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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95회
기정보(箕鄭父)·사곡(士穀)·양익이(梁益耳) 세 사람은 상의하여, 秦軍이 공격해 오면 그 틈에 반란을 일으켜 조돈(趙盾)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조돈이 秦軍을 기습하여 패퇴시키고 개선가를 부르며 돌아오자, 세 사람은 심중으로 더욱 분노를 품었다.
선도(先都)는 원래 하군부장이었는데, 하군대장이었던 선멸(先蔑)이 조돈에게 배신당해 秦나라로 가버리자, 역시 조돈에게 원한을 품었다.
[제93회에, 선도는 상군원수의 직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원한을 품었었다.]
괴득(蒯得)도 패전으로 인해 선극(先克)에게 전답과 봉록을 삭탈당한 일에 대해서 원망을 품고 있다가, 사곡을 찾아가 호소하였다. 사곡이 말했다.
“선극은 조돈의 세력만 믿고 감히 그처럼 멋대로 하고 있소. 조돈이 전제(專制)하고 있는 것은 오직 중군뿐이니, 한 사사(死士)를 얻어 먼저 선극만 죽여 버리면 조돈의 세력은 고립될 것이오. 하지만 이 일은 자회(子會; 선도)가 아니면 할 수 없소.”
[‘사사(死士)’는 목숨을 내놓고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다.]
괴득이 말했다.
“자회도 대장이었던 선멸이 조돈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에 역시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극을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소.”
사곡은 괴득의 귀에 대고 은밀히 말했다.
“여차여차하면 성사시킬 수 있소.”
괴득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제가 바로 가서 말하겠습니다.
괴득이 선도를 찾아가자, 선도가 도리어 먼저 말을 꺼냈다.
“조맹이 사계(士季; 선멸)를 배신하여 秦軍을 기습해 패퇴시켰소. 그렇게 신의가 없는 자와는 함께 일할 수 없소.”
괴득이 사곡의 말을 전하자, 선도가 말했다.
“참으로 그렇게만 된다면, 晉나라의 다행이오!”
겨울이 끝나가고 새봄이 돌아올 때였다. 선극은 조부(祖父) 선진(先軫)의 사당에 참배하기 위해 기성(箕城)으로 갔다. 선도는 가병들을 기성 밖에 매복시켜 두었다가, 선극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멀리서 뒤따라가다가 빈틈을 노려 일제히 달려들어 찔러 죽였다. 선극의 종자들은 모두 놀라서 달아났다.
조돈은 선극이 도적들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구(司寇)에게 닷새 내에 도적을 모두 잡아오라고 엄명을 내렸다.
선도는 당황하여 괴득과 상의하여, 사곡과 양익이를 찾아가 빨리 거사하라고 종용하였다. 그런데 양익이가 양홍(梁弘)과 술을 마시다가 취중에 기밀을 누설하고 말았다. 양홍은 깜짝 놀라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이는 멸족을 당할 일이다!”
[양홍은 양요미의 아들로서, 제89회에 秦軍과 효산에서 전투할 때 공을 세웠다. 양익이와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가문이다.]
양홍은 은밀히 유병(臾駢)에게 고하였고, 유병은 또 조돈에게 고했다.
조돈은 즉시 병사를 소집하고 병거를 정돈하여, 명을 대기하라고 분부하였다. 선도는 조씨가 병사를 소집하고 병거를 정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의 모의가 누설되었음을 알고 급히 사곡에게 달려가 빨리 거사하라고 재촉하였다. 기정보는 상원절(上元節)에 晉侯가 연회를 베풀 때 혼란한 틈을 타서 거사해야 한다고 했는데, 의논이 길어지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상원절(上元節)’은 정월 대보름날이다.]
조돈이 먼저 유병을 보내 선도의 집을 포위하고서, 선도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양익이와 괴득은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가, 기정보와 사곡에게 네 가문의 가병들을 모아 먼저 선도를 구출한 다음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고 하였다.
그때 조돈이 사람을 보내 도리어 선도의 음모를 기정보에게 알리면서, 입조하여 상의하자고 청하였다. 기정보가 말했다.
