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에게는 할당된 에너지가 주어져 있다. 그 에너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 에너지로 깨어 있을 때나, 자고 있을
때 육체의 성전을 유지한다. 우리는 그 에너지로 모든 일을 한다. 그리
고 그것을 제대로 사용했는 지, 그릇되이 썼는 지 그 각각에 따른 책임
을 져야한다.
가스회사와 전기회사가 배선에다 가스 계량기나 전기 계량기를 설치하
여 공급원으로부터 고객으로 가는 길목에서 체크하듯이, 신성은 각자의
손에 일정한 양 만큼의 에너지를 사용케 하였다. 그 분량은 법칙을 올
바로 사용하느냐 그릇되이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
들기도 한다.
"너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4)라는 말씀처럼 인류에게
주어진 에너지의 몫도 또한 세어진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숯이 많은
머리를 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대머리이고 어떤 이는 남아있는
머리를 셀 수 있는 정도인 경우도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
게는 에너지가 별로 없는가 하면, 어떤 이에게는 많다. 누구는 돈이
한 푼도 없는가하면, 누구는 돈을 불쏘시개로 쓸만큼 많다. 이러한 사
실로부터 우리의 세계로 오는 에너지의 분량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음을
추론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공부해야 한다.
중요한 사실은 깨어 있으나 자고 있으나 항상 에너지를 받고 있으며,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자유의지를 행사함으로써 그 에너지를 썼을 때
그 채무는 당신에게만 돌아간다는 것이다. 당신은 신께서 당신의 창조
적 자아 안에 투자한 에너지─실상 당신이 모멘텀을 확보하는 데 쓰이
는 일정량(한 달란트)에 해당하는 신의 빛과 신의 의식─의 그릇이다.
혹자는 말한다."난 모멘텀을 확보하는 데 흥미가 없어. 난 모멘텀이
뭔지도 몰라." 하지만 모멘텀이란 당신이 습관적인 것으로 키우는 것을
가리킨다.
에를 들어 살이 찌길 택하고, 살이 찌길 바래서, 살이 찌겠노라고 결
심했다면 먹는 데 모멘텀을 키워 나갈 것이다. 그리고 살이 찔 때까지
먹을 것이다. 그런데 살이 찌고 나도 먹는 것은 멈출 수 없다. 거기에
모멘텀을 발달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살을 빼기로 하고 심하게 다이어트를 하기로 한다면 그리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이어트를 하면서 일어나게 되는 일은 결국 당신의
살을 빠지게 하는 습관의 모멘텀, 습관패턴을 키우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뚱뚱해 지길 원할 수 있는 것처럼 날씬해 지길 원할 수 있다.
그때 그들이 발달시킨 그런 특질을 만들어 내는 습관패턴이 내가 이야
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멘텀(Momentum) 이다.
이제 우리는 이를 육체적인 몸에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적용고자 한
다. 당신이 프랑스어를 배우기 결심했다면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할
것이고 열심히 할 것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신은 거기에 매달릴
것이다.
헤라클레스처럼 되고자 한다면 밖으로 나가 몸을 가꾸어야 한다. 체육
관이나 뒷마당 차고 또는 어느 곳이든 가서 무거운 것을 들거나 여러가
지 운동을 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근육을 발달시키길 원하기 때문이
다. 당신은 거기에 모멘텀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계속 하게되면 점 점
더 그 모멘텀이 커져간다.
나는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준 법칙, 모멘텀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법칙을 여러분에게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모멘텀은 당신의 삶에 아
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한다.─너무 중요해서 당신이 어떤 것에
어떤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해도, 그 법칙은 당신의 삶 안에서 여전
히 작용한다. 아무리 당신이 무엇을 하지 않는다 해도 예수께서 가르친
모멘텀의 법칙하에 놓여 있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겠다.
당신이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하거나 토양과 주위 환경으로부터 영양소
를 섭취하거나, 자신 안으로 에너지를 흡입하기로 하거나, 좌우지간 어
떤 것이든 간에 당신이 원하는 것, 당신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하기로
했다고 해보자. 당신은 거기에 모멘텀을 발달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멘텀, 그 활동 자체의 내적 부분은 당신의 삶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칠 것이다.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모멘텀을 발달
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이 법칙은 당신의 세계 안에 결실을
맺어가게 되어 결국 당신의 창고는 텅텅비게 될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말고는 의식이나 동기가 텅비고
공허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우리 모두는 모멘텀을 발달시켜 나가
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모멘텀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결정한다.
우리는 가능한 동원할 수 있는 지각능력으로 자기에게 중요성이 있는
기록을 찾아내기 위해 가물가물하고 희미한 과거를 돌아보길 좋아한다.
어떤 사람은 앉아서 전생에 자신은 누구였을까 생각하길 좋아한다. 만
일 전생에 자신이 누구였는지 알기만 한다면, 그 인물에 관해 찾아낼
수 있는 역사책을 다 찾아내어 자기 전생에 관하여 연구하기 시작할 것
이다.
그러나, 멈추어 생각해보라. 죽은 모멘텀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과거의 역사에 있었던 것이 무엇이든 주사위는 던져졌
고, 그 생애에서 당신은 자신의 모멘텀을 실현하였다. 당신은 그것들이
불러주는 대로 그렸다. 그러나 괴수 또는 성자를 만들어 낸 자는 바로
당신이다. 하늘이 아니고 당신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광이 아마도 자신의 별자리 안에 있을 것이
라고 생각하길 좋아한다. 그들은 신들이 자신의 별자리를 통하여 혜택
을 주고 운명이 자기들에게 어떤 성격과 운수 ─어떤 수준의 생활을 하
거나 또는 그보다 못하거나─를 정해 놓았다고 여기고는 이렇게 말한다.
"아다시피 그건 전부 별자리 안에 다 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는 불행한 상황에 대해서는 혹성들의 나쁜 영향을 탓한다.
