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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의 역사
한의학이란?
한국에서 고대부터 발달해 내려온 의학이며 서양의학에 대응하여 동양의학이라고도 한다. 중국·일본 등 한자문화권 지역의 의학과 교류되면서 연구·전승·발전되어 왔으며 동양철학적인 방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국의학은 현재 WHO를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중국전통의학(Traditional Chinese Medicine; TCM)으로 알려져 있고 미국에서는 대체의학(Alternative Medicine)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고유한 의학은 일제를 거치면서 명치유신(明治維新) 때 전통의학을 말살하고 양방으로 일원화한 일본제도의 영향을 받아 전래의 동의학(東醫學)이 사라졌다가 1960년대 현대식 교육이 시작되면서 한방과 양방이라는 두 의료체계가 공존하게 되었다. 한방의학이라는 표현은 일본의 간뽀(漢方)의학이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현재는 한자를 바꾸어 한방(韓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북한에서는 동의학에서 고려의학으로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의학의 특징
기본원리
한의학의 특징
종합적인 생명현상을 동적(動的)으로 관찰함으로써 내적 생명력을 근본적으로 배양하고 건강을 증진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인체를 소우주(小宇宙)로 보기 때문에 한의학의 기초이론은 우주운행원리인 음양을 중심으로 한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다.한의학의 자연관과 인체의 생리·병리에 대한 원리, 진단·치료·약물 등에 대한 이론은 모두가 이 음양오행으로 설명된다.
동·서양 의학의 차이
·병과 증
병은 건강의 상대개념으로 동ㆍ서양의학에 함께 사용된다. 즉 중풍이란 용어의 경우 한양방을 막론하고 사용하고 있으며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한의사와 양의사의 병에 대한 개념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즉 중풍의 경우도 양의사의 경우에는 뇌혈관질환이라 하여 뇌혈관의 폐색이나 출혈로 구분하여 CT상 확인 가능한 경우 확진을 하게 되지만 한의사의 경우에는 풍(風)에 맞은 경우는 모두 중풍으로 보고 치료하게 된다. 이처럼 한 가지 병도 한약방에 따라 달리 설명될 수 있다. 또 한 예로 한의사가 간이 나쁘다 진단했을 때 임상병리과에서 간기능 검사를 해보면 수치의 이상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정상인 경우도 있게 된다.
이것 또한 한의학에서 의미하는 간이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Liver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간과 관련된 근육의 이상, 눈 이상, 혈 부족, 손톱 이상 등을 모두 간과 연관시켜 진단하므로 발생할 수 있는 차이이다. 결국 한의사는 병을 치료한다기 보다 증을 치료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으며 한 가지 병에도 여러 가지 증이 있을 수 있고 바꾸어 말하면 한 가지 증이라면 여러 가지 병도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변증논치
변증논치란 증을 가려서 그 증에 따라 치료방법을 선택하는 것이고 변병논치란 병을 가려서 치료방법을 모색하는 것인데 한의학에서는 변증논치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변증의 방법에는 내상병에 적용하는 장부변증, 외감병에 적용하는 육경변증, 삼초변증, 위기영혈변증 등이 있는 데 이들 변증을 모두 종합할 수 있는 대표적인 변증으로 팔강변증(八綱辨證)을 들 수 있다. 팔강변증은 여덟 가지의 강령으로 병을 구분하는 것인데 총강에 해당하는 음양을 제외하면 표(表), 리(裏), 한(寒), 열(熱), 허(虛), 실(實)의 여섯 가지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표리는 병의 부위가 겉인지 속인지를 가리는 것이고 한열은 병의 상태가 찬지 뜨거운지를 가리는 것이며 허실은 정기의 부족에 의한 것인지 사기의 지나침에 의한 것인지를 가리는 것이다.
한의학의 기초이론
음양오행의 의미
한의학의 기초이론
음양오행은 상대적인 개념을 의미하는 음(陰)과 양(陽), 다섯 개의 사물들 간의 상호관계를 중시하는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오행(五行)을 말한다. 이들은 자연계 사물의 현상을 두 가지 혹은 다섯 가지 측면으로 관찰하는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음양
음양은 구름에 의하여 생기는 음지의 그늘과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햇빛을 의미하는 글자로부터 유래되었고 후세에 그 의미가 점차 확대되어 낮과 밤, 밝고 어두움, 따뜻하고 차가움, 가볍고 무거움, 맑고 탁함이라는 성질을 대표하게 되었으며 자연현상 외에도 남과 여, 신체의 앞과 뒤, 장부 중 장과 부, 기와 혈, 경맥의 음경과 양경, 약의 온열과 한량 등으로 그 활용범위가 확대되었다.
