이 무엇인지? 또 한사군(漢四郡)의 왜 설치되었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눈치챌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일연(一然)스님은 삼국사기에서 기밀(機密)로 하던 것을 ‘알아야할 사람에게는 공개하되, 몰라야할 사람에게는
계속 모르게 하는 방법’으로 그 기밀을 ‘환하게 밝혀낸 것’입니다.
仍以所將袈裟等 付而囑云 此是本師釋伽尊之道具也 汝善護持
: 거듭해서 가사(袈裟)등등을 주려하면서 부탁(付託)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근본된 스승 석가세존(釋迦世尊)이
(친(親)히) 사용하던 도구(道具)이다. 너는 이를 잘 지키고 간수하여 지니라.”고 하였다.
[해설(解說)]
이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생전에 입던 가사(袈裟)와 또 바릿대, 그리고 두개골 뼈
에서 얻어진 사리(舍利)가 “태화지(太和池) 근처의 문수보살 석조(石造) 주변의 절(寺)에 있었다.”는 것은 불교적인
신앙이 있었던 시절에는 그 값은 어마어마한 것임을 일단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중국황제로 부터 투자된 것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태어나신 북인도의 카필라국 (Kapilavatthu, 迦比羅城)
지역에 ‘투자되고’ 이로부터 반대급부의 ‘투자회수’가 되는 것을 막대한 자금으로써 구입하지 않는 한, 태화지 근처
에 존재하고 있을 수 없다는 점 또한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석가족(釋迦族= Sakya)인데, 어머니이신 마야부인의 친정 쪽으로 해산(解産)키 위해 여행하는 도중에
‘룸비니(Lumbini)동산’에서 태어나셨는데, 아래 <불교 지도>를 보면 ‘히말리야 산맥’ 바로 밑에 석가족(釋迦族=
Sakya) 지역이 있고, 빨간 글씨로 ‘룸비니(Lumbini)’가 적혀 있는데, 부왕(父王)인 정반왕(淨飯王)의 가필라성
(Kapilavatthu, 迦比羅城)이 ‘룸비니(Lumbini)’의 바로 서남(西南)(↙)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룸비니(Lumbini)’의 동(東)쪽에 보면, 어떤 강이 <역(逆)-에스(S)자>모양으로 - 이는 위가 [⊃]로 아래가
[씨(C)]자 모양으로 된 것을 뜻합니다. - 히말리야 산맥을 뚫고 나오고 있는데, <갠지스 강 유역(流域)(Ganges
river Basins)지도>를 보면, 이 강이 코시-강(Kosi river)으로 나옵니다.
이 코시-강(Kosi river)은 히말리야 산맥 북록(北麓)에서 아뇩다지 즉 마나스 호(湖)(Manas Lake)에서 동류(東流)
해나가는 마천하(馬天河)-브라흐마푸트라 강(Brahmaputra river) 바로 정남(正南)쪽에서 병행해서 동류하다가
갑자기 기역(ㄱ)자로 꺽이어서 에스(S)자 모양으로 돌아서 갠지스 강에 합류하는 강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逆)에스(S)자>의 하단인 씨(C)자에서 서남류(↙)하면서 히말리야 산맥을 뚫고 나가는 북록(北麓)
을 ‘콜리야(Koliya)지역’이라고 하는데, 이는 코리 족(高麗族)(Koli)의 지역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 코시-강(Kosi river)이 히말리야 산맥을 서남류(↙)하면서 뚫고 나오는 북안(北岸)지역이 ‘콜리야(Koliya)지역’
로 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는 <불교 지도>
http://www.buddhanet.net/e-learning/buddhistworld/mapbud.htm
(*) 코시-강(Kosi river)가 잠시 브라흐마푸트라 강(Brahmputra river) 남(南)쪽에서 동반(同伴) 동류(東流)(→)
하다가 ‘히말리야 산맥’을 뚫고 나옴을 볼 수 있는 <갠지스 강 유역(流域)(Ganges river Basins)지도>
http://en.wikipedia.org/wiki/File:Ganges-Brahmaputra-Meghna_basins.jpg
이런 사실은 석가(釋迦)족(族)이 몽골인 가운데서도 ‘코리 족’이라는 학설이 있는데, 결코 허탄(虛誕)한 학설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학설은 영국의 저명한 인도 연구의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Vincent A Smith)>와 또 인도 역사학자인 퍼시발
스피어(Percival Spear)에 의해서 계속 주장된 것인데, 석가족은 몽골리안 중에서 네팔지역에서 남(南)쪽으로
이동한 ‘고리 족’이라는 <석존 몽고인설>인 것입니다.
(*) 석가족이 고리 족이라는 학설(學說)을 소개한
(1) ‘똥그라미’님의 <빈센트 스미스(Vincent A Smith)>를 인용한 블로그(Blog)
http://blog.daum.net/dongloco/8750616
(2) 퍼시발 스피어(Percival Spear)를 인용한 ‘아양황호기 님’의 블로그(Blog)
http://blog.daum.net/ak8118/439
위 두 학자의 저술(著述)을 좌계는 아직 직접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석가족이 고리 족이리는 근거는 위 불교 지도
에 드러나듯이 코시-강(Kosi river)이 히말리야 산맥을 뚫고 나오는 <역(逆)-에스(s)자>의 하단인 씨(C)자 모양
으로 도는 곳 북안(北岸)이 ‘고리 족의 땅’을 의미하는 ‘콜리야(Koliya)지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가장 큰
이론적인 근거로 하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리는 우리 사서(史書)와 ‘각 지역에 흩어진 전설(傳說)’을 종합해서 “언제 부터 고리-족이 코시-강(Kosi river)쪽
으로 해서 북인도 지역에 유입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부도지(符都誌)에 의하면, 12환국(桓國) 이전에 마고(麻姑)대성(大城)이 있는 티베트의 카일라스(Kailas) 산(山)
(=수미산) 근처에서 ‘복본(復本) 문명’이 여러 종족으로 나뉘면서 흩어져 나갔는데, 구다천국(句茶川國)의 ‘젊은
환인’ 거발환(居發桓)께서 배달국(倍達國)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웅가(熊家)-삼각지대를 형성하면서부터 티베트
(Tibet)지역에 재(再)-진입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즉 (1) ‘썩는 고무’가 나는 비서갑(斐西岬)계곡의 차릉(岔陵)과 (2) 고구리의 월해(月海)인 바이칼(Baika)에서 앙가라
강으로 물이 나가는 현 이루쿠츠크(Irkutsk)의 ‘헬륨 개스’가 나는 월지국(月漬國)과 (3) 천혜적인 말(馬)사육지인
마천하(馬泉河)에서 연원한 브라마푸트라 강 (Bramaputra river)의 남(南)쪽에 있는 <얌드록초(Yamdrok tso, =
(羊卓雍錯)>에 자리잡은 단국(丹國)[=단국(檀國))을 연결하는 웅가(熊家)-삼각지대를 형성하면서 ‘하늘을 날수 있는
기본 자원’을 확보합니다.
즉 ①썩는 고무 속에 ②헬륨 개스를 집어넣은 부구(浮具)에 ③ 단국(丹國)의 말(馬)들이 멍에를 메고 도는 힘으로
천아선(天鵝船)이 운영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바이칼(Baika)에는 우리 사서(史書)에서 거발환(居發桓) 환웅(桓雄)으로 일컫는 분이 <알혼 섬(Olkon island)>의
‘숫소’로 이름을 떨친 사냥꾼 ‘코리도이(Khoridoy)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코리도이‘에게 <바르구진 섬 (Barguzin
island)>의 백조(白鳥)가 날아와서 결혼해서 코리(Khori)족 11 부족(部族)을 낳았다.”라는 전설(傳說)이 있습니다.
이 전설(傳說)에서 백조(白鳥)는 바로 선패국(鮮稗國)의 ‘젊은 여(女) 환인(桓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이칼 주변에서 코리(Khori)족 11 부족(部族) 가운데 하나는 티베트의 <얌드록초(Yamdrok tso>
- 즉 양탁옹조(羊卓雍錯) 호수(湖水) 근처로 천아선(天鵝船)을 태고 대거 이동해서 이 지역에 고리 족이 웅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배달국(倍達國)을 거치면서 이 <얌드록초(Yamdrok tso> 성호(聖湖)주변을 지하(地下)에서 ‘용암여신 바나무허허의
마음’인 ‘북두칠성 밑에 그네타는 여신 처쿠마마’의 성수(聖水)가 ‘큰 우물’처럼 올라오기 때문에 ‘우물 정(井)’ 속에
‘솟는 점’을 첨가한 <단(丹)>의 나라인 단국(丹國)으로 칭해졌던 것입니다.
이 단국(丹國)과 음가가 같은 단국(檀國)으로 칭해지면서 점점 고리(Khori)족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단군왕검(檀君
王儉)의 부친이신 거불단(居弗檀)께서 배달국의 천왕(天王)에 오르시기 전(前)에 단국(檀國)을 통치했고, 또 왕검
께서는 고조선을 열기 이전에 이 단국(檀國)의 섭정(攝政)일을 볼 정도로 <얌드록초(Yamdrok tso> 성호(聖湖)주변
에는 고리(Khori)족들이 계속해서 번성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티베트의 성호(聖湖)인 양탁옹조(羊卓雍錯) 호수(湖水) 즉 <얌드록초(Yamdrok tso> 성호(聖湖)와 “코시-
강(Kosi river)와의 지리적 관계가 어찌되어 있는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시-강(Kosi river)을 한문(漢文)으로 쓸 때에는 과서하(戈西河)라고 합니다.
이는 코시(Kosi)의 음가(音價)가 과서(戈西)와 유사한데다가 과(戈)가 ‘기역(ㄱ)자’ 강으로 흐르면서 양탁옹조
(羊卓雍錯) 호수(湖水)의 서(西)쪽에서 남류해서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원래의 코시-강(Kosi river)이 히말리야 산맥을 막 뚫고 나갈 때에는 <역(逆)-에스(S)자>의 하단(下端)이 영어의
씨(C)자처럼 돌아나갔는데, 이 코시-강(Kosi river)의 이칭(異稱)이 아룬-강(Arun river)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현재의 흐름은 아라리아(Araria)지역을 통해서 동남남(東南南)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중국측 지도에는
이 강을 아룬-강(Arun river)의 중국어 음가로 표현하여 아윤하(阿潤河)라고 표기하기도 합니다.
아래 지도를 보면 과거의 코시-강이 현재의 코시 강의 흐름의 분기점이 되는 곳에 ‘Breach point’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 브릿츠(Breach)는 제방(堤防)이 붕괴할 때 잘 쓰는 표현입니다.
즉 이런(⊃) 모양 혹은 기역(ㄱ)자 모양으로 히말리야 산맥을 막 뚫고 나온 곳에는 과거에는 갑문이 쳐져있었던 것입
니다.
갑문을 쳐준 이유는 선박을 탄 채로 코시-강(Kosi river)를 타고 히말리야 산맥을 통과해서 그대로 티베트(Tibet)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갑문이 쳐지게 되면 자연 호수(湖水)가 형성되고, 그 북안(北岸)에 고리-족들이 많이 사는 ‘콜리야
(Koliya)지역’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갑문 이름을 ‘콜리야(Koliya) 갑문’이라고 이름할 수 있습니다.
상세한 등고선(等高線)이 나타난 지도(地圖)를 아직 찾진 못했지만, ‘콜리아(Koliya)갑문’ 북(北)쪽으로 코시-강
(Kosi river) 중간에도 간간(間間)이 갑문이 쳐져서 배(船)를 탄 채로 히말리야 산맥을 뚫고 티베트(Tibet)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처럼 ‘코시-강(Kosi river)’이 히말리야 산맥을 뚫고 나가는 지역에 갑문을 설치한 분은 단국(檀國)출신인 단군
왕검의 부친인 거불단(居弗檀)께서 배달국의 마지막 천왕(天王)으로 계셨던 때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코시-강’에 쳐진 갑문들은 배달국(倍達國)말기 고조선(古朝鮮) 초기(初期)에 이미 잘 발달되어 있었으나,
고조선(古朝鮮) 중기(中期)때 한번 어떤 이유에 의해 철수 되었다가, 해모수(解慕漱) 성제(聖帝)때부터 다시 설치
되어던 것입니다.
이 ‘코시-강’에 쳐진 갑문들이 최종적으로 철회된 것은 이 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고리 족이 조선(朝鮮)으로 철회
하면서도 갑문 역시 철회된 후인 것입니다.
이 때가 고리(高麗)말(末)인 것입니다.
