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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희미한 빛이 스며듭니다. 아직 세상이 잠들어 있는 시간입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숨소리만 들립니다. 들숨과 날숨이 반복됩니다. 가만히 느껴봅니다. 이 숨을 누가 쉬고 있을까요?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오늘 해야 할 일들이 떠오릅니다.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내가 이루어야 할 목표들이 떠오릅니다. 그 모든 생각의 중심에는 언제나 나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나는 이 몸을 움직입니다. 나는 이 생각을 생각합니다. 나는 2 선택을 선택합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해 보입니다. 손을 들어 올립니다. 손가락을 펴고 우물입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손을 봅니다. 내가 이 손을 움직이는 것일까요? 정말 내가 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다만 움직임이 일어날 뿐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위는 이때 행위자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한 문장이 우리가 평생 겪어온 고통의 뿌리를 보여줍니다. 이 한 문장 속에 해탈의 열쇠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섭니다. 거기에 비친 얼굴을 보며 이것이 나라고 생각합니다. 주름이 하나 늘었습니다. 흰 머리카락이 몇 가닥 보입니다. 어제와 다른 얼굴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것이 여전히 나라고 믿습니다. 이 얼굴 이 몸 이 마음이 변하지 않는 나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이 날을 지키기 위해 하루를 시작합니다. 나를 위해 일하고 나를 위해 사랑합니다. 나를 위해 걱정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나를 위해 쌓고 나를 위해 비워냅니다. 하지만 정작 그날은 어디에 있을까요? 손으로 만져지지 않습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생각으로 붙잡으려 하면 생각만 있을 뿐입니다. 느낌으로 찾으려 하면 느낌만 있을 뿐입니다. 마음속을 들여다봅니다. 생각이 떠오릅니다. 감정이 일어납니다. 기억이 스쳐갑니다. 그 모든 것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흐름을 보는 나는 누구일까요? 오늘 우리는 함께 이 깊은 물음 앞에 섭니다. 내가 한다는 그 확신은 과연 진실일까요? 아니면 오랜 습관이 만들어낸 착각일까요? 나라는 느낌은 실체일까요? 아니면 변화하는 현상일 뿐일까요? 이 물음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이 여정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을 돌아보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여정의 끝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내가 한다고 믿으며 살아갈까요? 이 물음은 단순해 보이지만 우리 삶에 많은 고통을 담고 있습니다. 이 물음 앞에 서면 우리 존재의 밑바닥이 드러납니다. 직장에서 실수를 했을 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여깁니다. 그 순간 가슴이 무거워집니다. 자책감이 밀려옵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가 찾아옵니다. 관계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도 생각합니다. 내가 상처받았다고 느낍니다. 그 상처가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내가 무시당했다고 느낍니다. 내가 인정받지 못했다고 아파합니다.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내가 해냈다고 여깁니다. 내 능력으로 이루었다고 자부합니다. 내 노력의 결실이라고 기뻐합니다. 이 모든 순간마다 나라는 주체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을 때도 그렇습니다. 내가 이 옷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색깔을 좋아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일까요? 과거의 경험이 선택하게 한 것은 아닐까요? 주변의 시선이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요? 광고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요?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화를 낸다고 할 때 정말 내가 화를 내는 것일까요? 아니면 화라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화가 나기 전에 내가 화를 내겠다고 결심했을까요? 아니면 어느새 화가 나 있었을까요? 내가 생각한다고 할 때 정말 내가 생각을 만드는 것일까요? 아니면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일까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할지 미리 알 수 있을까요? 다음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오를지 예측할 수 있을까요? 생각이 떠오른 후에야 그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요? 내가 숨을 쉰다고 할 때 정말 내가 숨을 조절할까요? 아니면 숨이 저절로 들고 나는 것일까요? 잠들어 있을 때도 숨이 쉬어집니다. 의식하지 않아도 심장이 뜹니다. 내가 시키지 않아도 소화가 됩니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하는 것일까요? 더 깊이 물어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요? 이 질문 앞에 서면 당황하게 됩니다. 너무나 자명해 보였던 것이 흔들립니다. 이 몸일까요? 하지만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7년이 지나면 몸의 세포 대부분이 교체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7년 전에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존재일까요? 아기 때의 몸과 지금의 몸이 전혀 다릅니다. 세포는 죽고 새로 생깁니다. 비는 흐르고 순환합니다. 변하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마음일까요? 하지만 마음도 순간순간 달라집니다. 어제 생각과 오늘의 생각이 다릅니다. 아침의 기분과 저녁의 기분이 다릅니다. 젊었을 때의 가치관과 지금의 가치관이 다릅니다. 변하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름일까요? 하지만 이름은 다른 사람이 지어준 것입니다.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바꾸면 나도 바뀔까요?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 다른 사람이 될까요? 기억일까요? 하지만 기억은 불완전합니다. 왜곡되고 변형됩니다. 잊지도 않았던 일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기억이 나라면 기억을 잃으면 나도 사라질까요? 성격일까요? 하지만 성격도 변합니다.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집에서의 나와 직장에서의 나가 다릅니다. 친구 앞에서의 나와 부모님 앞에서의 나가 다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변하지 않는 나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 믿음이 집착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번뇌의 뿌리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고통의 원인일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굳건하게 나를 믿을까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키웠습니다. 선생님이 나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친구들이 나를 알아보았습니다. 