오행
오행은 최초에는 물, 불, 나무, 쇠, 흙의 다섯 가지 사물로 생각되었는데, 물과 불은 음식조리에 필요하고 나무와 쇠는 거주지를 짓는데 필요하며 이들 네 가지는 모두 대지의 흙으로부터 만들어진다고 보아 이들 다섯 가지는 인간생활의 필수품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후 이러한 개념이 점차 확대되어 사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의 모든 현상도 다섯 가지로 설명하면서 오행은 목, 화, 토, 금, 수의 다섯으로 상징되었다. 그리고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정권의 정당성을 오행의 상극관계로 설명하게 된 이후 정치뿐 아니라 문화, 사회일반적인 문제까지도 오행으로 설명하게 되었다.
오행은 목, 화, 토, 금, 수 다섯 가지의 상호관계를 중요시하는데 이들의 관계는 상생(相生)과 상극(相克)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상생이란 흔히 모자(母子) 즉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 설명하는데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이 상생의 관계이다. 상극이란 흔히 부부(夫婦)의 관계로 설명하는데 목극토, 토극수, 수극화, 화극금, 금극목이 상극의 관계이다. 오행은 상생과 상극이라는 두 관계를 통하여 다섯간의 관계가 유지된다고 본다.
병의분류(외감병과 내상병)
흔히 질병은 병원균에 의한 병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광범위하게 생각하면 인간 내외부의 모든 요인이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의학에서는 외부환경의 나쁜 기운, 즉 사기(邪氣)에 의한 병과 인체 내의 기운이 감정이나 다른 원인에 의해 흐트러짐에 의한 병으로 나누고 있다. 자연계의 사기는 흔히 외부에서 들어오므로 이들에 의한 병은 외감(外感)병이라고 하고 기운과 감정변화로 인한 병은 인체내부에서 일어나므로 내상(內傷)병이라고 한다.
외감병은 인체 내의 정기가 사기에 상대하는 평형이 깨어져서 정기가 사기를 이겨낼 수 없게 되면 발생한다고 보는데 특히 각 계절의 기후특징인 육기(六氣), 즉 풍(風), 한(寒), 서(暑), 습(濕), 조(燥), 화(火)의 여섯 가지 기후변화가 지나치면 병이 생긴다고 보았다. 내상병은 주로 음식으로부터 만들어져야 할 기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하여 발생하는 기부족에 의한 병과 일곱 가지 감정 즉 칠정(七情)인 노(努), 희(喜), 사(思), 비(悲), 우(憂), 공(恐), 경(驚)의 지나친 변화에 의하여 병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서양의학이 신체의학에서 정신신체의학으로 발전되어 왔고 또한 향후의 현대의학이 정신신체사회의학으로 변해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추세를 볼 때 한의학에서는 일찍이 이들의 관련성을 고려한 질병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외에도 우주자연의 기후변화에 따른 질병양상의 변화도 중시하는 점은 앞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할 분야이기도 하다.
한의학의 인체관
정·기·신
한의학의 인체관
흔히 인체는 정신과 육체로 구분되어 있다고 하는데 한의학에서는 정(精), 기(氣), 신(神)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정(精)은 인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기초가 되고 신(神)은 정신활동과 감정활동이 포함되며 기(氣)는 정과 신을 만드는 기초가 된다. 한의학에서는 이들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삼보(三寶)라 하며, 특히 정과 신은 모두 기로부터 만들어지므로 결국 ‘인체는 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인체는 기의 덩어리이고 동시에 인간의 정신작용, 감정활동 등도 모두 기의 덩어리인 인체에서 기인하므로 인간의 생명활동 역시 기에 의한 활동이라고 본다.
장부와 경락
기는 인체 내 장부에 저장되고 경락을 통하여 전신을 운행한다.
장부(臟腑)는 서양의학의 해부학적 기준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정기(精氣)를 저장하는 기능은 장(臟)이 담당하고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기능은 부(腑)가 담당한다고 보고 장과 부를 구분하였다. 장부(臟腑)는 간(肝), 심(心), 비(脾), 폐(肺), 신(腎)의 오장과 담(膽), 소장(小腸), 위(胃), 대장(大腸), 방광(膀胱), 삼초(三焦)의 육부로 구성되어 있다.
