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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성심을 통하여
저희에게 베푸신 놀라운 사랑을 기리며 기뻐하오니
이 사랑의 샘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은총을
언제나 가득히 받게 하소서.
제1독서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를 선택하셨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7,6-11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6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선택하시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를 당신 소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7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사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수가 가장 적다.
8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셔서,
종살이하던 집,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 내셨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참하느님이시며,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10 또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그를 멸망시키시어
직접 갚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 없이 직접 갚으신다.
11 그러므로 내가 오늘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령하는
계명과 규정들과 법규들을 너희는 지켜야 한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복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누군가의 마음을 품는 방법은?
이번 달은 예수 성심 성월이고 오늘은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를 청하는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특별히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기에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마음은 이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사제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닐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오로 서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라고 하며, 그분이 어떻게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사실 수 있었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누군가의 마음을 품는 방법은 그 사람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9-11)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 마음을 품으면 당신의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이는 당신 마음을 품으면 그 마음이 원하는 뜻을 순종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마음이 느끼는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되리란 뜻입니다.
요즘 콜롬비아 아마존 밀림에서 무사히 구조된 4남매가 연일 화제입니다. 조금씩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배경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40일간의 기적은 장녀 열세 살 레슬리의 생존본능 덕분이었습니다. 사고 이후 나흘 동안 생존해있던 네 남매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꼭 살아남으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어머니의 당부대로 맏이인 레슬리는 나뭇가지를 모아 머리 끈으로 묶어 임시 거처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레슬리는 추락한 비행기에서 3kg 정도의 카사바 가루를 찾아 동생들을 챙겼습니다. 카사바는 고구마처럼 생긴 뿌리 식물인데요. 탄수화물이 풍부하여서 생존에 꼭 필요한 식량이었죠. 카사바가 떨어지자 네 남매는 주변의 씨앗과 나무 열매를 구해 생존을 이어갔습니다.
아무리 물과 식량이 있다 하더라도, 재규어 등 맹수와 독사가 우글거리는 아마존 밀림에서 13살 레슬리는 어떻게 9살과 4살, 그리고 11개월 된 동생들을 챙길 수 있었을까요? 아이들은 남미 원주민 후이토토족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원주민식 가정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냥과 낚시, 열매 채집 등 정글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며 가족들이 정기적으로 ‘생존게임’을 했다고 알려졌는데요. 영국의 열대림 생태학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원주민 아이들은 일찍이 임시 거처를 짓는 방법을 배우고, 아마존에 서식하는 독사를 구분할 줄 안다며 또래의 서양 어린이들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아이들을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구조팀의 작전명은 에스페란사, 스페인어로 ‘희망’이었는데요,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틴 열세 살 맏이 레슬리의 기지가 죽음의 정글에서 어린 동생들을 지켜냈습니다. 기적을 보여주며 희망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4남매의 사연은, 경제난과 범죄 등으로 신음하고 있는 콜롬비아는 물론 국경을 넘어 전 세계에 큰 울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장녀 레슬리는 살아남아야 했고 동생들을 지켜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 때문에 해야 했습니다. 이때 어머니의 마음을 장착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도 어리광 부릴 나이이지만 어머니로서 동생들을 보살폈습니다. 어머니 마음으로 산 것입니다. 그리고 40일이 지난 뒤에는 어떤 영광을 얻습니까? 어머니가 자녀를 잘 키워내어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누립니다.
스타벅스의 창업자 하워드 슐츠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브루클린의 가난한 동네에서 택시와 트럭, 공장 노동자로 가정을 부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직장에서 다치자 가족은 살길이 막막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건강 보험이나 산재 보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부상은 가족에게 절망적이었습니다.
슐츠가 아버지의 부상과 실직으로 얻은 교훈은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고객은 두 번째입니다. 직원이 첫 번째입니다.” 투자자들이 직원들의 보험을 줄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스타벅스를 아버지가 일하고 싶어 했을 만한 회사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의 경영 첫 번째 마인드는 직원의 건강과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좋은 결과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타벅스 직원들을 자녀로 둔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느꼈을 만한 아버지로서의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마음은 뜻과 감정의 결합입니다. 뜻을 장착하면 감정도 가지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온유하고 겸손해지라는 계명은 어느 종교나 어느 부모의 가르침에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한다면 이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안식을 영광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특별히 사제는 그래서 사제직을 주님께서 불러주셨고 주님께서 파견하셨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밝은 곳에 있다가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손을 앞으로 뻗어서 자기에게 다가올 위험을 손의 감각으로 막으려 합니다. 하지만 계속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뒤,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평상시에 보던 것처럼 잘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실로암에서 행하셨던 기적을 떠올려 보십시오(요한 9장). 그곳에는 태어났을 때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 명령을 충실히 따른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복음은 증언합니다.
선천적 백내장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성인이 되어 수술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수술해서 드디어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앞을 완전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형태만 보였습니다. 이제까지 하지 않았던 공간 능력 파악을 위해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대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금씩 보이는 수준을 뛰어넘는, 즉 시간을 뛰어넘는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엄청난 힘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힘센 분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랑을 더 많이 주실까를 고민하십니다.
문제는 늘 우리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을 뛰어넘는 분이신데, 우리는 그분을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려고 했습니다. 엄청난 분인데도 자기가 가진 그 어떤 것보다도 하찮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의 사랑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힘센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말씀에 큰 희망을 갖고 주님께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선택하신 것은 그분의 끝없는 사랑의 표현이며, 그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을 배웁니다. 무한하신 그분의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정녕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습니다.
우리의 어제와 오늘은 우리가 쌓아 올리는 벽돌이다(롱펠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