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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통해 백범(白凡) 김구(金九) 지사(志士)는 가장 영향력이 큰 민족지도자였다. 백범이 우리 민족의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사수하면서 대한민국의 법통성을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익전선의 한가운데 우뚝 섰으면서도 민족자주와 민족통일을 위해서는 좌우익의 협상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백범이 오늘날에 와서 단순히 흘러간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더욱 새롭게 해석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백범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그 험난한 역정에도 불구하고 떠받친 대들보 역할을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민족해방과 통일에 대한 간절하고 뜨거운 심장 때문일까? 물론 그런 점들이 두루 평가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민족분단이 60여년 계속된 뒤 평화통일의 전망이 보이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본다면, 일제 침략통치시대와 해방공간을 통해서 백범이 추진하고자 했던 민족통일국가 수립 활동이나 남북협상에 더 강력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백범은 통일을 가로막는 외세와 그들과 유착하여 민족의 분단을 서슴지 않고 오로지 정권장악의 길로 치달은 우익세력의 분단주의적 태도와 자세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미국·소련 양국의 군대 철수와 자주적 민족통일을 위해 온갖 비방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남북협상길에 올랐다. 백범만이 감행할 수 있었던 뜨거운 민족애(民族愛)의 발로였다. 남북협상차 북행길에 오르면서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라고 한 백범은 분단체제세력의 입장에서는 ‘죄인’이고 ‘비국민’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1949년 6월 26일 현역 군사장교가 쏜 총탄에 맞아 백범은 서거하고 말았다.
백범 사후 20년, 그리고 4·19민중항쟁 이후 9년만에 이승만(李承晩)의 동상을 끌어내린 서울 남산 바로 그 자리에 우람하게 들어선 백범의 동상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잘못된 역사의 유물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서야 할 역사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동학에 입도, ‘애기 접주’란 별칭 얻어
백범(白凡) 김구(金九) 지사는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에서 김순영(金淳永)과 곽낙원(郭樂園)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헌하고 효종(孝宗) 즉위 이후 영의정에 올라 국권을 전횡하다가 김여경(金餘慶)·송준길(宋浚吉) 등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북벌(北伐) 계획을 청나라에 알려 전쟁 위기를 조성한 혐의로 1651년 광양에 유배되어 사형당한 김자점(金自點)의 11대 방계 후손이었다. 조상들이 멸문의 화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패(牌)를 찬 상놈’ 노릇을 한 데다, 아버지가 가난한 농부여서 백범의 글공부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백범은 17세 때인 1892년 해주에서 경과(慶科) 초시(初試)에 응시했다. 갑오경장(甲午更張) 이전 조선왕조의 마지막 과거시험이었으나, 당시의 과거시험은 부정부패 투성이였다. 백범이 낙방한 것은 물론이었다. 글공부를 잘해 양반이 되려 했던 백범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백범은 과거시험 공부를 단념하고《손자병법》·《육도》등 병서를 읽으며 세월을 보냈다.
이 무렵 황해도에 동학이 전래되어 오응선(吳應善)이라는 접주(接主)가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백범은 18세 때인 1893년 오응선의 강론을 듣고 동학의 ‘평등주의’에 끌려 입도햇다. 해주의 과거시험에서 나라가 속속들이 썩었음을 체험한 백범에게 동학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동학에 입문한 뒤 백범은『동경대전(東經大全)』·『팔편가사(八編歌詞)』·『궁을가(弓乙歌)』등 동학관련 경전공부에 전념하며 포교에 힘을 쏟았다. 이때 이름을 창암에서 창수(昌洙)로 바꾸었다. 백범이 얼마나 동학포교에 열성적이었던지 입도 후 불과 몇 개월만에 백범이 끌어들인 동학교도가 수백 명에 달했다. 백범의 명성은 황해도 일대뿐 아니라 평안도 남쪽까지 퍼져, 1893년 입문한 바로 그 해에 백범의 연비(連臂)는 수천 명에 달했다. 나이 어린 사람 아래 많은 연비가 딸렸다 해서 백범에게는 ‘애기 접주’라는 별칭까지 생겼다.
1894년 가을 동학의 제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이 있던 보은(報恩)에 내려가 연비의 명단을 보고한 뒤 백범은 접주 첩지를 받았다. 이때 황해도 동학의 대표 15명이 함께 접주가 되어 동학의 간부로 공식인정을 받았다. 백범 일행이 보은에 머무는 동안 전라도에서 전봉준(全琫準)이 농민들을 모아 봉기했다는 소식이 들려와 해월도 동학교도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1894년 백범은 15인 접주를 비롯해 다른 접주들과 회의하여 거사를 결정했다. 백범은 팔봉산 아래 산다고 해서 팔봉(八峰)이란 이름을 썼고 푸른 비단에 ‘팔봉도소(八峰都所)’라고 쓴 기(旗)를 만들었다. ‘척왜척양(斥倭斥洋)’ 넉 자가 높이 걸렸다. 백범은 산골 출신인데다 연비 중에는 산포수 출신이 많아 총기(銃器)를 가진 사람이 7백여명이었다. 백범은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평소에 병법을 공부하고 휘하에 산포수가 많아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전국에 걸친 동학농민항쟁이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섬멸됨으로써 백범도 장연군(長淵郡) 몽금포(夢金浦) 근처에서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백범은 1895년 2월 신천군(信川郡) 두라면 천봉산(千峰山) 남쪽 기슭 청계동(淸溪洞)의 안태훈(安泰勳) 진사에게 몸을 의탁했다. 안태훈의 맏아들이 바로 하얼빈 의거[哈爾濱義擧]의 주역 안중근(安重根)이었다. 안중근은 그때 열일곱살로 화승총(火繩銃)을 메고 사냥을 즐겼는데 사격 솜씨가 빼어났다. 안태훈의 사랑방에서 백범은 고능선(髙能善)이란 유학자를 만났다. 고능선은 김평묵(金平默)과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이며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과 동문으로 해서지방에서는 행검(行檢)으로 손꼽히던 선비였다.
백범은 고능성으로부터『화서아언(華西雅言)』과『주자백선(朱子百選)』등의 강의를 듣고 성리학의 요체를 배웠다. 뿐만 아니라 당시 나라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우니, 청나라로 가서 정치계와 경제계의 인물들과 교의를 맺고 힘을 길렀다가, 훗날 청나라의 군사력을 빌려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1895년 남만주로 갔다.
