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사랑으로 계명을 지켜야
나는 사실 법을 무척 싫어합니다. 젊었을 때 법을 공부해서 법학자나 법률가가 되고 싶고 한동안 법에 재미를 붙여서 법공부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이 그 순수성을 잃어가고,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자를 내팽개치는 현실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되었습니다. 아주 착하고 정직한 사람을 보고 우리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는 말입니다. 사실상 법은 단순하게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법이 있어야 합니다. 아주 권세 있는 사람들은 법망을 잘도 빠져나가고 잘 이용합니다. 법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고 힘든 사람들은 법에 대하여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잘못하고 법의 심판을 받을 때도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정직하고 가난한 사람은 법에 의해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정직하게 사는 것이 몸에 배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약자들을 위해서 법은 보호자가 되고, 든든한 후견자가 되어서 힘없는 사람들은 ‘법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법이 이미 퇴락해져서 사람들을 구속하고 강제로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21대 국회가 개원할 때 삐거덕거렸습니다. 쟁점은 법사위원회의 실권을 어느 당에서 갖느냐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법이 정당하다면 또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뜻을 정확하게 대변한다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국회의원이 된 모든 정치가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국민을 위하는 올바른 사람들이 아니라 국민의 이름을 빌어서 나라를 망치려는 사기꾼들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들을 보면서 속상한 마음이 많이 듭니다. 이제 사랑으로 법을 만들고 국민을 생각해서 여야를 떠나 정치를 해야 합니다. 국민을 속이는 파렴치한은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적은 법으로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소화해냈습니다. 사람들은 그 법을 아주 잘 지켰기 때문이고 법을 아주 무겁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법의 정신을 존중하고 법을 정한 분의 뜻을 잘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교만과 오만이 지나쳐서 법의 종류도 많아지고 법을 지키는 정신도 희박해져갑니다. 그래서 사회가 다양해질수록 법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모든 범죄와 행동들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가 사회규범의 원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와 형벌을 법에서 정하는 대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는 법에 정해져 있지 않으면 죄가 아니고, 형량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법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고, 양심을 판단하고, 삶을 저울질합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법들이 더 이상 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허울뿐인 굴레가 되었습니다.
‘The city’라는 석간신문에 ‘재미있는 미국 술법’이라는 기사를 읽었는데 오늘 그 기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기사를 쓴 분은 미국의 한 블로그에서 ‘미국의 재미있는 법들’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고 이 기사를 썼다고 합니다. 나는 그의 양해를 받지도 않고 소개합니다.
미국의 재무성 산하 주류 담배 총포담당국(BATF)은 술에 대해 refreshing(상쾌한)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답니다. 이 단어가 술 소비자들에게 백주(白酒)는 ‘활발함’, 진(jean)은 ‘기운을 돋워주는’ 와인(wine)은 ‘회복시켜주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미국의 학교와 캠퍼스 내 마약 추방 법에 따르면 미성년자가 해외 유학을 하고 있을 경우라도 현지에서 음주하게 되면 처벌받도록 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는 오로지 현금으로만 술을 살 수 있으며 바에서 술을 추가 주문하는 것은 불법이랍니다. 텍사스 주에서는 브리태니커의 백과사전전집이 금지돼 있다고 합니다. 사전 내용에 집에서 맥주를 만드는 법이 들어 있기 때문이랍니다. 또한 서 있는 사람은 한 번에 세 모금 이상의 맥주를 살 수 없다고 합니다. 물론 쓰러져 있거나 비틀거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고 합니다.