“조맹(趙孟)이 나를 부르는 걸 보니, 아직 나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기정보는 가벼운 차림으로 나갔다.
원래 조돈은, 기정보가 상군원수가 되자 군사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는데, 그를 속여 불러들인 것이었다. 기정보는 조돈의 계략을 알지 못한 채 태연하게 입조하였다. 조돈은 기정보를 조방(朝房)으로 데리고 가서 선도의 일을 의논하였다.
[‘조방(朝房)’은 관원들이 조회 때를 기다리며 모여 있는 방이다.]
조돈은 한편으로 은밀히 순림보(荀林父)·극결(郤缺)·난돈(欒盾)으로 하여금 각기 군마를 이끌고 가서 사곡·양익이·괴득을 붙잡아 모두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 순림보 등은 임무를 마치고 보고하러 조방에 당도하였다. 순림보는 기정보를 보고 큰소리로 외쳤다.
“기정보! 너도 반란에 가담한 자인데, 어찌하여 감옥에 가지 않고 여기 있느냐?”
기정보가 말했다.
“나는 도성을 지킨 공로가 있는 사람이오. 그때 삼군이 바깥에 있을 때 나는 홀로 도성을 지켰는데, 내가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었다면 그 좋은 기회를 왜 이용하지 않았겠소? 그런데 지금 경들은 왜 한꺼번에 와서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오?”
조돈이 말했다.
“네가 그때 반란을 미루고 있었던 것은 선도와 괴득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실정을 다 알고 있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기정보는 고개를 숙이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조돈은 진영공(晉靈公)에게 선도 등 다섯 사람의 반란 음모를 아뢰고 사형에 처하겠다고 하였다. 영공은 나이가 어려 그저 ‘예’ ‘예’ 할 뿐이었다. 영공이 궁으로 들어가자, 모후 양부인(襄夫人)은 다섯 사람이 감옥에 갇힌 일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양부인(襄夫人)’은 양공의 부인인데, 앞서는 ‘목영’이라고 했었다.]
양부인이 영공에게 물었다.
“상국(相國)은 그들을 어떻게 처리한답니까?”
영공이 말했다.
“상국이 말하기를, 그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권력 다툼을 한 것이지, 찬역(篡逆)의 음모를 한 것이 아닙니다. 선극을 죽이려고 모의한 자는 한둘에 불과합니다. 죄에는 수괴와 종범(從犯)이 있는 법인데, 어찌하여 한꺼번에 다 죽인단 말입니까? 근래에 노신(老臣)들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 인재가 부족하게 되었는데, 또 하루아침에 다섯 신하를 죽인다면 조당의 자리가 비게 될까 두렵습니다. 어찌 그걸 염려하지 않으십니까?”
[‘찬역(篡逆)’은 군주의 자리를 뺏기 위한 반역이다.]
다음 날, 영공이 양부인의 말을 조돈에게 전하자, 조돈이 아뢰었다.
“주군께서 나이가 어려 나라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습니다. 대신들이 멋대로 사람을 죽였는데, 큰 형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후에는 어떻게 징벌하겠습니까?”
마침내 조돈은 선도·사곡·기정보·양익이·괴득 다섯 사람을 군주를 잘 받들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저자에서 참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선극의 아들 선곡(先縠)을 대부로 임명하였다. 晉나라 사람들은 조돈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노(潞)나라에서 그 소식을 들은 호사고(狐射姑)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다행이다! 나도 晉나라에 있었으면 함께 죽음을 당했을 텐데!”
어느 날, 노나라 대부 풍서(酆舒)가 호사고에게 물었다.
“조돈과 조쇠(趙衰)를 비교하면 누가 현명합니까?”
호사고가 말했다.
“조쇠는 겨울의 태양이고, 조돈은 여름의 태양입니다. 겨울의 태양은 만물을 따뜻하게 해주지만, 여름의 태양은 만물을 뜨겁게 만듭니다.”
풍서가 웃으며 말했다.
“경은 숙장(宿將)이면서도 역시 조맹을 두려워하십니까?”