◆ 향리에서 애국계몽운동 전개
1894년 갑오개혁으로 단발령이 선포되고, 1895년 8월에는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들에 의해 피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반일의병항쟁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남만주 삼도구(三道溝)라는 곳에서도 김이언(金利彦)이 의병을 모집하여 압록강 건너 강계성(江界城)을 공격할 때에, 백범도 김이언의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참전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합동공격에 참패하고 말았다.
패전 후 백범은 국내로 들어왔다가 1896년 갑오경장 친일정권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평북 안주(安州)에서 중국으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 황해도 안악(安岳)으로 향했다. 그해 3월 치하포(雉河浦)에서 상인으로 위장한 일본군 첩보장교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 중위를 살해하고 “국모(國母) 보수(報讐)의 목적으로 이 왜인(倭人)을 죽이노라”라고 적은 방을 붙였다. 석 달 후 백범은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고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인천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896년 10월 백범은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고종(高宗)의 특사령이 내려 가까스로 사형을 면했다.
백범은 옥중에서『태서신서(泰西新書)』·『세계지지(世界地誌)』등 서양의 근대서적들을 처음으로 접했다. 백범은 이들 신서들을 통해 세계의 정치·경제·문화·과학·기술 등에 눈을 떴으며, 세계정세가 어떻게 돼 가는가를 깨달았다. 그것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의 개안이었다.
당시 한국주재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백범에게 내린 특사령에도 불구하고 백범의 석방을 방해했다. 백범은 지인(知人)이 자신을 위해 몇 개월에 걸쳐 소장(訴狀)을 내면서 석방을 탄원했음에도 번번이 묵살되자 1898년 탈옥(脫獄)을 단행했다. 탈옥 후 백범은 삼남지방을 전전하다가 1898년 늦가을 계욜산 갑사(甲寺)를 거쳐 공주 마곡사(麻谷寺)로 들어가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고 출세간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백범은 승려 생활이 자신에게는 도저히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1899년 늦가을 환속했다. 1900년, 그의 나이 25세에 백범은 강화도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모아 교육계몽운동을 벌였고, 그 후 많은 애국지사들을 만났으며 다시 자신의 이름을 구(龜)로 개명했다. 1903년 백범은 개신교에 입문하고, 장련읍 사직동(社稷洞)에서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교원이 되어 신교육에 힘을 쏟다가 1904년 그의 나이 29세 때에 최준례(崔遵禮)와 결혼하여 처음으로 가정을 이루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한국은 일제의 반식민지(半植民地)가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산림들이 의병을 모아 봉기했다. 왕산(旺山) 허위(許蔿)를 비롯해 이강년(李康秊)·최익현(崔益鉉)·홍범도(洪範圖)·신돌석(申乭石)·민긍호(閔肯鎬) 등이 그들이다. 이때 백범은 진남포의 에버트청년회에서 총무로 있으면서 교회일을 하던 중 경성에 있던 민족운동의 요람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늑약 체결 반대 집회에 참석했다. 당시 상동교회에 모인 인물은 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조성환(曺成煥)·유동열(柳東說)·여준(呂準) 등이었다.
상동교회에 모인 애국지사들은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대한문 앞으로 나갔다. 상소운동은 가두 연설집회로 발전, 일본군 헌병들이 출동하여 군중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날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송병선(宋秉璿) 등이 자결하고, 상동교회에 모였던 백범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향리로 내려가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실력을 양성하기로 결의했다.
백범은 1906년 황해도로 가서 문화군 초리면(草里面)에 있던 서명의숙(西明義塾)의 교사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안악으로 옮겨 양산학교(楊山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백범은 또 최광옥(崔光玉)·김용제(金庸濟)·안명근(安明根) 등과 더불어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으로 취임, 황해도에 수많은 학교를 설립하며 신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 안악사건(安岳事件)으로 17년형을 언도받아
1907년 4월 서울에서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전덕기·유동열·여준 등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단체로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자 백범은 이에 가입하여 황해도 대표가 되었다. 신민회는 창립 후 국권회복을 위해 애국계몽운동과 교육사업·실력양성운동을 지도했다.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한 군사교육기관과 군사훈련기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1907년 이후 국내 민족운동에는 신민회의 지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哈爾濱] 역두에서 일제의 한국침략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브라우닝식 권총(拳銃)으로 저격·처단하였다. 이듬해 백범은 양기탁의 집에서 이동녕·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이회영 등과 만나 주로 해외의 독립군 기지 건설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지역별로 기금을 할당하여 모금하기로 하고, 백범은 황해도 지역의 모금책임을 맡았다.
백범이 모금 임무를 안고 안악으로 돌아왔을 때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이 찾아왔다. 안명근은 신민회의 계획과는 별도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항일의열투쟁을 벌이는 계획을 백범에게 토로하면서 협조를 구하였다. 백범은 안명근의 계획을 듣고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더욱 치밀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만류했으나, 안명근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실행하다가 1910년 말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 당국은 안명근 체포를 계기로 황해도 일대의 애국지사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안명근을 체포한 이유는 황해도 부호를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려 하고, 그 자금으로 간도에서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의병을 모집할 계획을 세웠으며, 황해도에서 반일봉기를 계획했다는 혐의였다.
황해도의 애국계몽운동을 탄압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제는 안명근 체포를 계기로 160여명의 요시찰인물을 구속하여 악랄한 방법으로 고문한 뒤 ‘내란미수, 모살미수, 강도 및 강도 미수죄’를 날조하여 18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이것이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유명한 안악사건이었다.
백범은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1911년 1월 일본군 헌병대에 구금된 후 야수적 고문을 받았다. 당시 일제의 고문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일일이 열서할 수 없지만, 고문치사자와 자결한 사람이 무수했다. 백범은 이 사건의 판결에서 ‘강도죄’라는 터무니없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안악사건에 이어 1911년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또 다시 일대 검거선풍이 둘어 6백여명이 체포됐고 그 중 105명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른바 105인사건(百五人事件)으로 신민회의 윤치호(尹致昊)·옥관빈(玉觀彬)·양기탁·안태국·이승훈 등이 체포되었다. 백범은 이 사건에도 연루되었다 하여 ‘보안법 위반’으로 2년형을 추가해 모두 17년형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 ‘백범(白凡)’이란 호의 의미
조선총독부는 안악사건을 계기로 신민회의 실체를 알아낸 뒤 애국지사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일제의 살인적 고문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사망하거나 불구의 몸이 되었고, 백범 또한 심한 고문에 시달렸다. 한때는 허리띠로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백범은 채찍과 몽둥이로 난타당하는 고문, 두 손이 등 뒤로 꺾여 오랏줄에 묶이고는 천장의 쇠고리에 달아 올려져 공중에 매달리는 고문, 화롯불에 벌겋게 달군 쇠막대기로 전신을 지지는 고문, 거꾸로 매달아 코로 냉수를 사정없이 붓는 고문 등 온갖 방법으로 고문당했다. 백범은 고문을 당할 때마다 사육신(死六臣)의 하나인 유응부(兪應孚)가 보습 단근질을 당할 때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 항거하던 모습을 떠올렸고, 겨울철 속옷을 입힌 채 난타당할 때 “속옷을 입어서 아프지 않으니 속옷을 벗고 맞겠다”라며 나체로 매를 맞아 온전한 살가죽이 없었다고『백범일지(白凡逸志)』에 기술했다.
