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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사를 반도사로 둔갑시키는 왜곡은 이제 그만해야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01550
필자는 일본의 야마토(大和)정권이 일본열도에서 창업했다는 한 칼럼의 주장을 접하고 이는 연구부족의 결과로 독자에 피해가 되고 역사를 바로 세워나가는데 장애가 되기에 오늘 붓을 들게 됐다.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배워서 그런지 모르나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일본 학계에서 조차 인정하지 않은 날조역사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일본의 역사인양 3류 소설과 같은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을 종종 본다. 왜(倭)는 일본열도에서 세운 나라가 아니다.
필자도 한·중·일의 사서를 보지 않은 때는 잘못 쓴 것도 없는 바 아니기에 이런 글을 볼 때는 신중히 검토해야 할 것을 강조해 왔다. 왜냐하면 중·일은 대륙의 지명과 지도를 반도로 이동해, 왜곡한 서적을 인용하면 잘못 쓰게 되는 경우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신중(愼重)을 기하며 반도사관의 왜곡을 밝히기 위해 국내서적뿐만 아니라 최소한 한·중·일 뿐만 아니라 여러 서적을 보며 연구하고 쓰노라 노력하고 있다.
야마토(大和)정권에 관한 내용은 <일본서기(日本書紀)> 내용이 사실인양 <일본서기>를 참고로 쓴 것 같은데 <일본서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3류 소설로 학자들은 ‘권력이동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역사를 제대로 연구한 한·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왜(倭)는 원래 ‘위’(衛)’ ‘와(倭)’ ‘왜(倭)’로 불리기도 했으나 주로 ‘와’로 발음한 왜(倭)는 670년에 사라진 나라의 명칭이다. 이 왜(倭)가 현재의 일본열도(日本列島)에 있었다는 기록은 <일본서기> 같은 왜곡된 서물(書物)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및 <당서(唐書)>에서 670년 12월에 왜(倭)가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변경하였다고 했는데 그 때에 사라진 나라이다. 당시 왜(倭)는 타이완에 있었다.
오늘은 가야(伽倻)가 세운 왜(倭;衛)의 위치가 일본열도에 없었고 대륙에 있었음과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은 왜곡된 것임을 밝혀 왜(倭)의 역사를 바로 잡고자 한다.
지나(支那;中國) 25사 왜인전(倭人傳)에서 보는 왜(倭)의 위치
우리나라 사람들은 3세기 이전에도 5세기 이전에도 649년 까지도 왜(倭)가 반도의 동쪽 지금의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알고 있으나 이는 역사왜곡의 잘못된 인식일 뿐이다.
당태종(唐太宗) 이전까지 발행된 양서(梁書), 북사(北史), 남사(南史)까지도 왜(倭)가 회계(會稽), 담이(儋耳), 남월지(南越地)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지 왜인전(倭人傳)에는 소강(小康)을 봉(封)한 곳이 회계(會稽)라고 말하고 있다. 회계(會稽)는 일본열도가 아니다. 이곳은 지나(支那;中國) 남쪽에 있는 절강성에 있다.
삼국지 왜인전(倭人傳)의 ‘夏后小康之子封會稽’ 이라 하여 소강의 후예들이 있었다고 하고 지명으로 주애(朱崖), 담이(儋耳), 단주(澶洲), 이주(夷洲)지역으로 표기하고 있다.
지나(支那;中國) 절강성 회계(會稽)에 있는 지역에 위(衛)와 유사형태는 구(衢)가 있는데 그 북쪽에는 왜(倭;衛)와 신라(新羅)사이에 있어야 할 전투지명으로 독산(獨山)이 있고, 함산이 있으며 나당(羅唐)의 교역지점인 항성(項城)이 있다.
또한 송(宋;42~479)때 쓰여진 후한서(後漢書)에는 회계, 주애, 담이, 이주, 단주(澶洲), 회계동야현(會稽東冶縣)이 있으며, 양(梁;502~557)때 쓰여진 남제서(南齊書)에는 대방(帶方) 남쪽에 있다고 했다. 이곳은 대륙으로 일본열도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학교에서 왜(倭)의 위치는 일본열도(日本列島)라 가르쳐 왔다. 그런데 지나(支那;中國)25사 동이전(東夷傳)에 등장하는 왜(倭;衛)의 위치는 동이(東夷)의 위치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또한 대방(帶方)의 위치에서도 벗어 날 수 없다. 대방(帶方)은 낙랑군(樂浪郡)의 현명칭(縣名稱)이었다가 요동군에서 분리된 명칭이다.
