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 버스에서 내린 것은 밤 10시경이었다. 밤이 제법 이슥했다. 가을비 내리다 웃날 들더니 무서리 내리는 가 갑자기 추워지면서 옷깃을 여미게 했다. 하늘엔 토끼가 입을 대다만 약간 기운 보름달이 요요하게 날 유혹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아파트 후문이지만 나는 옆길로 난 숲길을 택했다. 달이 내개 보낸 윙크를 못 본 체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 오장육부에 모두 달 月자가 들어있데. 그러니 일광욕도 좋지만 월광욕도 해야 한다나”
하던 친구의 말이 떠올라서라기보다 끌림이었다. 달빛을 선물인양 흠뻑 받으며 끌리듯 사람 기척 하나 없는 숲길을 허적허적 걸으니 달과 연결된 이 생각 저 생각이 널을 뛰었다.
“달은 이 세상 사람들 꿈의 무게를 달아주는 저울”이라고 영화 ‘미나리’의 배우 한예리가 달이 차고 기우는 순환과정을 삶에 비유한 무용극‘디어 루나’에서 ‘루나’역을 맡아 맨발에 검은 원피스를 입고 무대에 나와 조용히 읊던 대사가 떠올랐다. 한편으론 주책없이 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에서 '달빛 침침한 한밤중에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는 글귀를 떠올리며 젊은 날 어느 달밤을 돌이키다 거의 한 갑자가 다 되어 가는 얼마 전 추석 이튼 날, 그 옛날 정분이 있었던 그녀로부터 100년만의 보름달이라면서 전화가 걸려왔었다. 나는 얼떨떨했지만 나도 모르게 김용택 시인의‘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의 도입부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나 신나고 근사해요
젊은 날 그녀와 몇 사람이 그룹을 지어 평창을 다녀온 기억도 난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이 문장은 읽기만 해도 달빛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깨어지는 달빛처럼 우린 깨어졌지만….
나는 한 시간 쯤 숲속을, 말하여 월광욕을 즐기다 집을 향해 다시 후문 쪽을 향했다. 저 멀리 후문 쪽 오솔길 노변에 놓인 벤치에서 담뱃불이 빠끔빠끔 거렸다. 혹시 그 소녀가…. 나는 왠지 그 금발의 소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때렸다. 내가 잊고 지냈지만 내 마음속 어딘가에 깊게 각인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름이 떠날 채비를 하는 어느 날이었다. 반려견 베베와 산책을 하다 저뭇하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스무 살도 채 안돼 보이는 소녀가 벤치에 앉아 담배를 빠끔히 피워 물고 있었다. 머리는 금발로 물들여져 있었고 줄무늬 민소매 차람이었다. 나는 소녀가 민망해할 가 첫 번째는 딴 오솔길을 택했었고, 두 번째는 소녀를 못 본 척 스쳐지나왔었다. 그때 친구 K 생각이 났다. 그러자 웃음이 잔즐거려 입술이 다 간지러웠다. K의 말에 따르면 학창시절 화장실에서 담배를 빨다가 선생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엉겁결에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단다. 선생님이 지나가고 나니 불두덩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더라나. 급기야 불을 껐지만 그놈이 퉁퉁 부어올랐고, 그야말로 장가도 못갈 번 하였다고 엄살을 피우고는 했었다. 그런 친구가 요사이 공자는 저리 가라다. 한번은 같이 길을 가다 길모퉁이에서 담배를 피워 문 고등학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얼마나 나무라는지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어쩔 줄 몰라 얼굴이 시뻘건 학생이 K처럼 피우던 담배공초를 주머니에 집어넣을까봐 민망스러워 나는 K 소매를 잡아끌었다.
“내 믿고 그러지? 요사인 여자애들도 담배 피우던데 그 애들한테도 그럴 꺼가?”
“뭐라 카노? 그걸 그냥 봐? 당장 귓방만이를 엥기지.”