오하이오 주에서는 낚시 중에 물고기에게 술을 먹이는 행위는 불법이며, 따라서 ‘술고래’라는 뜻의 숙어인 'drinks like a fish'는 이 지역에서 전혀 맞지 않는 표현이랍니다. 펜실베니아주 법은 아내의 허락 없이는 남편이 술을 사는 것이 불법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이러한 법은 그냥 재미로 웃어넘기는 실효성이 없는 법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쓰레기를 불법으로 투기하면 경범죄에 해당해서 벌금을 매기도록 되어있지만 가래침을 거리에서 뱉고, 담배꽁초를 버리고, 거리가 쓰레기로 몸살을 앓아도 법으로는 질서를 잡을 수 없는 법이 되었습니다. 마치 미국의 술에 대한 법처럼 법으로서의 존엄성이나 가치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았고, 오히려 완성하려고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바리사이들과 언제나 논쟁하시며 많은 율법을 수정하시는 예수님께서 한 획, 한자도 없애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이상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율법주의자가 아닌지 착각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율법의 정신을 잠시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기본 정신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사람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관점으로 율법을 보아야 하고 하느님께 대한 율법도 사랑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사람이 만든 법률을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세오경에 나오는 모든 율법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내려주신 존귀한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법률이 그 실효성을 잃어가는 것은 사랑 없이 다만 사람들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며, 사랑에 관계없이 강제로 규제하는 데에 법률이 치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법은 강제적으로나 억지로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야만 율법의 정신이 올바르게 지켜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이나 모든 교회의 법들도 스스로 지키려는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법의 정신은 자율성과 생명의 존엄성과 사랑의 법칙 안에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정한 사형제도 또한 사랑의 법으로 폐지되어야 하며, 사형제도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극악한 범죄 속에서도 ‘이제는 끝장이다.’ 혹은 ‘이판사판이다.’하는 극단주의가 활개를 치게 되는 일이 빨리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법도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강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정신으로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가르치는 법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희에게 새로운 계명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고자 하시는 주님, 저희가 당신의 사랑의 계명을 소홀히 하면서도 세상의 허울뿐인 법률에 목숨을 걸고 살았음을 반성합니다. 당신의 계명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형식적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판공성사를 보고, 세상의 눈으로 저희의 신앙을 저울질하며, 세상의 법에 의지 하였나이다. 사랑으로 교회법을 지키도록 은총을 주소서.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새 계약을 이행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3,4-11
형제 여러분,
4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5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스스로 무엇인가 해냈다고 여긴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7 돌에 문자로 새겨 넣은 죽음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곧 사라질 것이기는 하였지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8 그렇다면 성령의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9 단죄로 이끄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10 사실 이 경우, 영광으로 빛나던 것이 더 뛰어난 영광 때문에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11 곧 사라질 것도 영광스러웠다면 길이 남을 것은 더욱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축일6월 14일 성 엘리사 (Elisha)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 +9세기경BC
같은 이름 :엘리세오, 엘리세우스
성 엘리사(Eliseus)는 엘리야(Elias)의 계승자로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셨다’라는 뜻이다. 엘리사는 대략 기원전 850-800년경 북이스라엘의 왕 아하지야, 요람, 그리고 여호아스 재위 기간에 활동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수많은 기적을 행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구약성서에는 그에 관한 대목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신명기계 역사서인 열왕기 상하권에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가 큰 단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엘리야 이야기는 열왕기 상권 17-19장과 21장, 열왕기 하권 1-2장에, 엘리사 이야기는 열왕기 하권 2-9장에 나타나며 그의 죽음 이야기가 13장 14-21절에 수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들은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엘리사 개인에 관한 설화적인 이야기들과 사마리아의 역사적인 격동과 연관되어 있는 사건들이다.
아벨 므홀라 출신으로 사밧의 아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1열왕 19,16-21). 열왕기에 등장하는 그에 관한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모두 기적에 대한 것이다. 또 각 이야기들은 서로 연관성을 갖지 않는 독립된 이야기로 나타나며, 엘리사의 생애에서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일어났는지 등의 시간적인 연계성도 표현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다만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며 이 기적들은 특별하게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또한 도덕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엘리사는 ‘예언자’라는 명칭과 함께 자주 ‘하느님의 사람’으로 지칭되었다. 그 시대의 역사적인 사실들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이야기들은 엘리사가 신명기계 역사서에서 예언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엘리야와 함께 예언자로서의 한 모델을 제시한다. 엘리사는 야훼 신앙을 저버린 오므리 왕조를 거슬러 계속해서 투쟁을 하며 오므리 왕조의 멸망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예후를 세우고, 다마스쿠스의 하자엘이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예후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엘리사의 사회적 역할의 장이 주변에서 중심으로 바뀌어 나타나며, 그는 왕궁과 밀접히 연결되어 특별히 국방 부분에 많이 연계된다.
엘리사는 그 시대에 온전한 성실로 야훼 신앙을 지킨 하느님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가 행한 것으로 나타나는 놀라운 일들은 그의 확신 있는 행동의 능력을 보여 준다. 거칠고 단호한 몇 개의 설화는 야훼 신앙이 위기에 처해 있고 이스라엘 역시 대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아주 힘든 시기에 그를 휩싸고 있던 신념과 확신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신명기계 역사 속에서 민간설화에서 기억하는 대로 크나큰 능력을 가지고 초기 이스라엘에서 혼합주의 경신례의 위협을 거슬러 야훼 신앙을 고수하며 오로지 야훼만을 신봉하던 사람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엘리사는 죽었을 때도 살아 있을 때처럼 야훼의 생명을 전하는 도구로 묘사되었다.
신약에서도 구약의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던 엘리사가 언급되고 있다. 예수님은 나자렛의 회당에서 엘리사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낳게 한 이야기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를 도운 이야기와 함께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의 정당성을 설명하였다(루가 4,27).
오늘 축일을 맞은 엘리사 (Elisha)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