왜인(倭人)이 있는 왜(倭;衛)의 위치는 대방(帶方)의 동남쪽에 있는데 후한 때 공손강(公孫康)이 요동군의 일부를 대방군으로 만들었다고 했고(三國志30), 대륙에 있는 사로신라(斯盧新羅)때 대방(帶方)이 사로신라(斯盧新羅)에 항복하였다고 했다(300년).
그리고 고구려가 314년 침범했고 474년에는 백제(百濟) 땅이 되었다고 했다. 이때는 개로왕(蓋鹵王)시대로 남제(南齊)때(479-505)이다. 대방의 남쪽에 삼한(三韓)이 있고 대방(帶方)의 남쪽에 왜(倭)가 있다고 했다. 한(韓)은 하남성(河南省) 중심으로 그 북쪽에 대방(帶方)이 있었다. 이를 일본열도로 옮기려 해도 옮길 수가 없는 것이다.
연(燕)제국에서 백제말까지 요동의 시점은 산서성 요(遼)의 동쪽이다. 이곳은 49년과 654년 즉, 고구려(高句麗)초기와 말기 당(唐)과 전투지명이 하북성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 태원, 은산(銀山), 용도(甬道), 신성, 고대인성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백제와 사로신라(斯盧新羅)의 위치가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동이(東夷)의 요(遼)의 동서쪽에 있었고 남북 측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북으로 유연제노(幽然齊魯)와 오월(吳越)사이에 사로신라(斯盧新羅;西新羅)가 있었다. 이곳은 신라와 전투를 한 왜(倭)가 있는 곳이다.
분명한 것은 왜(倭)는 회계(會稽), 대현(台縣), 이주(夷洲) 단주(澶洲), 주애(朱崖), 담이(儋耳)가 있는 곳에 있었다. 담이(儋耳), 주애(朱崖)는 왜(倭)에 가까운 곳이 아니라 왜(倭)땅이었다. 회계(會稽), 주애(朱崖), 담이(儋耳)는 양자강 이남의 지명이다.
이곳은 남월(南越)과 진번(眞番)이 근접한 곳이기도 한데 양자강 이남에 있는 지역이다. ‘담이본월지(儋耳本越地)’라 하였으니 남월(南越)과 진번(眞番)은 같은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남월(南越)의 흔적은 월성령이 있고, 진번(眞番)의 흔적은 지나(支那;中國)의 귀주성(貴州省)에 있는 예파(荔波)로 되어 있다. 왜곡사 극치는 왜 역사다.
왜(倭;古日本)는 양자강 이남에 있었으며 고조선의 일부이고, 한때 진번군(眞番郡)으로 부르던 지역이었다. 서기전50~서기670년까지 왜(倭) 또는 위(衛)로 되었다가 670년~9세기까지 국호를 대륙에서 사용하였다. 즉, 일본의 국호 사용은 670년부터인 것이다.
타이완은 왜(倭) 이주(夷洲)였고 670년에 일본이었다.
송(宋)나라 때 진번(眞番), 우적도(禹跡圖)에서 진번(眞番;眞播)의 위치는 조선의 서쪽에 대한 분명한 경계를 나타낸다. 진장성기록에서 안문 즉 태행산맥(山脈) 동쪽이 조선이었고 기자(箕子)에 의하여 서화(西華)를 포함한 동쪽이 조선(朝鮮)이었다.
그리고 진번군(眞番郡)에 의하여 귀주성(貴州省) 동쪽이 조선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일본은 귀주성(貴州省)에 있는 진번(眞番)도 한반도로 가져 왔다. 못 말리는 자들이다.
