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성 상실의 시대를 극복하려면
정치가 바로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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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7월
'미친소 수입 반대'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소위 '광우병 난동'을 부린 19일 오후 8시 50분쯤 서울 종로3가역 근처.
한 노인이 차도를 점거한 촛불시위대를 향해
"북한군이 금강산 관광객을 죽인 것에는 한 마디도 않는
'빨갱이' 같은 놈들"이라고 말하자,
시위대 20~30명이 순식간에 그 노인에게 몰려들어
물병과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을 집어 던졌다.
시위대 2~3명은 노인의 머리와 어깨를 향해 우산을 마구 휘둘렀다.
우산에 맞아 노인의 안경이 부러져 한쪽 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노인을 둘러쌌던 시위대는
"이런 데서 안 죽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떴다.
이보다 20분 전, 종로 2가 버스 정류장에선
"차는 다닐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아냐"
라고 불평하는 60대 노인에게 시위대는
"이게 노망 들었나"라고 위협하며 밀어붙였다.
밤 11시쯤 교보문고 근처 차도에선 시위대 20여명이
중앙데일리 기자를 둘러싸고
"'중앙' 자(字)가 들어간 놈들은 다 똑같다"며
밀치고 당겨 그의 우비를 다 찢어놓았다.
그전 12일 밤 을지로 3가 우리은행 지점 앞에서는
화공약품상을 하는 김모(65)씨가 촛불시위대에
눈두덩을 정통으로 맞아 혼절한 일도 있었다.
"미국 쇠고기 안 먹으면 되지 왜 이런 난리를 치느냐.
먹고 살기도 힘든데 X새끼들"이라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촛불시위가 벌어진 당시 심야 서울 도심 거리에선
수시로 이런 사적(私的)인 린치(폭력)가 횡행하고 있었다.
'시위 군중이 곧 법(法)'인 세상이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바로 인간성의 상실을 보여주는 패거리들의 집단 히스테리였다.
2011-12년 대한민국의 학교 현장.
가장 평화롭고 안전해야 할 배움의 동산인 학교가
폭력의 온상이 되고 있다.
물고문을 하고
전깃줄에 목을 감아 개처럼 끌고 다니며 과자를 먹게 하고
300개나 되는 협박 문자에 시달리게 하고
50여 차례나 구타를 함으로써
두려움과 불안, 분노에 떨다가
4장의 A4 용지에 유서를 써 놓고 자살한 대구 중학생,
물을 붓고
걸레로 얼굴을 문지르고
가슴을 주먹으로 치고
돈과 점퍼를 빼앗은 부산과 평택의 학생폭력,
반장이 된 뒤 쇠파이프로 급우 3명을 26차례에 걸쳐
상습적으로 폭행하여 상처를 입히고 현금과 가방 등
42만원어치의 금품을 갈취한 논산의 학생폭력,
귀갓길에 8명의 학생들이 끌고 가 폐업한 PC방에서
팔을 붙들어 꼼짝 못하게 한 뒤 빈 생수통으로 때리고
담뱃불로 입술과 혓바닥, 팔 등을 지지고 소리를 지르면
폭력의 강도를 더욱 높이고 지병인 간질로 발작을 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5시간 동안
폭력을 휘두른 경기도의 중학생들,
‘서울에서 왔다’는 이유로 6~7명이 집단으로 따돌리고
복부를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리는 등의
폭력에 시달린 경기도 여중생,
남녀 동급생 10여명으로부터 각목과 주먹으로
온 몸에 시퍼런 멍과 상처가 생길정도로 수없이
구타당하고 담뱃불로 손과 다리를 지지는 고통을 당한
인천시 계양구의 중학생,
동급생들로부터 학교 시청각실이나 인근 공원으로 끌려가
6개월간 성추행을 당한 광주광역시의 중학교 여학생,
전국 곳곳에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만연하고 있는 야만적인 학교폭력의 현주소다.
벼랑 끝의 어린 학생들,
두려움과 고통에 신음하는 동료학생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야수의 모습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학교폭력이 피라미드식 조직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 강남권일대에서는 일진회라는 이름의 폭력조직을 갖추고
수십 개의 학교에 상납액을 정하여 하청을 주면서
중·고생 700여명으로부터 수억 원을 갈취하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먹이사슬의 형태를 띠면서
학교에 독버섯으로 자라고 있다.
