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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사람이 겪는 과정
마가복음 13:9~13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여러분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고 싶습니까?
저는 육체가 분리되어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주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나의 기뻐하는 자야!” 하시면서 두 팔을 벌려 영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허상이 아닙니다.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면 됩니다. ‘영의 사람’이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을 벧후 1:4에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시면서 ‘신성한 성품’ 영어로는 ‘the divine nature,’ 여기서 ‘신성한’이란 헬라어 ‘데이오스 θεῖος’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성품’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앉으며 마 3:1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모든 인격을 지니고 오신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그분으로 다스림을 받으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게는 두 딸이 있습니다.
오늘까지 저는 이 아이들에게 싫증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언제나 사랑스럽고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예쁜 짓을 해서요? 아닙니다. 제 생명이 그 안에 깃들어 있기에 저는 본능적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예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온 우주 만물 가운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 예수님의 생명이 담겨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택하셨습니다. 거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아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 값 주고 저와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하나님 앞에 바른 모습으로 서기 위함입니다. 세상은 나그네 인생입니다. 잠시 있다 주님이 부르시면 내 육체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훌훌 털어버리고 주님께 가야 합니다. 주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나라에 합당한 영의 사람이 겪어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이런 흐름에서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첫 번째는 억울한 환경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과정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버림받는 아픔에서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과 세 번째는 인내하므로 승리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순종하고 잘 견디고 나가게 되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와 함께 영원한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억울한 환경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과정이 있습니다.
막 13: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은 쉬운 우리말 성경에서는 ‘너희는 정신을 바짝 차려라’고 하였고 영어 성경에서는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누구나 펼쳐질 수 있는 것으로 예외상황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사악한 무리로 고소를 당하여 재판을 받기도 하고 예수님 당시에 회당에서 열리는 유대인의 법정인 공회(산헤드린)에 넘겨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공연하게 회당에서 이교도들처럼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을 것이 예상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지난날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이뤄지며 장래에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합니다. 점차 말씀이 선명하고 심화하여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억울한 옥살이를 하거나 수치를 당하고 매를 맞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 들이고 복음을 믿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육에 속한 자들은 주님을 원망하고 주님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은 이런 일을 겪을 때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 예가 사도행전 16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귀신 들린 여종 하나가 이들을 뒤따라오면서 계속 소리를 질러 복음 전하는 일을 방해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이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니, 그를 통해 큰 돈벌이를 하던 그 여종의 주인들이 돈벌이가 끊긴 것을 알고 바울과 실라를 고발합니다. 이로 인하여 관원들에게 붙잡혀 심하게 매를 맞고 차꼬에 채여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얼마나 억울할 노릇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였고, 귀신에게 사로잡힌 여종을 구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돌아온 것은 매를 맞는 것과 감옥에 갇히는 수모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행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하였습니다. 죄수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당연히 나도 주님의 길을 감에 있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게 됨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한결같이 예수님과 함게 고난에 참여한 것을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억울한 사건을 당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입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실제가 되고 그 능력이 나타나고 있기에 어떤 억울함도 고통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막 13: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음과 사심을 말합니다. 이 복음이 만국에 전파하기 위하여 반드시 전도자에게서 복음이 실제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달가워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의 구원이 전파된다면 얼마든지 나를 포기할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로 인하여 복음을 생명력을 가지고 전파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영의 사람은 버림받는 아픔에서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막 13:12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형제와 부모는 그리고 자식과의 관계는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끊어지고 죽음에 내몰리는 현상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례가 구약에 등장하였습니다. 왕하 6:24-29에서는 북이스라엘 제 9대왕 여호람 때인 주전 851-840년경에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에워싸 크게 주리므로 어미가 자기 아들을 삶아 먹는 일이 실제로 발생했습니다. 남 유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시드기야 왕 제9년 주전 588년 10월 10일부터 제11년 주전 586년 4월 9일까지 30개월 동안 예루살렘 성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군대에 의해 둘러싸였는데, 이때도 성 밖 출입이 금지되어 자녀를 잡아먹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할 것에 대하여 주전 700년경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리고 멸망하기 얼마 전인 주전 6세기 초 예레미야 선지자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대적에게 둘러싸여 곤핍할 때 아들의 고기, 딸의 고기, 친구의 고기를 먹게 하리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가 쓴 『유대전쟁사』에서도 주 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성을 에워쌌을 때도 어미가 아들을 죽여 구워서 반은 먹고 반은 숨겨놓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신28:57에 기록한“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는 1400년 전 모세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말세가 되며 배교의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이단 사설로 오염을 시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들이 생길 것입니다. 이럴 때 반드시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한 저자로서 성령이 내 안에 계셔야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은혜를 입기 때문입니다.
막 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위기의 상황이 반드시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성령이 내 안에 들어 있는 말씀으로 나를 일깨워 순종하게 하십니다. 죽음의 환경으로 몰아갈 때 성령은 상황에 걸맞은 말씀으로 나를 위로하시고 이겨나갈 수 있든 담대함을 주실 것입니다. 일례로 두렵고 떨림의 환경에서 사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되면서 내 마음이 강하고 담대해졌다면 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취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으로 우리 안에 말씀이 스며들어 성취하게 되면 나는 예수님의 인격이 이뤄지는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영의 사람은 인내하므로 승리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막 13: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미움이란 혐오하여 죽일 듯 덤벼드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내게 대적자가 되어 나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절망하고 낙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접어든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여기서 ‘끝까지’는 헬라어로 ‘텔로스 τέλος’인데 이는 원래 이 단어는 하나의 단계가 끝나고 다음 단계가 시작되는 ‘전환점’을 의미합니다. 또한, 최종적인 단계를 말하기도 합니다. 즉, ‘끝까지’라는 단어에는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아무리 힘겹고 어려운 환경에 처하더라도 빛으로 내게 임하여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라고 할 때 ‘견디다’ 를 영어 성경에서는 ‘the one who stands firm to the end’라고 하였습니다. 즉, 굳건하게 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성경에서는 ‘endure’ 인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단순하게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주님 안에서 넉넉히 이기며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온전히 이기는 자의 모습으로 설 수 있는 배경에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기에 가능합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면서 주님의 사랑은 세상이 변하고 모든 사람이 나를 배척하여 떠날지라도 나와 함께 계셔 사랑의 손을 놓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신 약속대로 예수님은 믿음의 성도에게 성령을 통하여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종말의 때에는 수없는 재난과 영적 혼란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때에 성령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믿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님이 내 안에 내가 성령안에 있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믿고 주님의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는 성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게 임함 구원이 구원에 이르는 것인지를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환경에 처했을 때 예수님의 복음이 내 안에서 흐르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버림받고 외톨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왕 노릇하며 그 말씀이 성취하고 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나는 내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인내의 믿음으로 잘 견디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만일 이런 영의 사람이 겪는 과정이 내게 없다고 한다면 내가 구원받았는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신속하게 마음을 돌이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회개하면서 다시 한번 바른 믿음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영의 사람이 겪는 이런 과정들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에서 왕처럼 세워지고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