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42/191201]‘한양도성’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12월 1일. 달력이라고 달랑 한 장이 남았을 뿐이다. 2019년 올 한 해도 ‘이렇게 가고’ 마는 것인가. ‘이렇게 간다’고 하니, 뭔가 아쉬워도 한참 아쉬운 것같으나, 그럼 ‘어떻게 가야’ 아쉽지 않은 것일까. 딱히 그럴 것도 없는데, 그리고 무슨 목표를 크게 잡았는데 이루지 못해 안타까운 일도 없는데, 연말이 다가오니 괜히 마음이 그럴 뿐이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누구나 약간씩은 서글퍼지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그런 센티멘탈은 모두 접어두시라. 100년째 살고 계신 김형석 선생님이 역설하고 다니는 게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까지”이다. 6학년 3반 밖에 안되었지만, 그 말이 맞을 것같다. 앞으로 12년, 내 인생의 황금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고거시’(그것이라고 표기를 올바로 하면 느낌이 안온다) 최대의 문제이자 숙제일지니, 그까짓 올 한 해가 가고, 나이테가 하나 더해진다는 것을 일종의 ‘축복祝福’이라고 생각하자고 마음을 다잡는 12월 1일 새벽이다.
아무튼, 오늘은 맘 먹고 내 ‘잘난 체’를 하고 싶다. 어제 저녁 6시태평로에 있는 뉴국제호텔 15층. 어느 대학교 한의대출신 송년모임에 인문학강사로 초대를 받았다. 78학번이니 우리 또래이다. 여자 한의사 20명이 좀 넘고 남자까지 합하니 35명이다. ‘강산에’도 같은과 동기동창이다. 유수한 대학의 한의대를 나와 가수가 된 그의 이력도 독특하다. 30여분 뷔페로 저녁을 먹고, 특강을 시작하는데 주제는 “한양도성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이다. 주어진 시간은 30분이라지만, 조금은 융통성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그렇게 기똥찬 주제를 30분으로 압축할 것인가. 이 강의를 위하여 나는 그제 저녁 상경했다. 아무 유인물이나 동영상, 지도가 없어도 상관없지만, 강사로서 성의를 보여야 할 것같아, 키워드만 줄줄이 나열하여 A4용지 2장을 만들고 35장을 복사했고, 한양도성 지도도 악착같이 구해 모두 나눠드렸다. 곁들여 4년전인가 썼던 졸문칼럼 <기록의 나라, 조선>도 드리며,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칼럼 한편만 읽어도 오늘 보람있는 시간이 될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 칼럼은 당시 화제가 되었던, 나의 오랜 지론이 담긴, 누구라도 꼭 읽고 그 의미를 새겨야 할 것이라고 이 강사는 역설했다.
문제는 분위기이다. 진행될수록 35명의 70개 눈동자가 나의 ‘열강’에 빨려들어오는, 이런 기분좋은 느낌 처음이다. 마치 ‘왜 이제야 이런 좋은 주제를 말해주느냐’는 것같다. 조선 창업주 태조 이성계는 수도의 경계를 정하고 성을 쌓을 때, 내사산(內 四山: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 주변만 돌로 쌓고(석성石城), 평지는 흙으로 쌓았다(토성土城). 세종때 태종 이방원이 토성을 모두 석성으로 쌓았다. 세월이 흘러 무너지고 멸실된 석성을 숙종임금이 대개축공사를 벌였다. 1907년까지 총 18.6km의 석성은 어쨌거나 고스란히 유지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일제의 간계와 이완용의 주도로 점차 헐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맨먼저 남산(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임을 기억하자)의 ‘국사당’과 ‘봉수대’를 훼손하고, 그 자리에 ‘조선신사’를 지었다. 국립 현충원 1호인 ‘장충단’의 묘지들을 흩뿌리고, 그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를 지었다. 장충단의 무덤주인들은 ‘미스터 션샤인’에서 봤듯이 구한말 해산당한 국군들(남대문 전투에서 수백명이 죽었다)과 의병들이었다. 그러니 현충원 1호이지 않는가. 1935년 불멸의 영웅 안중근 의사의 아들을 데려다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빌게도 했다. ‘어진 조선왕의 산’인 ‘인왕산仁王山의 이름도 ‘어진 일본왕의 산’이라는 인왕산仁旺山이라고, 임금왕에 ‘날 일’변을 붙였다. 어디 그뿐인가. 전국의 명산 300곳의 산봉우리에 민족의 정기를 끊겠다며 쇠말뚝을 박았지 않았는가. 이런 아픈 일화나 실례를 들어가며 서두를 꺼내는데, 한의대 출신인지라 한자와 한문도 잘 알 듯이 집중도가 뛰어나다. 이러면 강의할 기분이 난다.