통탄할 일이다.
한숨만 나온다.
세상이 갈 데까지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동물의 세계, 정글의 법칙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청순하고 순박하며 정의심에 불타야 하는 꿈나무들이
그리고 미래의 동량재로서 곧게 자라야 할 청소년들이
반이성적이고 비교육적이며 불의에 편승하여
비인간적인 행각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규범을 붕괴케 하고
학교의 존재가치를 뿌리 채 흔드는 악행이다.
이러한 악행들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횡행된 학생자살이 계속된 악순환을 거쳐
80년대 대학가에서 벌어진 경찰 프락치의 유시민 사건,
부산동의대 방화사건 등 인간성 상실의 사건으로 번져
오늘날 학생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의 양심을 갉아먹는
독버섯처럼 자리잡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면서도 무관심 속에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성과 인격도야의 산실인 학교에서 비인간적이고
비교육적인 만행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계를 비롯하여 치안기관은 기회 있을 때마다
‘폭력과의 전쟁’을 선포하였지만 임기응변적
땜질처방에 그치고 말았다.
구두선에 그치고 만 것이다.
학교폭력은 안일하고 미온적인 대책으로는
근절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수박 겉핥기 정책으로 일관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아름다운 꽃봉오리들이
피지도 못하고 사라지게 된 것이다.
차제에 교육과학기술부를 비롯한 정부기관은
학교를 정상화 내지 재건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특단의 대책을 제시하여야 한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학교폭력은 탈선이나
비행학생들에 국한된 단순한 학생문제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국가와 사회의 사활문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학교에만 맡겨서는 아니 된다.
국가 최우선정책으로 삼아 총체적 종합적으로 접근하여
근절시켜야 한다.
폭력은 규범의 붕괴 및 인간성 상실에서 발원되는 것이다.
규범과 인간성이 상실된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더 이상 규범 및 인간성을 상실한 사회가 존재케 해서는 아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들 사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법을 어기고, 폭력을 행사하며 떼법을 앞세우는 무리들
더구나 이런 자리에 어린 청소년들을 동원하여 불법을 행하게 하는
사고뭉치, 거지발싸개 같은 싸가지 없는 쓰레기 같은 좀비들,
홍어 X도 모르면서 목포의 눈물 타령이나 하는 아마추어 좌빨,
거지 근성의 깽이 같은 싸이코패스들을 엄중 처단하여
우리 국민들의 인간성 회복에 일조를 하여야 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 주위에 사이코패스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감사'할줄 모르며, '충만'함을 모르며, '선의'를 모르며,
'신뢰'를 모르며, '행복'을 모른다.
그들은 물질적 풍요속에서, 혹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 속에서,
병적으로 '파괴'를 탐한다.
아마 '파괴'와 '폭력'이 그들에게 만족을 주거나
공허감을 달래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온전함과 충만함,
그리고 인간성과 양심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그들은 이러한 '나와 남과 모두에게 좋고 이로운' 것들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고 아주 빠르게 부정한다.
이들은 '영적'인 삶이 무엇인지 모르며
삶의 중요한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며 '인간성'을 헌신짝 여기듯 한다.
그들은 혼자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렇게 자라도록 유도되었다.
현대의 물질과 육체만 쫓도록 만드는 병리적 문화는
그들이 그렇게 되도록 자꾸만 유도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병'이 전염성이 아주 강하다는 것인데
아직 다소 '건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의 '타락해' 보이는 듯한 행동은 절망의 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불필요한 동정같다.
그것이 절망에 의한 것이듯 다른 요인이 있든 간에
그들이 본질적, 근본적으로 '망가져'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유감스럽게도 '시스템'은 이런 인간들을 양산하며
그나마 남은 몇몇의 양심적이고 제대로된 가치관을 지닌 인간들을
'제거'해 나가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은 위험한 상태에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남을 위험하게 만든다.
꽤 오래전,
조직폭력배 '막가파'를 검거했을 때
엉뚱하게도 그 이름이 참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조폭이 패거리 이름을 지으며
'우리는 막 나가는, 막가파다' 라고 했다니
혀를 내두를 '이름짓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오늘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있자면
마치 전 국민의 '막가파화'에 가깝다.