서대문감옥에서 그는 이름과 호를 구(九)와 백범(白凡)으로 모두 바꾸었다. 그 이유를『백범일지』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내 이름 김구(金龜)로 고쳐 김구(金九)라 하고 당호 연하(蓮下)를 버리고 백범(白凡)이라 하여 동지들에게 알렸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것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백범은 그 후 스스로 천민·백성의 처지로 몸을 낮추고 그들과 고락을 함께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오직 한 길만 걸었다. 백범은 옥살이를 하면서 훗날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이룬 김좌진(金佐鎭)을 비롯하여 안중근의 동지 우덕순(禹德淳),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등을 만나기도 했다. 백범은 감옥생활 중 창을 닦고 뜰을 쓸 때마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된 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1912년 9월 일본의 무쓰히토왕[睦仁王]이 죽은 뒤 백범은 7년형으로 감형되고 다시 쇼켄왕대비[昭憲王大妃]가 죽어 5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14년 백범은 감옥 중에서 가장 혹독하게 죄수를 다루기로 소문난 인천감옥으로 이송되었다가, 1915년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4년여에 걸친 감옥에서 ‘쓰고 신 맛’을 다 보면서 백범은 사상적으로 더욱 단련되었다. 감옥은 약한 자는 더욱 약하게 만들지만 강한 자는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석방된 백범은 황해도 재령에 있던 동산평(東山坪) 농장의 농감(農監)이 되었으며, 소작농들의 교육활동에도 애써 모범농장을 만들었다.
◆ 임시정부 ‘문지기’ 자원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백범은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 상해로 갔다. 해방 후 귀국할 때까지 27년에 걸친 망명생활의 시작이었다. 백범이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각료가 선임된 직후였다. 이때 상해에는 백범과 친숙한 사람으로 이동녕·이광수·김홍서(金弘敍)·서병호(徐丙浩) 등이 있었다.
임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되기는 했지만 국무총리 이하 7명의 총장(각료)들이 상해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라 차장들이 임시정부를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당시 국무총리 및 총장의 면모를 보면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金奎植), 재무총장에 최재형(崔在亨), 교통총장에 신석우(申錫雨), 군무총장에 이동휘, 법무총장에 이시영 등이었다.
그해 6월 28일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에서 상해로 와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하자 임시정부의 활동은 차장을 중심으로 본궤도에 올랐다. 백범은 도산에게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원했다. 일찍이 서대문감옥에서 간절하게 바랐던 소망을 이루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도산은 차장급보다 연배가 높은 백범을 도저리 그렇게 대접할 수 없어 임시정부의 내무부 경무국장 자리에 앉혔다.
백범이 맡은 경무국장은 일본영사관 소속 경찰활동과 맞먹는 것으로 일제의 밀정과 투항자에 대한 감시, 임시정부 요인의 경호와 한국 교민 보호 등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리였다. 임시정부 수립 초기에 백범은 프랑스 조계에 있던 프랑스 경찰과 밀접한 연계를 유지하면서 임시정부의 경계·보안업무에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와 서울의 대조선공화국 한성정부(大朝鮮共和國漢城政府), 그리고 상해의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는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한성정부의 수반 이승만은 임시대통령, 노령(露領)정부의 대표 격인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선임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좌익과 우익, 무장항쟁노선과 외교독립노선이 합작한 민족해방운동의 지휘부가 출범한 것이다.
◆ ‘상거지’ 생활
그러나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 정부였다는 점에 일정한 의의가 있었다 해도 민족해방운동의 대본영으로서 명실상부한 역할은 다하지 못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임시정부는 성립 당초부터 좌익과 우익, 무장투쟁론과 외교준비론, 여기에 기호파와 서북파 간에 합작적 성격을 띠고 출발해서 내분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23년 1월부터 국내외 70여개 단체 대표 150여명이 참가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정비하는 문제로 대대적인 난상토론을 하였다. 이때 ‘창조파’와 ‘개조파’, 그리고 임정 ‘고수파’가 서로 팽팽하게 대립했다. 창조파는 당시의 임시정부를 해체하여 새로운 임시정부를 구성하려 했고, 개조파는 임시정부를 유지한 채 개조하자는 입장을 취했으며, 고수파는 만난을 극복하고 임정을 끌고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3년에 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된 백범은 그해 6월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과 신숙(申肅)을 비롯한 창조파가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자, 즉각 취소·해산명령을 발동했다. 임시정부의 내분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1925년 임시의정원에서는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을 유엔의 위임통치 아래 두라고 비밀리에 청원한 것 등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이 격분하여 해임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밖에 이승만(李承晩)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음에도 상해에서 직접 정무를 본 것은 고작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임시정부를 자신의 사적 기구인 양 취급하면서 고압적 자세로 시종했다. 임시의정원은 수차 이승만에게 경고장을 보냈으나 이승만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마침내 이승만 탄핵안을 가결하여 제2대 임시대통령으로 백암을 선출했다. 의정원은 이어서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국무령(國務領)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바꿨으나, 1년 사이에 이상룡(李相龍)과 홍진(洪震) 체제로 내각이 바뀌는 등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의정원은 1926년 임정의 혼란과 위기를 극복할 인물로 백범을 국무령에 선출했다. 백범은 임정의 수반이 되자 임정의 분열과 잦은 내각 교체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헌법을 고쳐 국무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결정했다. 의정원이 최고권력을 갖고 행정부에는 대통령이나 국무령 같은 수반이 없이 국무위원들이 회의체를 구성하여 행정을 운영하는 체제였다. 국무회의에서는 의장으로 주석(主席)을 두되 주석은 국무위원이 교대로 맡게 했다. 새 헌법에 따라 백범은 1927년부터 내무장과 재무장을 역임하며 임정의 수호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임시정부는 이 무렵부터 실제적으로나 명목상으로나 백범의 주도로 운영됐다. 당시 임정요인들의 살림살이는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주로 이동녕이나 백범 등 몇 사람이 임정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자금이 바닥날 때가 많았고, 끼니를 이을 수 없어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면서 동냥밥을 먹는 식으로 그야말로 ‘상거지’ 생활을 했다.