고리(高麗)말에 ‘캄보디아 왜(倭)’가 한한도의 구고(九臯)-금성호(金城湖)의 ‘경병(炅兵)사령부’를 급습하면서 ‘주석
(朱錫)과 고무’의 유입을 차단시키자, 경병(炅兵)사령부에서는 <은정(銀釘)철(鐵)>로 대체하기 위해서 부상국
(扶桑國)지역에 재(再)-진출(進出)하게 되는데, 이런 진출로써 한한도(韓閑島)의 갑문(閘門)-대박(大舶)이 ‘비어
있게 되자’, 이를 메우면서 또한 부상국(扶桑國)과 꾸준한 왕래를 하던 단문(甘文)국(國)에서 코시-강(Kosi river)에
설치되었던 갑문대박과 운영요원들이 대거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 각설(却說)
아무튼 코시-강(Kosi river)가 히말리야 산맥을 막 뚫고 나온 곳의 ‘첫번 째’ 콜리야(Koliya)갑문까지도 고리(高麗)
말(末)때 철회되면서 그 주변의 제방을 튼튼하게 설치하였는데, 조선조 중기(中期)까지는 이 제방(堤防)이 그런대로
붕괴치 않았으나 1736년( 영조(英祖) 12년) 부터는 자주 붕괴하게 된 것으로 오늘날 지리조사에 나타나 있는 것입
니다.
이런 붕괴과정은 씨(C)자로 돌아가는 곳을 곤(丨)자로 강물이 흐르게 하였지만, 흥미롭게도 히말리야 산맥을 뚫고
나온 퇴적토(堆積土)를 싣고 범람하기 때문에, 원래의 코시-강(Kosi river)가 영어의 씨(C)자 처럼 흐르는 쪽으로
점차 서(西)쪽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조사보고 되고 있습니다.
퇴적토가 강물의 흐름을 바꾸는 것은 대하(大河)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코시-강(Kosi river)= 과서하(戈西河)]이 [아라리아-강(Araria river)=아윤하(阿潤河)]으로 변한 과정을 보여
주는 지도
http://www.gits4u.com/water/kosi1.gif
(*) Kosi River Flood Map
http://riseupindia.files.wordpress.com/2008/08/flood-3.jpg
(*) 영조(英祖) 12년(1736년) 이후의 7개의 코시-강의 범람 ((Sapta) Kosi River over)
http://www.greenstone.org/greenstone3/sites/nzdl/collect/envl/archives/HASH01a1/c382d392.dir/80a0
2e0s.gif
아무튼 코시-강(Kosi river)은 잦은 붕괴과정을 겪어서 원래 코시-강(Kosi river)가 흐르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이 코시-강(Kosi river)의 이칭(異稱)인 아룬 강(Arun river)의 중국어적인 표현인 아윤하(阿潤河)로 나타내고,
또 영조(英祖) 12년(1736년)때의 흐름으로 강의 흐름을 그린 ‘구닥다리 지도’는 현재 <중국측의 서장(西藏) 지도
(地圖)>에서만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아래 <서장(西藏) 지도(地圖)>를 보면, 브라흐마푸트라(Brahmaputra) [=포납마보특랍하(布拉馬普特拉河]의
상류인 <야룽창포-하(河)(Yanlung Tsangpo=雅魯藏布河)>가 있습니다.
(*)참고: 브라흐마푸트라 강(Brahmaputra river)는 크게 이 강이 이런(⊃)모양으로 히말리아 산맥을 돌아서 우회
하는데, 브라흐마푸트라 강(Brahmaputra river)은 주로 히말리야 산맥 밑에서 갠지스 강(Ganges river)와 합류키
위해 서류(西流)하는 부분을 칭하고, 히말리야 산맥 북록(北麓)에서 동류하는 곳은 <야룽창포-하(河)(Yanlung
Tsangpo)>로써 구분해 주고 있습니다. (*)
그런데 아래 지도에서 동류(東流)하는 아로장포(雅魯藏布)의 <포(布)>자가 있는 곳을 보면, <납자(拉孜>라는 도시
가 있는데, 이는 라쯔(Lāzī)를 한자 음가로 옮긴 것입니다. (티페트 어(語)로는 ‘라체 쫑’)
이 <납자(拉孜> 정남(正南)에서 코시-강(Kosi river)가 기역(ㄱ)자로 꺽여서 남류(南流)하는데, 강 이름을 아윤하
(阿潤河=Arun river)로 그려져 있는데, 이 때의 강 흐름은 1736년때의 강 흐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납자(拉孜>의 도시의 동(東)쪽에 양탁옹조(羊卓雍錯) 호수(湖水)가 ‘하늘 거위(천아(天鵝)’ 모양 혹은 ‘전갈
모양’으로 있는데, 강물의 흐름을 따라서 우하단(右下端)의 스케일(Scale)로 재어보면 <납자(拉孜>와 양탁옹조
(羊卓雍錯)의 거리는 약 250Km 정도됩니다.
그런데 <납자(拉孜>에서 오늘날 도로(道路)가 난 곳이 상대적으로 높은 곳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이를 따라서 기역
(ㄱ)자로 코시-강(Kosi river)가 꺽이는 곳을 가기 위해서는 꺽음표(>)처럼 살가(薩迦)란 도시를 지나서 간다고 할지
라도, 그 길이가 대략 100Km 밖에 안됩니다.
(*) <납자(拉孜>. 아윤하(阿潤河=Arun river), 양탁옹조(羊卓雍錯) 호수(湖水)를 볼 수 있는
<서장(西藏) 지도(地圖)>
http://parkchina.com.ne.kr/map/seojangj.JPG
중요한 것은 거불단(居弗檀) 환웅(桓雄)께서 오늘날 <납자(拉孜>에서 꺽쇠(>)모양으로 살가(薩迦)를 통과해서
코시-강(Kosi river)가 기역(ㄱ)자로 꺽이는 변곡점(變曲點)까지가 불과 100Km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두 강 즉
아로장포(雅魯藏布) 와 코시-강(Kosi river =과서하(戈西河))을 연결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민 <납자(拉孜>에서 ‘히말리야 산맥’ 북록(北麓)에서 동류했다가 남록(南麓)으로 돌아서 갠지스 강에 합류
하는 ‘브라흐마푸트라(Brahmaputra river)’를 타고 선박을 움직이는 것은 지나치게 우회(迂回)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납자(拉孜>는 한문(漢文)의 뜻으로 보면 ‘데려오기 위해서(=납(拉)) 힘쓰는 것(=힘쓸 자(孜))란 의미입니다.
또 <납자(拉孜>에서 꺽쇠(>)모양으로 돌아 나오는 살가(薩迦)란 도시는 살가야(薩迦耶)의 줄임말인데, 이는 범어
(梵語) 사트가야(satkaya)를 옮긴 것인데, 그 뜻은 ‘모아서(=취집(聚集) 있게하는 것(有之) 것의 뜻인 것입니다.
(*) 근거(根據)
薩迦耶,梵語satkaya,又作薩迦邪、颯迦耶。迦耶,梵語kaya,聚集
之義,意譯作身。薩是有之義,又含虛偽、移轉之義。見為梵語「達利瑟致」之意譯。故
薩迦耶見總譯作有身見,(*)
이는 <납자(拉孜>에서 <야룽창포-하(河)(Yanlung Tsangpo=雅魯藏布河)>에 갑문을 쳐서 수위(水位)를 높혀서
이를 코시-강(Kosi river)쪽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즉 납자(拉孜>하기 위해서 오늘날 살가(薩迦)로 해서 - 다시 말
하면 ‘없는 강을 있게 해서’ 코시-강(Kosi river)쪽으로 이어지게 하는 수로(水路)를 까마득한 고대에서 부터 유지
해오다가 고리(高麗) 말 때, 이 갑문을 비롯한 모든 수리시설이 철수된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는 지명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배달국(倍達國) 말기에 이미 아로장포(雅魯藏布)강은 코시-강(Kosi river)과 운하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고조선(古朝鮮)초기(初期)를 거치면서 고리(Khori)족들이 이 코시-강(Kosi river)를 따라서 점차 북인도 지역으로
흘러들어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코리 족’의 이동에서 ‘석가 족’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입니다.
즉 ‘석가 족’자체가 ‘코리 족’의 일종인데, 아래 불교지도에 보다시피, 석가모니의 모친(母親)께서는 친정(親庭)인
‘사카(Sakya)’지역으로 가기 위해서 ‘코시 강(Kosi river) 강변’을 따라서 결국 룸비니(Lumbini)쪽으로 방향을 꺽
어서 가는 도중에 출산(出産)을 하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출산(出産)과정에서 “장차 태어나는 아이가 왕위(王位)를 이으면, 세상을 평화통일하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豫言)이 당시에 광범위하게 믿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 코시 강(Kosi river)-룸비니(Lumbini)-‘사카(Sakya)’지역으로 가는 ‘마야부인의 길’을 추측케 하는 불교지도
http://www.buddhanet.net/e-learning/buddhistworld/mapbud.htm
그런데, 이런 ‘전륜성왕의 재(再)-도래(到來)에 대한 사회적 믿음’은 석가(釋迦)족(族) - 즉 코리(Khori)족의 일파
(一派)인 ‘사카(Sakya)족(族)’에 널리 있었던 믿음이고, 이는 “왜 고구리의 민중원(閔中原)이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의 분수령(分水岺)인가?!”를 설명하는 단서(端緖)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 회에는 인도 역사에서 베다 시대 때에 있었던 ‘<전륜(轉輪)성왕(聖王)>의 시대’와 우리 역사와의 깊은 연관
관계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南堂] <閔中原>-②, 금륜보(金輪寶)가 고조선으로 간 까닭은?
석가(釋迦)-족(族)은 엄격히 말하자면, 석가모니의 모친(母親)의 친정(親庭)인 ‘사카(Sakya)’지역의 종족이기
때문에, 결국 부처님의 모계(母系)의 혈족이 ‘코리 족’인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모후(母后)이신 마야 부인께서는 코시-강(Kosi river)을 따라서 서북류(↖)해 올라가다가 이 강이 영어의
씨(C)자처럼 돌아가기 시작하는 곳에서 계속 서북류(↖)하면서 ‘룸비니(Lumbini)지역’을 통해서 ‘사카(Sakya)’지역
으로 가려는 도중에 결국 출산(出産)을 하게 됩니다.
이런 ‘마야 부인의 행열도’는 강한 인상(印象)을 주어서 후세(後世)에 부조(浮彫)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룸비니(Lumbini)에서 마야부인께서는 ‘흰 코끼리’가 태(胎)속에 들어오는 꿈을 꾸게 되는데, 이는 ‘석가 족’
에는 왕위(王位)를 이으면 세상을 평화롭게 통일하시는 ‘전륜성왕’이 되거나 출가(出家)하면, 부처님(=각자(覺者))
이 되는 ‘조짐(兆朕)’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마야부인께서 “미래의 전륜성왕 혹은 부처님을 잉태하였다.”는 태몽(胎夢)을 부조(浮彫)한 것을 ‘탁태영몽도
(托胎靈夢圖)’라고 칭하는데, 이 역시 즐겨 부조(浮彫)되는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 ‘마야 부인의 길’을 짐작할 수 있는 <불교 지도>
http://www.buddhanet.net/e-learning/buddhistworld/mapbud.htm
(*) 탁태영몽도(托胎靈夢圖)
http://cafe.buddhapia.com/community/dajung/files/16-1dream.jpg
(*)참고: ‘마야부인의 행열도’가 있는 곳
www.buddhapia.com/_Service/_ContentView/ETC_C...
그런데, ‘부처님이 탄생된 때’는 불기(佛紀)가 부처님 입멸(入滅)로 부터 계산하고, 또, 일반적으로 80년을 (부처님
생존기간)으로 치기 때문에, 탄생한 때를 (기원전 624년경)으로 계산합니다.
문제는 “마야부인이 잉태(孕胎)한 아이가 왕위(王位)를 이으면, 전륜성왕이 되고, 또 출가(出家)하면, 부처님이 될
것이다.”는 것은 티베트에서 코시-강(Kosi river)를 타고 남류(南流)한 코리-족의 일반적인 ‘사회적 기다림’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출산(出産)후에 친견(親見)하러온 <아시타(阿私陀 Asita)>仙人 께서도 “왕위(王位)를 이으
시면, 전륜성왕이 되시고, 출가(出家)하시면 부처님이 되리라.”는 똑같은 예언을 하시면서 자신의 수명(壽命)이
다해서 이런 ‘우주적 대사건’을 못 보는 일을 한탄한 것을 통해서 이런 예언이 <코리-족>에 번져나간 메시아 사상이
하나의 ‘사회적 기다림’ 속에 이루어졌음을 느낄 수 있게 합니다.
(*) 부처님의 탄생과 <아시타(阿私陀 Asita)>선인의 예언을 소개한 블로그
http://blog.daum.net/thfsodma57/6791
여기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은 차크라바르티 라자(Cakra varti raja)를 -한문(漢文)으로는 작가라발랄저(斫迦羅跋
剌底) 혹은 자가월라(遮迦越羅) 등으로 표기(表記)- 의역(意譯)한 말입니다.