인터넷에는 공공장소에서 막말을 해대는
폭언과 폭행 동영상이 넘치는 요즈음이다.
지하철 안에서 막말을 하는 여자에게 어른이 타이른다.
'아가씨. 집에 부모 있어, 없어.'
그러자 이 젊은 여자 승객이 내뱉는다.
'아, 없어. 너 같은 부모 없어.'
중년의 택시기사가 길을 헤매자 젊은 여자 손님이
냅다 반말로 소리친다.
'택시 어떻게 해먹으려고. 운전 못하면서 운전기사를 왜 해.'
이런 현상을 두고 각박한 세상살이,
화를 참지 못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이라는 해석이 나오지만,
이건 한마디로 인간성의 상실이다.
그리고 이런 상실이 다만 지하철 등의
공공장소에만 널려 있는 게 아니라 소위 문화인들의
사교장이라는 블로그와 각종 사이트에는
익명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오래전부터 비일비재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인간성의 상실...
2009년 가을 세상을 떠나자 아르헨티나가
성대한 국장으로 추모했던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던 가수로
힘없는 자들의 가슴을 노래했던 그녀를 대중들은
'파차마마(대지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인생이여 고마워, 이렇게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어서/
나에게 소리와 글자를 주어서/
내가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언어를 주어서/
어머니 친구 형제,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영혼의 길을 비춰줄/ 빛을 주어서.'
'인생이여 고마워요' 하는 그 정성스러움,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한 소사.
그 소박함과 진정으로 왜 우리는 살지 못하는가 싶다.
살아가는 일의 아름다움을,
그 소중함을 두 손으로 정성들여 퍼 올리며
'인생이여 고마워요' 하며 이웃을 보듬고
세상살이를 서로 걱정할 수는 없는 것일까.
후회할 때는 늦은데...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더 많았던 조블,
오는 걸음에 다른 곳에 안착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던 것은
'인생이여 고마워요' 하며 이웃을 보듬고
세상살이를 서로 걱정하는 마음이 부족한 조블이라는
나의 편협한 마음 탓일까...
오랫만에 조블에 글을 올리면서
끼리끼리 뭉치고 모여서, 좋은 음식과 좋은 술과
좋은 시를 앞에 두고 즐기면서 먼 곳에 있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안부까지 시시각각으로
정확(?)하고도 교묘하게 걱정해 주는
자칭 파워블로그들의 그 수고로움 보다는
하루의 생활에서 행복을 느끼고, 그 느낌을 주고 받는
아름다운 글 한줄로 행복을 전하며,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이라는 것을 손수 보여주며 말은 없지만
마음이 따뜻한 많은 블로그들이 이곳에 존재하기에
그 행복에 동참하기 위해 다시 조블의 문을 열어 본다.
나를 창조한 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부질없이, 순식간에 바람에 날려갈 인간들인데...
[TIP]
4.11.
총선일,
이날은 최소한 이런 인간은 단죄하여
우리 사회의 인간성을 되살려 주시길...
총선에 얼굴을 들이민 후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가 염원했던 정치 쇄신의 소망과는 상당한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정당과 그들 지도자라는 인간 군상이 국민들의 여망인
정치권 쇄신은 뒤로 한 채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 연장에만 초점을 맞춘 결과다.
일부 무소속 후보가 보이기는 하지만,
당선 가능성이 극히 낮아, 대부분 정당이 제시하는 후보들
가운데서만 뽑아야 한다는, 유권자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현 선거제도의 모순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인간을 판단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알 길이 없다. 오죽하면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다고 했을까.
그러나 일단 말이나 행동으로 생각을 바깥으로 표출하면
인간을 판단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제한 된 선택의 폭이기는 하나 그 중에서도
그들의 언행을 통해서 이미 검증이 끝난
다음과 같은 인간들에게는 4.11 총선에서
절대로 표를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최선의 인물을 뽑기가 어려우면,
최악의 인간만이라도 우선적으로 제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제거해야 할 인간 군상들은 다음과 같다.
국회의사당에 최루탄을 터뜨린 인간.
그런 인종말자인 종말자의 행동을 의거라고 치켜 세운 인간이
대표로 있는 정당의 후보들 전부.