백범은 1928년 3월부터 집필한『백범일지』상권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나는 최초에는 정부의 문파수(문지기)를 청원하였으나, 끝내는 노동총판·내무총장·국무령·국무위원·주석으로 중임을 거의 역임하였다. 이렇게 된 것은 나의 문파수 자격이 진보된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인재난·경제난이 극도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명성이 쟁쟁하던 인가(人家)가 몰락하여 그 고대광실이 거인의 소굴이 된 것과 흡사한 형편이었다.”
◆ 한인애국단을 조직하다
1923년의 국민대표회의 실패 후 1920년대 후반기로 접어들 무렵 해외전선에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이 일어났을 때 백범은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의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7년 4월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에 상해교민단이 창설되자 단장 직책을 떠맡았다. 상해교민단의 책임을 맡으면서 백범은 동포 자제의 교육기관으로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운영하기도 했으며, 1928년 3월부터는『백범일지(白凡逸志)』상권의 집필을 시작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키자 백범은 그해 11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이란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했다. 한인애국단의 정확한 인원과 단원의 이름은 모두 알 수 없으나, 만주사변 후 상해임정과 독립운동전선의 타격에서 벗어나고자 한 백범의 대반전 작전의 일환이었다. 이에 앞서 백범은 1930년에 우익계 인사들인 이동녕·안창호·이시영·김붕준(金朋濬)·조완구(趙琬九)·조소앙(趙素昻)·윤기섭(尹琦燮) 등을 중심으로 우익계의 정당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결성했으며, 1932년 초에는 이봉창(李奉昌)이란 청년에게 일본 국왕 암살의 임무를 맡겨 도쿄로 밀파했다. 그러나 이봉창은 일본 국왕 폭살에 실패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니, 이 사건이 사쿠라다몬의거[櫻田門義擧]이다. 이어서 4월 29일 상해의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천장절(天長節)과 상해점령 승전경축회가 열리자 윤봉길(尹奉吉)에게 폭탄을 주어 현장에 잠입시켰다. 윤봉길은 일본 군·정의 고위 관료들이 선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져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폭살하고, 가와바타 시다쓰쿠[河端貞次] 상해일본거류민단장·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중국 주재 일본공사·해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에게 중상을 입히는 쾌거를 올렸으니, 이 사건이 곧 홍구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다.
사쿠라다몬의거와 홍구공원의거는 국내외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한국인들의 민족해방운동전선에도 상당한 자극이 되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는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고, 국내외 동포 사이에서는 임시정부에 대한 후원이 답지했다.
반면 일제는 백범 추적에 혈안이 되었다. 백범에게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백범은 그 후 가흥(嘉興)·남경·항주(杭州) 등지로 피신했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 후 백범을 한국독립운동계의 실질적 지도자로 인정하여 1933년에는 백범과 장개석(蔣介石) 주석 사이에 회담이 이루어졌다. 이 회담을 통해 하남성에 있던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인장교 양성반을 설립했다. 대일독립전쟁에 대비할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백범은 만주에 있던 이청천(李靑天)과 오광선(吳光鮮)·이범석(李範奭)을 불러 교관을 시켰으며, 여기에서의 활동과 교육은 훗날 광복군(光復軍) 창설의 모태가 되었다.
1932년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자 중국 관내지역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열단(義烈團)·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한국광복단동지회(韓國光復團同志會) 등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들이 1932년 11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했다. 통일동맹은 느슨한 연합체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1935년에는 더 강력한 응집력과 철저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했다.
그러나 백범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옹호세력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백범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사상이 다른 단체와는 하나의 조직체로 활동할 수 없다는 철학과 민족혁명당의 장래가 불투명한 터에 임시정부를 해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임정 주석이 되다.
1935년 1월 백범은 이동녕(李東寧)·차이석(車利錫)·조성환(曺成煥)·김붕준(金朋濬)·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여 이사장이 되었다. 한국국민당은 임시정부의 여당 격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고 중국 관내지역에서 또 다시 민족해방운동을 위한 통일전선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백범의 한국국민당과 조소앙(趙素昻)의 한국독립당, 이청천의 조선혁명당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고 임시정부의 체제 재정비에 나섰다. 한편 민족혁명당을 이끈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은 민족주의 좌파세력을 결집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했다.
이 시기에 임시정부는 강소성 진강(鎭江)으로 갔다가 다시 장사(長沙)·광주(廣州)·남해(南海)·유주(柳州)·기강(朞江)을 거쳐 1939년에는 중경으로 이동했다. 1939년 5월 백범과 약산은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의 정당·사회단체 사이에 전국연합진선협회(全國聯合陣線協會)를 결성했으나 단일당 결성에는 실패하였다.
1940년 4월 백범은 민족주의 정당만이라도 통합하려고 한국국민당과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을 합쳐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당 대표인 집행위원장에 백범이 선출됐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지주적 정당이었다. 백범은 이어서 국무위원제를 폐지하고 ‘주석제’를 신설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President)이 되었다. 이제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최고 지도자는 백범이었다. 백범은 이어서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 산하 군사조직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총사령관에는 이청천, 참모장에는 이범석을 임명했으며, 총사령부 아래 네 개의 지대를 설치했다.
백범은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채택·발표했다. 건국강령은 조소앙이 일찍이 제창한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의거한 것으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내세우되 정치·교육은 자유민주주의에 의거하고 경제에 관한 한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대폭 끌어들였다. 백범은 1941년 12월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대일선전포고’를 공포했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이미 일본에 항전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자,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참가하여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백범과 외무총장 조소앙의 공동명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 성명서’를 발표하여 일제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했다.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는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외교·정치적 행위였지만, 한국도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것을 연합국에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으로, 이는 곧 전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이 채택된 후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단체 사이에 다시 통일전선운동이 제기되었다. 1942년에 들어 약산의 조선민족혁명당과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의 조선민족해방동맹, 김두봉(金枓奉)의 조선독립동맹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에 앞서 1942년 4월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약산의 조선의용대 사이에 ‘합편(合編)’이 이루어져 약산은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에 임명되었고, 제2지대장에 이범석, 제3지대장에 김학규(金學奎)가 임명됐다. 이로써 역사적 군사통일이 이루어졌다.
