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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6일 금요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며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사제들이,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찾고자 애쓰시는 예수님의 성심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 제 짐을 가볍게 해 주세요.
농촌에서 소를 키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아주 재산형성의 지름길이었습니다. 소를 키우기 위해 쏟는 정성은 참으로 대단해서 외양간을 항상 깨끗하게 청소하고 분뇨는 치워주고 건초를 넣어주어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여물(마른볏짚이나 건초를 썰은 것)을 푹 삶아서 데워주고, 아주 고운 볏짚을 잘 골라 튼튼한 노끈으로 방석처럼 만들어 등과 배를 덮어주는 옷을 입혀줍니다. 개는 코가 따뜻해야 하고, 돼지는 주둥이가 따뜻해야 하듯이 소는 등과 배가 따뜻해야 잠을 잘 잔다고 합니다.
요즘 애완견에 예쁜 옷을 입혀준 것을 보면 옛날 소에게 옷을 입히던 기억이 나서 슬며시 웃기도 하는데 소가 코를 뚫어 코뚜레를 만들면서 이제는 소를 길이 들도록 훈련을 시키는데 그 때 멍에를 얹어주지만 소는 멍에를 메지 않으려고 고개를 흔들고 뒷발질을 하고 앙탈을 부리게 됩니다. 멍에를 숙명처럼 받아들일 수 없지만 멍에를 메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끙게’라는 바퀴 없는 나무 등걸에 돌이나 무거운 것을 달아매고 그것을 마당이나 길로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어려서 끙게를 탈 수 있는 것도 선택되는데 이 때 소가 달리거나 요동을 치면 아주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멍에는 소의 뒷목에 걸쳐져 있어서 모든 끄는 것의 무게와 힘을 뒷목에 걸리게 하여 무거운 것을 끌고 다닐 수 있게 하는 장치입니다. 소가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소의 앞발과 등에 멍에를 같이 묶어서 벗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소가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앙탈을 부리면 코뚜레로 사정을 두지 않고 코의 민감한 신경을 건들여서 소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순종하게끔 통제를 하게 됩니다.
소가 마땅히 없는 집에서는 사람들이 멍에를 메고 밭을 갈고 소와 같은 멍에를 멜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메는 멍에는 아주 작고 어깨에 걸쳐서 메게 만들었는데 이스라엘에는 소가 흔치 않아 사람들이 멍에를 많이 져야 했습니다. 예수님께 목수로서 멍에를 많이 제작하시고 깎아 주시면서 멍에에 대해 가르쳐 주신듯합니다. 멍에와 같은 것이 바로 지게입니다. 짐을 지고 나르는 데 옛날에는 지게가 제격이고 짐을 얹어 등에 착 달라붙어 몸에 잘 맞아야 등짐을 질 수 있듯이 지게와 멍에는 일단 몸에 잘 맞아야 짐을 질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대신해서 멍에를 메고 지게를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멍에와 지게 지는 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시는데 이는 다른 말로 ‘수용(受容)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주어진 그대로 잘 받아들이고 잘 식별해서 뱉을 것과 마실 것과 품을 것과 떼버릴 것을 구별해야 하는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내 몸에 맞도록 고쳐야 하기에 큰 것은 줄이고, 작은 것은 늘이고, 맵시가 나지 않는 것은 맵시를 만들고, 균형을 맞추고 형태를 조절해야 하는 것으로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젊은 시절 나는 엄청난 멍에를 지고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억지로 너무 힘겨운 내 십자가를 지고 산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제 나이를 먹고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곰곰이 생각하니 나는 참으로 미련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주님은 오늘 분명히 멍에와 지게를 가볍게 지는 방법을 설명하시고 당신에게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건 십자가가 아니라 짐을 가볍게 지는 방법으로 온유함과 겸손함은 모든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질 수 있는 지혜로 내게 주어진 짐을 억지로 지고 무거움을 느끼고 가면 정말 힘이 들지만 기쁘게 그리고 즐겁고 행복하게 짐을 지고 간다면 한결 가벼워진다는 진리인 것입니다.