모두가 나라는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사회도 그렇습니다. 법은 나에게 권리를 줍니다. 나에게 의무를 부여합니다. 나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경제는 내가 소비하고 생산한다고 말합니다. 정치는 내가 투표하고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나라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의심한다는 것은 세상 전체를 의심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의문조차 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이 당연함에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모두가 믿는 그것을 살펴보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명상 끝에 진실을 보셨습니다. 나라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현상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흐르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첫 번째 물음입니다. 정말로 나라는 것이 있을까요? 아니면 다만 나라는 생각만 있을 뿐일까요? 이 물음에 정직하게 답하는 것이 수행의 시작입니다. 어느 날 직장에서 중요한 일을 맡았습니다. 몇 달 동안 밤을 새워가며 준비했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실행하고 내가 완성했습니다. 자료를 검토하고 또 검토했습니다. 발표 자료를 수정하고 또 수정했습니다.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발표 당일 상사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준비가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핵심이 빠져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다시 해오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내가 한 노력이 부정당한 것 같았습니다.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것 같았습니다. 회의실을 나와 화장실로 갔습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봅니다. 창백해진 얼굴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나일까요? 이렇게 초라한 사람이 나일까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왜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생각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인정받지 못할까 원망했습니다.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일까 자책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는데 나만 못하는 것일까 비교했습니다. 머릿속에서 계속 되뇌었습니다. 내가 내가 내가 라는 말이 끝없이 반복되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무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그 생각들이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생각이 따라다녔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와서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나라는 주체가 짓누르는 무게를 느꼈습니다. 다른 날에는 오랜 친구와 다퉜습니다.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된 말다툼이었습니다. 약속 시간을 잊어버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화를 냈습니다. 친구는 내가 변했다고 말했습니다. 예전에 너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예전에는 약속을 소중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너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억울했습니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똑같은 나인데 왜 이해받지 못할까 답답했습니다. 친구가 나를 오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나를 모른다고 서운했습니다. 그날 밤 혼자 앉아 생각했습니다. 정말 나는 변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정말로 변한 것일까요? 예전에 나는 어디로 갔을까요? 지금의 나는 누구일까요? 혼란스러웠습니다. 또 다른 날에는 건강검진 결과를 받았습니다. 몇 가지 수치가 정상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혈압이 높다고 했습니다. 콜레스테롤도 높다고 했습니다. 혈당도 경계선이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생활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운동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식습관을 개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내 몸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내 몸을 지킬 수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나는 내 건강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몸은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습니다. 병원을 나와 걸으며 생각했습니다. 이 몸은 정말 내 것일까요? 내가 원한다고 해서 건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늙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몸은 제갈길을 갑니다. 저녁에는 부모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힘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했습니다. 큰 병은 아니지만 나이가 있으시니 걱정된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습니다. 부모님도 늙으십니다. 언젠가는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밀려왔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느꼈습니다. 이 모든 순간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라는 주체가 있고 그 주체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일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몸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부모님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자연스러움 속에 고통의 씨앗이 숨어 있을 수 있
내가. 한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책임감도 커집니다. 책임감이 커질수록. 부담도 커집니다. 부담이 커질수록. 불안도 커집니다. 불안이 커질수록. 집착도 커집니다. 퇴근
얼굴입니다. 얼굴들을 봅니다. 별이 하나 보입니다. 짊어진 듯한 표정입니다. 내일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는 얼굴입니다. 내가 해내야. 한다는 무게를 지고 있는 얼굴입니다. 젊은 사람도. 나이 든 사람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무게 속에서 살아갑니다. 창밖을 봅니다. 어두워진 하늘의. 별이 하나 보입니다. 저 별도. 누군가에게는 나일까요? 아니면 그냥. 빛날 뿐일까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나도 그냥 빛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밤늦게
침대에 누워도 마음은 쉬지 못합니다. 오늘 내가 한 말
되짚어봅니다. 잘못 말한 것은 없는지 걱정합니다.