전륜성왕은 ‘사회적 공덕(功德)’을 쌓는 수행(修行)을 하게 되면, ‘하늘에서 금륜보(金輪寶) - 즉 <금(金)빛 수레바퀴>
가 빙글 빙글 돌면서 성루(城樓)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바퀴를 따라가면, 뭇 왕(王)들이 승복(承服)하여 ’평화통일‘을
이루게 하는 제왕을 뜻합니다.
금륜보(金輪寶)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수레바퀴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드물게는 ‘비행접시’처럼 그려진 경우
도 있습니다.
(*) 금륜보(金輪寶)가 ‘비행접시’처럼 그려진 <베제클리크 사원 42굴 벽화>
http://ufoetland.com/images/b-006.jpg
(*) 퍼온 곳 주소: http://ufoetland.com/bu2.htm (*)
아무튼 금륜보(金輪寶)는 하늘에서 ‘회전(回轉)하면서 굴러가는 수레바퀴 형태로 된 비행체(飛行體)’인데, 왜 “이런
금륜보(金輪寶)가 굴러가서 도달하는 곳(=전(轉))마다 ‘평화적인 통일’현상이 일어난다.”는 전설(傳說)이 고대 인도
인들이 철저히 신봉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배달화백 때 사용되는 ‘영성문(靈星門)이 달린 금성(金城)’ - 즉 <리쉬(Rishi)의 성(城)>은 초대형의 자이로스코프
(gyroscope)를 외곽에 두르고 그 밖을 ‘축구공 모양의 32면체 부구(浮具)’에 쌓인 상태에 있게 되고, 이를 관경사국
(管境四國) 시절에는 환도(丸都)라고 칭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이런 환도(丸都)가 육지(陸地)나 바다에서 굴러 갈 때에는 ‘환도(丸都)를 에워싸는 복대(腹帶)’를 두르고
이를 연결해서 끌고나가는 비행(飛行) 물체가 필요한데, (1) 구다천국(句茶川國) 근처로 올수록 봉황(鳳凰)의 모습
을 한 비행물체로 묘사되어 있고, (2) 티베트(Tibet)지역으로 오면, 이 비행물체가 천아선(天鵝船)으로 묘사되어
있는 반면, (3) 인도대륙 쪽에서는 바로 금륜보(金輪寶)로 묘사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도 고대사’와 우리 역사와의 상관관계를 까마득한 고대에서부터 점검(點檢)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인도인 스스로가 쓴 최초의 사서(史書)인 라자타랑기니(Rajatarangini)는 서기 1148년(高麗 毅宗 2년)에
의해서 겨우 완성된 것입니다.
인도는 베다(Veda)나 마하바라타(Mahabharata) 같은 서사시(敍事詩)속에 ‘신화(神話)와 역사’가 혼재된 상태의
기록(記錄)이 내려오고, 사서(史書)의 기록 자체가 늦게 출현하였기 때문에, ‘역사적 연관관계’를 분명하게 추정하기
힘들게 합니다.
(*)참고: 라자타랑기니(Rajatarangini)에 대한 다움 백과사전 설명.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5r3682a
(*)참고 : [스크랩] ② 11세기 이전 인도에는 역사서가 없었다 (사서의 나라 중국, 서사시의 나라 인도)
http://blog.daum.net/come5769/5954433
왜냐하면, 인도의 초고대사는 기년(紀年)을 중심으로 한 사서(史書)형태가 아니라, 기년(紀年)이 없는 사건(事件)의
인연성과 인간의 정황(情況)을 연결시킨 서사시(敍事詩)형태로 전해지기 때문에, ‘역사적인 연관관계’를 명확히
가려내기 힘들게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 인더스-문명이라고 칭하는 객갈한국(客賢汗國: Ghaggar Han)을 이룬 북인도의 드라비다
인들은 인류를 미개(未開)상태로 빠지게 한, 초고대의 핵전쟁의 방사능 피해를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응전을 하여
일어난 환국(桓國) 문명이었고, 이를 미주(美洲)대륙에 적용하기 위해서 부상국(扶桑國)이전의 환국(桓國)
- 즉 <아가스띠야(Agastya)의 환국(桓國)>으로 이주(移駐)하였다가, 그곳에서 삼한인(三韓人)을 만나서 인도대륙
으로 재(再)-진입(進入)를 하게 되는 시기가 있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는 유럽에 떠돌던 아리아 족이 인도(印度)에
재(再)-진입(進入)하는 시기인 베다(Veda)시기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때 북인도 지역은 인류의 초고대 문명이 핵전쟁으로 멸망하자, 원래 인도에 거주하였지만, 방사능피해를 회피하기
위해서 초고대 문명의 지혜를 지닌 사제(司祭) 브라만인 아리아 족(Arians)족들이 기마(騎馬)하는 새로운 풍습을
지니면서 인도에 들어와서 ‘캐스트(Cast)제도’를 바탕으로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약 1000년 간의 베다(Veda)시대
를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가스띠야(Agastya)의 환국(桓國)>으로 부터 인도대륙에 삼한인(三韓人)들과 함께 들어온 ‘드라비다 인’
들은 객갈한국(客賢汗國: Ghaggar Han) 시절에 이미 개척한 각가르-하끄라 강(Ghaggar Hakra river)을 중심으로
소도(蘇塗)를 재건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브라만(Braman)계급의 성선(聖仙)인 거문성(Vasistha)인 바시슈타(Basishuta) 성선(聖仙)과 첫번째
별인 탐랑성(貪狼星)에 해당하는 ‘우주(宇宙)의 친구’라는 의미를 지닌 ‘비스마미트라(Visvamitra)’와의 갈등(葛藤)이
일으키게 되지만, 곧 수습을 하게되어서 드디어 배달화백을 할 수 있는 성선(聖仙)체제가 안정화되면서, 개스트
(Cast)의 엄격성을 적용치 않는 <탈(脫)캐스트 지역인 소도(蘇塗)>가 각가르-하끄라 강(Ghaggar Hakra river) 주변
에서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시기 직후에 유럽에서 들어온 아리아 족(Arians) 내부에서 미묘한 갈등이 일어나서 인류의 3대 신화 속의 전쟁
인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 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 전쟁’은 시기적으로 보아서 <인도 고대사>에서 베다(Veda)시기의 초기
(初期)로 간주하는 기원전(紀元前) 1.600년에서 1.500 년(年) 사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탁록대전(涿鹿大戰)보다
훨씬 후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일단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탁록대전은 자오지 환웅(=치우 천왕) 때 일어난 신화속의 전쟁인데, 치우천왕은 기원전 2707년 42살의
나이로 배달국 한웅에 오른 뒤에 재위 109년간을 지낸 후인 기원전 2599년 151세의 나이로 붕어(崩御)하시는 과정
‘사이’에서 터진 전쟁이고, 천왕(天王)께서 60대(代)때 터진 전쟁이라고 계산하면, 대략 기원전 2680년 대가 되기
때문에, 탁록대전(涿鹿大戰)은 고대(古代)인더스 문명이라고 흔히 말하는 객갈한국(客賢汗國: Ghaggar Han)시대
때의 전쟁인 것입니다.
시대(時代) 계산을 해보면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 전쟁’은 기원전 1.550년대의 전쟁이고, 탁록대전은 기원전
2680년대의 전쟁이기 때문에 (2680년-1550년=1130년)로 계산되어서 대략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 전쟁’은
탁록대전보다 1130년 후에 일어난 전쟁인 것입니다.
반면, 인류의 삼대 신화(神話) 속의 전쟁인 트로이 전쟁은 BC 1200년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류의 삼대 신화속의 전쟁이 일어난 순서를 열거(列擧)하면, ① 탁록대전(涿鹿大戰) (B.C 2680년),
②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 전쟁 (B.C 1650년 대(代), ③ 트로이 전쟁 (BC 1200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전쟁’이 탁록대전(涿鹿大戰)보다 과연 1,000년 후에 일어난
전쟁인가?”를 따져볼 때에, “분명히 그렇다.”라고 잘라서 말하기 매우 어려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이유는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전쟁’을 묘사한 마하바라타(Mahabharata)를 기년(紀年) 중심의 사서(史書)
에 익숙한 중국대륙-구다천국 주변의 동양인들이 이해(理解)하기 어러운 이유와 맞물려 있는 것입니다.
‘마하바라타’란 이 대(大) 서사시(敍事詩)는 서술하는 화자(話者)의 등장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온 사람들이 말
하는 것과 같이 <격세(隔世)-유전(遺傳)>의 형식을 빌어서 거론되고 있어서 맨 처음 읽는 극동(極東)의 독자(讀者)
들은 시간의 흐름이 기년(紀年)적에 따라 순차적으로 흐르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줄거리의 짜임새’를 가늠하기
힘들게 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또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전쟁’에 동원(動員)된 무기(武器)는 ‘신(神)들의 무기’를 사용한 것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무기들은 그 성격이 초현대적인 무기들이 정확하게 묘사되어서 “아니?? 이는 공상과학 소설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정확하다..”라는 느낌을 줍니다.
(*)참고: 좌계는 <불멸의 인도문학② 마하바라타>란 간추린 번역서- 비야샤 작 주해신(朱亥信) 옮김을 ‘종로구 정독
도서관’에서 빌려서 복사(複寫)해서 읽었습니다. 좌계가 읽었을 때에는 시중(市中)에 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 ‘관심있는 사람’을 위해서 아래 소개한 내용의 끌에는 page를 괄호 속이 기록하기로 합니다. (*)
예를 들어서 브라흐마스트라(Brahmastra)는 일명(一名) 브라흐마 아스트라(Brahma Astra)라고 하는데, 이 뜻은
브라흐마(Brahma)가 우주(宇宙)를 창조한 신(神)이고, 아스트라(Astra)가 주문(呪文)을 뜻하기 때문에, ‘창조주
(創造主)의 주문(呪文)에 의해서 움직이는 폭탄’을 이름의 뜻 자체에서 함축하고 있는데, 묘사한 글을 보면 ‘전파
(電波)에 의해서 <key word>에 의해서 조정되는 원폭(原爆)-미사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전쟁’에서는 <드로나>가 이 무기를 사용하는데, ‘원폭 폭발 규모’를 주문(呪文: Astra)에
의해서 조절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오늘날 말로 다탄두(多彈頭)내장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작은 탄두(彈頭)
는 사용하였지만, 모든 탄두(彈頭)를 사용하려는 순간에, ‘아들의 죽음’을 듣고 실의(失意)에 빠졌을 때에, ‘비마’가
“왜 브라만의 최고의 율법인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어기고, 전쟁에 뛰어들었는가?!”하는 문책을 하게 되자, 스스로
브라흐마스트라(Brahmastra)의 내던지고, 요가(Yaga)자세를 자청하고 ‘죽음’을 수용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불멸의 인도문학② 마하바라타> P401~P403 “제90장 드로나, 돌아가다.” 중(中)에서)
이는 결국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전쟁’이 ‘소규모 핵(核)’이 사용되었지만, 대형 참사가 억제되면서 치루어진
전쟁임을 뜻합니다.
이처럼 ‘크루크세트라 전쟁’에서는 초현대적인 무기가 등장하는데, 그 한 가지 예(例)가 <사법신 바루나(Varuna)의
지휘봉>입니다. 이는 던지는 무기(武器)인데, 오늘날 EMP(Electromagnetic Pulse effect)폭탄과 비슷해서 강력한
전자기 펄스(Pulse)로써 상대방의 전자회로를 태워버리는 무기이지만, 적장(敵將)의 인체만 살상(殺傷)하는 무기
여서 “그 어떤 적(敵)도 상대할 수 없는 무기로 해설되고 무기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무장(武裝)하지 않은 비전투원에게 던졌을 때에는 그의 가슴을 맞추고는 이윽고 던진 자에게 되돌아
죽이는 무기(武器)인 것입니다.
실제 ‘크루크세트라 전쟁’에서는 이 <사법신 바루나(Varuna)의 지휘봉>을 ‘스르타유드하’가 비전투원인 ‘크리슈나’
에게 던지자, 가슴을 맞히고는 되돌아서 던진 자인 ‘스르타유드하’를 죽입니다.
이 ‘사법신 바루나(Varuna)는 민주주의 여신 가우리(Gauri)의 남편 신(神)으로 ’우주의 법(法)‘을 관장하는 분이신데,
’우주의 법‘이 비무장한 ’소도(蘇塗)의 천독(天毒)‘들을 공격하는 자는 역으로 죽게된다는 이치를 들어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불멸의 인도문학② 마하바라타> P368 “제82장 신두의 왕” 중(中)에서)
뿐만 아니라, 생체(生體) 반물질(反物質) 폭탄-화살이 있는데, 이는 전쟁을 일으키는 권력자의 부자(父子)관계에
자연스럽게 적용되는 것으로써 화살로 된 무기입니다., ‘아르쥬나’가 이 화살을 먼저 아들 ‘자야뜨라타’의 머리를 자른
후에, 계속 ‘화살’을 날려서 머리(=두(頭))에 맞히게 하면, 그 힘에 의해서 하늘을 ‘머리통’이 날라가는데, 이는 부전
자전(父傳子傳)하는 D.N.A 를 반물질(反物質)로 변하게 하는 효능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들의 머리를 반물질
로 변하게 하면서 화살을 계속 쏘게 되어서 이윽고 아버지인 ‘브리따크샤트라’의 무릅에 떨어지게 해서, 결국 폭팔
해서 ‘브리따크샤트라’는 죽게 되는 것입니다.