그와같이 사람들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기보다 미신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실제로 캐시우스(Cassius)의 말대로 우리의 결함은 별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다.(5) 따라서 우리는 자신
의 별자리가 불러주는 바 뿐만아니라, 읽을 수 만 있다면 우리의 별자
리에 아주 분명히 새겨져 있는 과거의 카르마가 정한 바도 뛰어 넘어야
한다.
종종 나는 이런 말을 듣는다. "그건 내 과거의 카르마야. 그 때문에
나는 어떤 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단지 앉아서 나의
카르마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모두 과거의 카
르마를 거두고 있다.(6) 거기에 의문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거두지 않아도 되고 울지 않아도 된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는가? 하늘은 빠져 나갈 길을 마련해 두
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두지 않고, 비통해 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우리
에게는 과거의 모멘텀들을 건설적으로 사용하여 일을 바로 잡을 여지가
있다. 우리에게 그렇게 할 뜻이 있기 때문이다.
발을 디딜 때마다 추락하고 또 추락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런데 왜 우리의 카르마 자체가 우리의
길에 그물을 던져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고 걸려 엎어져 쓰러지게 하려
고 한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과거의 카르마는 과거의 카르마다. 허나 그것이 본래 부정적인 것이라
할 지라도 걸림돌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이다. 파산해서 빚장이들로부터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이 자
신이 택한 어느 때에 빚을 모두 값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이 법칙을 이해하도록 하자. 도덕적으로 파산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
고 겨우 확률이나 좋아야 우리에게 자유를 줄 지 모르는 삶의 변덕스러
움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우주가 변덕스럽게 돌아간다면, 생
명이 어떤 경우에 이 사람보다 저 사람을 더 유리하게 택할 것인가? 나
는 확신 하건대, 그런 건 아니다. 우주의 법칙이 수학적 정확성으로 정
해진 것처럼, 그 똑같은─사람의 정확성 뿐만아니라 신의─정확성으로
그 사람이 무엇이 될것이고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리
고 이것이 신적 자유의지와 인간적 자유의지 양 쪽에 다 해당되는 수학
적 등식인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아주 열심히 오랫동안 분투해
왔다. 나의 카르마로부터 벗어나고자 부지런히 일했으나 그것은 그물처
럼 나를 에워싸고 있다."
어느 요가의 대사에게 있었던 일화가 생각난다. 그는 자기의 아쉬람
(사원, 수행장소) 밖으로 나왔다가 길에서 킹코브라를 만났다.그 코브
라는 또아리를 틀고 덤비려 하였다. 그는 코브라를 보며 말했다. "자,
코브라 선생" 그리고 그는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며 순수한 가슴으로
그 놈을 진정시켰다.(7)
막 덤비려 하는 독거미나 코브라 또는 쥐를 만난다면 당신은 무어라
말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 비명을 지르며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와, 이젠 죽었구나! 희망이라곤 없어!" 아니면 도도하게 되돌아오는
과거의 에너지의 역류─보속과 그 보속의 전체 과정을 통해 당신 영혼
을 가르치기 위해 지금 되돌아오는 당신의 모멘텀─을 환영할 수도 있
다.
되돌아 오는 카르마의 주된 목적은 각 개인의 가르침에 있다. 여러 사
람들의 과거의 생에 대한 기록을 살표보면서, 나는 우주가 사람에게 해
가 되는 일을 꾸미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와는 반대로 그 사람에게 해
방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그 사람과 함께 도모한다.─사람을 배역자의
노역에 처하게 하는 것보다 그에게 해방을 가져다 주는 것이 오히려 신
께 기쁨이 된다.
우리가 지어낸 그 모든 모멘텀들 안에는 빠져나갈 길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자. 그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주의 목적의 신비적 이해를 통
해서, 바이올릿 불, 예수와 대광명 형제단의 승천대사들께서 가르친 말
씀의 '다이나믹 디크리(Dynamic decree)'를 통해서 가는 길이다.
의지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신의 의지에 반하여 자기의지를
행사하도록 만들어 졌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자신의 의지를
가졌다함이 지혜롭지 못하게 우주적 목적의 주류에 반하여 그것을 사용
해야 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자유의지의 요체는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보다 커다란 개별성의 선물이 우리에게 내려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우리는 정상에 올라 설 수 있고, 그
렇지 않으면 분명히 당신의 'x'를 싸고 있는 큰 동그라미와 당신의 '노
'(no)'를 싸고 있는 작은 동그라미가 있게 된다. 그러나 결국 우리에게
오는 상이 가장 클 때는 생명의 흐름에 거스르기보다 거기에 따라 움직
일 때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생명의 흐름에 거슬러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서 여러분이나, 나 자신 또는 어느 누구라도 얻어
낼 수 있는 전부라고는 우리의 진정한 목적을 좌절시키며, 우리가 얻어
야만 하는 진정한 결과를, 때때로 일생동안이나, 앗아갈 스쳐 지나가는
만족밖에 가져다 주지 못하는 장애가 되는 결과일 뿐이다. 우주적 흐름
에 따라 움직일 때만이 최상의 꿈이 실현되고 하느님의 기쁨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과거의 생을 거꾸로 올라가 살펴볼 때 생기는 후회도
큰사랑이 우리를 위하여 간직한 그 과정에 맞서는 일의 어리석음을 우
리에게 가르쳐 준다.
예수께서 하신 거룩한 말씀 중에 내가 이야기하기로 약속한 특별한 말
씀이 있다. 많은 신자에게 그말은 커다란 미스테리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똑똑히 보라.이 말은 마태, 마가, 루가 그리고 후대의 역자
들이 다시 여러 형태로 인용했던 것이다.
무릇 있는 자에게는 거기에 더할 것이고 없는 자로부터는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리라.(8)
이 말은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는 이상하고도 수수께끼같은 귀절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멘텀에 관해 말씀하고 계시다.
건설적 모멘텀을 가진 자에게는 하느님의 더한 것이 추가될 것이나 그
런 모멘텀이 없는 자로부터는 그가 가지고 있는 것조차도 빼앗길 것이
다.