1942년 8월에 열린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좌파 독립운동단체에도 문호를 개방했다. 그 결과 6명의 조선민족혁명당원과 좌파 출신의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선출되어 의회의 통일전선이 탈성되었다. 의정원에서 한국독립당은 여당이 되고 조선민족혁명당 등이 야당이 된 민족적 통일의회가 구성된 것이다.
◆ 임정을 좌우익 연합체로 개편
1940년대에 들어 백범은 미국·영국·중국 등에 임시정부의 승인과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등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특히 장개석은 1943년 7월경 임시정부 요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힘 써줄 것을 약속했다. 1943년 11월 27일의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은 한국의 독립을 열강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약속한 것이다.
백범은 카이로선언을 환영하면서도 한반도의 독립이 즉각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절차를 밟아서(in due course)” 될 것이라는 ‘유보’에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세계의 주요언론들이 잇따라 미국과 영국의 주요 지도자들이 한국의 독립에 ‘국제관리방식’을 도입한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개석 행정부가 1941년 한국의 임시정부를 “지체 없이(without delay)” 정식승인하자고 미국 국무성에 요청했을 때 미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승인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 중국 내 한국인사회와 임시정부가 연합전선을 구축하지 못한 점과 해외 한국인단체가 국내 한국인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들었다.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서 자칫 독립이 멀어질지 모른다는 의혹 속에서 백범은 1943년 12월 5일 특별성명을 발표하여 임시정부의 ‘우려’를 내외에 천명했다. 다음은 미국에서 발행하는《신한민보》12월 9일자에 실린 내용이다.
˝중경 신문계나 정부 정객들은 카이로회담 결과를 절대 찬성하지만, 시중의 평민과 희석에서는 이 공포가 포용치 못한 점을 성히 토론하고 있다. 김구 씨는…… 자유중국 안에 있는 1천여명의 자유한인은 “일정한 절차를 밟아서”라는 발표에 격분했다고 했다. 김구 씨는 선언하기를 만일 연합국이 제2전쟁 끝에 한국의 무조건 자유독립을 부여하기를 실패할 때는 우리는 어떤 침략자나 또는 침략하는 단체가 그 누구임을 막론하고 우리의 역사적 전쟁을 계속할 것을 결심했다.˝
카이로선언 발표 이후 민족해방운동진영은 대립과 분열을 지양하고 정파간 연대와 타협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1944년 4월 임시의정원에서는 ‘임시헌장(헌법)’을 개정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헌장에서는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여 비상시국에 대처하도록 했고 부주석제를 신설했다. 주석에는 백범을 연임시켰고, 부주석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대표인 우사 김규식을 선출했다.
국무위원에는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자들을 안배하여 정쟁을 완화하려고 했다. 14명의 국무위원의 명단을 보면 이시영·조성환·황학수(黃學秀)·조경한(趙擎韓)·박찬익(朴贊翊) 등 한국독립당 출신 인사와 장건상·성주식·김원봉 등 3명의 조선민족혁명당 출신 인사, 그리고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유림 등이 있었다.
임정의 체제정비를 마친 백범은 임정을 국제적으로 승인받는 일에 매달렸다. 우선 중국 정부로부터 승인받는 것이 급선무였다. 또한 광복군이 한시바삐 연합군의 일원으로 본격적 항일전에 나서는 것이 중요했다. 백범은 장개석과 만나 이러한 문제로 협상을 벌였으나, 임시정부의 승인이나 군사비 지원 등의 문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광복군 국내 진공 수포로
백범은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제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그 성과를 토대로 임시정부의 승임을 얻어내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1943년 광복군과 영국군 사이에 상호 군사협정을 체결한 뒤 광복군 부대를 인도·버마전선에 투입하기도 했다. 1944년에는 중국주둔 미국 공군 사령관의 협조를 얻어 미국의 전략정보처(OSS)와 합동으로 국내 진공(進攻)작전을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1945년 1월 때마침 학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탈출한 청년들이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장준하(張俊河)와 김준엽(金俊燁)·노능서(盧能瑞)·윤경빈(尹慶彬) 등이 그들이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은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OSS을 받은 대원들은 이제 출동시키기만 기다렸다. 백범은 1945년 8월 서안(西安)으로 날아갔다. 광복군 제1진을 국내에 진입시키려고 한 것이다. 미국군 전투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한 이래 일본의 패망은 시간문제로 다가왔다. 유럽전선에서도 연합군이 승승장구하여 독일이 무조건 항복했다. 8월 6일에는 일본의 히로시마에, 이어서 9일에는 나가시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1945년 8월 10일 백범은 서안의 한국인 동포의 집에서 하롯밤을 유숙한 뒤 성(省)의 주석 사랑방에서 담소를 나누던 중 일제의 항복소식을 들었다. 그날의 심경을『백범일지』에서는 이렇게 기술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도 말았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군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무전으로 통지하여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해서 사용하기로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 망명 26년만에 귀환
해방소식을 들은 백범은 즉시 중경으로 돌아와 임시정부의 환국을 준비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북위 38도선 이남 지역이 미군정하에 있으므로 임시정부의 단체입국을 허용하지 않고 개인자격의 입국만 허용했다. 백범은 미국이 임시정부의 귀국을 반대하고 개인자격의 입국만 허용하자 큰 충격에 빠졌다.
임시정부가 귀국준비를 서두르던 9월 2일 일본은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백범은 임시정부의 과도적 노선을 천명하는 역사적 문서와 임시정부의 당면정책 14개 조항을 발표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게 되면서 당면정책과 전망은 대부분 선언으로 끝나고 말았다.