한편, 초목왕(楚穆王)은 군위를 찬탈한 후 중원의 패자가 되려는 뜻을 갖고 있었는데, 첩보가 들어왔다.
[제91회에, 세자 상신(초목왕)이 대부 반숭과 함께 초성왕을 시해하고 군위에 올랐다.]
“晉君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조돈이 국정을 전횡하고 있으며, 여러 대부들이 서로 다투어 죽이고 있습니다.”
목왕은 신하들을 소집하여, 정나라 정벌을 의논하였다.
[제85회에, 정문공은 온 땅에서의 회맹 때 진문공(晉文公)에게 불만을 품고 귀국하였고, 제86회에 진문공이 진목공(秦穆公)과 연합하여 정나라를 정벌하러 갔다. 정문공은 촉무를 보내 진목공을 설득하였고, 진목공은 기자·봉손·양손을 남겨 정나라를 돕게 하고 철군하였다. 제87회에 진문공은 정문공에게 공자 난을 세자로 세우게 하고 철군하였고, 정문공 첩이 훙거하고 공자 난(정목공)이 즉위하였다. 제88회에, 진목공은 맹명·서걸술·백을로 하여금 정나라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현고의 지략으로 秦軍은 활나라만 정벌하였다. 제89회에 귀국하던 秦軍은 효산에서 晉軍에게 대패하였다.]
대부 범산(范山)이 아뢰었다.
“晉君은 나이가 어리고 그 신하들은 권력 다툼만 하느라, 천하의 제후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출병하여 북방을 정벌하면 누가 우리에게 대적하겠습니까?”
목왕은 크게 기뻐하며, 투월초(鬥越椒)를 대장으로, 위가(蒍賈)를 부장으로 삼아 병거 3백승을 거느리고 정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목왕 자신은 양광(兩廣)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낭연(狼淵)에 주둔하여 후원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따로 식공자(息公子) 주(朱)를 대장으로, 공자 패(茷)를 부장으로 삼아 병거 3백승을 거느리고 陳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제92회에, 초목왕은 투월초를 영윤에, 위가를 사마에 임명하였다. ‘양광’은 초나라의 군사 편제로써 왕의 좌우에 두 개의 부대를 두었다. 제79회에 나왔다. 제92회에, 초목왕이 초성왕을 시해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陳나라와 정나라를 침범하였다고 했는데, 지금 그걸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정목공(鄭穆公)은 楚軍이 국경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대부 공자 견(堅), 공자 방(龐), 악이(樂耳) 세 사람으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국경으로 가서 楚軍을 막게 하면서 굳게 지키기만 하고 싸우지 말라고 분부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晉나라로 보내 위급을 고하였다.
투월초가 연일 도전했지만, 鄭軍은 출전하지 않았다. 위가가 투월초에게 은밀히 말했다.
“성복(城濮)에서 패전한 후 우리 楚軍은 오랫동안 정나라에 온 일이 없었는데, 鄭나라는 지금 晉의 구원을 믿고 우리와 싸우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晉軍이 오기 전에 저들을 유인하여 사로잡아야만 지난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시간만 끌다가 제후들이 모여들게 되면, 자옥(子玉; 성득신)의 지난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제81회에, 초나라 성득신은 성복에서 晉軍에게 대패하고 연곡성에서 자결하였다.]
투월초가 말했다.
“지금 저들을 유인하기 위해서는 어떤 계책을 쓰면 좋겠소?”
위가가 투월초의 귀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여차여차 해야 합니다.”
투월초는 위가의 계책을 따르기로 하고, 군중에 명을 내렸다.
“군량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을에 가서 약탈해 오도록 하라!”
그리고서 투월초는 장막에서 장수들과 풍악을 즐기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매일 밤늦게까지 놀다가 헤어졌다.
낭연에 주둔하고 있던 초목왕은 그 소식을 듣고, 투월초가 적을 얕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여 친히 가서 전쟁을 감독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범산이 말했다.
“백영(伯嬴; 위가)은 지혜로운 사람이니, 그것은 필시 계책일 것입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승전 소식이 올 것입니다.”