건설적 모멘텀을 가진 자─우주의 흐름과 함께 일하고, 그 흐름에 따
라 흐르고, 신성의 도(道 Tao)가 그의 의식을 통하여 흐르게 하고, 자
신을 기꺼이 기쁨으로 하느님께만 여는 모멘텀을 가진 자에게는 하느님
의 더한 것이 거기에 더해지리라. 그러나 건설적 모멘텀이 없는 자로부
터는 그가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리라. 자기 자신을 위해 작용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보존할 모멘텀도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그가 갖고 있는 것조차도 잃게 되는 것이다.
멈추고 이 점을 생각해보라.─당신의 삶에 하느님의 플러스적인 요소
를 두지 않는다면 무엇을 둘 것인가? 당신의 삶에 창조주의 플러스적인
요소와 그 목적과 그 의지를 제거해 버린다면, 당신 자신의 모멘텀을
불리기 위해 필요한 플러스적인 요소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고 무
엇이겠는가? 당신이 갖지 않은 자이면 갖지 않음에 모멘텀이 있는 것이
고 매일 매일 당신은 점점 적게 갖게될 것이다.
그것은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처럼 무한히 계속될 것이다. 하느님이 당
신의 삶에 촉진적 모멘텀이 되어 그의 빛이 (당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
로서) 스스로에게 자기의 목적과 자기의 의지를 점점 더 모으게 될 때
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리되면 당신은 매일 매일 갖게될 것이다. 그리
고 당신은 가진 자가 되고 가진 자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이 더해질 것
이다. 그것은 계속 구른다. 올 맨 리버(Ol' Man River)처럼 "그는 계속
굴러 간다."
사람 안에 내재된 태양의 힘(Solar Power) 혹은 영혼의 힘(Soul Power)
식구들에게도 못 됫어. 밤에 집
에라도 들어오면 마누라하고 애들을 못살게 굴고는 잠든단 말야."
그는 거기에 모멘텀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대
체 하늘은 왜 그런 모멘텀을 없애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는 점점더 빚
에 깊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테네시 어니 포드(Tennesse Ernie Ford)가
불러 유명한 석탄 광부의 노래를 알것이다. "열 여섯 톤을 캤느냐? 네
가 얻은 건 무어냐? 하루하루 늙어가고 빚만 늘어가네..."
하늘은 그의 모멘텀을 부수지 않는다. 그가 지었고 그만이 풀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세줄기불(Threefold Flame)은 당신 속에 있는 신의
창조적 잠제력의 신적 분광임을 자각해야 한다. 당신으로 하여금 성부,
성자 그리고 성신에 대해 자유의지를 가진 대리인의 역할을 하게하는
권위는 그것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자신의 세계 안에 창조할 수 있는 (성부의) 힘
(Power), 자신의 창조를 보존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 결정할 (성자의)
지혜(Wisdom), 그리고 거룩한 불을 가지고 그것을 변형하거나 변환시킬
(성령의) 사랑(Love)이 주어졌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의 삼위일체적 세
기능은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한 동양적 이해, 즉 1)창조의 창조자 2)창
조의 보존자 3)창조의 파괴자, 변형자와 관계된 것이다.
당신은 신과 공동 창조자가 되기로 정해졌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째서
하늘의 모든 이가 당신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전능한 신께서 우리 스
스로를 신과 닮도록 재창조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당신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왜 존중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의 만군(Lord's hosts)의
중재(intercession개입)를 부르지 않는 한, 그들은, 영예를 지켜, 당신
의 창조적 실험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가장 최선의 교훈은 자유의지
가 손상되지 않은 채 발휘한 데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와 더불어 당신에겐 거의 아무 일이나 다 할 수 있
는 힘이 있다.─그리고 당신이 한 일은 어느 것이든 신의 법칙의 테두
리 안에 있도록 살펴야 한다. 당신에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말해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부정적 모멘텀때문에
나날이 살아 가면서 빚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얼만큼 지나면
그들은 그것들을 애완용 카멜레온이나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아끼게 될
것이다. "이건 나의 모멘텀이다! 간섭하지 마라! 날 좀 내버려 둬! 이
건 내 일이란 말야!"
도대체 누가 무엇때문에 거기에 간섭하겠는가? 올바른 정신이라면 아
무도 원치 않을 것이다. 왜 간섭하는가?
하지만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이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그러는 것
은 아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섭과 참된 친
구로부터 오는 위로와 위안, 지혜 안에서의 가르침 간의 차이를 인식하
도록 하자. 우리가 사귈 수 있는 가장 좋은 친구는 승천대사들이다. 그
들은 당신이 모멘텀에 관한 이런 지식들을 이해하길 바라는 이들이다.
삶에 있어 가장 좋은 것은 자유지만 어떤 것은 아주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 무엇보다도 비싼 댓가를 치러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계속적으로
부정적 모멘텀을 쌓아가며 ( 이는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쌓인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부정적(negative) 모멘텀은 내리막의 모멘텀으로 당신이 멈추는 순간
부터 쌓인다. 알겠는가? 당신이 멈추는 순간 즉시 내리막 길로 굴러 내
려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부정적 모멘텀을 짓는 데는 어떤 에너지도 소
요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알아서 움직인다. 그것은 자동적이
다.
사람들은 계속가다가 전진을 멈추고는─언덕 어느 곳에서 멈추고는 말
한다. "나는 쉬어야 겠다. 제발 날 좀 쉬게 내버려 둬. 여기서 잠시만
서 있을래. 난 계속 갈 수 없어." 그러면 당신은 자신이 몇 발자국 뒤
로 물러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오르막길의 언덕이
기 때문이다. 그것이 승천(Ascension 올라감)이다. 그것이야 말로 인생
에 가치있는 것이다. 승천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준 것이다.