상해로 돌아온 백범에게 들려온 고국의 소식은 미국·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이라는 어두운 소식이었다. 백범은 그 후 11월 23일이 되어서야 미국군 수송기 편으로 고국행에 몸을 실었다. 당시의 사정을 장준하는『돌베개』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환국 제1진의 일행 전원이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이시영 국무위원, 김상덕 문화부장, 유동열 참모총장, 엄항섭 선전부장 등의 정부요인들과 김규식 박사의 아들이며 비서일을 보던 김진동 씨, 그리고 주석의 시종의무관인 유진동 박사, 수행원으로는 나와 이영길(李永吉)·백정갑(白正甲)·윤경빈·선우진(鮮于鎭)·민영완(閔泳琬)·안미생(安美生) 이렇게 15명이 모두 우리 일행이었다. ……그때 누군가 크지 않은 소리로 외마디를 외쳤다. “아…아, 보인다, 한국이!”……“아, 조국의 땅이 우리를 맞으러 온다. 우리를 마중하러.” 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기체 안에는 애국가가 합창되었고…감상을 내어버린지 오래고 울음을 잊어버린지 이미 옛날인 강인한 백범 선생, 그의 두꺼운 안경알에도 뽀오얀 김이 서리고, 그 밑으로 두 줄기 눈물이 주르르 번져 내린다. ‘조국을 찾고 눈물을 찾으셨구나’ …하나의 거대한 돌부처럼, 우는 돌부처럼, 그런 모습으로 주먹을 쥐어 무릎 위에 얹은 채 새로운 앞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 “내 혼이 왔는지, 육신이 왔는지”
고국을 등진 채 망명길에 오른 지 실로 26년만의 귀환이었다. 백범 일행은 김포벌판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들 임정요인 제1진을 맞은 것은 그립고 반가운 동포의 모습이나 태극기의 물결은커녕 미국군 병사 몇 명과 장갑차뿐이었다. 11월 늦가을의 바람은 쌀쌀했고 하늘은 잿빛이었다. 조국의 동포들을 그들 일행의 환국을 까마득히 몰랐다.
백범 일행은 공항에 도착한 뒤 미군용 장갑차에 분승하여 숙소로 향했다. 이들의 환국사실은 미군정 당국이 통제했다. 이들의 환국사실은 미군정 당국이 통제했다. 이승만이 백범에 앞서 2개월 전 환국할 때 맥아더 사령관이 이승만에게 전용 비행기를 주선하고 융숭하게 대접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백범일행이 서대문 경교장(京橋莊)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백범일행이 도착한 뒤 미군정청에서는 하지중장 명의로 짤막한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오늘 오후 김구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이다.˝
‘개인자격’을 유난히 강조한 성명이었다.
백범일행의 환국소식이 전해지자 환영벽보가 나붙고 환영인파가 경교장으로 몰려들었다. 경교장에서 귀국 첫날을 보낸 백범은 다음 날부터 찾아오는 인사들을 만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들 중에는 송진우(宋鎭禹)·정인보(鄭寅普)·김병로(金炳魯)·안재홍(安在鴻)·권동진(權東鎭)·김창숙(金昌淑) 등이 있었다. 이어서 백범은 귀국 후 첫 기자회견을 가졌다. 환국 첫 밤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 백범은 “내 혼이 왔는지 육체가 왔는지 분간할 수 없는 심경”이라고 말하고, ‘개인자격 환국’에 대해서는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관계로 대외적으로는 개인자격이 된 것이나, 우리나라 사람 입장으로 보면 임시정부가 환국한 것”이라고 밝혔다.
◆ ‘비상정치회의’ 소집
해방의 감격으로 온 국민이 부푼 12월 28일, 미국·영국·소련 3국 외상들이 모스크바에서 3상회의를 갖고 한국문제에 4개항의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① 일제 청산과 임시 조선민주주의정부 수립, ②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돕기 위한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설치와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미·소 공위와의 협의, ③ 미·소 공위는 조선 임시정부와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 최고 5년간의 신탁통치 협약 작성, ④ 2주 내 미·소 양군 사령부 대표의 회의소집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12월 27일자《동아일보》는 1면 머리기사에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고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①항과 ②항을 고의적으로 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백범은 미·소 공위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5년간 신탁통치를 결의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에 충격과 실망에 빠졌다. 신탁통치는 실상 미국의 일관된 한반도정책이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1943년 10월에 이미 스탈린에게 한국이 자치능력을 갖출 때까지 연합국의 보호하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는 미국·영국·소련 3국 대표가 한국을 신탁통치할 것을 제의하면서 그 기간을 20년~30년으로 잡은 바 있었다. 그 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이 제안한 내용을 소련이 4개항으로 수정하여 발표한 것이《동아일보》지면에 보도된 것이다.
일찍이 1943년 11월 27일 미국·영국·중국 등 연합국의 카이로회담 직후 미국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문제가 나왔을 때 백범은 이에 강력한 항의의사를 미국에 표했다. 또한 해방 후 한국이 즉각 독립되지 않고 연합국의 신탁통치하에 들어가면 ‘독립운동’을 다시 전개하겠다고 임시정부에서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백범에게 해방 후의 반탁운동은 독립운동의 연장이었다.
백범은 ‘제2의 독립운동’을 하는 자세로 반탁운동에 나섰다. 백범은 반탁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45년 12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했다. 12월 31일 이 위원회가 주도한 시위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한국의 정부로 세계에 선포하는 동시에, 세계 각국은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반탁투쟁은 명백히 임시정부 추대운동의 하나로 전개되었다.
같은 날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申翼熙)는 ‘국자(國字)’ 제1호를 발표해서 경찰기구를 임시정부 지휘하에 둔다고 했다. 신탁통치문제를 계기로 임정이 미군정 대신 정부역할을 하겠다는 임정의 ‘주권회복선언’이었다.
백범의 정치공세는 1946년 1월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1월 4일 백범은 과도정권 수립을 위해 비상정치회의 개최를 주장했고, 이승만이 비상정치회의에 합류하면서 비상정치회의는 비상국민회의(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계승)로 개칭했다. 2월에 열린 비상국민회의는 과도정부의 내각에 해당하는 최고정무회의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고 김구·이승만에게 인선을 일임했다.
백범과 이승만은 최고정무위원을 선출했다. 그러나 백범의 뜻과는 달리 최고정무위원은 미국군사령부에 의해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이하 민주의원)’이 되었다. 민주의원은 하지 사령관의 자문기관으로 전락했다. 의장은 이승만, 부의장은 김규식, 그리고 자문기관에 어울리지 않게 총리를 신설하여 백범을 그 자리에 앉혔다. 미군정은 앞으로 개최될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하여 남한 정치세력을 대표할 것을 염두에 두고 민주의원을 포석한 것이다.