한편, 공자 견 등은 楚軍이 싸움을 걸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 심중으로 의심이 들어 사람을 보내 정탐하였더니, 그가 돌아와 보고하였다.
“楚軍은 사방으로 나가서 식량을 약탈하고 있고, 투원수는 중군에서 날마다 풍악을 즐기며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술이 취하면 ‘정나라 인간들은 쓸모없는 놈들이라 공격할 필요도 없다.’고 욕하고 있습니다.”
공자 견은 기뻐하며 말했다.
“楚軍이 사방으로 나가 약탈하고 있으니 필시 그 영채는 비었을 것이고, 초나라 장수들이 풍악을 즐기며 술을 마시고 있으니 필시 그 마음이 해이해졌을 것이다. 밤에 그 영채를 기습하면 전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공자 방과 악이도 찬성했다.
그날 밤 鄭軍은 무장을 갖추고 밥을 배부르게 먹었다. 공자 방이 전·중·후 3대 나누어 차례로 진격하자고 말하자, 공자 견이 말했다.
“영채를 기습하는 것은 진을 펼치고 싸우는 것과는 다르오. 일시에 습격하기 위해서는 좌우로 나누어야지 전후로 나누어서는 안 되오.”
그리하여 세 장수는 나란히 진격하여 楚軍 영채에 당도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등불이 휘황하게 켜져 있고 풍악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공자 견이 말했다.
“백분(伯棼; 투월초)의 목숨도 이제 끝장이다!”
공자 견은 병거를 휘몰아 곧장 초군 영채로 돌진하였다. 막아서는 초군이 하나도 없었다. 공자 견이 먼저 영채 안으로 들어가자, 악사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런데 투월초는 멍하니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공자 견은 다가가서 보고 깜짝 놀랐다. 그건 짚으로 엮어 만든 투월초의 인형이었다. 공자 견은 급하게 소리쳤다.
“계략에 빠졌다!”
정군이 급히 초군 영채를 빠져나오는데, 홀연 영채 뒤편에서 포성이 크게 울리면서 한 대장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면서 소리쳤다.
“투월초가 여기 있다!”
공자 견은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공자 방과 악이를 만나 함께 달아났다. 1리도 채 못 갔는데 앞쪽에서 포성이 또 울리면서 위가가 미리 매복해 둔 한 무리의 군마가 나타나 정군의 퇴로를 가로막았다. 앞에서는 위가가, 뒤에서는 투월초가 협공을 해오자 鄭軍은 대패하였다.
공자 방과 악이가 먼저 사로잡혔다. 공자 견은 목숨을 걸고 그들을 구출하려고 달려가다가, 말이 넘어지면서 병거가 전복되어 역시 楚軍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패전 소식을 들은 정목공은 크게 두려워하며 신하들에게 말했다.
“세 장수는 사로잡혔고, 晉의 구원병은 오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하들이 모두 말했다.
“楚軍의 기세가 아주 강성하니,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조만간에 도성이 함락될 것입니다. 그러면 비록 晉軍이 오더라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정목공은 공자 풍(豐)을 楚軍 영채로 보내 사죄하고, 뇌물을 바치면서 강화를 청하고 다시는 초나라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투월초가 사자를 보내 목왕에게 보고하자, 목왕은 강화를 허락하였다. 투월초는 공자 견, 공자 방, 악이 세 사람을 석방하여 정나라로 돌려보냈다.
초목왕은 회군하다가 도중에 공자 주를 만났다. 공자 주는 陳나라를 정벌하러 갔다가 패전하고, 부장인 공자 패는 陳軍에 사로잡혀, 원병을 청해 복수를 하기 위해 목왕을 뵈려고 낭연으로 가던 길이었다. 목왕은 크게 노하여 다시 군대를 보내 陳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는데, 홀연 보고가 들어왔다.
“陳나라에서 사신이 왔는데, 공자 패를 楚나라로 돌려보면서 항복을 청하는 서신을 바쳤습니다.”
목왕이 서신을 열어 보았다.