경락은 손발에 각각 여섯 개씩 12개의 경맥이 좌우 한쌍씩 있는데 수태음폐경, 수양명대장경, 족양명위경, 족태음비경, 수소음심경, 수태양소장경, 족태양방광경, 족소음신경, 수궐음심포경, 수소양삼초경, 족소양담경, 족궐음간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부와 경락의 순환회로
장부와 경락은 인체 내에서 각각 전신의 영양분을 저장하고 운반하는 역할을 맡아 일정한 방식으로 순환하고 있다. 즉 만물이 자라기 위해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순환하듯이 장부와 경락의 기운이 순환하는 일정한 회로가 있다.
장부는 인체의 흉복강 내에서 각 장부의 기운을 순환시키는데 특히 심(心)과 신(腎)이 중심이 된다. 즉 하늘의 따뜻한 기운이 땅으로 내려오고 땅의 물이 따뜻한 기운을 받아 기화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하늘의 화(火)에 해당하는 심(心), 땅의 수(水)에 해당하는 신(腎)이 서로 수화의 기운을 주고 받으며 변화를 주관하는 것이다.
경락도 이와 마찬가지로 땅에 해당하는 음(陰)의 경락은 하늘의 방향인 위쪽으로 올라가고 하늘에 해당하는 양(陽)의 경락은 땅의 방향은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순환과정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 즉 손발의 음경(陰經)은 모두 머리 쪽으로 올라가고, 손발의 양경(陽經)은 모두 발쪽으로 향하도록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체 내 기운이 순환하는 회로는 수승화강(水升火降)의 원리를 따르고 있으며이러한 원리에 따른 옛사람들의 ‘가슴이 서늘하고 아랫배는 따뜻하게', 혹은 ‘머리는 서늘하고 발은 따뜻하게' 하라는 얘기는 건강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기를 통한 자연과 인체의 조화
기는 넓게는 우주의 기에서부터 좁게는 미세한 원소세계의 기까지 다양하게 정의되며 그 존재여부에 관하여 많은 논란이 있지만 한의학에서는 경락을 전제로 성립하는 개념이다. 즉 기는 경락을 통하여 인체의 구석구석 필요한 곳에 전달되며 잉여분의 기는 오장에 저장된다. 이러한 의학에서의 기외에 일상에서 인식하기 쉬운 기로는 눈에 보이는 입김과 눈에 보이지 않는 호흡을 예로 들 수 있다. 즉 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이중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예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도 기의 변화로 설명하여 호수 물결을 일으키는 바람,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풍선속의 바람이 나오면서 날아가는 모양, 심지어 우물 속에 떨어지는 돌에 물이 번져가는 모양도 기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생명을 유지하는 기는 자연으로부터 흡수하는 기와 그 흡수한 기로부터 만들어져 생명유지에 쓰이는 기로 나눌 수 있다. 자연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기는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로 구분하며 천기(天氣)중에는 공기가, 지기(地氣)중에는 먹고 마시는 곡식과 물에서 비롯되는 수곡(水穀)의 기가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한의학에서는 인간은 천지자연의 기로 구성되므로 하늘의 공기를 받아들이고 땅의 곡식과 물을 섭취하여 생명을 유지한다고 보는 것이다.
외부에서 받아들인 자연의 기는 장부에서 몸에 필요한 기로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기는 경락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전신을 영양하거나 각 장부의 특성에 맞는 영양분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장부 중에서는 간, 심, 비, 폐, 신 오장에 혈(血), 신(神), 영(營), 기(氣), 정(精)의 형태로 저장되어 장부의 기능을 유지하게 된다.