학창시절이 생각난다. 안동여고 우리 동학년에 우리끼리 부르는‘후렛빠’라는 그룹이 있었다. 그녀들은 가정이 대체로 넉넉했었다. 모든 여학생들이 검은 교복을 입었는데 그 애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감청색이 나는 비싼 교복을 입고 다닌 줄로 기억난다. ‘후렛빠’가 있는가하면 ‘지성파’도 있었다. 그녀들은 대체로 공부도 잘하고 책 읽기를 좋아한 아이들로 꾸려졌다. 예를 들면 지성파 아이들의 손목을 한 번 잡으려면 날밤을 세워야 했지만, 후렛빠들은 푼푼하게 제 먼저 손을 내밀곤 했었다. 그녀들과의 만남은 20년이 넘어서도 간혹 연결되었는데 후렛빠들이 그 당시만 해도 삐가번쩍하는 자가용을 몰았는가 하면, 지성파 아이들은 나름대로 한 가지 이상의 걱정을 안고 제대로 얼어붙지 않은 강을 건너듯 항상 조바심을 쳤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담배를 피우는 소녀를 부추기지는 않지만 나쁘게 생각지도 않는다. 대구에서도 대낮에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마당에 남자만 담배를 피우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도리어 이런 상상을 하면 무릎이 살짝 녹아내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 세월이 흘러, 소녀가 성숙한 어느 날에, 담배 피우던 과거가 종종 여러 얼굴로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 때 왜 그랬을까 하면서도, 흘러가버린 옛날을 아름답게 느낀다면 말이다. 미국 하버드대의 심리학 석학인 스티븐 핑커는
“나쁜 일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면서 우리는 과거를 향한 향수에 젖는다” 하지 않는가. 혹시나 이 글을 읽는 여자동기 중에서 나도 젊은 시절 담배를 한번 피워볼 걸 하는 사람은 없을까?
역시 그 소녀였다. 밤이 이즈막하여 저녁을 마친 새들도 제 잠자리로 든 고적한 숲속에서 소녀는 옹크리고 담배를 아끼듯 꽁초를 빨고 있었다. 그러나 달빛에 나앉은 소녀의 모습은 한 떨기 메밀꽃처럼 맑고 깨끗했다. 제법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줄무늬 민소매 원피스를 그냥 차려 입고 있었다. 그런 소녀에게서 쓸쓸함이 전해왔다. 그러나 나는 소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제목도 모르는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그녀 앞을 지나쳤다.
“베베는요?” 이만치 걸어오는데 소녀가 내 꼭뒤를 걸었다.
“베베? 베베를 알아요?” 내가 돌아서서 물었다.
“알다마다요. 우리 동네서 베베 모르면 간첩이죠?”
“하, 고마워요. 오늘은 내가 볼일이 좀 있어서….” 내가 돌아서는데 소녀가 또다시 꼭뒤를 걸었다.
“아저씨, 혹시 담배 있, 나, 요?”
“딩~” 내 머리에서 에밀레종이 울렸다. 나는 천천히 그녀 곁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소녀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볐다. 절대, 원피스 안에 감추지는 않았다.
“어쩌지. 난 담배 끊은 지 한 20년 돼서…” 나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낮게 중얼거렸다.
“됐어요.” 소녀는 잽을 날리듯 말하고, 몸을 움직여 앉아있던 자리를 잗다란 손으로 쓸면서 말했다.
“아저씨 잠시 앉으실래요?”
“날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아요.” 나는 나대로 요상한 생각이 들어 벤치에 앉으며 못을 박았다.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80 넘은지가 벌써 거든.”
“아, 할아버지. 좋아요, 할아버지.”
짝짜꿍을 치는 소녀의 목소리는 팔랑대는 꽃잎처럼 청아했고, 초강초강한 민낯의 눈동자가 빨다만 사탕처럼 빛났다.
첫댓글 백해무익한 담배를 왜 피울까?
호기심으로 어른 흉내를 내보는 청소년들, 사색의 샘이라고 한 임어당,
파이프를 문 멋진 사나이 맥아더, 영국의 쳐칠 수상. 등등...
달 빛 아래 담배를 피우는 소녀와 대화를 나누는 멋진 사나이의 독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