(<불멸의 인도문학② 마하바라타> P399~400 “제 89장 자야드라타, 죽음을 당하다” 중(中)에서)
이처럼 ‘크르크세트라 전쟁’은 신들의 무기(武器)들이 활, 창, 칼등이 구식(舊式)무기와 함께 사용되는 전쟁인 것입
니다.
인도(印度)의 ‘베다(Veda)시대 초기’에 일어난 이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전쟁’의 비밀은 바로 인류의 문명이
초고대에서 핵전쟁으로 멸망하고, 그 반성 위에서 객갈한국(客賢汗國: Ghaggar Han)이 등장하면서, 인류 멸망에
이르게 한 핵(核)기술을 비롯한 ‘잘못된 과학기술’을 의도적으로 사제(司祭)계급인 브라만들이 통제하면서, 이를
폐기(廢棄)하는 과정이 주로 베다(Veda)시대를 통해서 일어났는데, 인류를 멸망으로 가게한 초고대의 무기(武器)
들이 ‘신(神)들의 무기’로써 전수(傳授)되어서 이것이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석인 것입니다.
따라서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전쟁’은 탁록대전(涿鹿大戰)보다 무려 1000년 후에 일어났지만, 동원된 무기는
초현대적인 폐기(廢棄)과정에 있었던 무기가 동원된 격세(隔世)-과학기술이 유전(遺傳)된 전쟁이라는 점에서 ‘잔존
한 더욱 고대의 전쟁’이라는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란 말은 <쿠루(Kuru)왕조(王朝)의 들판 고원(高原)>이라는 말입니다.
쿠루(Kuru)왕조는 이 ‘크르쿠세트라’ 전쟁에 참여한 성자(聖者) ‘크리슈나’의 왕조(王朝)를 의미합니다.
베다(Veda) 경전 중에 ‘바가바드기타(신(神)의 노래)’는 바로 ‘크리슈나’가 참전(參戰)하는 ‘아르쥬나’를 격려하기
위해서 들려준 일종의 복음(福音)인 것입니다.
이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전쟁’은 결국 쿠루(Kuru)왕조(王朝)가 본토(本土)에서 카우라바(Kaurava)집안과
판다바(Pāndava)집안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인데, 이 두 집안은 모두 아리야 족(Aryan)가운데서도 가장 인도통합의
주역인 ‘바라타(Bharata)족’에 속하는 것입니다.
인도인들은 자신들을 ‘바라타 족’ 혹은 ‘바라타의 나라’라고 칭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인도의 아리안
족이 베다(Veda)시대에 들어와서 최초로 나라를 설립한 왕이 바라타(Bharata)였고 '바라타 민족의 나라'를 뜻하는
말이 '바라타 바르샤(Bharata Varsa)'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란 말 역시 따지고 보면 ‘대(大) 바라타 족의 이야기’라는 의미를 띠는 것
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신(神)들의 무기가 사용된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전쟁’이 일어난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
고원(高原)이 어디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도의 각가르-하끄라 강(Ghaggar Hakra river)이 결국 야무나 강(Yamuna river)과 (1) 북(北)쪽에서
야무노트리(Yamunotri)에서 ‘야무노리 강(Yamunori river)’과 (2) 남(南)쪽에서 드리샤드와띠 강(Drishadwati river)
를 통해서 각가르 강(Ghaggar river)에 하끄라(Hakra)되어서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이 연결되게 한 것임을 알고 있
습니다.
(*) 1996년에 정리(整理)된 각가르 하끄라 강(Ghaggar Hakra river) 수계(水系)지도
- (1)‘야무노리 강(Yamunori river)’과 (2) 남(南)쪽에서 드리샤드와띠 강(Drishadwati river)에 의해서 북인도의
강이 관통됨을 보여줌.
http://www.hindunet.org/hindu_history/sarasvati/vedicsaras1.jpg
그런데, 근세(近世)에 와서 인도의 고전학자와 지질학자들은 베다(Veda)에 등장하는 옛 지명(地名)을 철저히 고증
하게 작업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지도가 아래의 ‘인도 서사시(敍事詩: Epic) 속의 고대도시 지도’입니다.
이 지도를 보면,
(1) 남(南)쪽의 드리샤드와띠 강(Drishadwati river)이 야무나(Yamuna)강에서 분류(分流)해나가는 즉 하끄라
(Hakra)되는 바로 북(北)쪽에 <플락챠(Plakcha)>란 도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류지점에서 야무나
(Yamuna)강을 갑문으로 막아서 수위(水位)를 높혀주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호수(湖水)가 형성되고, 이 호수
(湖水)의 북안(北岸)에 도시가 <플락챠(Plakcha)>인데 ‘붉은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이 <플락챠(Plakcha)>를 ‘우리 말 감각’으로 들으면 ‘플럭이는 깃발이 꽉차있는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이런 감각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달화백을 하려면, ‘작은 공동체의 통합’과 ‘큰 공동체의 통합’이 병행되어서 개최(開催)되면서 ‘말발’이
이동을 하여야하는데, ‘말발’의 이동을 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태(兌)라는 선박에 설치된 말발을 받는 장치인
집시관(集矢棺) 전체를 움직이는 ‘처쿠마마의 그네’에 대형 깃발을 걸고서 이를 흔들어서 알리는 방법이 가장 효과
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드리샤드와띠 강(Drishadwati river) 위에서 야무나 강(Yamuna river)과 연결되는 야무노리 강(Yamunori river)
의 분류(分流)지점인 ‘야무노트리(Yamunotri)’ 도시에 - 이 역시 ‘붉은 글씨’로 적혀있습니다. -갑문을 쳐주면, 호수
(湖水)가 형성되는데, 이 ‘큰 공동체의 통합’을 담당하는 <야무노트리(Yamunotri) 호수(湖水)>에서 일어나는 상황
(狀況)을 알리려면, ‘깃발로 통신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아래 지도’에서는 ‘야무노트리(Yamunotri)’란 도시는 ‘붉은 글씨’로 적혀있지만, 여기서 분류(分流)해나
가는 야무노리 강(Yamunori river)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왜 1996년에 정리(整理)된 <각가르 하끄라 강(Ghaggar Hakra river) 수계(水系)지도>에는 야무노리 강(Yamunori
river)이 기재되어 있지만, 아래의 <인도 서사시(敍事詩: Epic) 속의 고대도시 지도>에서는 그려있지 않는가?
이는 고전(古典)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만, 지질학자(地質學者)들이 조사해보았을 때에 ‘강(江)의 흔적’이 잘 발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강의 흔적’이 발견이 안되는 까닭은 남(南)쪽의 드리샤드와띠 강(Drishadwati river)의 강뚝을 인도사람들이 익숙한
방법 - 즉 ‘구운 벽돌’로 쌓는 제방이 아니라, 야무노리 강(Yamunori river)은 ‘코리 족’들이 ‘철(鐵)테를 두른 벽돌
정석(貞石) 원통(圓筒)’을 평지(平地)보다 더 높게 만들어서 쌓아올리고, 고리(高麗)말(末) 때에 이를 철수(撤收)
하였기 때문에, 그 흔적이 안 띠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3) 그런데, 야무나(Yamuna)강이 씨(C)자처럼 크게 돌아가는 동(東)쪽에는 [Kuru(E)]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는 ‘쿠루(Kuru)왕조(王朝)의 동(東)쪽 지역’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Kuru(W)]로 적혀있는 곳은 ‘쿠루(Kuru)왕조(王朝)의 서(西)쪽 지역’이란 뜻이고, 이는 자연스럽게 야무나
강(Yamuna river)의 서(西)쪽에 위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4) 그런데 [Kuru(W)]로 적혀있는 곳, 바로 서(西)쪽에 보면, ‘붉은 글씨’로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란 지명이
나타납니다.
이곳이 바로 ‘크르크세트라 전쟁’이 일어난 곳인데, 중요한 것은 이 곳의 위치가 남(南)쪽에서 각가르 강(Ghaggar
river)이 야무나-강(Yamuna river)를 하끄라(Hakra)하는 드리샤드와띠 강(Drishadwati river)이 위치한 곳과 북
(北)쪽에서 각가르 강(Ghaggar river)이 야무나-강(Yamuna river)를 하끄라(Hakra)하는 야무노리 강(Yamunori
river)의 정(正) 가운데에 위치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민중원(閔中原)이라고 할 때의 민(閔)은 그 뜻이 ‘가엽이 생각하다’, ‘불쌍히 생각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의미가 ‘불쌍히 생각하는 것(=민(閔))이 가운데 있는(=중(中))있는 들판 고원(高原)’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크르크세트라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브라흐마 아스트라(Brahma Astra)가 ‘소규모 폭팔’로 사용되어서 ‘핵
전쟁의 비극’이 재현(再現)된 ‘불쌍히 생각해야할 사태’가 발생하였기 때문임을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이 고조선
(古朝鮮)때부터 전래(傳來)되는 이야기로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북인도에서 인더스 강 수계와 갠지스 강 수계를
곤(丨)자로 분수령(分水岺)이 되게하는 것을 바로 민중원(閔中原)이라고 칭하게 된 것입니다.
(*) 위 (1),(2),(3),(4)를 알 수 있는, <인도 서사시(敍事詩: Epic) 속의 고대도시 지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1/EpicIndiaCities.jpg
아무튼 민중원(閔中原)이란 말 자체가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전쟁 - ‘소규모의 핵전쟁의 재현(再現)된 현상’을
고조선(古朝鮮)에서 알고 있었고, 이때 지어진 이름이 민중원(閔中原)인데,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고구리 초기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인도 고대사>는 ①고대 인더스 문명 시대 ②베다(Veda)시대 ③ 비(非) 베다(Veda)시대로 크게 구분해주고
있는데, 이런 <인도 고대사> 자체가 우리 역사와 깊은 관련성이 있는 것입니다.
베다(Veda)시대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는 인도대륙과 미주(美洲)대륙 ‘사이’에 있었던 초고대 문명 상호간의 핵(核)-전쟁으로 인해서 인류의 문명이 파국
(破局)으로 빠지자, ‘초고대 문명’의 과학기술(科學技術)을 아는 아리아 족(Aryan)의 브라만(Brahman) 계급이 엄격
한 수행(修行)으로 이 과학기술을 통제하여야함을 절감하고 사제(司祭)로써 유럽 등지로 흩어져나갔는데, 원래의
인도대륙에서 방사능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드라바다 인’을 주축으로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고대 인더스
문명’이라고 일컫는 각가르-한(Ghaggar Han)국(國)[=객갈한국(客賢汗國)이 성공하고, ‘방사능 피해’의 노출이 가장
심한 미주대륙 - 즉 아가스띠야(Agastya) 환국(桓國)으로 이주(移駐)해 나간 빈틈에 ‘북인도 지역’으로 다시 들어오
면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리아 족(Aryan)의 브라만 계급이 인도대륙에 재진입할 때에는 유럽에 나가있는 동안에 소위 귀족
(貴族) 무사(武士)계급인 크샤트리아(Kshatriya)를 같은 아리아 족(Aryan)이 기마(騎馬)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무사
(武士)계급으로 형성하여 자신들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들을 대동(帶同)하고, 들어오면서 베다(Veda)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즉 인도의 캐스트(Caste)제도는 아리아 족(Aryan)들이 ‘유럽에 떠돌 때 부터’ 시행하던 것을 대동(帶同)하면서 들고
들어온 제도이지, 결코 아리아 족(Aryan)들이 ‘드라비다 족’을 점령해서 지배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아니라는 것입
니다.
좌계의 역사를 보는 눈(眼)에 <기특한 관점>이 있는데, 그것은 “정복자가 피정복자를 발전하게 했다.”는 사관(史觀)
을 전혀 안 믿는다는 점입니다.
정복자가 관여한 역사 해설의 ‘패러다임’은 침략-정복-착취적 통치라는 ‘범죄 행위’에 대한 <자기 변명(辨明)>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도는 근대(近代)에 들어와서 유럽인들에게 침략, 정복당하는 오랜 세월을 겪고 독립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침략-정복-착취적 통치>가 근대에 와서 이루어졌음은 확실하나, “‘고대 인더스 문명’이나 베다(Veda)시대
때에도 역시 ‘같은 모델(Model)로 진행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백인(白人)들이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이 지구촌(地球村)을 정복하면서, 일종의 카스트(caste)제도
로써 기존의 문명들을 파괴하면서 발전시켰다.”는 역사논리가 고대사(古代史)에 투영된 것을 안 믿는 것입니다.