한의학의 발달사
고조선에서 고려까지
미송리식 토기
우리 한민족은 고조선이래로 아시아 동북에 위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역사 유물에서 나타나듯이 처음에 이 땅에 흘러든 사람들은 중국의 문화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그들만의 문화를 가졌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흔적들을 우리는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먼저 단군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내용 중의 쑥과 마늘에 關한 것은 그 당시 중국의 神農本草에서도 조차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만의 고유의 원시적 治療 행위였다. 중국과 다른 문화 양상을 가진 그들은 이 땅에 독자적인 문화와 藥物의 사용을 남겼다. 그리하여 이 땅에는 중국과는 다른 원시의학이 胎動하였다. 그 이후 문화의 교류가 중국과 많이 이루어지고 지금의 한반도로 국토가 축소되면서 이웃 국가인 대륙의 중국 영향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국 또는 일본에서 전하는 책 속에는 삼국시대의 藥物 사용과 處方에 관한 것들이 보인다. 이때는 사회 구성원의 성격이 귀족적이고 중국에 유학하는 학자들이 많아 사회 문화 전반적으로 중국문화를 답습하는데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고 여러 의서들을 수입하여 교과서로 사용하였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무신정변과 몽고족의 侵入으로 귀족층이 몰락하고 과거시험을 통과한 신진사대부들이 중앙에 등장하면서 자주적 기운이 다시 싹트기 始作하여 『濟衆立效方』, 『新集御醫撮要方』, 『鄕藥救急方』등의 의서들이 만들어졌다. 또한 의료제도의 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의업이 권장되고 그 사회적 지위가 상당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 중국에서 금원 사대가가 등장하여 중국의학사에 한 획을 긋고 있지만 그 당시 고려에서는 그러한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과거시험과목도 송나라 이전의 서적을 과목으로 하고 간행된 의서도 금원시대 이전의 서적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만약 고려가 중국의학의 영향을 받아서 계속적인 발전을 하였다면 분명히 선진의학을 받아들여 중국에 예속되는 양상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문화 수용의 주체가 자주적이어서 우리 醫學이 주류를 이룰 수가 있었다. 또한 계속되는 전란의 영향으로 많은 문화재가 消失되어 지금 남아 있는 의서는 없고 내용의 일부가 조선초기의 의서에 보인다. 그래서 고조선에서 고려시대까지의 남아 있는 서적은 없고 다른 나라 혹은 조선초기의 의서를 살펴볼 때 醫學의 始作은 중국과 확연히 달랐으며 정치적 침체기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답보상태에 머물렀으나 몽고침략이후에는 민족위기 의식과 더불어 醫學도 함께 자주적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즉 고려말에는 唐, 宋의 영향을 받아 그 이론 기반위에서 고유의 韓醫學을 창조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전기
허준의 묘소
병은 건강의 상대개념으로 동서양의학에 함께 사용된다. 즉 중풍이란 용어의 경우 한양방을 막론하고 사용하고 있으며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한의사와 양의사의 병에 대한 개념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즉 중풍의 경우도 양의사의 경우에는 뇌혈관질환이라 하여 뇌혈관의 폐색이나 출혈로 구분하여 CT상 확인 가능한 경우 확진을 하게 되지만 한의사의 경우에는 풍(風)에 맞은 경우는 모두 중풍으로 보고 치료하게 된다. 이처럼 한 가지 병도 한양방에 따라 달리 설명될 수 있다. 또 한 예로 한의사가 간이 나쁘다 진단했을 때 임상병리과에서 간기능검사를 해보면 수치의 이상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정상인 경우도 있게 된다.
이것 또한 한의학에서 의미하는 간이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Liver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간과 관련된 근육의 이상, 눈 이상, 혈 부족, 손톱 이상 등을 모두 간과 연관시켜 진단하므로 발생할 수 있는 차이이다. 결국 한의사는 병을 치료한다기 보다 증을 치료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으며 한 가지 병에도 여러 가지 증이 있을 수 있고 바꾸어 말하면 한 가지 증이라면 여러 가지 병도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중종에서 선조 전까지
中宗때에는 事大風潮가 짙어지고 중국과의 교통이 빈번해짐해 따라 명나라의 醫學이 들어오고 唐藥의 輸入도 쉅게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하여 中宗 以後에서부터는 다시 중국에 依存하여 醫學이 존속되었다. 그러나 일방적인 수입은 없었고 중국의 예를 그대로 따르는 것도 또한 볼 수 없었다.
