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제1독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3,15─4,1.3-6
형제 여러분,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15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16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4,1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3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하여도
멸망할 자들에게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4 그들의 경우, 이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5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복음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분노가 하고 싶은 말: “너도 날 무시해?”
넷플릭스 ‘성난 사람들’(BEEF)은 분노가 왜 생기는 것일까? 또 분노는 꼭 나쁜 것일까? 등을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입니다. 재미교포 대니 조는 모든 일이 잘 안 풀리는 도급업자입니다. 대니 조 자신은 돈도 없고 미래도 보이지 않으며 부모님은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한국으로 돌아가 일하게 되었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 폴은 게임과 코인에 빠져있습니다. 대니는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느 날 대니가 대형 할인점에서 계속 반품을 반복하다 영수증이 없어 반품이 안 되자 되는 일이 없다며 짜증을 내고 화를 냅니다. 그러던 중 주차장에서 흰색 벤츠와 시비가 붙습니다. 상대 벤츠는 위협을 가하고 도망을 칩니다. 가뜩이나 화가 나 있던 대니는 시비를 건 차에 보복하려 부촌의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며 쫓습니다.
벤츠에 탔던 사람은 중국계 사업가인 에이미입니다. 그녀는 가난하게 자랐지만 부유한 일본계 도예가 남편을 만나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남편 대신 평생 일을 하고 온갖 간섭하는 시어머니와 자신보다 돈이 더 많은 갑질하는 이들에게 짓눌려 삽니다. 남편은 아내의 스트레스 사정을 들어주지 않고 그저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라며 아내를 어리석은 사람 취급합니다. 이렇게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대니와 주차장에서 시비가 붙은 것입니다.
둘은 티격태격하며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합니다. 그런데 결말에는 화가 난 사람만이 화가 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식으로 갑니다. 두 사람은 크게 다치고 외딴곳에 떨어져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입니다. 둘은 마치 땅처럼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느낍니다. 둘은 살기 위해 협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탈진 상태에서 둘은 “내가 누구지?”라고 할 정도로 서로 구분하지 못하는 사이가 됩니다. 내가 상대의 감정을 알아주고 상대가 나의 감정을 알아줌으로써 사랑이 싹트게 된 것입니다. 화는 아직 잃을 것이 남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이들의 분노가 언제 생겨난 것인지를 묻습니다. 분명 둘이 주차장에서 마주쳤을 때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이미 분노에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것을 터뜨린 계기가 되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방법으로 분노를 조절하라 말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왜 분노가 생기는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분노는 내가 행복해야 할 존재인데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분노 안에는 “내가 누군지 알아?”, “너도 날 무시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원숭이 두 마리에게 오이를 줍니다. 원숭이들은 잘 먹습니다. 그런데 한 원숭이에겐 오이를 주고 다른 원숭이에겐 포도를 줍니다. 원숭이는 오이보다 포도를 열 배는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동안 잘 먹던 원숭이는 분노합니다. 오이를 주는 사람에게 집어던집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군지 알아?”, “너도 날 무시해?”
오늘 복음에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재판에 넘겨진다는 말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는 말처럼 살인자로 여기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화를 내고 살인까지 하게 되는 데는 결국 내면 안에 있는 불만족 때문입니다. 그 불만족은 낮아진 자존감에서 비롯됩니다. 열등감 자체가 화입니다. 자존감은 사랑으로 생깁니다. 소중한 존재임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연세대학교 권수영 교수에게 어떤 자매가 찾아왔습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이유 없이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차려주면 자꾸 흘린다는 것입니다. 권 교수는 그 자매에게 이유 없는 분노는 없다고 말합니다. 어릴 적 혹시 그와 비슷한 상처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밥 먹는 시간이 그리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우유를 흘렸다가 엄마에게 따귀를 맞고 코피를 흘렸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펑펑 울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산상설교의 연속 선상에 있습니다. 행복하다면 화가 날 일이 없습니다. 행복하여지려면 그리스도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나의 정체성이 그리스도라면 화가 날 일이 없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살인의 감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로 삽니다.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 “너도 날 무시해?”라는 분노는 나오지 않습니다. 물 위를 걷는 사람이 모터 보트나 수상 스키를 타는 사람을 보고 화가 날 일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을 지녔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만이 진정 우리를 분노에서, 그리고 이웃에게 악한 일을 벌이지 않게 되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맙시다.
https://youtu.be/aJb1awKnmcM
유튜브 묵상 동영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올해부터 본당신부로 살면서 더 바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우선 성당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본당신부의 유일한 휴일이라고 하는 월요일에도 사제관에 앉아 하루 종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또 초보 본당신부로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워낙 능력과 재주가 없다 보니, 시간을 쪼개고 써야 간신히 조금 본당신부답게 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면서 힘이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럴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곳에 머무르시지 않고 늘 길을 떠났습니다. 그 떠난 길에서 기적이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서 기적이 선포됩니다. 저의 모습을 깊이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한곳에만 머물러만 있던 저의 모습을 말이지요.
한곳에만 머물러 있으면, 새로움을 얻기가 힘듭니다. 만나는 사람만 만나게 되고, 편하고 친한 사람만 만나며, 자기에 도움 되는 사람만 부르게 됩니다. 익숙한 것만을 찾고 편하고 쉬운 것을 향해서만 나아가려고 합니다. 새로움이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길을 떠나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으니 힘이 빠져서 늘 피곤함만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떠나셨다는 것은 늘 새로운 시작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새로움을 간직해야 말과 행동에 힘이 생기게 됨을 당신 삶으로 직접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편하고 쉬운 것, 익숙하고 하고 싶은 것만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끊임없이 걸어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말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의로움’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하지요. 그들은 새로움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율법의 세부 조항 자체를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의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전혀 의롭지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움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길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 익숙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와도 화해하고 타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 새로움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확실하게 인도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사제연수에 참석하면서 새로움을 얻고 있습니다. 행복한 시간입니다.
관계가 두터워질수록,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방을 마치 나의 소유물처럼 취급해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정약용).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