한양도성이 세계문화유산이 되지 못하는 이유, 축조과정과 사대문(四大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이름의 의미, 사소문(四小門: 창의문,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 그리고 종루鐘樓인 보신각(普信閣) 등을 명쾌히 설명하는데, 박수가 터져나온다. 조선조 임금들의 첫 번째 미션은 우매한 백성들이 오상(五常: 사람의 자식으로 갖춰야할 5가지 떳떳한 도리-仁義禮智信 어질고, 의롭고, 예의바르고, 지혜롭고, 믿음직스러움)을 갖도록 교화敎化시키는 것이고, 두 번째 미션이 정비든 계비든 후궁이든 많이 관계해 국본(國本: 대를 이를 왕자) 생산이라고 하자 웃음보가 터진다. 사대문의 이름이 내세우는 것이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다. 마지막으로 고종때 종루 이름을 ‘보신각’으로 하여 ‘인의예지신’으로 완성이 되었다. 당시 인구 2만가구(10만명 추산). 그들은 밤 10시면 ‘인경人定’이라 하여 종을 28번(하늘의 별자리 28宿) 쳐 문을 닫았고, 새벽 4시면 ‘파루(罷漏바라)’라 하여 종을 33번(불교에서 말하는 33天) 쳐 문을 열고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날은 ‘제야의 종소리’ 33번으로 남았지만, ‘아침 조朝, 맑을 선鮮’ 조선이라는 나라, 외국 선교사 등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며 영어로 ‘모닝 캄Morning Calm’이라고 한 ‘은자의 나라’ 조선을 어찌 사랑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만약에 ‘종주국’ 명나라가 우리 나라 이름을 조선과 화녕和寧중 화녕으로 하라고 했다면(두 개를 갖다 바치면서 국명을 정해달라고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성계 고향마을 이름이 국가명으로 됐을 것은 불문가지. 그런 비극이 어디 있었을까.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낙산(조선조 이름은 타락산이었다. 해발 125m 밖에 안되니 해발 338m인 우백호 인왕산과 격이 맞지 않아 타락죽을 먹고 빨리빨리 자라라고 타락산이라 했다한다)을 좌청룡으로, 인왕산을 우백호로, 남산을 안산案山으로 하여 14만여평의 경복궁을 지은 것이다. 당연히 태조산太祖山은 한북정맥의 뿌리를 내려준 백두산이고, 조산祖山은 북한산(삼각산. 해발 837m)이며, 조산과 주산 사이에 있는 보현봉普賢峯은 풍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내사산과 사대문 그리고 사소문으로 둘러싸인 한양도성이 오늘날 고스란히 원형이 보전되었다면, 우리는 그리스나 이탈리아를 조금도 부러워할 일이 아닌 게, 전세계 사람들이 이 도성 한바퀴 돌아보려고 줄을 이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중국의 4000km나 되는 만리장성을 돌 수 있겠는가. 18.6km의 도성을 돌면서 700년 이어온 대한민국의 수도를 일별하는 것은 꿈일 것이다. 사대문안 사람들은 외국관광객들의 캐리어 굴러가는 소리 때문에 늘 새벽잠을 설치지 않았을까. 얼마나 즐거운 상상인가. 그런 선조들이 물려준 기똥찬 문화유산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넘들 때문에, 광복이후엔 뭣도 모르는 정부관계자들에 의해 난개발 등으로 처절하게 훼손되어 나간 것이다. 지하도로를 내든, 고가도로를 내든, 도성을 보호하며 도시개발을 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홍준씨는 1993년 펴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문답사)’ 1권 머리글에서 ‘우리나라는 전국토가 박물관’이라고 썼다. 그렇다. 5천년 역사에 전국 방방곡곡 어디 하나 신화와 전설이 없을 것인가. 한양도성 한바퀴 도는 의미도 여기에 있다. 곳곳에 설치된 친절한 안내판들을 꼭 읽어보시며, 두 번에 나눠 걸어보셔라.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전경, 조망대로는 최고이다. 북악산을 오르시려면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하셔라. 신분증이 없으면 고관대작의 아들도 출입금지다. 숙정문 근처의 ‘김신조 소나무’도 일별하시라. 10여발의 총알자국이 흰 페인트로 칠해 있다. 1993년 김영삼대통령이 인왕산을 개방했고, 2007년 4월 노무현대통령이 마침내 북악산을 개방, 우리는 이제 한바퀴를 돌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황지우가 썼다는 북악산 개방에 부친 축시를 낭독하자 일제히 박수가 터졌다(우리 블로그에서 ‘북악산’이라고 검색해 보시라). 끝도 없는 강의내용은 이만 줄인다.
수강태도가 너무 좋고, 들려줄 이야기가 너무 많았지만, 일년에 한번 모임자리에서 나의 기분으로 1시간이상 끌 수는 없는 일. 40여분만에 마치면서 “이 어줍잖은 강의가, 도성을 순례하면서 우리 역사와 문화재에 관심을 가져주는 계기가 된다면 저로선 영광”이라고 했다. 강의가 끝난 직후, 우리 또래이긴 하지만 졸지에 아줌마팬들이 생겼다. "이렇게 시종일관 힘 있는 강의는 처음 들었다" "사실 이런 주제의 인문학 강의가 많아져야 한다"며 달려와 선크림을 주는 자, 아주 귀한 거라며 로하스 크림을 두 개 주면서 하나는 사모님 드리라고 하는 자, 한의사들답게 ‘공진단’ 1박스를 주는 회장(처음 알았는데 1개에 5만원, 20개 1박스면 100만원. 오매 놀래라), 남자들은 서로 발렌다인 21년산을 따라주기에 바쁘다. 또한 모임의 기념품인 고급 블로치까지 안긴다. 수강료가 대수랴. 내년 모임에는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최소 1시간이상 시간을 잡아놓겠다고 한다. 흐미- 좋은 거! 내가 열강을 하긴 했나보다. 아니면, 이 양반들이 순진하나? 어느 여고에서 영재반 200명 앞에서 2시간 특강한 때보다 더 기분이 좋은가, 모르겠다(그때는 학생들이 내가 연예인이나 방송인도 아닌데 사인을 해달라고 줄을 서 당황했고, 어떤 학생은 무조건 인문대학을 가겠다하여 나를 기쁘게 했다).
아무튼, 나의 자화자찬은 여기까지이다. 지나쳤으면 용서하시라. 9시 집에 돌아오자, 아내의 하는 말 “잘 했겠지요? 얼마 받았어요?” 그것 참, 대뜸 돈의 액수라니? 그게 대수랴. 내가 이렇게 기분이 업이 됐는데. 재능기부하려고 했는데. 20만원을 절반씩 나눠가졌다는 얘기.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