선조에서 영조 전까지
임진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한민족은 다시금 단결하여 무너진 문화를 다시 세우게 된다. 또한 전란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통 당하게 되어 의서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이어 명나라가 멸망함에 따라 약재를 수입하는데 힘들게 되어 治療에 어려움이 생기자 먼저 『鄕藥集成方』을 다시 간행하여 보급시켰다. 조선초 『鄕藥集成方』의 편찬 이후 금ㆍ원나라의 醫學을 융합하여 새로이 체계를 세운 명나라의 醫學이 들어오게 되지만 전대의 病論과 治療方이 時勢에 맞지 않게 되었다. 전란의 직후이고 여러 方書가 消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대의 醫學에 통달한 許浚이 醫書를 아주 새로운 구상 아래 실용에 적절한 方을 취해 정확을 기한 東方 一大 醫書인 『東醫寶鑑』을 편찬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목차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 중국의 醫書를 종합했다기 보다는 새로운 精神(思想)에 依해서 먼저 醫學의 바탕을 인간 내면에서 바라볼려고 시도하였고 그 뒤에 신체나 외적인 것과 그외의 것을 서술하였다. 『東醫寶鑑』이 出現함으로써 醫學이 통합되고 확립되었으며 그 후에는 이 이상의 의서가 나오지 않았다. 이후 醫人들은 한결같이 이 책을 존중하였고 醫論ㆍ醫方은 거의 모두가 이것을 말한 것이며 이것을 原典으로 삼아 여러 가지 醫書가 많이 편술되어 復興期를 맞이하게 되었다.
영조에서 한말까지
英祖元年(1725年)부터 哲宗末年(1863年)까지의 5代 139年間을 이르는 것이다. 이 時期에 우리의 文化는 모든 部門에 걸쳐 復興的 氣運을 보게 되었다. 醫學에 있어서도 實證的 學風의 刺戟과 影響으로 因하여 自主的 經驗과 內省的 觀察을 主로 한 專門方書, 그 中에도 특히 小兒科學에 關한 專門方書들을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다. 또는 法醫學的 知見과 博物學的 分野에 있어서도 새로운 氣勢를 올리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後半期에 들어서는 西歐醫學的 知識과 間接으로나마 接觸할 機會를 갖게 되어 우리 醫學의 傳統的 知見에 動搖를 일으키기 始作하였다. 그러나 西學의 壓迫이라는 鎖國政策으로 말미암아 充分한 進展을 보지 못하고, 다만 部分的으로 겨우 그 實現을 본 것이 있을 뿐이다.
『東醫寶鑑』이후 영ㆍ정조대에 『東醫寶鑑』의 缺點을 보충한 그리고 요점을 간추린『濟衆新編』, 『廣濟秘』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책들에서는 수많은 중국 의서 및 우리 나라 의서들의 내용을 인용하여 이들을 換骨奪胎시켜 우리나라 고유한 주체성을 가지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서민을 위해 편집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민간 醫方을 알 수 있다. 특히 본초를 외우기 쉽도록 藥性歌를 첨가하고 노인의 병을 따로 다루어서 증보한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丁若鏞이 실학의 영향과 서구 의학의 영향을 받아 과학 지식과 實事求是의 학문을 醫學이론에 도입을 試圖하기도 하였다.
정조 이후 국내의 정치 불안으로 생활이 어렵게 되어 침체기를 맞기도 하지만 고종때 黃度淵이 『醫宗損益』을 편찬하였고 『醫方活套』, 『方藥合編』을 지어 일반인도 알기 쉬게 배울 수 있어 醫學을 널리 보급하였다. 또한 고종 31년에 李濟馬의 『東醫壽世保元』이 간행되어 모든 질병을 인간 중심으로 고찰하고 생각하도록 하였다. 즉 인간의 “心”을 중시하는 醫學으로 그 기본적인 내용은 素問에 있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 전개에 있어서는 중국과는 완연히 다른 양상의 의론이 성립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 이규준이 “扶陽論”을 주장하여 醫學의 一門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시대적인 흐름속에서 비과학이라는 이름하에 천시되고 멸시를 당하였다
현대
현대의 의학
1894년 甲午改革으로부터 시작된 일제의 박해와 식민치하를 거쳐 해방이 되기까지 50년간 암흑기동안 침체속에서 발전이 정체되어 버린 한의학계는 대를 이을 인재도 없는 공백상태였다. 다행히도 醫學講習所 출신의 한의사들이 한의학의 법적 지위의 복구와 후학 육성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50년 6.25동란으로 부산 임시수도에서 '51년 9월 25일 國民醫療法 제정이라는 새로운 계기를 맞으면서 역사적인 한의사 제도가 탄생되었다. 國民醫療法은 제2조에 한의사, 제3조와 제8조에 한의원, 제13조에 한의학을 전공하는 대학을 나온 자로서 국가고시에 합격하여야 자격을 획득하게 하고 의료업자로서의 권리와 의무 모두를 의사와 동등하게 보장하였다.