아무튼 베다(Veda)시기 초기에는 나중에 부상국(扶桑國)이라고 칭하는 아가스띠야(Agastya) 환국(桓國)에 진출하
였던 드라비다 인들이 삼한인(三韓人)을 대동하고, 인도대륙에 다시 들어오면서 ‘각가르-하끄라-강(Ghaggar Hakra
river)’을 중심으로 소도(蘇塗)를 재건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베다(Veda)시대의 뚜렷한 특징은 ‘사제(司祭)들이 지닌 초고대 과학기술을 계율(戒律)로 통제하면서 지니면서 이
힘을 은연중에 카스트(caste)제도로써 <초고대 과학기술>이 번져나감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주대륙에서 등장한 드라비다 인과 삼한인들이 ‘삽타 리쉬(Sapta Rishi)’를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民主主義)
를 소도(蘇塗)를 개척하면서 ‘계급주의’를 거부하자 갈등(葛藤)을 일으키고 되는 것입니다.
즉 베다(Veda)시대란 그때까지 잔존(殘存)하고 있었던 ‘초고대 과학기술’을 사제(司祭)계급을 정점으로한 캐스트
(Caste)제도와 성선(聖仙: Rishi)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民主主義)가 갈등을 일으키긴 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인류를 원시시대로 빠지게 한, ‘초고대 과학기술’의 통제와 조직적인 폐기(廢棄)과정이 병행된 시기였던 것입니다.
이 ‘인도 고대사’에서 이처럼 약 1,000년간의 베다(Veda)시대를 지낸 후에 이른바 <비(非)-베다(Veda) 시대>가 열리
는데, 이 <비(非)-베다(Veda) 시대>의 특징은 ‘초고대 과학기술’이 운영된 흔적이 전혀 발견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비(非)-베다(Veda) 시대> 초기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석가모니(釋迦牟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인도 고대사>에서 각가르-한(Ghaggar Han)국(國)[=객갈한국(客賢汗國) 시대(時代) - 다시
말하면, 오늘날 <고대 인더스 문명>이라고 칭하는 시절에 인도대륙 밖에서 유입(流入)되는 사람들은 없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있었습니다.
바로 배달국 말기에 거불단(居弗檀)환웅(桓雄)께서 <야룽창포-하(河)(Yanlung Tsangpo=雅魯藏布河)>강(江)과
코시-강(Kosi river)를 잇게하는 갑문들과 운하(運河)를 설치하면서 코리-족들이 대거(大擧) 북인도 지역으로 들어
간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룽창포-하(河)(Yanlung Tsangpo=雅魯藏布河)>의 <납자(拉孜>갑문에서 살가(薩迦=사트가야
(satkaya))를 거쳐서 코시-강(Kosi river)의 코리야(Koliya)갑문까지의 수로(水路)의 이름을 정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참고: 좌계는 <Koliya>의 엘(L)자를 ‘ㄹㄹ’로 독음(讀音)해서 ‘콜리야’로 읽었으나, <아나사마>님이 ‘코리야’로 읽는
독음(讀音)이 더욱 합당하게 생각되어서 이를 ‘코리야’로 읽습니다. (*)
아무튼 <납자(拉孜>갑문에서 <코리야(Koliya)갑문>까지의 수로(水路)를 개척한 배달국(倍達國)의 마지막 환웅(桓雄)
이신 거불단(居弗檀)환웅의 또 다른 명칭인 단웅(檀雄)의 이름을 따서 ‘단웅수로(檀雄水路)’라고 칭하기로 합니다.
거불단 환웅께서 재위기간이 48년인데, 이 재위기간 내내 단웅수로(檀雄水路)를 놓았다고 하면, 그 아드님인 단군
왕검(檀君王儉)께서 고조선(古朝鮮)을 세운 무진(戊辰)년(B.C. 2333년)을 고려하면, 고조선이 입국(立國)한 해에
단웅수로(檀雄水路)가 완성되었다고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은 것입니다.
고대 인더스 문명은 B.C. 3000년 경에서 B.C. 1600년까지로 보기 때문에, (B.C. 3000년 -B.C. 1600년= 1400년)으로
계산되어서 각가르-한(Ghaggar Han)국(國)[=객갈한국(客賢汗國)은 무려 1400년이나 계속된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각가르-한(Ghaggar Han)국(國)[=객갈한국(客賢汗國)에 코리-족들이 단웅수로(檀雄水路)를 통해서
북인도 대륙으로 들어간 기간을 계산해보면 (B.C. 2333년-B.C 1600년=733년)인데, 고조선(古朝鮮) 전기(前期)인
것입니다..
따라서 1400년 되는 객갈한국(客賢汗國) 역사에서 후기(後記)의 역사는 고조선(古朝鮮)의 전기(前期)에 단국(丹國)
에 있는 사람들이 단웅수로(檀雄水路)를 타고 북인도 대륙에 들어간 시대(時代)가 되는 셈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도 역사와 고조선 역사에서 인류(人流)가 대량으로 왕래하는 현상은 산해경(山海經)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산해경(山海經)이란 ‘지리서(地理書)’가 통합되어 저술된 때를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좌계는 이를 주(周)나라
건국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周)족(族) 자체가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이끌고, 고조선의 백악산(白岳山)아사달(阿斯達)의 - 오늘날
섬서성 피라미드(Pyaramid) 군(群)이 있는 지역 - 지역에 들어왔는데, 이런 시도는 고조선(古朝鮮)이 중국대륙을
넘어서 지구촌(地球村)과 호흡하는 문명임을 알고, 백악산 아사달(阿斯達)을 새로운 주(周)-문명의 산파(産婆) 역할
에을 할 것이라는 기대에 의해서 들어왔음이 유교(儒敎)경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산해경(山海經)의 지리(地理)의 내용을 전(傳)해준 사람은 고조선 사람이고, 이를 ‘중국대륙’에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봉건(封建)체체의 입장에서 그 밖의 지리(地理)와 해내(海內) 해외(海外) 지역의 현실적인 지리에 따른
여러 신화적인 내용을 정리한 내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의 ‘가장 첫머리[1]’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之。
: 동해(東海)안 쪽, 북해(北海)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朝鮮)천독(天毒)이라고 한다.
이 사람들은 물(水)에 거주(居住)한다. - 이는 수상(水上)생활을 뜻함 - (이들은) 사람을 가까이하여(=외(偎))아낀다
(=애(愛))
[해설(解說)]
일단 여기서 동해지내(東海之內) 북해지우(北海之隅)라고 하면, 오늘날 황해(黃海)의 북쪽 지역 즉 산동반도가 두입
(斗入)하는 곳의 북쪽지역인 발해(渤海)지역을 뜻합니다.
좌계는 조선(朝鮮) 다음에 나오는 천독(天毒)의 뜻을 ‘소도(蘇塗)에서 국가(國家)의 영역을 넘어서 민주(民主) 주권
(主權)을 지닌 사람’으로 즉 <태(兌)를 타고서 다루칸(darukhan)으로 나갈수 있는 신분(身分)을 지닌 자(者)>란 의미
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우리 말을 한자(漢字)로 옮길 때에, “앞 글자는 훈(訓: 뜻)으로 읽고, 뒷 글자를 음(音)으로 읽는 글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예(例)가 바로 이 천독(天毒)이란 글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천독(天毒)을 향찰(鄕札)로 읽으면, ‘하늘 둑 (님)’이 된다고 봅니다.
독(毒)은 독(纛)과 전용이 되는데, 몽고인들이 평화회담을 할 때에는 ‘흰 말(馬)꼬리’를 장대에 달아매달고, 전쟁회의
(작전회의)를 할 때에는 ‘검은 말(馬)꼬리’를 장대에 매달아두는데, 이 기(旗)를 ‘둑기’, 혹은 ‘뚝기’라고 합니다.
이런 습속은 ‘하늘의 호수(湖水)’인 북두칠성 주변에 제방(堤防=뚝), 즉 청구(靑丘)가 있고, 이곳에 천인(天人)들이
배달화백을 하였다는 신화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독(纛)을 독(dock)으로 읽어도 그 뜻은 ‘물이 고여있는 것을 에워싸는 인위적(人爲的)인 물체’라는 뜻임은 똑같은 것
입니다.
즉 ‘하늘 둑 님’(=천독(天毒))은 “하늘에서부터 청구(靑丘)라는 제방 둑에 앉아서 사회적 명상을 하셨던 분‘이란 뜻인
것이지요.
그런데, 한자(漢字)는 <표의(表意)문자>이기 때문에, 이를 ‘읽는 독음(讀音)’이 지금도 지역(地域)마다 다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북경(北京)의 경(京)을 현 지나인(支那人)들은 ‘페이(킹)’으로 읽기도 하지만, 동경(東京)의 경(京)을 현
일본인은 ‘도(쿄)’로 읽습니다.)
즉 한자(漢字)는 독음(讀音)하는 것을 들으면 “이 사람이 어디 출신(出身)인가?”가 들어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
니다.
배달국(倍達國)-고조선(古朝鮮)으로 이어지면서 <화백민주주의>가 운영되는 순방(淳庬)체제는 광대한 지역에 있었
지만, 이들이 봉건(封建)체제에 속하지 않은 사람임이 첵크(check)되는 것은 <天毒>이란 글자를 ‘하늘 둑’ 혹은
‘하늘 독’으로 읽지 않고, 천독(天毒)에 해당되는 지역 ‘사투리’ 발음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봉견체제에 사는 사람들은 <天毒>을 ‘천독’으로 읽게 되는 것입니다.
고대 인더스 문명을 일군 ‘드라비다 인’들이 스스로의 나라를 ‘인더스-강’ 바로 우측(右側)에서 흐르던 ‘각가르 하끄라
(Ghaggar Hakra) 강(江)’을 인위적인 운하(運河)로써 개발하였기에 ‘각가르 한(Ghaggar Han)국’ - 즉 객갈한국
(客賢汗國)으로 칭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북인도의 공(工)자 모양의 산세(山勢)에서 민중원(閔中原)의 분수령을 넘어 동(東)쪽의 ’갠지스 강‘의 유역
(流域)을 무엇이라고 칭하였겠는가?”를 생각해볼 때에, 인도의 대명사라고 알고 있는 천축(天竺)말이 떠오릅니다.
이 천축(天竺)이란 말의 어원(語源)은 확실치 않는데, 당(唐)나라 때 널리 사용된 말입니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을 읽어보면 천축국(天竺國)을 중(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배치(配置)한 당시 ‘지리
구분’에 의해서 이 천축국을 여행한 기록인데, 그 중심인 중천축국(中天竺國)의 수도의 위치는 오늘날 칸나우지
(Kanauji=갈나급자(葛那及自)) - 이를 카나우지(Kanauj) 혹은 ‘칸나우즈(Cannauj)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 입니다.
칸나우지(Kanauji)는 우타르프라데시 주(Uttar Pradesh)의 중심에 있습니다.
(*) 우타르프라데시 주(Uttar Pradesh) 위치
http://ko.wikipedia.org/wiki/%ED%8C%8C%EC%9D%BC:India_Uttar_Pradesh_locator_map.svg
칸나우지(Kanauji)의 위치는 항하(恒河) 즉 갠지스 강(Ganges river)이 씨(C)자처럼 흘러서 동남류(↘)하면서
야무나 강(Yamuna river)를 만나기 전(前)의 구간(區間)에서 <정중앙>이 됩니다.
이 칸나우지(Kanauji) 주변에 사는 인도인을 ‘칸나우지 족(族)’이라고도 간혹 표기하는데, 아래 ‘예수쟁이 글’ 속에
보면, 중천축국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 예수쟁이 글 속에서 <중천축국>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지도(地圖)
http://blog.daum.net/topyung/5499690
아래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 전의 내용 가운데, ‘중천축국’에 대한 글을 성실하게 소개한 ‘김첨지 님의 블로그(blog)’
을 보면, “중천축국은 여타의 천축국과 전쟁을 벌렸으나 항상 이겼다.”는 글이 나옵니다.
(*) 참고: ‘중천축국의 수도 칸나우지(Kanauji)여!’ - ‘김첨지 님의 블로그(blog)’
http://blog.daum.net/suri116/15123980
중요한 것은 오늘날 ‘고대 인더스 문명’이라고 칭하는 객갈한국(Ghaggar Han)시절 혹은 그 후에 베다(Veda) 시절
때에 "과연 오늘날 칸나우지(Kanauji)에 해당되는 고대 도시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베다(Veda)시대에 까지 인도의 서사시(敍事詩: Epic)로 된 고전(古典)에 등장하는 도시 이름에서는 칸나우지
(Kanauji)가 ‘칸냐쿱자(Kanyakubja)’로 나옵니다.
아래 <서사시(敍事詩: Epic) 속의 인도 도시(都市) 지도>를 보면, 야무나 강(Yamuna river)이 갠지스-강(Ganges
river)와 합류하는 곳을 향하여 갠지스-강(Ganges river)가 동남류(↘)하는 구간의 정중앙에 <칸냐쿱자
(Kanyakubja)>가 나옴을 알수 있습니다.