우익에서 이렇게 나오자 좌익에서는 좌익대로 거대조직을 기획했다. 민주의원 발족 바로 다음 날인 2월 15일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 결성대회를 가졌다. 민전에는 공산당·인민당·독립동맹이 참여했으며, 전평·전농·청총·부총과 문화단체 등 대중단체가 여기에 가담했다. 중경 임정에서 탈퇴한 김성숙·김원봉·장건상·성주식 등과 이극로·오지영 등도 가담했다. 공동의장으로는 여운형·박헌영·허헌·김원봉·백남운이 선임되었으며, 이들 또한 임시정부 역할을 떠맡겠다고 선언했다.
◆ 이승만과 김규식 사이에서
좌우익 정치세력간에 분열의 골이 깊어지는 가운데 1946년 3월 20일 조선 임시정부 수립의 역할을 맡은 미·소 공동위원회가 덕수궁에서 열렸다. 미·소 공위가 열리면서 미군정은 백범과 이승만과는 거리를 두면서 우사를 우익의 대표로 내세웠다. 미·소 공위는 개막과 동시에 미국·소련의 입장차이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소련은 반탁투쟁을 한 정당·사회단체를 임시정부 구성의 협의체로 인정하지 않았고, 미국은 민주의원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미·소 공위는 4월 18일 가까스로 미·소간 공동성명 5호를 발표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여 협력한다면 과거의 반탁행위를 불문에 부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협의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은 먼저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신탁통치에 반대하자고 민주의원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백범과 조소앙(趙素昻),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한사코 반대했다.
미·소 공위는 소련과 미국 대표단 사이에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1946년 5월 결렬되었다. 남한의 정국도 세 갈래로 나뉘었다. 이승만은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주장하고, 중도파는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으며, 공산당은 미군정의 강경노선에 대항하여 좌익노선을 강화했다. 백범은 1946년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을 한독당으로 통합해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해 하반기까지 백범은 반탁노선을 견지하면서 이승만과 우사의 중간에서 다소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1946년 10월 숱한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우사 김규식과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자 이승만과 한민당·공산당은 각각의 이해타산 때문에 합작7원칙을 반대했다. 그러나 백범은 개인 자격으로 담화를 발표하여 좌우합작을 지지하고 이에 협조한다고 천명했다. 백범은 좌우합작만이 남·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길이었기에 지지했지만, 좌우합작의 7원칙 중 신탁통치문제 때문에 적극성이 결여된 한계를 지녔다.
◆ 단독정부 수립 한사코 반대
이승만은 ‘정읍발언’ 후 남한만의 단정(單政)수립에 적극 나섰고, 1946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미국에 건너가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좌우합작운동이 이승만과 한민당 및 공산당에 의해 좌초하자, 미군정은 군정의 자문기관이던 민주의원과는 별도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하 입법의원)을 창설했다. 미군정은 의장으로 우사를 내세웠고, 백범은 입법의원에 나서지 않았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의 참여 정당과 단체를 놓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 의견차이가 다시 한번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해 7월 19일에는 좌우합작을 견인하던 몽양이 암살되었다. 미·소 공위에 의한 임시정부의 수립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반탁의 선봉에 서면서 미·소 공위를 처음부터 탐탁지 않게 여기던 백범은 미·소 공위 결렬 후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되는 것을 처음에는 환영했다.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총회는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11월 14일 열린 유엔총회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안을 결의했고, 남북총선거를 감시할 유엔 한국임시위원회를 구성했다.
백범은 유엔의 활동을 지지하면서 이승만·한민당과의 제휴와 단합을 모색했다. 백범이 1947년 말까지 단독정부 수립문제에 모호한 입장을 보인 것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반탁논리와 우익 대단결의 측면, 다시 말해 이승만과의 관계유지라는 측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범은 1945년의 환국 때부터 1947년 말까지 친일파에 대해서도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예컨대 환국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백범은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청산하는 문제에 ‘선통일 후제거’ 입장을 보였다. 1946년 2월 하순에는 백범이 친일파 대사설(大赦說)을 내놓았다는 의견이 나돌아 이를 해명하는가 하면, 1946년 11월 환국 1주년을 맞아 감회를 술회할 때도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백범이 친일파에 본격적으로 비판을 가한 것은 1948년 이승만의 한민당 세력과 결별한 후였다. 1948년 3월 백범은 미군정 기간중 최대의 실책이 “과거 왜적에게 가장 충량하던 주구배·부호배 등 특수계급의 등용”이라고 지적하고, 친일파·민족반역자 처단을 독립정부 수립 후로 미루자는 미군정 당국이나 민족지도자들의 주장을 비판했다.
1947년 12월 하순에 백범은 유엔 한국위원단은 환영하면서도 단독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는 곧 우익진영이 백범과 이승만 계열 두 갈래로 나뉘었음을 의미한다. 1948년 3월 1일의 기념식전에서 백범은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우리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민생문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므로” 이승만과 행보를 같이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앞서 1948년 1월 26일에 발표한 담화와 28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백범은 통일자주정부의 수립을 촉구하면서, 미·소 양군의 철수와 유엔에 의한 한국치안 책임, 남북한 지도자회의의 소집을 주장하여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엇다. 남북한 정치지도자 회의는 이미 1947년 10월 15일과 16일에 한독당 임시 중앙집행위원회의에서 의결된 것이며, 이 회의에서도 미·소 양군 철병안에 대한 찬성과 남북통일선거를 주장한 바 있었다.
◆ 너무 늦은 남북연석회의
1948년이 되면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위원단은 이승만·김구·김규식 등을 만나 남북총선 문제를 협의했다. 백범과 우사의 남북지도자회담 개최 주장은 2월에 접어들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2월 4일 우사가 이끌던 중도파 정치세력 모임인 민족자주연맹(이하 민연)에서는 2월 4일 남한의 백범·우사와 북한의 김일성·김두봉 사이에 4김 요인회담을 개최하자는 서한을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대세는 남북정부 수립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백범은 2월 10일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글을 통해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 나서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라고 호소하고,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고 자신의 굳은 의지를 천명했다.
백범과 우사가 북쪽의 회신을 기다리던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는 미국의 남한 총선안이 통과되었다. 3월 1일 한국주재 미국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5월 9일(실제는 5월 10일)에 총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3월 12일 백범과 우사, 홍명희 등은 “통일독립을 위해 여생을 바칠 것”을 맹세하면서 ‘7거두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국토를 분단하는 남한 단독선거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명백히 선언한 것이다.
