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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은 “도대체 무슨 실없는 질문이람”이라거나 “이 친구는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하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전에 이것을 한 번 생각해 보자. 구글의 에릭 슈미트 회장에 따르면 현재는 20억 명이 인터넷을 접속하고 있지만 앞으로 5년 안에는 70억 명이 대부분 스마트폰과 태블릿 같은 휴대기구를 이용해 인터넷에 접속할 것이라고 한다. 지금 이 칼럼을 읽은 이들은 대부분 탁상용 컴퓨터와 노트북을 통해 접속하고 있을 터인데, 이것과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앞으로 세대는 스마트폰과 태블릿으로 인터넷에 접속하게 되는데, 이것은 소셜 미디어 접속, 그리고 특정 앱 이용에 특화된 것들이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웹을 여러 다른 일을 위해 쓰는 것을 알고 있다. 인터넷 뱅킹이나 화상 회의에서부터 의미 없는 수다, 포르노 보기 등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우리는 웹이 만들어진 목적인 쌍방향 소통이 아랍의 봄 사태에서 보는 것처럼 정치적 변화를 불러온 사례들을 알고 있다. 다음 세대가 어떻게 인터넷에 접속할 것인가에 관해 진짜 새로운 것은 이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통 관심사를 가진 다른 이들과 어떻게 상호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소셜 미디어는 인류 진화의 역사 속에 전대미문의 규모로 상호소통이 가능하게 해 줄 도구다. 전임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말했듯이, 웹은 새로운 약속 장소 또는 집합 지점- 아고라다. 웹은 메시지가 전달되는 곳이다. 여기에 참여하려면, 자기가 말하는 것을 남이 경청하는 것에 익숙해진 교회지도자들에게는 사고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소셜 미디어는 이제 교회의 심장 박동소리를 듣는 새로운 도구가 되었다. 이것을 놓치면 당신은 잊혀질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자신이 정보를 통제하고 상호소통을 억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 스스로 꽉 파묻혀 있는 폐쇄 사회일수록 소셜 미디어가 변화를 일으키는 힘은 더 커진다. 좌절을 겪는 이들은 언제나 사이버 세계의 방화벽 같은 장벽을 깨거나 넘어서 자신의 길을 찾아낸다. 방법만 알면 간단해진다. 중국인들이 미국이나 호주의 정보기관들에 대해 벌이고 있는 인터넷 공격을 보라. 중국인들은 미국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싶어 한다! 전 세계 인구의 2/3 이상이 사이버 공간을 통해 상호소통하게 되면 가톨릭 신자들과 교회에는 어떤 변화가 올까? 내 질문을 내쳐버리기 전에, 문명의 전환점마다 기술의 발전은 경제적 변화만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문화적 변화도 일으켰음을 생각해 보라. 수레 바퀴가 발명되었을 때도 그랬고, 항공 여행이 가능해졌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우리는 70억에 이르는 보통 사람들이 정보 보급과 상호소통의 기술을 공유할 능력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지켜보고 있다. 이것은 그저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 웹의 등장에 숨겨져 따라오는 문화적 변화를 격발시킬 것이다. 정보와 의견 형성 과정에 접근하는 것을 민주화시키고 상호소통이 증가할 것이다. 문화적 변화는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설득 능력을 향상시킬 수도 있고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해 아직까지 교회가 보여준 실적은 별로 좋지 않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명된 뒤, 교황청이 이 인쇄술을 이용하기 시작하기 까지는 무려 150년이 걸렸다. 하지만 루터는 그 잠재력을 알아보고 성경을 라틴어에서 각 나라말고 번역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이들에게 모두 손에 쥐어주었다. 여러 이유 가운데, 바로 이것이 개신교의 종교개혁이 퍼져나간 주요 이유의 하나였다. 아시아는 가톨릭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대륙 가운데 하나다. 이곳에서 우리는 문화적 변화의 충격력과 교회의 선교사명에 미치는 그 관련성을 잘 알고 있다. 지난 20세기 중반에 식민지 시대가 끝난 뒤로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보여주려는 교회의 선교사명은 그 언제보다도 잘 되고 있다. 아시아인들은 각자 독립하면서 가톨릭 교회가 유럽 수입품으로 보이는 부담을 더 이상 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여러 곳에서 현지 교회들은 각자 언어와 관습, 이미지에 맞게 변화했다. 하지만 이제 2018년에 이르면 아시아의 의사소통 지형은 인터넷이 값싼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통해 제공할 변화에 의해 또다시 변할 것이다. 아시아는 이전까지는 수직적이며 중앙통제적 국가구조와 문화를 갖고 있었지만 상호소통의 충격을 받으면서 이러한 구조들이 공격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아시아 국가와 문화가 내부로부터 겪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래서 베트남, 중국, 미얀마 등은 자국민이 인터넷에 잘 접근하지 못하도록 아주 엄하게 단속하고 중앙 정부가 위협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무엇이든 차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가 제 꼬리 쫓기다. 주도권은 언제나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 편에 있지 국민을 통제하려는 사람 쪽에 있지 않다. 관료기구와 사이버 경찰이 생각하는 것보다 대중은 더 똑똑하다. 이러한 변화에 직면해,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보고 시작부터 교계제도를 만들었다고 규정하지 않았던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아주 시급하고 명확한 시기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렇게 본 것을 두고 당신이 그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아니면 그것을 개선이라고 보든 개악이라고 보든 상관없이, 인터넷은 모든 사람이 각자가 독립된 권위로서 자신을 표현하며 각자의 믿음을 확산시키며, 집단이나 국가를 단결시키거나 분열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어떤 개인이든 의지와 능력만 있으면 전체를 설득해 자기편으로 만들 의견을 발표하고 상호소통할 수 있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간에. 인터넷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문화의 외양과 본질의 변화를 놓치면 교회는 자신에게 영구한 손실을 끼치는 것이다. 물론 가상 공간에서의 상호소통이 실제 생활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만남을 완전히 대치할 수는 없다. 인터넷에서 친구를 사귈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만나보고 그 사람됨됨이를 잘 알게 되어야 비로소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인터넷 데이트도 실제 데이트로 이뤄져야 의미가 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장래 세대의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 당국이 그저 당국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장래의 교회 지도부는 자신이 지침을 내리기만 하면 단지 자기가 그 직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기 보다는,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고 또 설득하는 데 익숙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프랑스 역사가인 샤를 페기는 20세기 초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교회는 (각 시대의 전환점에서마다) 늘 좀 지각하고 좀 숨차한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변화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범위는 지금 우리가 그 가능성을 어떻게 제한하느냐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마이클 켈리 신부 (예수회 소속으로, <UCAN 가톨릭뉴스> 대표를 맡고 있다.) <기사 제휴 / UCAN 가톨릭뉴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