상처 준 사람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내일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합니다.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합니다.
주체는 쉴 틈이 없습니다.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하고 무언가가 되어야 합니다. 더. 나은 나가 되어야 합니다. 더. 성공한 나가 되어야 합니다. 더. 사랑받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무
거창한. 철학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 눈 뜨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삶의 무게입니다. 출근하고 일하고. 관계 맺고 돌아오는 하루하루의 무게입니다. 그리고 2. 무게의 중심에는 언제나 나가 있습니다. 어떤 날은. 이 무게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겁습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집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내려놓을 수도 없습니다. 나라는 것이 있는 한계 속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묻습니다. 이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나라는 짐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부처님
이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의 원인을 명확히 보셨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그것 그
고통의 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유따. 니까야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행위는. 있으되 행위자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과보는. 있으되 받는 자는 없다고 하셨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어떻게 행위가. 있는데 행위자가 없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과보가? 있는데 받는 자가 없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것이? 연기의 진실입니다. 이것이 무아의. 핵심입니다. 걷는다는 행위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내가. 걷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걷기라는 현상만 있을 뿐입니다. 의도가 일어나고 근육이 움직이고 발이 땅을 딛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연이 화합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거기에 별도로 걷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생각이라는 현상이 일어날 뿐입니다. 과거의 경험이 원인이 되고 현재의 대상이 조건이 되어 생각이 일어납니다. 거기에 별도로 생각하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론에서 용수 보살님께서 밝히셨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겨난다고 하셨습니다. 자성이 없고 실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공성의 가르침입니다. 나라고 부르는 것도 온의 일시적 화합일 뿐입니다. 오온이 무엇일까요? 책 수상행식입니다. 몸과 느낌과 지각과 의지와 의식입니다. 이 5 가지가 모여 나라는 느낌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이 5 가지 중 어느 것도 나가 아닙니다. 몸은 나일까요? 몸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아기 때의 몸과 지금의 몸이 다릅니다. 세포는 죽고 새로 생깁니다. 변하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느낌은 나일까요? 느낌도 순간순간 달라집니다.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변합니다.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변합니다. 변하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각은 나일까요? 지각도 대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대상을 보아도 어제와 오늘의 지각이 다릅니다. 변하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의지는 나일까요? 의지도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 사라집니다. 아침의 의지와 저녁의 의지가 다릅니다. 변하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의식은 나일까요? 의식도 대상과 감각 기관에 의존합니다. 눈이 있고 색깔이 있을 때 시각이 생깁니다. 귀가 있고 소리가 있을 때 청각이 생깁니다. 의존하는 것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온 전체가 나일까요? 하지만 온은 순간순간 변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흐르는 강물의 실체가 없듯이 변하는 온에도 실체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재범무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현상에는 자아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사성제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8 정도가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없는데 누가 고통받을까요? 내가 없는데 누가 해타를 구할까요? 이것이 깊은 역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역설이 진리의 문입니다.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없습니다. 고통은 있지만 고통받는 자는 없습니다. 해탈은 있지만 해탈하는 자는 없습니다. 이것이 연기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무화의 진실입니다. 마치 파도가 일어났다 사라지듯이 현상들이 일어났다 사라질 뿐입니다. 거기에 별도의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이 모이면 현상이 일어나고 2년이 흩어지면 현상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법의 흐름입니다. 이것이 다름아의 진실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은 습관일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반복되어 온 생각의 패턴일 수 있습니다. 