기독교회의 어떤 이는 돌로사(dolorosa)─슬픔의 길, 통곡의 길로 그
것을 설명한다. 그들은 인생 속의 겟세마네를 말한다. 그들은 삶의 고
뇌와 괴로움, 공포 그리고 그 어두움을 이야기한다. 생명이 얼마나 밝
은 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같다. "나를 따라 배우라. " 대사께서 말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도다( Light 빛이라 )"(12)
우리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는 법을 배울 수 있고, 그 멍에 안에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 이는 농담(joke)이 아니다. 그것은 멍에(yoke)이
다. 그것은 진실이다. 강철같은 진실이다. 그리고 모멘텀을 건설해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발전해 가는 모습에 우리는 놀라게 될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아무에게나 종이와 연필을 주고 정말로 원하는 것을
적으라고 한다면 여러분 대부분은 영적인 목표들을 적으리라고 나는
장담한다. 왜냐하면 영적인 목표들만이 영속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
실을 조만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백만불이 생겼다고 한다면─다 써버리든, 남에게 주어 버리
든, 원하는 것 무엇을 하든 당신은 문제를 안게 된다. 진 폴 게티(Jean
Paul Getty)나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가난
한 사람보다 골칫거리가 더 많다.
돈은 필요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리라. 그러나 자신들이 이세상에
없다면 돈이란 필요없는 것임을 안다. 세상을 떠날 때, 산채로 떠나는
것이 아니므로 돈이 필요없어지리라는 점을 또한 알 것이다. 그러나 살
아있는 동안은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백만불씩은 필요치 않다. 그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도 편안히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의심할 바 없이 영구적인 목표를 적을 것이다. 세속
적인 스쳐지나갈 목표를 적는다면, 그것들이 이루어 질런지 안 이루어
질런지는 당신이 잘 알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이처럼 말한다고 하자. "나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
하고 결혼하고 싶다." 이는 견해상의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자
가 당신하고 결혼 하게 될런지 아닐런지 당신은 모르는 일이다. 정말로
그런 목표는 어떤 면에서 아주 진부한 것이다. 인간으로서 원하는 것을
모두 얻는다고 해도, 그것이 극소량의 행복도 당신에게 보장해 주지 않
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당신이 원한다고 생각한 것을 얻을 지라도
그것을 얻고 나서 행복해 질런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이 부자건, 가난뱅이건, 지혜롭건, 어리석건, 당신이 무엇이든 간
에 영적으로는─당신의 목표가 영적인 것이라면, 신을 모든 것에 우선
시 한다면, 모든 것이 당신에게 더하여질 것임을 당신은 알고 있다.(13)
당신에게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얻게되리라는 점을 당신은 알고 있다.
돈이 부족하면 돈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친구가 부족하면 친
구를 얻게될 것이다─지상에는 당신과 같은 영적인 사람들이 있기 때문
이다. 허나 지금은 그런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칼리 유가기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힌두사상에서는 이 시대를
암흑시대로 묘사한다. 인간의 과학적 동향이 영적 진실을 거의 외면하
기 때문에 물질적 개념이 전면으로 부상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모든 과학자 중 가장 위대한 과학자는 창조주이다. 창조주께
서는 작은 DNA 고리 안에 아주 미세한 형태로 어느 누구도 그릴 수 없
던 엄청난 이미지를 넣어 둘 수 있는 이이다. 전자 현미경을 통해서만
볼수 있는 그 자그만 칩 속에 유전공학적으로 말해 당신의 온 생명이
적혀 있는 부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웁지 않은가?
당신이 태어나 삶을 시작할 때 충분히 건강치 못했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유전자를 탓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모든 것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머리와
눈의 색깔, 청각, 내부 감관기관, 피부건강등. 당신은 누군가를 보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와, 저 사람은 피부도 고와라. 내 피부는 저만
못한데." 그것은 전부 당신 유전자의 탓이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의 유전자는 그처럼 되었을까? 어떻게 당신의 유전
자에 그런 색인이 찍히게 되었을까? 그렇게 된 것은 당신 과거의 카르마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하는 바, 당신이 했던 바는 오늘 당신이 지니
고 있는 유전적 패턴에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겼다. "그건 나의 유전
적 형질이다."─그러나 사람들이 이처럼 말하는 건 듣기 어렵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유전적 형질을 바꾸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인공배양에 대해 논의가 진행 중이다. 아마도 자신들을 복제라
도 할 모양이다.(여분으로) 다른 몸 안에 당신이 복제되어 있다고 상상
해 보라. 그런 일에 따를 책임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자기자신
이 여럿 우글대는 일이 없이 현재 우리의 몸을 충분히 잘 보살펴야 한
다.
그러므로 그 과정은 배양법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간구한 바에 대
해 우리를 돕기위해 내려오는 신적인 응답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지키
는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는 간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간구함에 모멘텀이 없다. 곤경에 처할 때까지 많은
시간 동안 그 어느 것도 간구하지 않는다.
그리다가 곤경에 처해서 말한다. "경애하는 하느님, 여긴 벼랑입니다.
저는 지금 10피트나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읍니다. 다시 벼랑 위로 올라
가려하니, 도와 주소서, 주여!"라고 소리지른다. 곤경에 빠졌기 때문이
다! 그러나 곤경에 빠지지 않는다면 신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은 장신구처럼─팔뚝에 찬 패물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은 알
라딘의 요술 램프와 흡사하다. 곤경에 빠졌을 때 그것을 문지르면 마신
이 나타난다. 그러면 "이러 이런 일을 해 주시오."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신께서 하리라고 기대했던 모든 일들이 생명을 바로 이해했을
때,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이상한 말로 들리는가? 나는 신께서 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모든
일을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틀림없는 말이다. 신은 우리
를 스스로 충분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각 개별적 모나드(Monad)
는 우주의 힘을 끌어다가 그 힘이 자신을 위해 작용케 하고, 원하는 일
은 무엇이든지 하도록 만들어 졌다. 그러면 대체 왜 우리는 그리도 믿
음이 부족한가? 왜 누구는 큰 믿음이 있는 가하면 어떤 이는 믿음이 적
은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화과 씨앗만큼의 믿음이 있다면,
이 산에 말하여 '옮겨가라' 그러면 그리 되리라. 너희에게 불가능한 것
은 아무 것도 없느니라.(14)" 이 세상은 믿음이 너무도 부족한 것 같아
보이지 않는가? 왜냐하면 움직이는 산이 많이 안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늘귀에 관한 이야기처럼 그것은 아주 상징적인 말씀임을 알
아야 한다.─즉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15) 그와 같이 아버지께서 "이 산더러 말
하라. 옮겨가라, 그러면 그리 되리라."라고 말했을 때는 어떤 생각들이
심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역경의 산이다. 실제적인 산을 보고 "거기서 사
라져라, 네가 그 자리에 있는 게 맘에 안든다."라는 뜻은 전혀 없다.