그런데 왜(倭)가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된 이유는 왜(倭) 지명(地名)을 회계(會稽), 주애(朱崖), 담이(儋耳), 이주(夷洲), 단주(澶洲)가 그 영역을 나타내는 곳이 모두 진번군(眞番郡)의 동쪽에 있으니 왜(倭;衛)는 조선의 일부이고 기준(箕準)의 한 일부임으로 왜(倭;衛)가 동이전에 기록된 것이다. 왜(倭)의 역사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왜(倭;衛)는 한(韓)의 조선(朝鮮) 무녀(巫女) 히미코(卑彌呼)가 세운 야마다이 국(邪馬台國)과 구노국(狗奴國)의 발전국이다. 이들 왜인은 조선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이완(臺灣)은 왜(倭), 이주(夷洲)였고 670에 일본(日本)이었다. 누차 말해온대로 후한서(後漢書) 왜전(倭傳)에 관계된 지명으로 회계(會稽)는 절강성, 담이(儋耳)는 귀주성, 주애(朱崖)는 해남도, 단주(澶洲)는 항주입구 바다, 그리고 이주(夷洲)는 대만(臺灣;타이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왜가 타이완에 있을 때 일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도서(圖書)에는 대만은 1600년 이전은 모른다고 한 것도 있고 한(漢)나라 때부터 알고 있다고도 하였다. 이는 일본이 대륙에 있었고 670년에 일본(日本)의 국호(國號)를 시작한 때도 타이완(臺灣)에 있는 것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나라 주영(周嬰)(1426`1522)의 동번기(東蕃記)에 태원(台員)으로 나온 것이 최초라고 하며 이것이 이주민(移住民)에 의해 타이완으로 불리고 1544년 지나(支那;中國) 해엽을 지나는 포로투칼의 ‘일랴 포르모사(‘아름다운 섬’이라는 뜻)’라고 하여 유럽인들이 ‘포르모사’라고 하고 있으나 북경대학 역사자료집에 의하면 대만(臺灣;타이완)은 이주(夷洲)라 명기(明記)하고 있는데 이주(夷洲)는 후한(後漢)때 부터 왜(倭)의 이주(夷洲)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열도에서 이주(夷洲)를 다스린 것이 아니라 왜(倭)가 양자강 이남에서 대만을 다스렸다는 기록인 것이다. 따라서 왜(倭)가 일본열도에서 야마토(大和)정부를 창업했다는 것은 일본서기의 왜곡역사를 기반으로 한 허구인 것을 알아야 한다.
왜(倭)는 당(唐)과 사로신라(斯盧新羅;西新羅)에 의하여 본거지에서 축출되며 대만(臺灣;타이완)으로 이주하게 되고 이주(夷洲)에서 일본을 재건하고 본국탈환의 꿈을 키우며 진출을 시도 하였으나 사로신라(斯盧新羅) 장보고(張保皐)에 의하여 봉쇄를 받는다.
일본을 건국한 왜인(倭人)들은 국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1279년 원(元)나라 정벌 때부터 명(明)까지 본토회복을 반복 시도하며 사로신라(斯盧新羅;西新羅)의 동해안에 출몰하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본거지를 잃어버리고 개척지인 유구열도를 거쳐 일본열도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중앙정부가 없는 일본열도로 완전히 이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야마토(大和)정권은 일본열도에 없었다
자학식민사관자(自虐植民史觀者)들은 일본의 왜곡한 반도사관으로 우리역사를 보며 우리국민을 현혹시키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런 있지도 않은 사실을 믿으며 사실인양 왜곡하는 반도사관에 매달리는 지 알 수가 없다.
하기야 최태영 선생님도 103세까지 역사를 연구하고 글을 쓰며 오진(應神)이 나라를 세워 왜(倭)라 하고 비로소 뚜렷한 실존인물인 왜왕(倭王) 1대가 되었다 하며 그곳이 일본열도로 봤다. 이때는 부락국가(部落國家)에서 씨성국가(氏姓國家)로 간 시기였다.
한편 최태영 선생도 지나(支那;中國)의 25사나 우리 삼국사기 등의 사서(史書)기록들을 무시하여 야마토(大和)정권이 일본열도(日本列島)가 야마토(大和)정부를 세운 곳으로 보았다. 우리나라 학자들도 지나(支那;中國)의 18사 등의 사서도 봤으면 한다.
지나(支那;中國)의 기록을 보지 않은데서 최선생도 왜(倭)가 대륙에서 세운 왜를 일본열도에 세운 것으로 봤던 것이다. 야마토(大和)는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연호 태화(太和)에서 따온 것을 말씀하면서도 양자강 이남에 왜가 있었음을 모르고 있었다.
필자는 최태영 선생의 뒤를 이어 역사칼럼을 쓰고 있는 제자이자, 후학으로서 90년대부터 역사 연구를 하며 야마토(大和)정권은 대륙에 세워진 것이라는 많은 기록을 접했다.