이 패턴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무명이 행을 만들고 행위식을 만들고 식이 명색을 만듭니다. 이렇게 12 연기의 사슬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24슬을 끊을 수 있습니다. 무명을 소멸하면 행위 소멸하고 행을 소멸하면 식이 소멸합니다. 이것이 환멸의 도리입니다. 이것이 해탈의 길입니다. 내가 한다는 생각을 조금씩 내려놓아 봅시다. 그러면 책임의 무게가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받는다는 생각을 조금씩 내려놓아 봅시다. 그러면 집착의 고통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을 조금씩 내려놓아 봅시다. 그러면 자유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자유롭게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나라는 무게가 없으니 가볍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나라는 집착이 없으니 자유롭게 행할 수 있습니다. 행위는 계속됩니다. 다만 행위 잘하는 착각이 사라질 뿐입니다. 걷기는 계속됩니다. 다만 걷는 자라는 환상이 사라질 뿐입니다. 생각은 계속됩니다. 다만 생각하는 잘하는 망상이 사라질 뿐입니다. 이것이 무화행입니다. 주체 없는 행위입니다. 집착 없는 움직임입니다. 자유로운 삶의 흐름입니다. 바니아 심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고 하셨습니다. 현상은 있되 실체는 없다는 뜻입니다. 행위는 이때 행위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반야의 지혜입니다. 이것이 해탈의 문입니다. 현대 신경과학도 비슷한 발견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물론 과학은 현상을 설명할 뿐 진리를 직접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식이 틀릴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뇌과학자 벤저민 리벳의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을 움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언제 움직이려는 의도가 생겼는지 물었습니다. 동시에 뇌파를 측정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의식적 의도가 생기기 전에 이미 뇌가 준비 신호를 보냈습니다. 약 반초 정도 앞서서 말입니다. 즉 우리가 의식적으로 결정했다고 느끼기 전에 이미 뇌는 움직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결정한 것일까요? 과연 내가 결정한 것일까요? 이것은 자유의지가 우리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내가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무의식적 과정이 먼저 일어나고 의식은 그것을 사후에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마치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내가 된 듯 느끼는 것과 비슷합니다. 다른 실험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카드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습니다. 뇌 활동을 관찰하면 선택하기 수초 전에 이미 어떤 카드를 선택할지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본인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느끼지만 말입니다. 뇌는 이미 결정을 내린 후 의식에 전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리학자 대니얼 웨그너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행위 주체성은 사후에 구성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행동이 일어난 후에 그것이 자기 행동이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 느낌 자체가 또 하나의 심리적 과정일 수 있습니다. 뇌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해석일 수 있습니다. 외근어는 최면 실험을 했습니다. 최면에 걸린 사람에게 특정 행동을 하도록 암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을 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최면 암시를 기억하지 못하고 스스로 합리화한 것입니다. 우리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조건과 원인이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내가 한 것으로 느낍니다. 뇌가 그렇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인지 과학에서는 마음을 여러 과정의 흐름으로 봅니다. 지각 기억주의 사고 등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흘러갑니다. 거기에 중앙 통제자는 없습니다. 각 과정이 자동적으로 일어날 뿐입니다. 마치 개미집처럼 중앙사령부 없이 운영됩니다. 마빈 민스키는 마음을 사회로 보았습니다. 수많은 작은 마음들이 모여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각각은 단순한 기능만 합니다. 하지만 함께 작동하면 복잡한 마음이 나타납니다. 그 어디에도 주인은 없습니다. 마치 교양악단과 같습니다. 지휘자가 없어도 음악이 흘러갑니다. 각 악기가 서로의 소리를 듣고 조화롭게 연주합니다. 첫 바이올린이 시작하면 다른 악기들이 따라갑니다. 지휘자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중앙에 나가 없어도 모든 것이 조화롭게 흘러갑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감정이 따라옵니다. 감정이 일어나면 행동이 따라옵니다. 지휘자 없는 교향곡입니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말합니다. 자는 뇌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몸의 상태를 계속 모니터하고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습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내가 느끼는 나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실체가 아닙니다. 진화 심리학적으로 보면 자아감각은 생존에 유리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 위험을 피하고 음식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 선택에 의해 강화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존에 유리하다고 해서 실체인 것은 아닙니다. 