'63년 12월 13일에 醫療法을 재개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한의사 제도가 비로서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즉 한의학 수업년한이 洋醫學 敎育制度와 동등한 6년제로 승격발전하게 되면서 한의사 교육제도의 정상화를 되찾은 한의계는 대한한의사협회를 중심으로 각종 학술활동을 활성화시킴은 물론 국내외 학술대회를 유치하고 학술진흥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학계사업들이 성숙한 단계로 진전되어 “韓”의학 명칭을 바로잡고 세계보건기구(WHO)의 국내 한방학술사업의 지원, 한방의료보험 참여를 준비하는 조사, 연구사업들이 추진되었다. 또한 한의학회의 활동이 계속 강화되면서 분과학회가 19개로 확충되고 한의과대학도 11개대학으로 증설되었으며 한의학 碩·博士가 다수 배출되면서 한의학이 치료의학으로서 질적 향상의 토대를 구축하게 되었다.
'88년부터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방의료보험이 착수되는 한편 정부는 한방의료정책을 심도있게 추진하기 위하여 國民醫療政策審議委員會를 구성하여 한의학의 장기발전사업으로 국립한방병원의 설치 전문연구기관의 설립 한방보건지도의 법제화 한방전문의 제도의 타당성을 심의 채택하고 단계적으로 이를 정책에 반영한 바 있다. 그리고 정부와 국회는 한·양방 균형발전을 위한 중장기 육성발전계획을 수립, 공표하는 한편 정부기금 출연의 「韓國韓醫學硏究所」를 특수법인체로 설립하고 한방행정기구의 설치, 한약관리제도를 법정화하는 등 한방의료의 대국민 기여도의 제고를 위한 한의약 종합발전계획과 각종 관련제도의 개선 및 육성책의 추진을 계속하고 있다.
한의학의 의서와 인물
동의보감(東醫寶鑑)
우리 나라 3대 한의서 가운데 하나인 동의보감은 조선 중기의 태의였던 허준이 지었다. 조선 선조 29년(1596)에 왕명으로 김응탁을 비롯 양예수, 이명원, 정작등과 함께 집필하였으나 정유재란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그후 허준이 완성한 것이다. 한의학과 관계된 백과사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25권 25책을 조선 광해 5년(1613)에 내의원에서 간행하였다. 조선 세종때의 의방유취와 향약집성방, 조선 선조때의 의림촬요 등이 인용되어 있으며 각 강의 유에 따라 항과 목으로 나누어 병론과 방약을 빠짐없이 수록하는 한편 그 출전을 기록하고 있어 각 병증에 대한 고금의 치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점과 허준이 자신의 경험방을 적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뿐만아니라 억지스런 말을 배제하고 실증, 실용적인 처방을 정확하게 적고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내경편을 비롯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경, 외형, 잡병편에는 각종 병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옛날의 처방이 약 배분량이 너무 많은데다가 위급할 때 쓸 수 없는 점을 감안해 이를 제거하고 비교적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약재에 의한 처방을 제시해 놓았다. 내용은 내경편 6권을 비롯 외형편 4권, 잡병편 11권 탕액편 3권, 침구편 1권등이다.
내경편에는 신형과 정을 비롯 신·혈·몽·언어등 내과와 관련된 질병을 외형편에서는 두·면·이·비·배·요·협에 이르는 외과와 관련된 질병을 설명하고 있다. 잡병편에는 진맥·용약등 진담법에서부터 풍·한·서·황달·창만에 이르는 질환들이 섞여있으며 탕액편에는 채약법·건약법·수제법 등을 기록했다. 한편 침구편에는 화침법과 구법 침보사법이 적혀 있다.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
전염방의 치료와 관계된 여러가지 방문을 모아 엮은 의서인 간이벽온방은 조선 중종때의 의관인 김순봉을 비롯 박세거와 유영정등이 중종 20년(1525)에 편찬하였다. 1권 1책으로 되어 있으며, 중종 19년(1525) 봄까지 평안도에 전염성열병인 여역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죽자 이를 막을 생각으로 많은 한의서를 참고하여 만든 것이다. 먼저 병의 증상을 기록하였으며, 44개 항목으로 구성된 치료법부근에서는 치료법은 물론이고 예방법을 적고 있다. 증상부분에서는 나이에 관계없이 전염병에 걸리게 되면 열이 몹시 나고 정신을 잃게 되며 사망률이 높으므로 미리 약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예방법부분에는 환자와의 접촉을 될수 있는 대로 피하고 가족들의 옷과 환자의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어야 한다고 설명해 놓았다. 현재에는 원간본은 전하지 않으며, 다만 조선 선조 11년(1578)에 을해자로 간행되고 조선 광해 5년(1613)에 훈련도감자로 간행된 중간본이 전해진다.