사람들은 참으로 우습다! 그 산은 곤경과 역경 그리고 혼란,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산이다.─그것에 대해 당신은 말할 수 있고 그것은
움직일 것이다. 그것이 효과가 있음을 나는 증언할 수 있다. 그러나 어
느 누가─모하메드라 할 지라도─물리적인 산을 움직이며 다니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지진이나 대륙의 융기나 침강의 경우 이외에) 산이 물
리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예수께서 산을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예수께서 산을 움직였다는 기록을 마태, 마가, 루가
또는 요한복음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가 산을 움직였다는 역사적
기록은 어느곳에도 없다.
히말라야의 위대한 대사들 중에 누가 산을 움직였다는 말을 들어본 적
이 있는가? 그들이 산과 산을 이리 저리 오가며 다니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다. 유명한 요기 밀라레파처럼 산과 산 사이에서 공중부양도 하고,
여러 곳에 동시 출현도 하고, 날아다니기도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물리적인 산을 움직인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
했을 것이다.
(* 크리슈나의 서사시에 보면 한 때 그가 고바르다나 산을 움직였을 뿐
만 아니라 질투하는 인드라가 보낸 사나운 폭풍으로 부터 그의 목자들
과 소들을 구하기 위해 7일낮 7일밤동안 그 산을 들고 있었다는 이야기
는 있다.)
그처럼 대사께서는 물리적인 산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역경
의 산, 카르마의 산, 문제의 산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쌓여 올
라가는 모멘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신이 그걸 쌓았다. 그래서 당
신이 그것을 치워야한다. 그것이 법칙이다. 물론 이는 환영받을 만한
개념은 아니다.
오늘날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신들을 위하여 그런 일을 할 '조지'같은
사람을 찾고 있다. 그래서 불쌍한 조지는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는
데도 사람들이 자기 자녀의 이름을 조지라고 짓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
다. 사람들은 "조지에게 맡겨버려."라고 한다. 그들은 메시아를 ─자신
들의 죄를 용서해줄 사람을 찾고 있다.─실은 죄를 사해 줄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전환시켜주고, 그 후에 그들을 위해 삶을 살아줄 사람을
찾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가서 이렇게 말함으로 큰 위안을 얻는다. "당신
은 제 생명입니다. 주여, 당신께 모두 맡기 나이다." 첫번째 작은 교차
로를 만날 때까지 그것은 효력이 있다. 첫번째 교차로란 무엇인가? 그
가 원치 않는다고 생각은 하나 자신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만나게 되
었을 때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말한다. "이는 대수로운게 아
니니, 주여, 보지 마옵소서." 그리곤 그 일을 하러 나간다. "타임 아웃!
이건 계산에 들어가는 게 아냐. 시계는 안간다." 이와같이 말한다. 그
리곤 하고싶은 대로 한다.
그리고 난 다음 바로 그가 다시 오길 바랜다. "지금 스위치를 다시 돌
리려 합나다. 다시 들어 오실 수 있읍니다. 나의 삶을 다시 취하실 수
있나이다. 주여!"
주께선 잠시 혼동했다가는 그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어 휴가를 떠나
버리신다. 그를 탓할 것인가? 사람들은 자신들조차 믿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매사에서 (주
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된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자신 속에 있는 신성에 의지하고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
한다면, 양심의 목소리가 화인(火印)을 맞지 않는다면 (17), 사람들은
신의 인도하심이 가능함을 실제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신적 인도하심이 산을 쌓는다는 것을 말
하려고 이 자리에 섰다! 그것은 산을 세운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산이
다. 그것은 모멘텀의 산─움직이는 산이다. 거기엔 힘이 있고, 이루어
져야할 것들을 행할 때 필요한 힘을 생성시킨다.
전에 아랍계의 신사와 담화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는 아랍 사람들이
지닌 모멘텀, 즉 서로 화합해서 지내지 못하고 참되게 통일되지 못하는
점에 관해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이런 질문이 나왔다. "그들이 장
차 서로 화합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말했다. "아니요, 현재 상
황하에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들의 행태로 보아 그건 기적에 가까운 일
일 겁니다." 이는 회교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아일랜드인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가져왔다!
그런 기적들을 세인트 저메인은 행하였다.(22) 예수도 온갖 종류의 기
적을 행했다. 성모 마리아께서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 그 점은 나자
신도 알고 있다. 나는 그녀가 기적을 행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실제로,
여러분이 놀랄지 모르나─파울로 베로니스, 지금은 승천한 폴 더 베네
시안(Paul the Venetian), 또한 기적을 행할 수 있다. 더 한 것은 여러
분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점을 모르고 있
다. 그들에겐 아다시피 모멘텀이 있었다.
육신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서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때로는 아주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
다. 만일 안다면 서로에게 큰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세
상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 그들의 감정이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텔레비젼 프로그램 "요술장이"와 거의 흡사한 상황일 것이다.
한 여자가 어느 사내가 하는 짓이 마음에 안든다고 하여, 코를 씰룩거
리기만 하면, 그 다음 일어나는 일은 그 사내에게 뿔이 돋아 나거나 그
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 진다. 이는 TV 프로 "요술장이"에 나오는 얘기
다. 온갖 종류의 일이 벌어지는 걸 보게될 것이다. 왜? 그것은 요술이
기 때문이다.
