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외 1편) 진 란
꽃들의 구역에서 가장 생생한 아픔은 너와 내 뿌리가 맞닿은 것을 볼 수 없다는 것 서로 얽히고설켜도 둘의 뿌리를 섞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너와 내가 꽃으로 피어 마주 보는 시선이 뜻하지 않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다 너의 향기도 너의 속삭임도 바람에 흩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더 많이 쳐다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침묵하고 더 많이 주고 싶어지는 마음 세상에 함께 하는 시간에 우리는 살고 살아 있고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뿌리와 뿌리를 맞대고 연리지가 되기까지 자유를 향하여 달려가는 네 도주의 흔적을 따라 나는 또 피어나고 피어나고 피어나고 톡 톡 톡 떨어지는 낙화는 문득 네 꿈속에서 또 다른 뿌리를 내리고 그런 오늘이 나는 마음에 드네
우기의 빗줄기는 무섭게 지붕이 무너지듯 쏟아붓네 내일을 기다리는 동안 의자를 주문하고 굵은 빨대로 수박 샤베트를 빨다가 당신은 입안이 데었다고 펄쩍 뛰고 엉겁결에 빨대를 뽑아내면서 나는 맵다고 했네 에디트 피아프의 빠담빠담과 섞여서 어두운 조명을 자주 들여다 보았는데 한참 후에 당신은 원래 저런 조명이 있었나 묻고 와인은 여자의 목젖을 할짝할짝 물들이고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말할 때 당신의 등 뒤로 댓잎들이 빗방울을 껴안고 탱고를 추는 푸르스름한 옷소매를 보았는데 쏟아지는 것들이 자주 흔들리고 어지러웠고 어쩐지 와인이 짜다고 말하는 고양이 같은, 그 웃음 속으로 수묵화처럼 주름이 번졌지 숨은 고양이는 어디에도 있고 고양이가 처음도 아니었는데 그런 오늘이 나는 마음에 드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제목 ―계간 《미네르바》 2024년 봄호 -------------------- 진란 / 1959년 전북 전주 출생. 2001년 대구 《시하늘》 계간지에 신작시 발표, 2002년 《주변인과 詩》가을호로 작품 활동 시작, 편집 동인. 계간 《문학과 사람》 편집위원. 계간 《P.S(시와 징후)》 부주간. 시집 『혼자 노는 숲』 『슬픈 거짓말을 만난 적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