허준(許浚)
조선 중기의 의인인 허준에 대해서는 선조실록을 비롯 광해군일기 등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허준의 묘역이 경기도 파주군등에 의해 민통선지대 안에 복원되기도 했다. 명종 1년(1546)에 태어나 광해 7년(1615) 70세에 죽었으며 본관은 양천, 호는 구암이다. 무관이었던 할아버지 허곤과 아버지 허륜과는 달리 29세되던 해인 선조 7년(1574)에 의과에 합격하여 의관이 되었다. 그뒤 내의를 비롯 태의, 어의로 이름을 떨쳤으며, 우리 나라 3대 한의서중 하나인 동의보감을 편술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51세되던 해인 선조 29년(1596)에 선조의 명으로 김응탁, 양예수, 이명원, 정예남, 정작 등과 내의원 편집구에서 작업을 시작해 10년만인 광해 2년(1610)에 완성을 했다. 이밖에도 56세되던 선조 34년(1601)에 언해구급방과 두창집요, 63세되던 해인 선조 41년(1608)에 언해태산집요, 67세되던 해인 관해 4년(1612)에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을 가가 개편하거나 간행, 편집, 저술하였다. 한편 허준은 품계가 종일품인 승록대부를 지냈으며 그의 생활이 담긴 허준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제마(李濟馬)
이제마는 사람들을 체격과 용모등 육체적인 측면과 성질, 정서, 행동 등 정신적인 측면등에 따라 네가지 체질로 구분하여 환자의 진단과 치료에 응용되고 있는 사상의학이론을 확증한 조선 말기의 한의학자다. 헌종 4년(1838)에 함경남도의 함흥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고종 4년(1900)에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본관은 전주, 호는 동무였다. 56세때인 고종 30년(1893)에 자신이 맡고 있던 진해현감을 그만두고 서울로 와 책을 저술하기 시작해 이듬해인 고종 31년(1894)에 동의수세보원의 저술을 마쳤다. 58세되던 해인 고종 32년(1895)부터는 함흥으로 가서 어머니의 병을 돌보면서 의업에 종사하였다. 1900년에 동의수세보원의 내용을 개편하기 시작했으나 그가 죽자 제자들이 모여 동의수세보원의 증보판을 출판하였다. 이밖에 이제마의 저술로는 격치고가 있다.
강명길(康命吉)
조선 후기 의관이였던 강명길은 정조 23년에 왕명으로 제중신편이라는 제목의 의서를 편찬해 우리들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영조13년(1737)에 태어나 순조 1년(1801)에 유명을 달리하였으며 본관은 승평이다. 아버지는 강덕령이며 의과출신인 강명오와는 형제간이고 어렸을 때 부르던 이름인 초명은 명휘 자는 군석이었다. 34세되던 해인 영조 44년(1768) 의과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이 의과선생안에 보인다. 이듬해에 대궐안의 의약을 맡아보던 부서인 내의원의 의관이 되었으며 정조가 임금의 장손인 왕세손으로 있을 때에 특별히 사랑을 받아 의약에 대한 자문을 맡기도 하였다. 58세때인 정조 18년(1794)에는 내의원의 제일 높은 의원인 수의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에 양주의 지방장관인 목사와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중추원을 고쳐부르던 중추부의 부사를 지냈으며 종일품인 슬록대부에 까지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65때인 순조 1년(1801)에 정조의 질병을 잘못 치료했다고 하여 동료 의관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우리 나라 한의학의 고전인 제중신편은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의 번잡함을 피하여 간략하게 요약한 총 8권의 책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한편 동의보감에 중요한 부분을 뽑아 통현집을 편찬하였으며 강명길에 대한 참고문헌으로는 정조실록과 순조실록 등이 있다.
권중화(權仲和)
문신인 권중화는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를 살았던 인물로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용부, 호는 동고였다. 32세때인 고려 공민왕 2년(1353)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왕명을 전하는 벼슬인 승지에 해당하는 우·좌부대언을 거쳐 고려 후기 몽고간섭기에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관청인 밀직사의 정삼품 관직, 지신사로서 관리를 뽑는 일을 맡았다. 또한 56세때인 고려 우왕 3년(1377)에는 국가의 행정을 총괄하던 중서문하성의 종이품 벼슬인 정당문학의 신분으로 과거의 최종시험인 예부시의 시험관이 되었다. 이밖에도 71세때인 고려 공양왕 3년(1392)에는 중국에 보내는 사신인 보은사로 명에 파견되었다가 왕조가 바뀐 후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한편 의약에도 정통하여 고려 말기에 유행한 의학서인 삼화자향약방을 보충하는 성격의 향약간이방을 서찬 등과 편집하였으며, 78세때인 정종 1년(1399)에는 한상경과 신편집성마우이방을 새로 편집하였다. 권중화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와 태조실록등에서 볼 수 있다.