그리고 오진(應神)은 일본서기(日本書紀)상의 기년(紀年)을 270~310년이라 말하나 사실이 아니었다. 오진(應神)은 서기363~394년의 일왕인 것을 모든 학자들의 주장이다. 일본역사는 978년 조작이라는 와세다(早稻田)대학 미쓰노 유(水野 祐)교수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이 조작한 진무덴노(神武天皇)의 왕이 ‘아마테라스오미 카미’(天照大御神)’로 일본인들이 받들고 있는데 이 진무덴노(神武天皇)는 가공(架空)의 왕으로 일본의 왕도 ‘아마테라스오미 가미(天照大御神)’도 아니다. 또한 오진(應神)도 ‘아마테라스오미 가미(天照大御神)’가 아니다. 이는 일본이 제멋대로 지어낸 조어(造語)인 것이다.
그리고 사이메이(齊明)여왕이 백제로부터 원군지원요청을 받아 지원했으나 백제가 멸망한 후,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장(扶餘豊璋)이 사이메이(齊明)의 뒤를 이어 덴지(天智)왕이 되는데 오진(應神) 1대로부터 24대인 덴지(天智662~671)왕이 재위 때인 670년 당(唐)의 승인을 얻어 이때부터 왜(倭)가 일본(日本)이라는 국호(國號)를 쓰게 되었다.
이때는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왜(倭)는 신라(新羅)와 당(唐)에 밀려서 타이완에 있었다.
(以上은 최태영, ‘단군을 찾아서’ 246~250면. 오재성 九黎系, 倭 日本史4~30면 參照 引用하다.)
글을 맺으며
야마토 정권은 대륙에서 가야(伽倻)인이 대륙에 세운 것이지 일본열도에서 세운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이 연구를 위해 상가야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몇 십만 명이 된다.
필자는 역사왜곡(歷史歪曲)에 대해서 사실에 어긋나는 것은 단호하게 용납하지 않는다. 진실의 역사만을 역사로 보는 관점에서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진실을 추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왜(倭)는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같은 동이족으로 왜국(倭國)을 세운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이 자기조상이라며 미에겡(三重縣), 이세시(伊勢市)에 있는 이세궁(伊勢宮)에 모셔져 있는 36위(位) 신위(神位)도 모두 우리 가야(伽倻), 신라(新羅), 백제의 선조(先祖)로 이를 입증한다.
필자는 1978년에 이곳을 답사(踏査)를 간적이 있는데 개방이 아니 되어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세궁(伊勢宮)에 모셔진 소노가미(園神;伽倻,新羅神)와 가라가미(韓神;百濟神)36신위(神位)는 다른 사람 아닌 모두 우리조상의 신위(神位)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당시 일본은 단군(檀君)의 신상(神像)도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일본인이 자기들 조상신이 왔다고 환영하며 제사(祭祀)를 우리말로 하고 있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양자강 이남에 세운 왜(倭)는 자기 선조들로서 우리나라를 조선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은 고종이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변경한 이후 1901년 노부오 준빼이(信夫淳平)는 ‘한반도(韓半島)’라는 책을 펴내어 조선반도와 함께 ‘한반도’라고 하며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 현실을 똑바로 간파했으면 한다.
적어도 야마토(大和)정권에 대해 말하려면 5세기이전의 기록인 정사(正史)를 보고 논해야 한다. 예컨대 한무제;서기전142~27)때 편찬된 사기(史記), 후한효장제(後漢孝章帝;76~88)때 편찬된 한서(漢書), 진(晉;265~316)때 편찬된 삼국지(三國志), 송(宋;420~479)때 편찬된 후한(後漢書)서, 고려(1145년) 때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우리 민족의 5세기 이전 역사를 제대로 써야 한다.
일본의 역사는 면밀히 살펴보면 우리의 역사다. <일본서기> 상반부(上半部)는 모두 우리 역사를 자기들 역사같이 엮어 놓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반도사관, 만선사관(滿鮮史觀), 만한사관(滿韓史觀)으로 현혹하게끔 바꿔 놓아도 우리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 역사는 앞으로 자손만대에도 빛날 역사이고, 온 국민이 지켜갈 우리 역사이기에 소홀히 다를 수 없는 것이다. 미흡한 점은 다음으로 미루고 이만 줄이기로 한다.
(다음에 계속)
출처:https://blog.daum.net/coreakai/20830?category=177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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