그녀 스스로도 어떻게 의원후보 자격을 박탈당하고
쫓겨 났는지 안다면, 그녀가 추천한 인간들도 여러 면에서
그녀와 대동소이 하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이
결코 어렵지는 않으리라.
사기, 협박, 폭행, 성추행의 화려한 전과를 가진 인간들,
국회의사당을 쇠망치, 전기 톱, 소화기로
아수라장으로 만든 전력이 있는 인간들
국회 사무실을 공중부양의 서커스 장으로 만들어
민의의 전당이어야 할 대한민국 국회를
세계의 웃음거리로 만든 인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법의 심판을 받았거나,
의혹에 싸였던 인간.
지금도 의혹이 진행중인 인간.
고의로 병역을 기피한자,
한 푼도 세금을 내지 않은 자,
세금을 납부하기는 했으나 일반 국민들의 평균에도 못 미치는
세금 납부의 흉내만 낸 자들도 솎아 내어야 한다.
특히 유념해야 할 인간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에 경도 되어
친북, 종북, 좌파의 길을 걷고 있는 인간이나
과거에 그 같은 길을 거쳐온 경력이 있는 인간.
이러한 인간은 개인적인 형사범의 범주를 넘어,
나라를 팔아 넘길 국사범으로써 국회에
매국 활동의 근거지가 될 아지트를 마련하기 위해서
출마한 것이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국회 진입을 막는 것은
국가안보 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국회의원을 의법 처단하는 것이 얼마나 까다롭고
어려운 것인지는 수많은 범법 국회의원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경험으로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 많은 후보 중에 하필이면 나라를 팔아 먹을 인간을
국회에 들여 보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들여 보내놓고 속을 썩일 것이 아니라,
사전에 진입을 막는 것이 바른 투표법이다.
선거란 가장 국정 수행에 가장 합당한 인물을
고르는 것이기는 하나, 인간의 속을 알기가 어려우니
혹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미 검증이 끝난, 국사범을 선택하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한다.
국사범을 국회의원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장래를 위협하는 일인 동시에
나라의 장래까지 망칠 수 있는 위험한 것이다.
국회를 전과자의 세탁장소나
국사범의 아지트로 만드는 일만은 결단코 피해야 한다.
이것이 주권을 가진 국민이 투표로 나라에 봉사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 사항인 것이다.
환경을 지키는 것은 자연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전과자나 국사범으로부터 국회의 국정 논의의 환경을 지키는 것도
훌륭한 정치적 환경보호인 것이다.
이것은 투표권을 가진 국민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당의 공천권에 가로막혀 최선의 인물을
국회의원으로 선발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최악의 인간을 걸러 내지도 못한다면,
그런 국회는 무용지물을 넘어 국가와 국민에게 해약을 끼치는
매국의 기관이 될 것이다.
최소한 국회가 이지경에 이르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투표권을 가진 주권 국민의 최소한의 의무다.
우리는 지난 세월 우리 정치와 우리 국회를 수없이 질타하고
끊임없이 저주해왔다.
모두가 부나비처럼 정치에 이끌려가면서도 너도나도
정치를 동네북처럼 두들겨 팬 이율배반의 구조 속에 살았다.
우리 정치수준이 그랬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정치를 겪을 만큼 겪었고, 욕할 만큼 욕해왔다.
우리도 다른 선진국처럼 먹고살 만큼 됐고 정치문화 면에서도
보고 배울 만큼 배웠다.
우리는 이제 우리도 선진화에 걸맞은 정치를 할 때가 됐다는
자존심과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기회주의 정치, 부패 정치, 패거리 정치, 최루탄 국회, 쇠망치 국회,
점거농성 정치, 지역사업 따내기 정치, 앞잡이 정치 같은
구시대 정치환경과 풍토를 걷어낼 때가 됐다.
이것은 국회의원이나 정치권을 욕해서 시정될 일이 아니다.
유권자가, 국민이 투표로 엄하게 다스려서 그런 부정적 요소들이
발 못 붙이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자존심을 살리는 일이며,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우리 사회의 인간성을 살리는 길이다.
'꼼수"만 부리는 이 인간들...
이런 인간들만 없어도
우리 사회의 인간성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입에서 나오는대로 주절거리는 쓰레기 인간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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