세상 살기가 어렵다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을 생각하고 그 어려운 일들을 주님께 봉헌한다면 그 어려움은 다 없어질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 때,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이 모든 어려움과 가난을 봉헌한다면 더욱 가벼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있으니 짐이 점점 무거워지고 더욱 힘들어서 지치고 멍에가 무겁다고 느끼고 조금도 쉴 틈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나는 그 일을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고귀한 성덕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짐은 아주 가벼워 질 것입니다. 나는 젊어서 그 모든 일을 끌어안으려고만 하였습니다. 흔히 축구에서 처음부터 공을 잡고 골인까지 혼자 하려는 바보와 같이 미련한 방법으로 세상을 살았습니다. 주님께 의탁한다는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봉헌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무감으로 억지로 하기 싫은데 모두 나의 짐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억지로 일을 하려니까 모든 것이 잘 풀리지 않으니 그래서 언제나 힘들고 원망으로 가득차서 세상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멍에를 대신 짊어지시고, 내 대신 모든 어려움을 모두 하시고, 나는 그냥 놀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주님께 멍에를 짊어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렵지 않게 멍에를 지고 세상을 아주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나를 완전히 비우는 훈련부터 먼저 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영신적 아버지이신 사제들에게 주님께서는 멍에를 지는 방법을 오늘 특별히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우리들도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축일6월 16일 성녀 루갈다 (Lutgardis)
신분 : 수녀, 신비가
활동 지역 : 통에런(Tongeren)
활동 연도 : 1182-1246년
같은 이름 : 누갈다, 누갈따, 루갈따, 루트가르다, 루트가르디스, 룻가르다, 룻가르디스
성녀 루트가르디스(또는 루갈다)는 1182년 오늘날의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에 속한 림뷔르흐(Limburg) 지방의 통에런(Tongeren)에서 부유한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 귀족 청년과 혼인하기로 하였으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지참금을 마련할 수 없게 되자 파혼을 당했다. 그래서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12살의 나이에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생트롱(Saint Trond) 부근 성녀 카타리나(Catharina)의 검은 베네딕토 수도회(Black Benedictine convent of Saint Catherine)로 보내졌다. 수도 생활에 특별한 성소가 있지는 않았지만, 지참금이 없다는 사실은 적당한 남편을 찾을 희망을 버리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옷과 천진난만한 즐거움을 좋아하던 아리따운 소녀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체험한 뒤 자신의 삶의 행로를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는 그녀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당신만을 사랑할 수 있는지 물으셨다. 그녀는 즉시 예수님을 자신의 신랑으로 맞이했고, 20살이 되는 해에 베네딕토회의 수녀가 되었다. 다른 많은 수녀들은 성녀 루트가르디스에게 생긴 갑작스러운 열정이 얼마 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성녀 루트가르디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현존은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에 기도를 시작하면 육신의 눈으로 보듯이 예수님을 보았다. 어떤 일이 주어지면 “주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일을 끝내자마자 다시 돌아올게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 후 12년 동안 다수의 환시를 경험했고, 그 환시를 통해 주님과 성모님 그리고 다수의 성인을 뵙게 되었다.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할 때엔 이마와 머리에서 피가 맺혀 흐르기도 했다.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의 수녀들이 그녀를 원장으로 추대하고 싶었지만,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1208년 그 수도원을 떠나 더 엄격한 규칙이 있는 곳을 찾아 브뤼셀(Brussel) 근처 에비에르(Aywieres)에 있는 시토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수도원을 선호했을 법도 한데 그녀는 자신의 고해 사제와 당시 성 카타리나 수도원 근처에 살고 있던 성녀 크리스티나(Christina, 7월 24일)의 권고를 받아들여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다. 이는 훗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수도원에서 그녀가 프랑스어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수녀원장직을 피하는 좋은 핑계가 되었다.
그곳에서 오직 빵과 물로만 지내며 극기 생활을 하던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당시 기승을 부리던 알비파 이단을 위한 보속으로 7년 동안 3번이나 대재를 지켰다. 또 그녀는 에비에르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30년을 살며 영적 슬기로움으로 명성을 떨쳤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치유와 예언의 은사를 주셨고, 성경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넣어주셨다. 그래서 불완전한 프랑스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영적 지도에 있어서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특히 기도에 열중했는데, 그녀의 기도는 신비롭게 이루어지는 일이 많았다. 그중의 한 예가 동정심이 없던 한 수도원 원장이 죽자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그가 천국에 들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그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는데, 어느 날 수도원장이 나타나 그녀의 기도 덕분으로 연옥의 고통을 크게 덜게 되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진 일이 있었다. 또한 예수님은 당신의 심장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자주 성녀 루트가르디스에게 발현하셨는데,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묵상은 그녀의 수도 생활의 핵심 주제였다.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1235년부터는 시력을 완전히 잃어 생애의 마지막 11년을 앞을 보지 못한 채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가시적인 세계에서 자신을 떼어놓고자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기쁜 선물로 생각하며 모든 고통을 참아냈다.
예수님께서는 성녀 루트가르디스에게 나타나셔서 언제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그렇게 받은 선물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 후 죄인의 회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을 영원히 마주 뵐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만 의지하였다. 성녀 루트가르디스는 자신이 예언한 대로 1246년 6월 16일 삼위일체 대축일 저녁기도가 끝나고 끝기도가 시작되려는 시간에 64세로 선종하였다.
성녀 루트가르디스의 일생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가치관에 큰 징표를 남겨 주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라는 말씀대로 살았다. 그녀는 12-13세기의 뛰어난 신비가 중 한 명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루갈다 (Lutgardis)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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