우리는 요술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거기에 관심도 없다. 그러나 그것
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사람들은 실
제로 서로에게 요술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것은 중동에
서 알게 된 것인데) 어느 누가 자기 자식에 대해 자랑하고 다닐 때, 다
른 누가 '악마의 눈(the evil eye)'이라는 것을 그 애에게 놓아둔다.
그러면, 그 애는 병에 걸려 죽게 된다. 카이로에서는 악마의 눈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다.(23)
당신이 알던 모르던 관계없이, 악마의 눈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악에
대한 비젼(vision 시각)의 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흑마술
이라고 하는 것의 전부이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다음같은 것이다. 어느 누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내 사업은 놀랄 정도로 잘 되. 우리 집은 너무 멋져. 내 아내는
더욱 아름답지. 애들도 예쁘고.., 내게는 만사가 잘 되고 있어. 몇 해
안되서 나는 백만장자가 될 거야." 그러면 누군가 말한다. "그래 그렇
게 생각하냐!" 그리고는 마음의 눈 속에서 그 사람을 찢어 놓기 시작한
다. 질투심이 강해져서 그 사악한 의도가 '악마의 눈'을 통해서 발산될
정도가 되어 버린다!
이는 우리들이 "서밋 라이트 하우스, 세계의 기둥"이란 제하에 팜풀렛
을 냈을 때 있었던 일과 비슷하다. 우리는 그것을 전국적으로 부쳤는데
, 어느 누가 이렇게 답장을 보내 왔다. "당신들이 세계의 기둥이라 하
는 데, 당신들은 세계의 기둥이 아니야." 이런 천박한 오물 덩어리를
그는 어떤 커다란 혹성으로부터 입수했노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렇게
편지를 보내 왔다.) 그는 말하길 "뉴욕에서 나는 우주선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길 전에는 당신들은 세계의 기둥이었으
나, 다시는 세계의 기둥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요지는 당신을 시기하는 사람이 언제나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어리
석게 당신의 좋은 일들을─당신이 할 수 있는 일 또는 했던 일, 또는
당신이 얼마나 행복한 지를─ 모든 사람에게 말하지 마라. 당신의 행복
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현명하게 처신하고 침묵을 지켜라.
침묵은 금이기 때문이다. '군중의 마음(mass mind)'이 당신을 에워싸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침묵은 금인 것이다.
여러분 중에 많은 이들이 요술이나 기타 도깨비 장난같은 일의 견지에
서 본 악마의 눈이 아니라, 성인처럼 보이는 백발의 노부인이나 젊은
여자같은 인간들의 눈을 통해서 인도될 수 있는 사악한 힘을 알지 못하
고 있다. 당신은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악을 위해 그들의 시각 능력
을 기꺼이 쓸 수 있다는 어느 누구라도 의미에서 '악마의 눈'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누가 만약 그런 것을 갖고 있다면, 그가 누구이건 간
에, 그에게는 하느님의 힘을 눈을 통해서 그릇되이 쓰는 데에 모멘텀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모멘텀은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전달된다.
그것은 본질상 남을 저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주처럼 사용된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파괴를 그리는 데에 그들 가슴 속의 상상과 비
젼(시각)의 능력을 사용한다. 그것이 강력한 감정으로 충전되었을 때는
예기치 못한 사람에게 급작스런 해를 가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성서
에서 말하길 "사람의 악함이 세상에 커다랗고, 가슴 속의 모든 상상
(every imagination) 즉 '눈의 마술'(eye magic), 또는 '눈의 상상'(eye
imaging)이 계속 악할 뿐이다"고 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타오르는 일이 없을 때, 사람들은 종종 타인의 빛
과 기쁨을 시기한다. 시기는 손실(loses)을 초래한다. 서로에게 향하는
시기는 서로의 인생에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
보며 어느 한 사람이 성공했기 때문에 누군가 그것을 싫어 하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은 속으로 "저놈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하고 생각
한다. 대부분 그것은 하부의식(subconscious)속의 생각이다. 알겠는가?
그것은 반드시 의식적 생각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하부의식 속의 감정일 수 있다. "나는 그렇지 못한데, 왜 저놈은 그렇
지? 나는 재능도, 외모도, 돈도 없고 출세도 못했고, 행복하지도 못해.
그런데 왜 저놈은 그렇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모든 생각들에 대해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자신이 나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어느 누가
죽는다면 자신에게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카르마적 책임이 있
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법칙은 틀림없이 그들에게 한 점, 한 획까
지도 다시 치르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책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우주에는 회피할 수 있는 책임
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회피할 수 없다! 그렇게 생
각한다면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 밖에 안된다. 실상은 당신이 행한 대로
지불하는 것이다. 인생은 현찰거래와 같다.
그러므로 떨치고 나가 파괴적 모멘텀대신에 건설적 모멘텀을 쌓아가라.
그리고 사람들 앞에 침묵을 지켜라.
혹자는 말한다. "나는 항상 대사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애쓴다. 대사에
관해 이야기 함으로써 공덕(운동)을 쌓아 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라. 단지 당신의 삶 안에 그리스도를 높여라. 당신의 삶
안에 그리스도를 높이기만 한다면 당신은 모든 이를 빛으로 끌어 당기
게 될 것이다(25). 왜냐구? 요란스럽게 떠드는 것만큼 침묵에 의해서도
많은 사람을 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란 어떤 중요성이 꼭 있는 것
은 아니다.말은 때때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어떤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어느 아가씨와 결혼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입을 열자 그만 더 이상 그녀와 있고 싶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다시피 우리는 때때로 입을 열어 무지를 드러내기 때문이
다.
그래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침묵과 조화와 감사함을 키우는 것이
다. 하느님께 감사하라.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커가는 지를 살펴보라!