과인 삭(朔)은 땅이 구석에 있고 작아, 군왕을 곁에서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군왕께서 저희를 훈계하시려고 군대를 보냈는데, 변방에 있는 자들이 어리석어 공자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삭은 황송하여 잠을 자려고 해도 편히 잘 수 없어, 삼가 사신을 보내 대국의 군사와 병거를 모두 보내드립니다. 삭은 군왕의 휘하에서 보호를 받기를 원하오니, 거두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제84회에 진문공이 온 땅에서 회맹했을 때 진목공(陳穆公)이 훙거하고 진공공(陳共公) 삭(朔)이 새로 즉위하여 상복을 입고 참석하였으며, 제85회에 진문공이 허나라를 정벌할 때 진공공도 참여하였다. 제92회에, 秦나라 맹명이 효산에서의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晉나라를 침공했다가 패전한 후, 晉나라 선차거가 秦나라를 정벌하고 강과 팽아 두 읍을 점령할 때 陳나라 대부 원선도 참여하였다.]
목왕은 웃으며 말했다.
“陳은 내가 토벌하러 갈까 봐 두려워 항복을 애걸하고 있구나. 陳侯는 형세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목왕은 陳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鄭·陳 2국의 군후에게 격문을 보내 蔡侯와 함께 겨울 10월 초하루에 궐맥(厥貉)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한편, 조돈은 정나라가 위급을 고하자, 宋·魯·衛·許 4국 군대와 연합하여 정나라를 구원하러 갔다. 연합군이 정나라 국경에 미처 도착하기 전에, 정나라가 초나라에 항복하고 초군은 이미 회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또 陳나라 역시 초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송나라 대부 화우(華耦)와 노나라 대부 공자 수(遂)가 陳과 鄭을 정벌하자고 청하였다. 조돈이 말했다.
“내가 빨리 달려가서 구원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나라를 잃은 것입니다. 저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돌아가 국내 정사를 잘 돌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연합군은 모두 본국으로 회군하였다.
염옹(髯翁)이 시를 지어 탄식하였다.
誰專國柄主諸侯 누가 정권을 잡고 제후들을 주도했던가?
卻令荊蠻肆蠢謀 군령을 거두어 형만(荊蠻)이 준동하기 시작했네.
今日鄭陳連臂去 오늘 鄭·陳이 나란히 형만으로 달려가니
中原伯氣黯然收 중원의 패기(覇氣)는 쇠퇴하였도다!
한편, 陳侯 삭(朔)과 鄭伯 난(蘭)은 가을이 끝나갈 무렵 식(息) 땅에 당도하여 초목왕의 어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초목왕이 도착하여 상견례를 마친 다음, 목왕이 물었다.
“원래 궐맥 땅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어찌하여 여기에 머물러 계십니까?”
陳侯와 鄭伯이 일제히 대답했다.
“군왕과의 약속에 혹 늦어서 죄를 얻을까 두려워, 이곳에서 군왕을 기다렸다가 수행하려고 미리 왔습니다.”
목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때 홀연 첩보가 들어왔다.
“蔡侯 갑오(甲午)가 이미 궐맥에 당도하였습니다.”
[제84회에 진문공이 온 땅에서 회맹했을 때 채장공(蔡莊公) 갑오도 참석하였으며, 제85회에 진문공이 허나라를 정벌할 때도 참여하였다.]
목왕이 陳·鄭 두 군후와 함께 궐맥에 당도하자, 蔡侯가 목왕을 신하의 예로써 영접하여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陳侯와 鄭伯은 크게 놀라며, 은밀히 말을 주고받았다.
“蔡侯가 저렇게 굴욕적인 예로써 대하니, 楚王은 필시 우리가 태만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두 군후는 목왕에게 청하였다.
“군왕께서 이곳에 오셨는데, 宋君은 아직 알현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군왕께서는 宋을 정벌하십시오.”
[앞서 초목왕이 송나라를 회맹에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궐맥은 송나라 땅이다.]
목왕이 웃으며 말했다.
“과인이 이곳에 둔병한 것도 실은 宋을 정벌하기 위한 계책이오.”
[앞서 정나라가 晉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을 때, 조돈은 宋·魯·衛·許 4국 군대와 연합하여 정나라를 구원하러 갔었다.]