(*) <칸냐쿱자(Kanyakubja)>의 위치를 알수 있는 ‘서사시 속의 고대 인도 지역 지도’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1/EpicIndiaCities.jpg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오늘날 ‘고대 인더스 문명’이라고 일컫는 유적에서 발견된 시대에는 ‘북인도 전체’를
객갈한국(客賢汗國)이 관할하였으나, 민중원(閔中原)의 동쪽 지역 - 즉 항하(恒河= Ganges river) 유역(流域)을
천축(天竺)이라고 칭하는 관습이 있었음을 뜻합니다.
반면, 범어(梵語)에서 " 신두(sindhu 身毒)는 큰 강(江) 혹은 바다(海)를 뜻하며 실제로는 현재의 인더스 강(Indus
river)의 하류(下流) 지역을 "신두(sindhu)"지역으로 불렀는데, 오늘날 ‘힌두교’라고 칭하는 어원은 이 ‘신두(Sindhu)
, 아랍의 신화적인 아랍인 항해자의 모험을 담은 ‘신드밧드의 모험’에서 ‘신드’ 아라비아 해(海)에서 접근하기 좋은
인더스-강을 칭하는 용어였으며, 지금도 인더스 강 하류 지역을 "신두(Sindhu)" 라고 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독(天毒)>은 화백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지 않는 중국대륙의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의미가 천축(天竺)의 천(天)과 신독(身毒)의 독(毒)을 합친 것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천독(天毒)=천축(天竺)+신독(身毒)]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천독(天毒)의 ‘화백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순방(淳庬)체제에 살지않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어원
(語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어원 추정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조선 전기(前期)때에 ①단국(丹國)을 중심으로 한 코리(Kohri)족들이 ② 단웅수로(檀雄水路)-③코시 강
(Kosi river)-④천축(天竺)의 갠즈스 강(Ganges river) - ⑤ 야무나 강(Yamuna river) - ⑥민중원(閔中原) -
⑦ 객가르 하끄라 강(Ghaggar Hakra river) - ⑧인더스 강(Indus river) 하류인 신독(身毒: Sindhu)으로 수로(水路)
를 중심으로 ‘북인도 전체’를 꿰뚫으면서 진출(進出)한 시기가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사실이 가장 잘 들어나는 것이 바로 산해경(山海經) 속의 <해내경(海內經)> 첫머리에 있는 <東海之內,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偎人愛之>라는 문장으로 볼수 있는 것입니다.
즉 위 <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문장은 순방(淳庬)체제를 따르는 입장에서 해석하면,
- 즉 천독(天毒)을 향찰(鄕札)로 읽으면, “동해(東海)안 쪽, 북해(北海)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朝鮮)의
<하늘 둑 님>들의 나라가 있다.”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은 고조선의 왕험성(王險城)이 발해(渤海) 북안(北岸)의 명해(溟海) 호안(湖岸)에 있었기 때문에 일단 정확한
해석이 됩니다.
(*) 참고: 맥제사해(百濟四海)와 왕험성(王險城)이 있는 창려(昌黎) 오른편의 호수가 명해(冥海)로 표기된 곳을 볼수
있는 곳
http://www.coo2.net/files/sa080525-1.gif
그러나 봉건(封建)체제의 입장에서 읽으면, 즉 천독(天毒)을 향찰(鄕札)로 읽지 않고, [천독(天毒)=천축(天竺)+신독
(身毒)]의 개념으로 읽으면 “고조선과 북인도(=천독(天毒))는 발해(渤海) 북안(北岸)에 있었다.”라는 이야기가 되
어서 일단 지리적인 위치가 맞지 않게 됩니다.
문제는 이처럼 해석한 학자가 있는데, 바로 곽박(郭璞)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여기서 곽박(郭璞)이란 학자는 진(晉)나라의 학자로써 산해경(山海經)의 주석(註釋)을 깊이 있게 일관성(一貫性)을
지니면서 ‘학술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인데, 선가(仙家)적 깊이 속에 ‘일체의 종교적인 권위를 거부하는’ 자세에서
학술을 펼쳐나간 분인데, 점술(占術)과 풍수학의 대가(大家)이기도 합니다.
이 곽박(郭璞)에 대한 자료를 ‘과거급제’를 의미하는 두룡(頭龍)이란 말을 알기 위해서 조사한 적이 있는데, 아래
글을 보면 ‘화장실에서 제사(祭祀)를 드리는데, 그것도 벌거벗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칼을 입에 물고 했다.”는 기록
이 나옵니다.
이는 그만큼 곽박(郭璞)하는 학자가 ‘종교적인 권위’에 맹목적으로 승복치않는 강력한 정신이 있음을 뜻합니다.
(*) [참고] <원중랑(袁中郞)의 시(詩)-두룡(頭龍)과 곽박(郭璞)>에 대한 좌계의 글
http://coo2.net/bbs/zboard.php?id=con_4&page=1&sn1=on&divpage=3&sn=on&ss=off&sc=off&keyword=
%C1%C2%B0%E8&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9397
(*)참고 : <곽박(郭璞)이야기>를 소개한 블로그(blog)
http://blog.naver.com/cdd54321/80146335168
그런데, 곽박(郭璞)이 단 주(註)는 봉건체제를 따르는 동진(東晋)의 학자로써는 매우 일관성(一貫性)이 있는 주(註)
를 달고 있기 때문에, “그의 학설이 틀렸다.”라고 단언할 수 없음이 발견이 됩니다.
郭璞云:「朝鮮今樂浪郡也。」
: 곽박이 말하기를 “조선(朝鮮)이란 지금의 낙랑군(樂浪郡)이다.”
郭璞云: 「天毒卽天竺國, 貴道德, 有文書.金銀.錢貨, 浮屠出此國中也. 晉大興四年, 天竺胡王獻珍寶.」
: 곽박이 말하기를 “천독(天毒)은 즉 천축국(天竺國)을 뜻하는데, 도덕(道德)을 귀하게 알고, 문자(文字)가 있으며,
금은(金銀)으로써 화폐로 삼으며, 부도(浮屠)가 이 나라에서 나왔다. 진(晉)나라 대흥(大興)4년에 천축(天竺)의
호왕(胡王)은 진보(珍寶)를 바치었다.
그런데, 위 곽박(郭璞)의 주(註)를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이 “‘위치’가 안 맞는다.”는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지만, 중국
황제가 제후국(諸侯國)으로 부터 세금을 거두어서 낙랑(樂浪)을 통해서 해외(海外)의 관경사국(管境四國)에 투자를
하는 <봉건제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 역시 정확한 해석임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단 곽박(郭璞)은 조선(朝鮮)을 ‘지금의 낙랑군(樂浪郡)이다.’라고 한 까닭은 위만이 고조선의 험독(險瀆)을 숙위
(宿衛)한다는 핑계로 점유(占有)한 적이 있는데, 이를 북부여가 탈환한 상태에서 한무제(漢武帝)와의 전쟁에서 성
(城)을 버리고 나간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사군(漢四郡)에서 중국황제의 대리(代理)천독(天毒)을 하는 사람들을 관리
하는 군읍(郡邑)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곽박(郭璞)이 이야기하는 조선(朝鮮)은 ‘조공(朝貢)공정(工程)플로우(flow)의
원점이 되는 태화지(太和池)의 낙랑군(樂浪郡)이라고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틀린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朝鮮)을 낙랑군(樂浪郡)과 등치(等値)시킨 후에, 천독(天毒)의 의미를 인도를 뜻하는 천축(天竺)으로
규정하는 것은 결국 곽박(郭璞)의 논점(論點)이 ‘지리(地理)의 위치’에 있지 않고, ‘조공(朝貢) 공정(工程) 플로우
(Flow)’에서 <투자대상의 위치>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고조선(古朝鮮)사람들이 해외(海外)에 주로 투자하는 대상이 천축(天竺)이다.”라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대흥(大興)4년>은 동진(東晉)을 일으킨 사마예(司馬睿)의 연호(年號)인 것입니다.
동진(東晉)은 조조(曹操)때부터 기틀을 잡은 위(魏)나라를 사마의(司馬懿)가 전통적인 제도인 낙양(洛陽)을 도읍을
삼아 서진(西晉)을 일으켰으나 무려 16년이나 끈 팔왕(八王)의 난(亂)으로 피폐하고, 흉노의 유연이 세운 한(漢)에
- 조(趙)로 곧 이름을 바꿈-의해 망하게 됩니다.
이처럼 진(晉)이 멸망하자, 진(晉)의 낭야왕(琅邪王)인 사마예(司馬睿)가- 사마의(司馬懿)의 증손(曾孫)이 됨
- 강남(江南)의 오(吳)나라의 전통적인 제도(帝都)이고 오늘날 남경(南京)이라고 칭하는 건업(建業)을 도읍삼아서
진(晉)의 명맥을 유지시키면서 멸망한 진(晉)을 서진(西晉), 그리고 새로 건업(建業)을 중심으로 일으킨 진(晉)을
동진(東晋)으로 구분해준 것입니다.
이 건업(建業)이란 도시는 바로 장강(長江)에서 신라(新羅)가 중국 황제로부터 투자를 받는 금성호(金城湖) 즉
오늘날 합비(合肥)의 소호(蘇湖)에서 정동(正東)쪽의 장강(長江)가에 있는 것입니다.
(*) 고대의 건업(建業)인 오늘날 남경(南京)의 위치
http://parkchina.com.ne.kr/map/anhui.JPG
따라서 사마예(司馬睿)[=원황제(元皇帝)]의 연호(年號)가 대흥(AD.318∼321년)이기 때문에, 대흥(大興)4년이면,
결국 A.D 321년이 됩니다.
(*) 동진(東晉)의 역대 군주와 연호(年號)를 기록한 <apache630>님의 블로그(blog)
http://blog.naver.com/apache630/30125292087
이 대흥(大興)4년은 고구리(高句麗)의 ‘거지왕자’로 유명한 을불(乙弗)이 왕으로 등극한 미천왕(美川王) 22년(321년)
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곽박(郭璞)은 동진(東晉)을 전통적인 제도인 낙양(洛陽)을 제도(帝都)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서는 고구리
(高句麗)가 관할하는 낙랑(樂浪) - 즉 태화지(太和池)에서 ‘북인도 지역’에 고조선(古朝鮮)때부터 단국(丹國)을 통
해서 왕래하면서 코리-족에게 투자하는 관례(慣例)를 계속 살려야한다는 관점에서 주(註)를 단 것입니다.
왜냐면, 동진(東晋)의 도읍 건업(建業)은 장강(長江)에서 신라(新羅)의 난함선(欄檻船)의 호위(護衛)를 받으면서
중국황제가 해외(海外)로 투자하는 선단(船團)을 내보낼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그 투자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북(北)인도(印度)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진(晉)나라 대흥(大興)4년에 천축(天竺)의 호왕(胡王)은 진보(珍寶)를 바치었다.”고 했을 때의 대상은 바로
동진(東晋)의 초대 황제인 원황제(元皇帝)[=사마예(司馬睿)]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진보(珍寶)를 바친 천축(天竺)
호왕(胡王)이 인도의 어떤 왕(王)인지 확실히 규명된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곽박(郭璞)이 주(註)를 천독(天毒)을 천축(天竺)이라고 한 까닭은 “천축(天竺)의 왕(王)이 진보(珍寶)를
바치러 오는 코스(course)가 과연 해양(海洋)이 아닌 육지(陸地)로 해서 진상(進上)하였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
니다.
어찌해서 그러한가?
이는 해내경(海內經)의 다음 귀절들을 읽어보면, 자명(自明)하게 나타납니다.
즉 ‘조선(朝鮮)천독(天毒)’이란 말 다음에 등장하는 문단 [2]와 그 다음 문단 [3], 그 다음 문단 [4]의 내용과 ‘위치’
를 보면, 오늘날 감숙주랑(甘肅走廊)에서 청해(靑海)성(省)과 ‘서장(西藏)자치구’를 통해서 - 쉽게 말하자면 티베트
(Tibet)지역을 통해서 북(北)인도(印度)로 가는 육로(陸路)가 묘사되어 있는 것입니다.
[2] 西海之內, 流沙之中, 有國名曰壑市
서해(西海)의 안쪽에 유사(流沙)의 한 가운데, 나라가 있으니 이름을 ‘학시(壑市)’라고 한다.
[해설(解說)]
전통적으로 중국대륙이 사해(四海)로 둘러쌓여 있다고 할 때의 서해(西海)는 오늘날의 청해(靑海)를 뜻합니다.
따라서 청해(淸海)의 안쪽에 있으면서도 유사(流沙)가 있는 한 가운데라고 하면, 오늘날 감숙주랑(甘肅走廊)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대부분의 고지도(古地圖)에는 감숙주랑에 유사(流沙)지역이 그려져 있습니다.
