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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장 불타는 임치성 (4)
이듬해인 BC 554년(진평공 3년) 정월, 연합군은 축아(祝阿) 인근의 독양이라는 곳에서 군대 해산식을 갖고 각자 나라로 돌아갔다.
진군(晉軍) 역시 강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쪽으로 행군해 나갔다.
그때까지도 중군 원수 순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귀로에 오른 순언(荀偃)은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 나는 죽지 않았다.
도성을 떠나오기 전 무당 고(皐)가 말한 예언은 빗나간 셈이었다.
'고(皐)의 예언도 이제 영험이 사라졌는가?'
순언(荀偃)은 기분이 좋아졌다.
머리가 맑고 상쾌하여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록 제영공의 항복을 받아내지는 못했지만, 동방의 대국 제(齊)나라 도성을 포위한 최초의 장수로 자신의 이름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다음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오른편 관자놀이 위편으로 불룩한 종기 하나가 만져졌다. 종기는 크지 않았으나 매우 뜨겁고 아팠다.
'작은 놈이 맵기도 하군.'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행군을 계속했다.
그런데 머리 위의 종기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커져갔다.
이틀이 지났을 때는 주먹만해져 있었다. 아픔도 더하여 더 이상 행군하기가 어려웠다.
- 신강으로 돌아가면 치료하리라!
순언(荀偃)은 고집했으나 황하를 건너 저옹(著雍)이라는 땅에 이르렀을 때는 더 이상 수레를 탈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얼굴은 엉망이 되어 측근조차 그가 순언임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대열에서 이탈하여 그 곳에 머물며 따로 치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2월이 되자 머리뿐만 아니라 온 얼굴이 짓물러 터졌다.
이상한 병이었다.
눈알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의원조차 끔찍하여 순언 대하기를 두려워하였다.
- 원수 위독!
이러한 소식이 앞서간 진(晉)나라 장수들 사이에 전해졌다.
중군 좌장 범개(范匃)는 수레를 돌려 순언이 머물러 있는 저옹으로 되돌아왔다.
"원수를 뵙고자 하오."
그러나 순언(荀偃)은 자신의 추악한 몰골을 남에게 보이기 싫었다.
간병하는 종자에게 엄히 명을 내렸다.
-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일체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결국 범개는 종자를 통해 순언과 말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귀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문의 후계자였던 모양이다.
범개(范匃)는 이렇게 물었다.
"원수께서 돌아가시면 누구를 순씨의 당주로 삼으시렵니까?"
종자가 나와 순언의 대답을 전했다.
"정생(鄭甥)이 좋겠소."
정생이라면 정나라 생(甥)이라는 뜻이다.
생은 곧 생질(甥姪).
순언의 집안에 정(鄭)나라에서 시집온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낳은 아들 - 순언에게는 조카뻘 되는 사람 중에 순오(荀吳)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를 순씨의 당주로 삼으라는 유언이었다.
2월 20일, 마침내 순언(荀偃)은 괴로운 표정으로 긴 숨을 토하고 나서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살아생전에 해결하지 못한 걱정거리라도 있었는가.
순언은 주먹만하게 불거진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아 - !"
순언(荀偃)이 죽었다는 통보를 받고 가장 먼저 방으로 들어간 범개(范匃)는 질겁을 했다.
절로 몸이 떨렸다.
용기를 내어 순언의 시신 앞으로 다가가 깨끗하게 씻은 손으로 눈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당신은 집안일을 걱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순오(荀吳)를 당신 대하듯 잘 받들겠습니다."
그러나 순언의 부릅뜬 눈은 여전히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난영(欒盈)이 귀띔했다.
"혹시 제(齊)나라의 일을 완전히 마무리짓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서가 아닐까요?"
범개(范匃)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다시 순언의 눈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제 돌아가셨지만, 당신이 하던 일을 이어받지 않은 자는 벌을 받을 것입니다. 황하의 신이여, 굽어살피소서."
그러자 순언(荀偃)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진(晉)나라 군대는 분명히 제나라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수도인 임치성을 포위하고 성안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전과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어떠한가.
제영공(齊靈公)의 항복을 받아내지도 못했고, 동맹에 참여하겠다는 맹세를 얻어내지도 못했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싸움만 해댔을 뿐이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번 제나라 원정을 결코 성공적이라 할 수 없었다.
완전한 승리를 갈구했던 순언(荀偃)으로서는 이러한 미완의 승리가 못내 아쉬웠을지도 몰랐다.
범개(范匃)는 비로소 순언의 가슴속에 담긴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의 생각은 참으로 얕았다. 순언(荀偃)이야말로 진정한 장부였다."
건너편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봄을 알리고 있었다.
그날 밤이었다.
중군에 갇혀 있던 제나라 장수 식작(殖綽)과 곽최(郭最)가 순언이 죽은 틈을 타 탈출을 감행했다.
범개(范匃)는 그들을 추격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그는 식작과 곽최가 그대로 제나라로 도망치게 내버려두고 순언의 시체를 관에 담아 진(晉)나라로 돌아갔다.