이 세상에서 가장 외면당하는 것 중에 하나가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것에 대한 감사함이다. 때로는 단지 앉아서 감사만하라. 5분 내지 10분
동안 앉아서 당신의 인생에 부어주신 모든 은총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
사하여 보라. 종종 그렇게 해 보라.(Try It!) 당신의 생각들 안에 일어
나는 변화와 마음의 진동적 특성이 바뀌는 것을 살펴보라.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은 온종일 나쁜 일만 생각하노라면, 나쁜 모멘
텀을 쌓게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쁜 모멘텀을 쌓아보라,
그리하면 분명히 부정적인 댓가를 거둘 것이다. 바른 모멘텀을 쌓으면
긍정적인 댓가를 거두게 된다 :가진 자에게는 더 많이 더하여질 것이고,
없는 자에게는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리라.
"이 얼마나 공정치 못한 일인가?" 나의 어머니께서는 예수의 이런 말
씀을 보고 그렇게 말하시곤 하셨다. "이건 아주 이상한 글이야." 오늘
날 기독교 교회의 많은 사람들도 그 글귀를 듣고는 거기에 의문을 갖는
다.
그러나 그것은 모멘텀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간단한 것이다. "모멘텀
을 가진 자에게는..."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모멘텀을 쌓아가기 시작
하고, 어떤 일을 행함에 모멘텀을 얻어가면, 예를 들어 육십여일 동안
그렇게 한다면, 당신에게 모멘텀이 생길 것이고 더 많은 것이 추가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멘텀 그 자체는 같은 류의 것을 더욱 더 생성시키
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해 보자. 그러면 시작하지
않음에 대한 60일의 모멘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서 갖고 있던
은총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 가르침이 뜻하는 바이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르게 모멘텀을 쌓아가기 시작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세계에 대해서 대
가(大家)가 되게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인트 저메인처럼 될
수 있다. 성모 마리아처럼 될 수 있다. 당신이 되고자 하고 닮고자 하
는 그 누구처럼도 될 수 있다. 이는 당신이 그들을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6)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그릇되이 보고 있음을 아는가? 사람들이 하느
님을 그처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때로 정말 소름이 끼친다.
신은 독재자가 아니다. 보좌에 앉아서 후광에 윤이나 내고 있는 이가
아니다. 우주의 청결한 구석에 앉아서는 "나는 거룩하다. 나는 생기로
충만해 있도다. 거기 아래 인간들아, 잘 해보도록 하라!"고 말하는 신
이 아니다. 네로처럼 로마가 불에 타고 있는 데도 희희낙낙하는 이가
아니다.
신은 일체 자비와 일체 정의의 신이다. 그분은 바로 당신이 사는 도시
에 대리인을 두고 계시다. 그 대리인이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그의 사
절이다. 당신은 하느님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당신은 그분과 이야
기할 수 있다.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는 열려있다. 해 보라!(Try it!)
주께서 가로되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매..,만군의 주께
서 말씀하시되, 나를 시험하여 보라,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네 방이 넘
치도록 은총을 부어 주는 지를 " (27) 하느님께서 그와같이 말씀하셨다.
그것은 약속이다.
그러므로 그 약속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걸 받아들일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의 부족은 모멘텀의 부족이다. 왜냐하
면 모멘텀은 항상 믿음의 모멘텀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하는 일과
왜 그일을 하는 지를 믿고 있다.─또는 당신의 부모, 선생, 고용주가
믿는 바를 받아 들이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바가 어떤 결과
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따름으로써 모멘
텀을 키워 나가게 된다. 우리가 승천대사들의 건전한 충고를 따를 때
바로 그러하다.
때때로 사람들은 우리의 디크리 책을 보고는 말한다. "저 사람들은 앉
아서 하는 짓이라곤 그저 디크리하고, 디크리하고 또 디크리할 뿐이야."
그렇다, 그것이 우리의 모멘텀이다. 우리는 디크리에 모멘텀이 있고 세
계의 긍정적 선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은 효능이 있다.(28)
나는 디크리에 모멘텀을 발달시킨 사람들이 그것을 긍정적으로 뿐만
아니라 부정적으로도 쓰는 걸 보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놀라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필라델피아의 워너메이커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인데, 30여년 동안 디
크리를 해 오던 여인에게 점원이 세번이나 네번에 걸쳐 똑같은 계산서
에 싸인을 하라고 하자 그녀는 짜증이 났다. 그녀는 당뇨병으로 거의
실명할 지경이었기 때문에 더욱 짜증이 났다. 이름을 적었는데 엉뚱한
곳에다 적고 말았다. 당뇨병과 점원의 추궁, 이런 모든 상황이 그녀를
몰고가 그녀의 분노를 폭발, 소위 격분케 했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 30년간 디크리한 모멘텀과 함께 들어올려 카운터
를 내리치며, 워너메이커 백화점의 점원 아가씨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폭탄이 터졌는 줄로 알았다. 그것은 그녀가 디크리
의 에너지를 분노로 바꾸었을 때 그녀가 지니고 있던 힘 때문이었다.
내 말의 뜻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디크리나 기도를 많이 할 때 당신이 갖게될 책임에 아주 조
심해야 한다. 디크리나 기도를 많이 할 때는 보통보다 하늘과 더 많이
접촉하게 되기 때문에─당신이 돌아서서 누군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
면, 당신의 그 말이 금방 실현될 것이다. 거기에 정말로 놀라게 될 것
이다.
그래서 디크리로 개발한 힘은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영적 모멘텀의
힘을 주의해서 다루어야 한다. 영적인 모멘텀은 그릇되이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흑마술과 똑 같은 것이 되
고 만다.
이 법칙을 이해하기 바란다. 바울은 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
침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태양이 그대의 분노 위로 지게 하지 말라."
