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7657003097
(68도1000 판결문 중 한 문장. 그냥 옛날 판결 아무거나 집어왔음. 이 정도 길이는 흔함)
위에서 보는 것처럼, 판결문을 보다 보면 가끔 "와 ㅅㅂ 저게 한 문장이야?" 싶을 정도로 긴 문장이 심심찮게 보인다.
법조인들은 왜 저따구로 문장을 적는 걸까? 저게 보기 편한 걸까?
물론 법조인들도 저런 문장을 (일반인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보기 편해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장이 자꾸 늘어지는 것은
1. 의미가 명확한 문장을 작성하기 위해서
2. 문장을 끊지 않고 자꾸 이어붙여서
라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부터 알아보자.
1. 의미가 명확한 문장을 작성하기 위해서
우리도 어릴 때 맨날 배웠던 내용이다. 6하원칙을 지켜서 말하기.
그런데 이게 철저히 지키려면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일상 속의 간단한 문장을 상상해보자.
예를 들어 당신이 친구에게서 빌린 펜을 잃어버렸다. 뭐라고 할까?
"야 네가 빌려준 거 잃어버렸다. 미안. 내가 돈 줄게."
일반인이 받아들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문장이다.
하지만 저 문장을 법적인 분야에 갖다 쓰려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내용이 특정되지 않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0) 말하는 사람은 누구고 '너'는 누구인가?
(1) 빌려준 물건 및 수량이 어떻게 되는가?
- 당연히 필요한 부분이다
(2) 언제 빌려준 것인가?
- 이게 특정되지 않으면, 같은 물건을 여러 번 빌려준 경우 특정이 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3) 잃어버린 사유는 어떻게 되는가?
- 특히, 책임소재를 따짐에 있어 누구의 과실인지는 중요해질 수 있다
(4) 저 사과는 본인의 과실을 인정한 것인가?
(5) 돈은 얼마를 준다는 것인가?
(6) 돈은 언제까지 준다는 것인가?
자 이제 당신이 친구에게 각서를 써주면서 위의 질문을 모두 반영하는 경우
써야 하는 말은 아래와 같다.
"저 김ㅇㅇ은 (주어)
2024. 11. 4. (날짜)
친구 개죽이에게서 (상대)
제트스트림 0.5mm 볼펜 1자루(이하 '이 사건 볼펜')를 (목적. 이 펜은 여러번 언급할테니 이런 식으로 줄여줌)
언제까지 돌려줄지 정하지 않고 대여하였으나 (행동. 뭔가 대여할 때는 언제까지 돌려주겠다고 했는지가 중요하다),
이를 돌려주지 못한 상태에서 (돌려줬으면 배상할 필요가 없으므로 적어야 함)
김ㅇㅇ의 과실로 인하여 이 사건 볼펜을 분실하였으므로
(주어는 문장 맨 앞에 '김ㅇㅇ은'을 썼으니 생략)
2024. 12. 5.까지 (돈은 언제까지 줄지 날짜)
친구 개죽이에게 (돈을 줘야 하는 상대)
이 사건 볼펜 시가 상당의 금액 및 (목적. 얼마를 줄지 특정. 그냥 액수를 적어도 상관없긴 함)
이에 대하여 2024. 12. 6.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5%로 계산한 이자를 (목적2. 이자도 특정하는 경우)
지급하겠습니다." (행동)
빠지면 의미가 불투명해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괄호로 하나하나 설명해놓으니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위 문장을 붙이면 이렇게 된다.
"저 김ㅇㅇ은 2024. 11. 4. 친구 개죽이에게서 제트스트림 0.5mm 볼펜 1자루(이하 '이 사건 볼펜')를 언제까지 돌려줄지 정하지 않고 대여하였으나, 이를 돌려주지 못한 상태에서 김ㅇㅇ의 과실로 인하여 이 사건 볼펜을 분실하였으므로, 2024. 12. 5.까지 친구 개죽이에게 이 사건 볼펜 시가 상당의 금액 및 이에 대하여 2024. 12. 6.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5%로 계산한 이자를 지급하겠습니다."
어떤가? 처음의 "야 네가 빌려준 거 잃어버렸다. 미안. 내가 돈 줄게." 에서 몇 배나 길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 이 사건 볼펜을 분실한 경위
- 분실이 만약 다른 사람의 과실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경우, 그 이유 및 사실관계
- 이 사건 볼펜의 정확한 가격과 그것을 산출한 과정
- 기타 등등 우리가 상상도 못한 상대방의 태클들
등등을 추가하다 보면
우리가 아는, 긴 문장 덩어리로 이루어진 서면이나 판결문 등이 등장하는 것이다.
즉, 결론은
법적인 효과를 분명히 하고
중의적 표현이나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6하원칙을 완벽하게 서술하는 것이
문장이 길어지는 것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겠다.
2. 문장을 끊지 않고 자꾸 이어붙여서
이건 다시 또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아까 위의 예시에서 볼 수 있는데
"(주어는 문장 맨 앞에 '김ㅇㅇ은'을 썼으니 생략)" 이라는 문장을 기억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 문장으로 쓰면
겹치는 부분을 생략해도 되는 경우가 생기다 보니
이러한 편의성을 위해서 한 문장으로 붙여서 쓰는 경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솔직히 그냥 그게 익숙해서이다
사실 문장의 경우 짧게 끊어치는 게 가독성은 무조건 높아진다.
하지만 어차피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 길기도 하고
법 공부하는 사람들이 만연체에 길들여져 있다 보니
그냥 별 의식 없이 만연체를 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최소한 "일부러 만연체를 선호하는" 문화는 법조계에서도 없어지고 있고
판결문을 비교해보아도 적어도 옛날 판결문보다는 요즘의 판결문이 훨씬 더 문장도 짧아지고 가독성이 올라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이 부분은 점차 지속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해 보자.
쓰다 보니 좀 용두사미가 됐는데
사실 내가 쓰고싶었던 건 2번보다는 1번이었어서 그런 것 같다.
여러분도 저런 문장을 읽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길어서 짜증난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이 부분이 없다면 어떤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을까 라는 부분을 생각하면서 읽어보는 것도
글의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
끝!
첫댓글 오 몰랐던 사실이야
우와 엄청 유익하다 평소에 쓰는 우리말.. 엄청 고맥락 함축적인게 느껴져
삭제된 댓글 입니다.
레알 일본에서 온 영향도 꽤 있다 생각함...
오 그래서 그랬군! 명확하긴 해야지.. 그치만 한문장이 너무 길긴 하더라..
오오
오 하기야 중요한 내용을 빼놓고 쓸수 없으니 길어지는구나?
현실에서도 말 길어지지 않아? 정확도를 위해서… 생략하면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넘 많은데 그냥 내 주ㅜ위 환경이 이상한 건가 ㅠ
우와 이해 쏙쏙 된다
회사 보고서처럼 개조식으로 쓰면 안되남..?
오 흥미돋..
후 그래도 판례 문장 조따 길때 판사들 때리고싶음 한문장이 뭔 세줄 ㅡㅡ
유익한 글이였다..
재밋닼ㅋㅋㅋㅋㅋ
오 유익하다 잘읽었어
ㅋㅋ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너무 공감,,정확한 의미전달 + 만연하지 않고 깔끔하게 두 가지를 다 지키는 거 너무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