진평공(晉平公)은 순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한 후 범개를 중군 원수에 임명했다.
그리고 순언의 조카인 순오(荀吳)를 대부로 올려 중군 좌장의 직위를 내렸다.
진나라를 맹주로 한 12개국 연합국의 공격을 받고 함락 직전까지 몰렸던 동방의 대국 제(齊)나라는 분위기가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임치성은 폐허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활기 넘치던 백성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 우리 제(齊)나라가 이렇게 보잘것 없었던가.
첫 패공을 탄생시켰던 영광의 나라라는 자긍심은 사라졌다.
대신 패전국이라는 치욕스런 멍에를 뒤집어썼다.
여기에 공실마저 어지러움 속으로 빠져들었다.
제영공이 세자 광(光)을 폐위시키고 중자(仲子)의 소생인 공자 아(牙)를 새로이 세자에 책봉한 것이었다.
- 부군(父君)에게 칼을 휘두른 패륜아!
이것이 세자 광의 죄목이었다.
세자 광의 폐위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졌다.
재상인 최저로서도 어떻게 손써볼 틈이 없었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아경 고후(高厚)였다.
그는 평음과 경자가 함락되는 와중에서 끝까지 노읍을 지켜낸 전공을 앞세우며 개선장군처럼 임치성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대뜸 세자 광(光)을 탄핵한 것이었다.
여기에 공자 아(牙)의 대리모격인 융자(戎子)가 적극적으로 끼여들었다.
세자 광(光)의 폐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반대론자는 내궁에서 생겨났다.
다름 아닌 공자 아(牙)의 생모인 중자였다.
그녀는 융자와 고후에 의해 세자의 폐위가 거론되는 것을 알고 제영공을 찾아가 말했다.
- 세자를 폐해서는 안됩니다. 광(光)은 이미 중원의 제후들에게 제(齊)나라 세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세자를 폐하면 군후께서는 신용을 잃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제영공(齊靈公)은 이러한 중자의 간언을 일언지하에 물리쳤다.
- 이 일은 오로지 내 마음이다.
끝내 광(光)은 세자자리에서 쫓겨나고 대신 이복동생인 공자 아(牙)가 세자에 올랐다.
"고후를 세자 아(牙)의 태부(太傅)로 삼고, 숙사위를 소부(小傅)에 임명하노라!
최저는 조당 한구석에 서서 조용히 제영공의 영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 최저의 시대도 끝났다.
많은 신료들이 이런 눈으로 최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최저(崔杼)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광(光)에 대한 제영공의 조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폐세자 광을 동쪽 옛 내나라 땅인 즉묵(卽墨)으로 추방한 것이었다.
진(晉)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한 것이 원인이었던 모양이다.
그 해 5월, 제영공은 병석에 누웠다. 병은 악화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쉽게 낫지도 않았다.
이래저래 제나라 공실은 암울했다.
그 암울함 속에 유독 강한 빛을 내뿜는 눈동자가 하나 있었다.
최저였다.
'여기서 꺾이면 내가 최저라 할 수 없겠지.'
최저(崔杼)는 자신의 내면 속에 숨겨져 있는 특유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사내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5경 중의 한 사람인 경봉(慶封)이었다. 한밤중에 은밀히 그의 집을 방문했다. 최저의 투지에 찬 얼굴을 본 경봉은 긴장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그런 경봉의 눈동자를 쏘듯 들여다보며 최저(崔杼)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한 가지만 묻겠소."
"말씀하십시오."
"주공의 후사로 광(光)공자가 좋소, 아(牙) 공자가 좋소?"
이 말은 곧 폐세자 광(光)을 지지하겠느냐, 아니면 현재 세자인 아(牙)를 지지하겠느냐는 물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경봉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야 물론.......광(光)공자여야 하겠지요."
경봉(慶封)은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다.
이제부터 그는 최저와 한 배를 탄 동반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되었소."
최저의 얼굴에 만족의 빛이 스쳐갔다.
경봉(慶封)이 물었다.
"어떻게 할 작정이오?"
"내가 만일 고후나 숙사위라면...........화근을 없애버릴 것이오."
"광(光)공자가 살해될 것이라는 말씀이오?"
"틀림없이!"
"우선은 광 공자부터 보호해야겠군요."
"그렇소. 나는 광 공자를 임치성으로 다시 데려올 작정이오."
"내가 할 일은 어떤 것이오?"
경봉(慶封)으로서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그대 동생인 경좌(慶佐)의 직위가 사구(司寇)인 것으로 알고 있소."
사구라면 오늘날의 검찰총장에 해당한다.
나라 안의 민간 치안을 담당하는 총책임자다.
경봉(慶封)은 비로소 최저가 자신을 찾아온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경좌가 이끄는 치안 조직망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경좌(慶佐)로 하여금 즉묵 땅에 유배되어 있는 광(光)공자를 빼돌린다.'
놀라운 착안이었다.
경봉은 새삼스런 눈길로 최저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부도옹(不倒翁)인가?'
부도옹이란 아무렇게 굴려도 오똑오똑 일어서게 된 인형(人形)을 말하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을 말한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