학시(壑市)는 ‘산(山) 골짜기(=학(壑)의 시장(市場)’을 뜻하는데, 이는 아래 <청해성(靑海省)지도>에 보다시피, 기련
(祁連)-산맥이 감숙주랑(甘肅走廊)의 좌측에서 나란히 불(乀)자 모양으로 치달리고 있는데, 이 것이 문득 끊긴 곳의
위치가 바로 ‘기련(祁連)’입니다.
그런데 이 기련(祁連)-산맥으로 바로 남(南)쪽에서 동남류(↘)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다른 세부지도>를 보면
맞장구치면서 서북류(↖)하는 강물과 만나서 함께 북류(↑)하다가 이윽고 장액(張掖)이란 도시를 향해 동류(→)하
다가 다시 유-턴(U-tern)해서 동북류(↖)로 꺽어서 나가는 강물이 있는데 이름이 흑하(黑河)입니다.
즉 흑하(黑河)는 장액(張掖)을 지나서 동북류(↖)하던 흑하(黑河)는 오늘날 감숙성(甘肅省)지도에서 보다시피 기련산
(祁連山: 5547m)의 바로 동(東)쪽에서 다시 동북류(↗)하면서 2줄기로 나뉘어서 거연해(居延海)로 들어가는 약수
(弱水)로 이름을 바뀌게 됩니다.
약수(弱水)는 ‘부력(浮力)이 마이너스(minus)를 뜻하는데 이런 명칭이 붙게 된 까닭은 강물이 모래 밑으로 빠져서
흡수되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그것은 기련산(祁連山: 5547m)에서 생긴 물이 흑하(黑河)의 아래에서 지하(地下)로 흐르되 윗쪽의 흑하(黑河)보다
속도가 빠르게 동북류(↗)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유체(流體)는 속도가 빠른 것이 늦은 것을 빨아들이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위에서 흐르는 흑하(黑河)를 밑으로 빨아
들이는(↓)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유사(流沙)라는 것은 사막의 모래 밑으로 물(水)이 지나갈 경우, 그 위의 모래 역시 ‘떠돌아다니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사막의 대상(隊商)들’이 유사(流沙) 위로 가게 되면, 즉각 빠져서 헤어날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약수(弱水)와 유사(流沙)는 결국 같은 내용을 뜻하는데, 고대의 지도를 보면, 장액(張掖)이란 도시에서 부터
유사(流沙)가 시작되는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 흑하(黑河)가 이런 (乀↑-→(장액(張掖))__↖)모양으로 흐르는<청해성(靑海省)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chunghae.JPG
(*)기련산(祁連山: 5547m)에서 지하(地下)로 들어간 물이 동북류(↗)하면서 흑하(黑河)를 약수(弱水)로 변환시킴을
볼 수 있는 감숙성(甘肅省)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gamsuk.JPG
고지도(古地圖)에서 오늘날 장액(張掖)이란 도시에서 부터 약수(弱水)가 그려진 이유를 <장액(張掖)>이란 명칭 자체
에서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활(弓)줄을 당기는 것을 긴장(緊張)이라고 하고, 놓는 것을 이완(弛緩)이라고 하는데, <장액(張掖)>이란 명칭 자체가
“겨드랑이까지 (활(弓)줄을 긴장(緊張)시킨다.”는 것입니다.
‘푸른 바다’님이 제공한 지도를 - 지금은 coo2.net 에 올려져 있지 않음 - 보면, 오늘날 <장액(張掖)>근처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漠志曰 此水潛行地下 南出於積石
: “막지(漠志) -사막(沙漠)에 관한 논문(論文)에서 말하기를, 이 물은 지하(地下)로 잠행(潛行)하는데, 남(南)쪽에서
‘적석(積石)이 되어 있는 곳’에서 그 물이 나온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청해성(靑海省)지도>에서 기련(祁連)산맥이 끊어지는 곳인 ‘기련(祁連)’이라는 도시 -즉 흑하(黑河)가 돌아나가는
곳(↘__↖)곳에 갑문을 설치하면, 수위(水位)가 높아지게 되면서 호수(湖水)가 형성이 되는데, 이 호수(湖水) 위에서
선박들이 오가면서 시장(市場)을 열기 때문에, 이를 ‘산골짜기 시장(市場)’이란 의미로 산해경(山海經)이 만들어지는
시기인 주(周)나라 직전에 이미 학시(壑市)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문은 기본적으로 미닫이 식으로 ‘깍지 결합’ - 즉 이런(⇄ ==∈ ⊃== ⇄ )식으로 열고 닫는데, 물은 하상
(河床)밑의 터널(Tunnel)을 통해서 이런 (↘___↗) 모양으로 흐르게 되는데, 물이 들어가는 입구(入口)는 수류(水流)
의 흐름에서 갑문 바로 ‘윗 쪽’이 되고, 물이 나오는 출구(出口)는 갑문 바로 ‘아랫 쪽’이 되는 것입니다.
유사(流沙)를 만들려면, 이런 하상(河床)밑 터널(Tunnel)을 별도(別途)로 만들되, 수압(水壓)이 가장 크게 걸리는
곳에 설치해서 이 터널(Tunnel)를 무척 길게 철(鐵)테를 두른 정석(貞石)원통을 계속 이어 붙여서 무척 길게 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석 원통의 터널(Tunnel) 끝부분 분은 이런 (二二二工二工)으로 막힌 부분이 2곳에 위치한다고 추측할 수 있
습니다.
즉 맨 바깥쪽의 막힌 부분은 쇠 그물이 정(井)자 모양으로 좌우로 번져 나간 곳의 바로 안쪽에 수직모양의 된 막대
철판 (▮)이 ‘모래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지요.
수직 막대는 유압에 의해서 수평으로 회전하게 되면 얇은 판막이 이런(丨)모양으로 되어서 물(水)이 흐르드록 되어
있었다고 추측할수 있습니다.
물론 정석(貞石)-터널(tunnel) 안(內)쪽에 있는 막힌 부분은 평상시는 닫혀있으나 (工) 유압의 힘으로 열면 이런
( 二乀↗)으로 ‘여닫이 문(門)’으로 열리게 되어서 ‘강한 수압’이 앞으로 나가게 되는하는데, 그 다음의 막힌 부분을
막대철판의 ‘넓은 판(▮)을 ’좁은 측면(丨)으로 수평회전을 시키게 되면, 강한 수압(水壓)이 흐르기 때문에, 모래가
터널(tunnel)쪽으로 들어오기는 커녕 오히려 수압이 물을 모래 사이로 뚫고 나가기 때문에, 그 주변 특히 윗쪽의
모래를 흐르게 해서 유사(流沙)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방(堤防)속에 터널(tunnel)을 만들었지만, <장액(張掖)>에 와서는 이 터널(tunnel)이 흑하(黑河) 밑으로 위치
하게 이런 (↘__ ) 모양으로 흐르게 함은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사(流沙)는 위에 모래에 흡수되어서 완만히 흐르는 밑바닥에서 강한 수압으로 빨리 흐르는 지하수
(地下水)가 있어야만 ‘모래’까지 흐르는 현상이 일어나니깐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기련(祁連)인 <학시(壑市)>갑문에서 장액(張掖)까지 정석(貞石)원통을 이은 터널
(tunnel)이 제방(堤防)을 쌓은 정석원통을 따라서 흑하(黑河)를 따라서 설치되었다고 가정을 하고, <청해성(靑海省)
지도> 우하(右下)변(邊)의 스케일(Scale)로 재어보면, 약 120Km나 됩니다.
즉 주(周)나라가 시작된 때 즉 BC 1046 년 - 다시 말하면 산해경(山海經)이 최초로 편집될 때에 이미 고조선
(古朝鮮)은 이런 ‘유사(流沙)통제(統制)’하는 장치를 설치하였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산해경(山海經)이 완성된 시기를 주(周)나라의 건국시기와 일치시키면, 자연 <학시(壑市)>갑문이 완성된 때를 BC
1046 년으로 잡게 되는데, 이는 고조선(古朝鮮)의 26세 단군 추로(鄒魯) 17년 조(條)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주(周)건국 시기이자, 고조선에서 ‘유사(流沙)통제(統制)’하는 <학시(壑市)>갑문을 비롯한 여러 부대(附帶)
수리시설들이 모두 완성된 때인 BC 1046 년은 인도에서 신(神)들의 무기가 사제(司祭)들의 통제 속에서 사용된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 전쟁’이 터진 베다(Veda)시기의 초기인 (B.C 1650년)에 비해서 무려 604년 후(後)
인 것입니다.(B.C 1650년- BC 1046 = 604년)
왜 이런 계산을 하는가?
이는 인도역사에서 베다(Veda)시기(時期)의 의미는 ‘신(神)들의 무기’, ‘신(神)들의 공학(工學)’이 ‘인류를 멸망시킨
나쁜 과학’이라는 차원에서 사제(司祭)의 통제되면서 활, 창(鎗), 칼 등의 원시(原始)무기와 공존하면서 간헐적으로
통제가 실패해서 ‘사용되었지만’, 이런 ‘초고대 문명’의 과학기술은 결국 ‘새로 일어나야할 생태(生態)친화(親和)적인
원시(原始) 기술’의 자양분(滋養分) 역할을 하면서 폐기(廢棄)되는 ‘떡잎 문명’ 역할을 담당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약 1,000년간의 베다(Veda)시대가 지난 후인 속칭 비(非)-베다(Veda) 시기에는 신(神)들의 공학, 신(神)들의
무기가 완전히 폐기(廢棄)되면서도 이런 ‘떡잎’의 자양분(滋養分)을 바탕으로 ‘생태 친화적인 인도의 공학’이 발달해
올라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륜성왕 금륜보(金輪寶)가 ‘하늘 위’를 비행하는 힘이 “도대체 어떤 엔진(engine)에서 나온 것일까?”하는
것을 ‘실험고고학적’으로 증명하기에는 몹시 힘든 ‘신(神)들의 공학(工學)’이 적용된 비행체인데, 왜 금륜보(金輪寶)는
베다(Veda)시기가 일어나기 직전(直前)에 - 즉 B.C. 1750 년(年) 경에 홀연히 코시 강(Kosi river) - 단웅수로(檀雄
水路)를 통해서 티베트(Tibet) 단국(丹國)을 통해서 고조선(古朝鮮) 지역으로 사라져간 것일까?
이는 금륜보(金輪寶)를 운영하던 천독(天毒)국(國)의 ‘코리(Khori)족’들이 ‘캐스트(Caste)’의권위로 ‘떡잎 역할’을
하기보다는 ‘화백(和白) 민주주의 체제’가 운영되는 고조선(古朝鮮) 체제가 더 ‘떡잎 역할’을 잘 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조선(古朝鮮) 역시 ‘신(神)들의 공학’과 ‘신(神)들의 무기(武器)’가 있었는데, 이런 초고대문명의 잔존
(殘存)기술을 ‘화백민주주의’로써 민주통제(民主統制)하면서, ‘생태(生態) 친화적인 새로운 문명에 대해서 자양분
(滋養分)역할을 하면서 ’잘못된 과학문명‘을 폐기(廢棄)하는 것이 더욱 용이하다고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사제(司祭)의 권위와 무력(武力)의 힘을 바탕으로한 캐스트(Caste)의 힘보다는 화백(和白)민주주의가 ‘초고대
과학문명’이 <떡잎>효율이 더욱 높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인도(印度)지역에 (1) 아리아 족(Aryan)과 (2) 미주대륙의 <아가스띠야(Agastya)의 환국(桓國)>에 진출하
였던 ‘드라비다 인’들이 재 진입(進入)하기 시작한 베다(Veda)시기가 열리기 직전에 금륜보(金輪寶)를 운영하던
인도(印度)의 코리(Khori)족들은 고조선을 향하여 코시 강(Kosi river) - 단웅수로(檀雄水路)를 통해서 북행(北行)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매우 이상한 이야기지만, “고조선(古朝鮮) 초기 때부터 <핵(核)무기(武器)>와 같은 신(神)들의 무기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신라(新羅)시대 ‘원광법사(圓光法師)’시절에 완벽히 폐기(廢棄)하였다.”는 기록이 버젖이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에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지금 서술하고 있는 민중원(閔中原) 씨리즈(series)가 끝나면, 곧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
따라서 주(周)나라의 건국(建國)한 때인 BC 1046 년에 <학시(壑市)>갑문을 비롯한 유사(流沙)통제(統制)를 할 수
있는 수리시설들이 건설되었다는 것은 고조선(古朝鮮)의 과학기술로 볼 때에 결코 무리(無理)가 되는 것은 아닌 것
입니다.
흥미있는 것은 추로(鄒魯)단군 원년(元年)인 기묘(己卯)년(B.C1062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을. 7월에 백악산 계곡에 흰 사슴 200마리가 떼를 지어 놀았다.”