이는 당신의 영혼을 보호하기위한 것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
대사 예수께서는 고대 이집트인이 카(ka)라고 부르던 것, 즉 당신의
일부분으로 밤에 잠들었을 때 당신의 몸을 빠져나가 돌아 다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그것을 '아스트랄체'라고도 한다. 잠자리에 들
때 누군가에 대한 분노를 의식 속에 남겨둔 채 잠들면, 의식적으로 분
별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지배를 받지 않은 채, 카는 당신 자신의 유
령처럼 분노나 시기하는 감정, 심지어는 살해의도─의식적이건 무의식
적이건 누군가를 죽이려는 소원─으로 충전된 채 빠져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 표적을 향해 가서는 저지되지 않은 모멘텀으로서 일체의 증
오를 다른 이의 세계의 입구에다 주저함없이 쏟아 놓아 버린다.
그런 분노는 그 분노가 향하고 있는 개인의 죽음에 원인이 될 수 있
을 정도로 부정적 에너지의 모멘텀을 모이게 할 수 있음을 나는 지금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 하지 말 것을 충고하는 바이다.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그것을 다시 깨끗하게 해야만 하기때문이다. 단지 사람
들을 증오하는 것 만으로도 그들에게 병이 들게 하고, 심장마비를 일
으키게 하며, 온갖 종류의 문제를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깨어 있는 의식상태에서 사람들을 증오한다면, 당신이 잠들었을 때 그
'눈먼 카'는─당신의 욕구적 모멘텀의 운반자로서─당신을 빠져 나가
의식적인 마음이 하고자 했던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의 신실한 이들에게 이렇게 썼다. "태양이 그대
의 분노 위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사악한 자에게 그 자리를 주지도 마
라." 예루살렘 성서대로 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가 화가 났을 지라도
죄를 범하면 아니된다. 너희 분노 위로 태양이 지지 않게하라. 그렇지
않으면 악마에게 설 땅을 주게된다.(즉 당신의 감정체나 의식 또는 당
신 존재의 하부의식 속에 악마의 증오가 자리잡게 하지마라.)"
너희의 분노 위로 태양이 진다는 개념은 은유적인 표현이다. 당신이
잠의 세계로 빠져들 때 태양(Sun)이 지고 당신의 분노가 배회할 뿐 만
아니라 아들(Sun), 혹은 빛도 또한 당신의 삶 안에서 자진하여 원한 부
정적 모멘텀에 가리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더욱 더 증폭된다:
"하느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
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
ㅇ 자연령이었을 뿐이었다. 그가 정령이 되고 난 뒤
그는 세인트 저메인의 책에 묘사된 (그 책에서 대사께서는 정령들이 어
떻게 격차의 다리를 건너 인간계를 지나 천사계로 갈 수 있는 지 설명
하였다.) 바와 같은 비범한 일을 성취하였다. 그와같이 대천사 미카엘
은 해 내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도 환생하였을 뿐만아니
라 하이어라키적 비전(이니셰이션)의 사다리를 타고 상승하여 천사의
영역으로 올라섰다. 거기서 그는 더욱 올라가 캡틴의 반열에 도달하고
마침내는 대천사가 되었다. 그리고는 선지자 다니엘에게 나타난 바와
같은 대천사 중의 대왕자로 되었 Q (36)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위대한 존재가 우연히 생겨난 것으로 생각한
다. 즉 신이 변덕이 생겨서─갑자기 자리에 나타나서는 말하되 "대천사
를 만들어야지."하고서는 "좋아, 생겨라!"고 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
서 꽃이나 눈 꽃송이 또는 어떤 것이 대천사로 바뀌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처럼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 사람들─나는 대천사들을
칭하고 있다(어떤 면에서 그들은 사람과 똑같다─여호수아는 다니엘이
가브리엘 천사를 본 것과(37) 똑같이 사람으로서 대천사 미카엘을 보았
던 것이다)─그들은 사다리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서 계속 전진해
나간 것이다. 천사적 영역의 구성원들도 우리들처럼 똑같이 상승해 간다.
그래서 우주가 그리도 큰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무한의 '경계'가
있는 이유이다.─그것은 계속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태양 안에 자기
자리를 찾아 가도록 되어 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높이, 더 높이 더높
이 더 높이 올라 가도록 되어 있다. 그들은 멈추어선 안되게 되어 있다.
인생이란 아무런 도전이 없다면 지독하게 재미없는 것이 아닌가? 나의
현재 도전은 여기 콜로라도 스프링즈에 있다. 그러나 콜로라도 스프링
즈에 언제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세상 여기에 언제고 있으
리라고 생각치도 않는다. 여러분은 계속 있을 거라고 생각 하는가? 그
렇다면 참으로 바보스런 생각이다! 그건 정말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왜
냐하면 우주에는 놀라운 곳이─아름다운 곳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커다란 기회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대천사 미카엘도 그가 대천사가 되기전, 그가 그의 승리를 쟁취하기
전에는 다른 세계에 존재 했었다. 그리고 그가 사건에 이은 사건으로
갈가리 찢겨져 거의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그의 온 경력과 그의 승리
에 대한 가장 크고 심각한 시련에 봉착했을 때, 이 멜로디가 그에게 다
가왔다.(마크는 '해군 찬송'의 멜로디를 읊조렸다.)
당신이 그걸 듣고 있노라면, 우주의 엄청난 힘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
다! 그 노래 안에는 힘의 흐름이 있다. 그걸 알겠는가? 그 노래는 그
안에 이겨나가는 힘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믿음, 바로 그것이다. 그
노래는 믿음의 노래이다. 이 위대한 믿음의 노래를 타고 대천사 미카엘
의 광채가 사람 안에 내려 앉게 된다.
그러므로 그 노래를 불러라. 그러면 그 느낌이 올 것이고 당신은 진정
으로 자라게 되리라.
당신으로 하여금 모멘텀을 쌓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사랑하는 예수의 이 잃어버린 가르침을 여러분이 알길 바란다. 그것을
이해하길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이겨내는 것은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은 모멘텀에
의하여 커나가는 것이다.
한 층 위에 또 한층 또 한층 또 한층
거대한 삼나무는 자라고 자라고 또 자란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뀌고,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면서,
우린 사건들과 여건들을 지배해 나가
그리하여 우리의 생명을 장엄케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