송나라에 이런 사실이 전해졌다. 그때는 송성공(宋成公) 왕신(王臣)이 훙거하고 아들 송소공(宋昭公) 저구(杵臼)가 군위에 오른 지 3년째였다. 송소공은 소인배들을 믿고 등용했으며, 공족을 멀리하고 배척했다. 목공(穆公)과 양공(襄公)의 후손들이 난을 일으켜 사마 공자 앙(卬)을 살해하자, 사성(司城) 탕의제(蕩意諸)는 노나라로 달아났다. 송나라는 크게 혼란해졌다.
[송목공은 제10회에 나왔고, 송양공은 송성공의 부친이다. 제92회에, 秦나라 맹명이 효산에서의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晉나라를 침공했다가 패전한 후, 晉나라 선차거가 秦나라를 정벌하고 강과 팽아 두 읍을 점령할 때 송나라 대부 공자 성(成)도 참여하였다. ‘사성(司城)’은 다른 나라의 사공(司空)에 해당하는 건축과 토목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사구(司寇) 화어사(華御事)가 국사를 조정하고, 탕의제를 불러들여 복직시킴으로써 송나라는 조금 안정되었다. 그때 초나라가 궐맥에서 제후들과 연합하여 송나라를 엿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화어사는 송양공을 섬겼던 원로이다. 제65회에 등장했다.]
화어사가 송소공에게 말했다.
“신이 듣건대, ‘소국이 대국을 섬기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초나라가 陳과 鄭을 복종시켰으며, 아직 복종시키지 못한 나라는 우리 宋뿐입니다. 주군께서는 먼저 가서 楚王을 영접하십시오. 만약 초나라가 쳐들어온 다음에 강화를 청하면, 이미 때가 늦습니다.”
송소공은 화어사의 말에 따라 친히 궐맥으로 가서 楚王을 알현하였다. 사냥에 필요한 도구들을 모두 준비해 가서, 楚王에게 맹제(孟諸)의 늪에서 사냥하기를 청하였다. 목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陳侯가 자청하여 전대(前隊)가 되어 길을 열고, 宋公이 우진(右陣), 鄭伯이 좌진(左陣), 蔡侯가 후대가 되어 초목왕을 모시고 사냥에 나섰다.
목왕은 명을 내려, 제후들을 따라 사냥 나온 자들은 새벽에 말을 수레에 매어 놓고 수레 안에는 불을 피울 수 있는 재료들을 준비해 두라고 일렀다.
다음 날 새벽, 제후들의 군사가 사냥터를 포위하고 한동안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목왕이 우진(右陳)으로 왔다. 그때 마침 여우 떼가 나타나자, 목왕은 수레를 몰아 여우 떼를 추격하였다. 여우들이 도망쳐서 깊은 굴속으로 들어가자, 목왕이 송소공을 돌아보며 불을 피워 연기를 굴속으로 넣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송소공이 거느린 우진의 수레에 부싯돌이 없어 불을 피우지 못하였다.
초나라 사마 신무외(申無畏)가 楚王에게 아뢰었다.
“宋公은 명을 어겼습니다. 군주에게 형벌을 가할 수는 없으니, 그 어자(御者)를 벌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신무외는 宋公의 어자를 붙잡아 꾸짖고, 곤장 3백 대를 때림으로써 제후들을 경계하였다. 송소공은 수치를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는 주경왕(周頃王) 2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때 초나라는 가장 강성하였다. 초목왕은 투월초를 齊와 魯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공공연히 중원의 패자를 자처하였다. 晉은 초나라를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92회에, 주양왕이 진목공을 방백으로 책봉하려다가 윤무공이 간하여 그만두었었다. 주양왕은 32년 동안 재위했고, 주경왕은 양왕의 아들로서 이름은 임신(壬臣)이다.]
첫댓글 전쟁 스토리 좀 읽다
어찌 그리 길기도 한지
오랫만에 뵙습니다
건강 하신거죠?
지금 날치고 있는 초나라 목양 다음에 초장왕이다.
초장왕이 춘추5패중의 하나인 제3대 패왕(공)이다.
곧 나오겠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