이는 대단한 길조(吉兆)를 의미하는데, 생각 컨데, 이는 오늘날 장액(張掖)에서 무려 120Km나 되는 터널(tunnel)을
통해서 ‘최초로 유사(流沙) 통제(統制)’가 성공되어서 하늘이 ‘흰사슴’을 보내어서 축하(祝賀)한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사(流沙) 통제(統制)’의 기술은 결국 사막(沙漠)을 옥토(沃土)로 변하게 하는 기술을 의미하기 때문에,
길조(吉兆)로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오늘날 기련(祁連)인 <학시(壑市)>갑문에서 장액(張掖)까지 120Km 임을 알 수 있는
<청해성(靑海省)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chunghae.JPG
아무튼, 이러한 “인도대륙과 미주(美洲)대륙 간의 ‘핵전쟁’으로 선대(先代) 인류가 멸망하고, ‘초고대 과학문명’을
지닌 사람들과 원시(原始)로 몰락한 인류들이 교감(交感)하면서 ‘인류 문명’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이러한 관점
(觀點)은 부도지(符都誌)의 관점이기도 한 것입니다.
부도지(符都誌)에는 오늘날 카일라스(Kailas)산인 마고(麻姑)대성(大城) 밑에 ‘지유(地乳)’가 나오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아뇩다지 - 즉 오늘날 마나스(Manas)호수(湖水)라고 봅니다.
이 ‘지유(地乳)’는 신화적인 은유(隱喩)인지, 혹은 ‘실재(實在)했던 성수(聖水)’인지는 몰라도, 이를 먹으면, 인간의
생리(生理)구조 자체가 ‘초고대 과학문명’을 이끌어갈지라도, 건전한 정서(情緖)와 지적판단을 하게하는 음식물
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마고(麻姑)대성(大城)이 있는 티베트(Tibet)지역 이외에 ‘초고대 과학문명’으로 있었던 문명(文明)
들이 지구촌에 있었고, 이들이 일정기간 마고대성에 와서 스스로의 생체(生體)를 건전한 정신(精神)을 지니게 하기
위해여 ‘재충전 하는 시기’를 의무적으로 하였음을 뜻합니다.
그러다가 인도대륙과 미주대륙의 핵전쟁으로 지각(地殼)이 흔들려서 지유(地油)가 올라오는 맥(脈)이 끊겼고,
이에 복본(復本)의 맹세를 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던 것입니다.
복본(復本)의 맹세라는 것은 ‘초고대 과학문명’을 엄격히 통제하면서 결국 이를 폐지(廢止)하게되지만, ‘올바르고
생태(生態)친화적인 문명’을 원시(原始)에 빠진 인류에게 제시하는 이른바 ‘떡잎’문명이 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12환국(桓國)은 이런 ‘복본(復本)의 떡잎문명’으로 일어난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관(史觀)은 현대의 역사관 즉 “원시(原始)시대부터 직선적(直線的)으로 계속 일류문명이 발전해왔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궤도(軌道)에 서 있기 때문에, 좀 당혹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역사가 오랜 기록’에는 “신(神)들의 공학(工學)을 지닌 자와 원시 인류가 서로 교류(交流)하면서 문명을
일구었다.”라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현대의 역사관이 좀 유별(類別)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국제사회의 가장 큰 지평(地坪)은 ‘핵(核) 캐스트(Caste)’입니다.
즉 ‘핵(核)을 보유해도 될 귀족(貴族)국가’와 ‘핵(核)을 보유하면 안되는 천민(賤民)국가’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핵(核)전쟁은 인류가 전쟁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지켜온 대원칙 - “비전투원과 전투원을 구분하고, 비전투원을 살상
대상으로 하면 안된다.”는 것이 무너지게 하는 전략기초를 띨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 상호 보증 파괴)가 가장 기본이기 때문에, 결국 공멸(共滅)의 위험을 담보
로 하는 전략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다(Veda)시대 처럼 ‘신(神)들의 공학(工學)과 무기(武器)’를 개발하는 과학기술자들이 사제(司祭)
의 계율로써 엄격히 통제하면서 점차적인 폐기(廢棄)를 하면서 ‘원천적으로 정화(淨化)되는 새로운 과학기술을 위한
<떡잎 역할>에 대한 맹세를 한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신(神)들의 공학’과 ‘신들의 무기’를 지닌 과학기술자들은 국가(國歌)라는 ‘리바이어던(leviathan)의 노예
(奴隸)’일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베다(Veda)시대보다 못한 시도를 하고 있음을 알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북인도에서 객갈한국(客賢汗國)에 진출하였던 ‘코리 족’들은 금륜보(金輪寶)가 상징하는 인도지역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었던 “배달화백의 ‘민주통제’를 중심으로 ‘떡잎’ 역할을 더욱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리아 족(Aryan)
족이 재진입하기 시작하자, 이들이 “사제(司祭: 브라만(Brahman))의 권위로써 ‘떡잎 역할’을 할수 있다.”는 것에 대
해서 회의(懷疑)를 하면서 북행(北行)해서 고조선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배달화백의 민주통제’ 역할은 미주(美洲)대륙의 환국(桓國)에 들어갔다가 삼한인(三韓人)과 더불어 들어오는 ‘드라
비다 인’들에게 맞겼던 것입니다.
아무튼 금륜보(金輪寶)가 북행(北行)해서 사라진 시기인 B.C. 1750 년(年) 경에서 약 100년이 지난 B.C 1650년 경에
소규모의 핵폭발이 - 중성자 탄 인듯 - 터지는 ‘크루크세트라 전쟁’이 터지고, 이는 사제(司祭)의 ‘떡잎 역할’이 전제
하고 있는 ‘핵 통제’가 실패한 것을 의미해서 금륜보(金輪寶)를 운영하던 코리-족들의 판단이 옳음을 의미하는 것입
니다.
문제는 ‘마하바라타’에서는 ‘크르크 세트라’ 전쟁의 후유증(後遺症)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전쟁을 겪은 후에, 인간의 ‘사회 문제’에 대해서 진지한 연구와 관심(關心)이 “무의미하다.”하는 풍조(風潮)
가 번져나가서 사람의 관심이 ‘진지함에 대한 희롱(戱弄)’에서 오히려 쾌감(快感)을 느끼는 쪽으로 휩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 일어난 사건이 <불멸의 인도문학② 마하바라타> 제 105 장 ‘크리슈나 돌아가다’ (p459~p461)에 상세히 묘사
되었습니다.
핵전쟁의 상처때문에 ‘진지함에 대한 희롱(戱弄)’을 일삼게 된 사람들은 진지함의 상징인 수행자(修行者)를 희롱하
기에 가장 좋아하게 되었는데, 드디어 ‘아름다운 남자’를 부인복(婦人服)을 입히고, 지나가는 수행(修行)승(僧)를
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오!! 학식이 높은 분들이여 이 부인(婦人)이 아들을 날것이요? 아니면 딸을 날것이요?”
그러자 수행승은 이 희롱(戱弄)을 알고, 저주(咀呪)를 내립니다.
“이 사람은 아들도 딸도 아닌 몽둥이를 낳을 것이며, 그 몽둥이는 야마(=죽음의 신)이 되어서 너희들 모두를 때려
죽일 것이다.”
희롱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장난에 대한 홧김의 소리라고 생각하였지만, 부인복(婦人服)을 입은 남자는 밤새도록
산고(産苦)를 치루면서 드디어 ‘몽둥이’를 낳게 됩니다.
이에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게 되어서 출생(出生)된 ‘몽둥이’를 갈아서 강(江)과 땅에 뿌리게 되었는데, 이 ‘가루’가
온 마을에 퍼지게 되어서 ‘꺽으면 즉각 회초리’가 되는 나무로 성장하게 됩니다.(아마 물푸레 나무인듯)
그런데, ‘크루크세트라 전쟁’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내어서 술(酒)을 마시게 되면, 서로 과거의 행적과
사상에 대해서 시비(是非)를 거는 풍속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의 예로 번안(飜案)을 하자면, “너 빨갱이지!” “너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의 개로 살아지 않니?!” “너 일제
(日帝)와 싸웠다고 하지만, 결국 만주(滿洲)를 뙤놈에게 팔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니?!” 하는 식으로
싸우게 된 것이지요.
이런 말다툼의 씨앗이 되어서 인근에 지천으로 있는 몽둥이를 꺽어서 서로 패죽이는 사태가 생깁니다.
이 모습을 본 성자(聖者) ‘크리슈나’는 조용히 숲속에 들어가서 돌(石)위에 누우면서 자신의 모습을 맹수(猛獸)로 둔갑
시켜서 지나가던 사냥꾼이 활로 죽이게 합니다.
이 ‘크리슈나의 죽음’을 다른 것은 마하바라타에서 ‘섬찍한 예지(叡智)’를 들어내는 플롯(plot)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핵(核)통제를 가하는 쪽에 반발하는 쪽은 결국 자살-폭탄을 안고 공격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에,
이는 종교적인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성자(聖者)의 세계인 종교를 다른 종교에서는 ‘맹수(猛獸)’로 보는 현상
이 발생하는 - 오늘날 용어로 문명충돌이 일어남을 ‘마하바라타’는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마하바라타’는 ‘야마의 몽둥이’와 ‘크리슈나의 죽음’이 있은 직후에, 쿠루(Kuru)왕조(王朝)를 이루는 사람들
은 ‘문명(文明)을 이끄는 자’로써 회개(悔改)하기 위해서 ‘카일라스(Kailas)성산(聖山)’에 오르는 힘겨운 여행을 합니다.
이 여행과정을 살펴보면, 코시-강(Kosi river)와 단웅수로(檀雄水路)에 있었던 ‘갑문과 운하시설’들이 사라졌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갑문 대박(大舶)이 결국 ‘인위적인 호수(湖水)’ - 다시 말하면, 배달화백을 하는 소도(蘇塗) 시설의 공급을 단국
(丹國)에서 북인도에 공급하는 것을 차단시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각가르-한(Ghaggar Han)국에 진출해서 배달화백을 운영하였던 코리-족들은 금성(金城)을 환도(丸都)에 싼
후에 복대(腹帶)걸이를 하여서 금륜보(金輪寶)가 끌게해서 티베트(Tibet)지역으로 사라진 후에, 단웅수로(檀雄水路)
에서 갑문을 철회함으로써 ‘배달화백’에서 ‘말발’이 티베트(Tibet)와 인도대륙을 오가는 길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배달화백은 ‘제 민족의 평등성’을 기초로해서 전개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캐스트(Caste)’제도와 맞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금륜보(金輪寶)가 북인도에서 고조선으로 사라졌지만, 북인도에 잔존(殘存)한 ‘코리 족’들은 여전히 티베트
단국(丹國)을 중심으로한 코리-족 들과의 교류가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인도역사에서 비(非)베다(Veda) 시대의 초기의 대표적인 인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태어날 때(B.C, 624년) “왕위(王位)를 이으시면 전륜성왕이 될것이다.”라는 예언이 ‘사회적 기다림’
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웅수로(檀雄水路)에 다시 갑문과 운하를 놓기 시작하는 공사(工事)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배달화백을 운영하는 전륜성왕의 도래(到來)’를 하나의 ‘사회적 기다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웅수로(檀雄水路)가 완벽히 개통(開通)시킨 분은 인도의 ‘아쇼카 대왕’ 시절에 해모수(解慕漱) 성제(聖帝)
때였던 것입니다.
해모수(解慕漱) 성제(聖帝)께서 단웅수로(檀雄水路)를 다시 개통(開通)시키고, 비록 무력으로 인도를 통일하였지만,
‘일어나는 반란’을 배달화백으로 승화(昇華)시켜 통합하였기 때문에, 아쇼카 대왕은 전륜성왕으로 칭하게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살펴보면, 해모수 성제께서는 ‘아쇼카 대왕’의 장남(長男)이면서 ‘장님’이 된 쿠나라
(Kunala) 왕자(王子)와 깊은 교제(交際)가 있었음이 발견이 됩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이 민중원(閔中原) 씨리즈(series)에서 다루게 됩니다.)
이처럼 해모수 성제와 쿠나라(Kunala) 왕자(王子)와 깊은 교제(交際)를 하는 기간(期間)에서 단국(丹國)과 ‘코리야
(Koliya)지역’에 있던 ‘코리(Kohri)족들이 인도 대륙에 수로(水路)를 따라서 대거(大擧) 들어가서 소도(蘇塗) 즉 선원
(仙院)을 움직이는 주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전쟁‘이 일어난 지역
을 고조선(古朝鮮) 사람들이 <우려(憂慮)해야할 것이 가운데 있는 고원(高原)>이란 의미로 민중원(閔中原)이라고
칭한 것을 그대로 승계해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어찌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이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전쟁‘을 모르겠습니까?
고구리(高句麗)는 ‘복본(復本)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세계헌법을 고친’ 동명성왕(東明聖王)께서 건국(建國)한
나라인 것입니다.
이런 그들이 복본(復本)을 위해 인도인들의 처절한 기원(祈願)이 담긴 속에 터진 전쟁인 ’크루크세트라(Kurukshetra)
의 고원(高原)‘ 즉 민중원(閔中原)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좌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