백범과 우사가 서신을 보낸 뒤 3우러 25일에야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를 4월 14일 평양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북한이 남한 단독선거 일정이 이미 결정된 뒤 남북지도자회의를 개최하자고 한 데는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북한 정권 수립에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4월 13일 경교장회의에서 우사는 북행(北行)을 보류하고 추후에 떠나겠다고 밝힌 것과는 달리 백범은 북행 결정을 명백히 천명했다. 4월 15일의 기자회견에서 백범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깨끗이 조국 통일독립에 바치려는 것”일 뿐이라고 하면서 비장하게 북행을 강행하기로 결의했다. 그리하여 1948년 4월 19일 백범은 38선을 넘었고, 우사는 이틀 뒤인 4월 21일 서울을 떠났다.
백범은 연석회의보다는 남북지도자회의에 훨씬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연석회의가 끝난 후 4월 26일부터 30일 사이에 백범과 우사가 평양을 방문하여 ‘전조선 정당사회단체지도자 협의회’ 회의가 열렸다. 이어서 4월 30일 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명의로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공동성명에는 ① 외국군의 즉시 철거, ② 외국군 철거 후 내전발생 불가 확인, ③ 전조선정치회의 소집→임시정부 수립→총선 후 입법기관 수립→헌법제정과 통일정부 수립, ④ 남조선 단독선거 절대반대 등 4개항이 포함되었다.
북행을 마친 백범은 5월 5일 서울로 귀환했다. 5·10선거 닷새 전이었다. 백범은 귀환 후 발표한 성명에서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통일조국을 수립하기 위해서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미·소 양군의 철거를 요구하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밝혔다. 아울러 남한에 대한 단전의 중단과 연백(延白)평야 등의 저수지 개방 결정도 밝혔다.
그러나 1948년 5월 10일 기어코 남한 단독총선거는 치러지고 말았다. 1948년 4월 말부터 5월 초 사이에 열린 남북협상회의는 분단을 막고 통일을 이루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고, 분단이란 대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의 통일운동과 관련하여 백범의 북행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남한과 북한이 주체적으로 통일을 이루려고 노력한 점, 남한과 북한의 회담이 남한과 북한 사이의 대립과 긴장 해소에 기여한 점, 그리고 통일의 형식에서 중요한 선례를 남긴 것에 의미가 깊다. 설혹 공동성명에 담긴 내용이 실현되기는 어려웠다 하더라도, 통일국가 수립방안을 구체화했다는 것은 그 후의 통일운동 진전에 중요한 디딤돌을 놓은 것이다.
백범이 국내 우익 분단세력의 온갖 방해책동에도 불구하고 남북협상길에 나서지 않았다면, 한국은 해방공간을 통해 분단을 막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아무런 주체적이고 민족적인 역할도 않은 채 해방 후 3년간을 방치하는 부끄러운 기억을 남길 뻔했다.
◆ ‘비국민(非國民)’으로 수난당하기도
5·10선거 후 남한에 이승만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북한에서도 9월 9일 김일성 정권이 수립되었다. 8월 15일 이승만 정권 출범 후 9월 1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통과되고, 10월 23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1949년 6월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해 반민특위 습격사건으로 친일파 처단은 그로부터 거의 60여년이 흐른 2006년으로 이월되고 말았다.
이승만 정권 출범 후 백범은 죄인처럼 취급되었고, 미·소 양군의 철수 후 자주적 통일을 주장했다 하여 백범은 ‘비국민(非國民)’으로 낙인찍혔다. 백범은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분단체제의 유지세력 측에서 볼 때는 용납할 수 없는 ‘적’이었다. 그들의 눈에 백범은 비애국자이자 비국민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백범은 언젠가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백범은 1948년 11월 “소련의 정치적 제스처는 한국민중의 갈망하는 요소를 파악함으로써 대한정책에서 이니시어티브를 장악한 감이 있다”라고 주장하였거니와, 남북협상 후 미국의 세계체제적 냉전정책에서 백범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반냉전적 민족자주파였다.
이승만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축으로 한 미국의 세계정책에 재빨리 편승함으로써 분단조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에 반해 백범은 해방 직후에는 완고한 민족주의자로 중경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미국과 자주 충돌했고, 1948년 이후에는 남북협상운동으로 미국의 냉전정책에 정면으로 맞섰다.
◆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마침내 백범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깔리기 시작했다. 1949년 6월 26일 오전 11시가 조금 지나 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가 경교장에 나타났다. 전에도 여러 차례 방문한 터라, 선우진은 안두희를 2층의 거실로 안내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선우진이 내려온 지 10여분도 안 돼 경교장을 지키던 경찰들이 총성을 듣고 현관문을 거쳐 2층으로 뛰어 올라가고 안두희는 2층에서 내려오다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비서들이 2층에 올라갔을 때 백범은 이미 절명한 뒤였다. 총탄은 오른쪽 폐와 왼쪽 넓적다리, 목과 입술 등 네 군데를 관통했다. 이때 시간이 12시 45분경, 백범은 이렇게 운명했다. 향년 74세였다.
중도좌파이던 몽양은 미국의 단정노선이 확고하게 굳어갈 무렵 백주에 집 근처에서 암살되고, 우익 민족주의자 백범은 남한과 북한에 단정이 들어서고 냉전체제가 확립된 후 경교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처럼 민족지도자 두 사람의 죽음은 시대적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백범 암살의 하수인은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였지만, 그의 배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핵심세력과 친일파·분단세력·외세 등이 복잡·치밀하고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예컨대 안두희의 직속상관인 포병사령관 장은산, 헌병사령관 전봉덕, 일본 육군 오사카 조병창 병기행정부원 출신인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관동군 헌병보조원 출신인 특수 정보장교 김창룡, 친일 정치브로커 김지용 등이 백범 암살에 관여한 것으로 보이며, 미국 또한 관여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적어도 백범 암살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보인다.
백범의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국민장(國民葬)으로 치러졌다. 해방 후 국민장은 처음이었다. 장례식에는 50만명이나 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백범은 생전에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며 자주국가에 대한 염원을 토로한 적 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은 평생을 온통 조국의 제단에 바쳐 그의 소원이던 나라의 독립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독립된 나라가 두 토막으로 나뉘자, 그것을 온전히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생애를 다 바쳤다. 생명까지도 바친 것이다.
백범이 세상을 떠난 뒤 이승만의 동상이 서 있던 자리에 백범의 우람한 동상이 들어섰다. 독재와 분단주의자의 시대가 민족통일의 시대로 옮겨가는 징표였다.
첫댓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이시대에는 왜 지도자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