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재(吉再)-述志(술지)(뜻을 적다)(한가로이 지내며)
臨溪茅屋獨閑居(임계모옥독한거) 개울가 초가집에 한가로이 혼자인데
月白風淸興有餘(월백풍청흥유여) 밝은 달 맑은 바람 흥취가 넘치누나
外客不來山鳥語(외객불래산조어) 찾아오는 손님 없어 산새와 벗하고
移床竹塢臥看書(이상죽오와간서) 대밭으로 평상 옮겨 누워서 책을 보네
*위 시는 “한시 감상 景경, 자연을 노래하다(한국고전번역원 엮음)”(야은집冶隱集)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본 것입니다.
*이정원님은 “길재는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호가 야은冶隱이다.이성계, 정도전 등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려하자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물러나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던 인물이다. 위 시에도 미련 없이 속세를 떠나 한가로이 지내는 시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위 시는 동문선東文選과 용재총화慵齋叢話 등에는 ‘한가로이 지내다閑居’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조선의 조정에서 예우를 갖추어 불렀지만 끝내 거절하였던 절의를 생각하면 ‘뜻을 적다’도 좋겠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 세상일에 초탈했던 풍모를 생각해 보면 ‘한가로이 지내다’가 좀 더 어울릴 듯하다.
시골의 조용한 개울가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혼자 살고 있다보면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환하게 비추는 달빛에 삶의 흥취가 절로 난다. 세상과 등지고 살고 있어 찾아오는 손님 하나 없지만 언제나 산새가 옆에서 지저귀니 외롭지도 않고, 시원한 대나무 그늘 평상에 누워 책을 볼 수도 있으니 이보다 한가로울 수는 없다.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던 길재의 삶이 마냥 한가로웠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번 감상에서는 ‘한가로이 지내다’라는 제목에 집중하여 시대상과 배경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 두고자 한다.
절의를 표현했다고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그냥 한가한 어느 한때를 즐기는 모습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 많은 느낌을 줄 것 같기 때문이다.
현대인들 특히 도시인들은 건물 숲 속에서 늘 바쁘고 여유가 없다. 휴가 기간조차도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한가하게 여유를 즐기지 못할 형편이라면 잠시나마 눈을 감고 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 누워 있는 상상을 해 보는 정도라도 여유를 가져 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시의 내용이 자꾸만 그림으로 떠오른다. 그림에 조금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시의 전개에 따라 화폭을 채워도 멋지고 편안한 작품이 완성될 듯싶다. 물 흐르는 작은 시내곁에 외따로 있지만 외로워 보이지 않는 작은 초가집을 그리고 위쪽에는 밝은 달을 채워 넣는다. 바람에 살포시 흔들리는 대나무 근처로 이름 모를 산새 몇 마리가 날고 있고 대밭 아래 조그만 평상에는 아무렇게나 누워 책을 보고 있는 나를 그린다. 그림 속에 누워 있는 나를 상상해 보라.”라고 감상평을 하셨습니다.
*길재[吉再, 1353 ~ 1419, 본관 해평(海平). 자 재보(再父). 호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 충절(忠節).]-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 1387년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를 지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금주지사 (錦州知事) 원진(元璡)의 아들. 구미 출생.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朴賁)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에,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고, 다음해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하였다. 1389년(창왕 1)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하여 늙은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였으며, 고향으로 가는 길에 장단에 있던 이색(李穡)을 만나기도 하였다. 1390년 계림부(鷄林府)의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죽음을 듣고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茅屋(모옥) : 띠풀로 엮은 집. 초가집(草家-).
*塢(오) : 둑 오, 1.둑, 제방(堤防), 2. 마을, 3.보루(堡壘: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
첫댓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려말 3인중 한 사람...
한가로이 지내는 그의 삶에서 그의 철학이 보이는 듯 합니다...
한 폭의 그림으로 그 한가로움의 여백을 채워보면 어떨까요....
한 폭의 그림으로 한가로움의 여백을 채운다는 표현 멋지네요.
회장님의 멋진 댓글에 감사드리고,
오늘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