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연구소 후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구 선생이 서거 당시 입고 계셨던
피 묻은 옷이 보관돼 있는데, 그 혈흔에서 유전자분석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김구 선생이 서거한 지 50년 이상이 지났기 때문에
혈흔도 그 정도 되었을 것이다. 필자는 오랜 세월이 경과된 혈흔에서도 혈액형과 유전자분석을 성공적으로 마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자신 있게 대답은 했지만 수십 년이 지난 혈흔에서 과연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나조차도 의심스러웠다. 혈흔이 아무리 잘 보관되었더라도 자연환경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아 DNA가 완전히
분해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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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4월 평양 모란봉극장의 남북연석회의에서 남북한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연설을 하는 백범.
며칠 후 문화재연구소로부터 공문과 함께 혈흔이 연구원에 접수되었다. 보내 온 편지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봉투
안에는 새까맣게 변색된 숯덩이 같은 고체 덩어리 소량이 비닐봉투 안에 있었다. "이것이 백범 김구 선생의 혈흔!" 그의 혈흔을
접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살아생전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대한민국 역사의 큰 인물을 가슴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새까맣게 변색돼 숯덩이 같았던 혈흔 감
동도 잠시, 시료를 본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숯덩이 같은 혈흔에서 과연 유전자분석이 가능할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혈흔이 새까맣게 되었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데 분석이 가능할까?’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데 완충용액에 풀리기나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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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 선생이 서거 당시 입었던 옷에서 채취된 혈흔.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완충용액에 장시간 넣어 가능성을 보기로 했다. 하지만 돌덩이
같이 굳어진 혈흔이 금방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일부의 혈흔을 완충용액에 넣은 다음 사람의 체온과 비슷한 37도 온탕기에서
혈흔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며칠이 지나도 혈흔 덩어리는 전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 넣었을
때보다는 조금 풀린 듯 했으나 그 정도로는 시험을 진행할 수 없었다. 보통 오래된 혈흔도 몇 분에서 길어도 몇 시간이면 다
풀리는데 며칠이 지나도 약간의 붉은 기만 있을 뿐 풀리지 않았다. 실험을 시작도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하지만 다시 며칠이 지나자 붉은색이 진해지기 시작했다. 열흘 넘게 지났을까, 단단했던 덩어리는 제법 풀렸다. 어느 정도 실험을 하기에 적당한 것으로 판단, 작은 덩어리를 꺼내고 풀린 혈흔을 실험에 사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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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윤현영
딱딱한 혈흔, 완충용액에 넣었더니 열흘 지나 조금씩 풀리기 시작 심하게 변색되어
실제로 혈흔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기 때문에 혈흔이 맞는지를 먼저 실험하기로 했다. 실험 결과는 혈흔 반응 양성이었다. 다음에
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혈흔인지를 판단하는 인수혈(人壽血)검사였다. 사건 현장에서 들어오는 각종 혈흔 증거물들은 대개 사람의 것인
게 많지만 간혹 동물이나 생선의 혈흔이 묻어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혈흔인지를 실험하는 것은 항원항체 반응을 응용한
겔 확산법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겔 확산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실험 결과, 예상대로 사람의 혈흔인 것으로 확인됐다.
본
격적으로 혈흔에서 혈액형 그리고 유전자분석을 실시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혈액형 실험은 슬라이드 응집법이다.
항혈청 A와 항혈청 B에 각각 혈액을 떨어뜨려 혈구가 응집하는지 아닌지 여부로 혈액형을 판단하는 것이다. A에만 응집되면 A형,
B에만 응집되면 B형, 둘 다 응집되면 AB형, 모두 응집되지 않으면 O형으로 판정한다.
하지만 혈흔은 혈액이 마른
상태여서 슬라이드 응집법으로 간단하게 할 수 없다. 이 경우 연구원에서 쓰는 방법이 해리 또는 흡착시험법이다. 해리시험법은
항혈청을 혈흔이 묻어 있는 거즈 등과 반응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A형인 경우 항혈청 A의 항체가 가서 붙게 된다. 이렇게
반응한 항체는 56도에서 약 10분간 가열하면 다시 떨어지는데 그 떨어져 나온 항체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알고 있는 혈액형의 혈구를 떨어뜨려 반응 시킨 후 응집 여부로 판단한다. 흡착은 이와 반대의 과정을 거친다.
혈액형 검사 결과, 김구 선생의 혈액형은 AB형인 것으로 밝혀졌다. 1996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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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 선생의 혈액형 실험 결과.
김구 선생의 혈액형 AB형 확인, 유전자 분석까지
혈액형을 성공적으로 검출한 후
유전자분석을 실시했다. 혈흔이 수십 년 이상 자연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DNA를 분리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예상대로 DNA는 많이 깨진 상태였다. 당시에는 일부 좌위의 유전자형이 검출되지 않았지만 최근에 다시 실험을 해
깨끗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던 혈흔에서 유전자형을 성공적으로 검출하고 나니 기분이 매우
좋았다. 김구 선생이 마치 살아 돌아오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성공적으로 모든 실험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서거 당시 입고 있었던
옷의 혈흔이 마른 상태로 보관되어 부패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과학의 영역은 제한이 없다. 범죄 관련
증거물 분석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분석 방법들이 역사적인 사건들의 진실을 밝히는데도 응용될 수 있다. 앞으로 이런 과학적 분석
방법들이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응용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