권찬(權攢)
조선 초기의 의관이자 문신인 권찬은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취지시호는 정순이다. 아버지는 관리들을 통솔하고 정사를 도맡아 하던 최고 행정관청인 의정부의 종일품 벼슬인 좌찬성을 지낸 권훤이며 세종 12년(1430)에 태어나 성종 18년(1847) 56세에 삶을 마쳤다. 33세때인 세조 8년(1462)에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인 사마시에 합격, 의서를 읽고 익히는 관리인 의서습독관에 임명되어 의방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37세때인 세조 12년(1466)에는 궁중에서 쓰이는 의약을 맡아보던 내의원의 종육품 벼슬인 주부 겸 의학교육을 맡아보던 의학의 교수를 지냈다. 그 이듬해에는 공조의 정육품인 좌랑으로 있으면서 왕손의 질병을 치료하여 왕실의 족친과 관계되는 일을 맡았던 종친부의 정오품인 전부령으로 승진됐다. 또 48세때인 성종 8년(1477)에 성종의 질병치료와 의서유취를 간행하여 정이품의 품계에 해당하는 자헌대부가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치료에 힘써 많은 사람을 살렸으며, 이로 인해 명의로 이름이 나게 되었다.
김순몽(金順蒙)
조선 중종 20년(1525)에 박세거, 유영정과 간이벽온방을 편찬한 김순몽은 태어나고 죽은해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관직에 대한 언급만이 1962년 일본에서 발행된 조선의학사급질병사에 실려 있다. 중종 11년(1516) 궁중에서 쓰이는 의약을 맡아보던 내의원의 종일품에서 정·종이품에 해당되는 제조조 임명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임금이 질병이 있을 때에 임시로 설치했던 기관인 시약청의 의원이 되었다. 주로 종기를 잘 치료하여 명의라 불리웠으며, 중종 14년(1519)에는 종오품 벼슬인 판관에서 정삼품 통정대부 이상에 해당하는 당삼의관을 제수받았다.
김응삼(金應三)
숙종 6년에 태어난 조선 후기의 의관인 김응삼은 죽은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다. 효종 1년(1650)과 숙종 7년(1681) 의과에 뽑힌 김경화와 김후가 할아버지고 아버지며, 의과출신인 김성수와 김광국이 아들이며 손자다.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정보, 호는 행촌이다. 20세때인 숙종 25년(1699)에 나라에 경사 있을 때 기념으로 실시하던 과거인 증광시 의과에 합격하여 의과선생안에 이름이 적혀 있으며, 내의원의 의관인 내의가 되었다. 33세때인 숙종 38년(1712)에는 청나라 연경에 임금이 특별히 파견한 의사로 다녀왔으며 51세때인 영조 6년(1730)에는 빈궁의 질병을 치료해 상을 받기도 했다. 한편 수종실록과 영조실록, 의과선생안 등의 서적에 따르면 김응삼은 무려 23년간 내의원의 수의로 있었다.
유이태(劉爾泰)
머리에 나는 부스럼인 두창과 홍역등의 질병이 널리 퍼지는데 자극을 받았던 유이태는 조선 정조때의 명의였다. 자신의 집에 대대로 내려오던 마진경험방을 근거로 해서 정조 10년(1786)에 붓으로 직접 쓴 마진편을 내놓았으며, 지난 1931년 경남 진주에서 박주헌이 출간한 바 있다. 특히 유이태는 우리나라 구비문학 차원에서 볼때 허준과 함께 설화를 지닌 인물이다. 유이태 설화는 주로 영남지방에서 전래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이태탕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인즉 하루는 유이태가 어느 곳을 지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담장 밑에서 약을 달이는데 약봉지에 유이태탕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이태가 적힌 연유를 물으니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면 명의인 유이태가 있어야 하는데 그를 만날 길이 없어 그 대신 약봉지에 유이태라고 쓰게 되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질만큼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