물리학적으로 보아도 흥미롭습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끊임없이 교체됩니다. 먹고 배설하고 숨 쉬면서 물질이 들곤합니다. 1년이 지나면 몸의 대부분 원자가 바뀝니다. 그렇다면 1년 전에 나와 지금의 나는 물리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양자역학은 더 나아갑니다.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말합니다. 관찰하기 전에는 확률의 구름일 뿐입니다. 관찰하는 순간 하나의 상태로 결정됩니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의문스럽게 만듭니다.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이 독립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연기설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물론 과학은 현상을 설명할 뿐입니다. 그 너머의 진리를 직접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과학은 어떻게를 설명하지만 뇌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현상을 기술하지만 본질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상식이 틀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믿음이 착각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것만으로도 과학은 불교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불교는 2500년 전부터 이것을 가르쳐 왔습니다. 과학이 최근에 발견한 것을 부처님은 이미 깨달으셨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더 깊습니다. 현상의 설명을 넘어 해탈의 길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주체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말하지 못합니다. 그저 사실을 기술할 뿐입니다. 삶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불교는 주체가 없음을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무화를 깨닫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합니다. 이것이 불교와 과학의 차이입니다. 과학은 지도를 그립니다. 하지만 그 지도를 가지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지도를 그리면서 동시에 목적지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는 방법까지 가르칩니다. 과학적 발견은 불교 수행의 보조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무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과학적 증거가 믿음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과학 논문을 읽어도 무화를 깨닫지 못합니다. 직접 관찰하고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고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행하는 것이 낫습니다. 과학은 이정표입니다. 방향을 가리킬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과학책을 읽는 것과 수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을 참고하되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도움이 되면 활용하되 의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과학도 하나의 방편일 뿐입니다. 궁극적 진리는 직접 깨달아야 합니다. 무화를 더 깊이 이해하려면 유식 사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유식은 마음의 작용을 가장 정밀하게 분석한 불교 철학입니다. 유식에서는 마음을 팔식으로 나눕니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전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눈 귀 코 혀 몸의 감각을 아는 식입니다. 그리고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생각하고 판단하는 식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의식입니다. 하지만 그 아래 더 깊은 층이 있습니다. 말라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아를 만드는 식입니다. 끊임없이 나라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은 이 말라식의 작용일 수 있습니다. 더 깊은 곳에 아래 야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업의 씨앗을 저장하는 식입니다. 과거의 모든 행위가 종자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 종자들이 조건을 만나면 현행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입니다. 말라식은 아래 야식을 자아로 착각합니다. 마치 파도가 바다를 자기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파도는 바다의 일부일 뿐인데 자신을 독립된 존재로 여깁니다. 말라식도 그렇습니다. 아래 야식의 흐름 중 일부인데 자신을 독립된 나로 여깁니다. 이것을 아집이라고 합니다. 나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 집착이 번뇌의 뿌리일 수 있습니다. 이 집착이 고통의 원천일 수 있습니다. 해신 밀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삼성의 이치를 말씀하셨습니다. 변계 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입니다. 변계 소집성은 분별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나와 세계를 실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망상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의타기성은 인연으로 생긴 것입니다. 모든 현상은 조건에 의존합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서로 의지하여 일시적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원성실성은 진여의 본성입니다. 분별을 벗어난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변개 소집성의 허구를 꿰뚫어 보면 원성실성이 드러납니다. 의타기성의 공함을 알면 원성실성이 나타납니다. 나라는 것은 변개 소집성일 수 있습니다. 분별로 만들어낸 허구일 수 있습니다. 오온의 흐름은 의타기성입니다. 인연으로 생겨나는 현상입니다. 무화의 진실은 원성실성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법성입니다. 유식에서는 전식 듣지를 말합니다. 식을 전환하여 지혜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전후식을 성소작지로 전환합니다. 의식을 묘관 찰지로 전환합니다. 말라식을 평등 성지로 전환합니다. 아래 야식을 대원 경지로 전환합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과정입니다. 시계 작용이 지혜로 바뀌는 것입니다. 나라는 착각이 무아의 지혜로 바뀌는 것입니다. 중간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용수 보살님께서 말씀하신 8불입니다. 불생불멸 북어불의 불일부리 불쌍불단입니다. 모든 것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습니다.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습니다. 갖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끊어지지도 않고 계속되지도 않습니다. 나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죽지도 않습니다. 나는 잊지도 않고 없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공의 진실입니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분별심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법의 모습입니다. 화음에서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사사무애 법계를 말합니다. 사과 사과 서로 걸림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서로 융통한다는 뜻입니다. 하나가 전체를 포함하고 전체가 하나를 포함합니다. 한 티끌 속에 모든 우주가 들어 있습니다. 한순간 속에 모든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중중무진의 법계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나는 모든 것 속에 있습니다. 동시에 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와 세계가 하나로 융통합니다.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원흉무예라고 합니다. 완전히 융통하여 걸림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라는 경계가 무너질 때 이 경지가 열립니다. 집착이 사라질 때 이 자유가 찾아옵니다. 법화경에서는 또 다른 가르침을 줍니다. 일체 중생실 유불성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불성이 나는 아닙니다. 불성은 나를 초월합니다. 나라는 분별이 사라질 때 불성이 드러납니다. 나라는 장애가 없어질 때 부처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버리는 것입니다. 나라는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주체라는 착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버릴 것을 다 버리면 본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금강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응무소주의 생기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뜻입니다. 나에게 머물지 말고 법에 머물라는 뜻입니다. 주체에 집착하지 말고 흐름에 따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아행입니다. 그것이 보살행입니다. 육조 해능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무일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뜻입니다. 나도 없고 법도 없습니다. 집착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무심의 경지입니다. 이것이 견성의 체험입니다. 하지만 무심히 무정은 아닙니다. 나가 없다고 자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가 없기에 진정한 자비가 가능합니다. 내 것과 남의 것이 구분되지 않기에 모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체가 없기에 집착 없는 행위가 가능합니다. 이것이 대승의 가르침입니다. 무화를 깨달아 중생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공을 알아 방편을 행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자비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어떻게 무화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 삶 속에서 적용해 보는 수행입니다. 먼저 작은 것부터 시작해 봅시다. 한 번의 모든 것을 바꾸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호흡을 관찰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조용히 앉아 호흡을 느껴봅시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껴봅시다. 코끝에서 시원한 공기가 들어옵니다. 가슴이 부풀어 오릅니다. 배가 불러옵니다. 잠시 멈춥니다. 그리고 따뜻한 공기가 나갑니다. 그런데 누가 숨을 쉴까요? 내가 숨을 쉬는 것일까요? 아니면 숨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일까요? 잠시 숨을 멈추어 봅시다. 얼마나 오래 멈출 수 있을까요? 곧 숨을 쉬어야 한다는 충동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숨은 저절로 쉬어집니다. 자세히 관찰하면 알게 됩니다. 숨은 저절로 일어납니다. 내가 조절하려 하지 않으면 알아서 들곤 합니다. 심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뜀니다. 소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납니다. 이렇게 관찰하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실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임을 말입니다. 몸은 자기 알아서 움직입니다. 내가 일일이 조절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이 무화를 경험하는 첫걸음입니다. 매일 아침 5분만이라도 이렇게 앉아 봅시다. 호흡을 관찰해 봅시다. 내가 숨을 쉬는가 숨이 쉬어지는가 물어봅시다. 이 간단한 관찰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봅시다.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지 봅시다. 판단하지 말고 그냥 지켜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