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만 명이 넘는 네티즌들이 ‘MBC 폐쇄’를 건의하는 네티즌 청원에 참여하는 등 황우석 교수 파문과 관련해 MBC에 대한 네티즌들과 시청자들의 공격이 연일 격해 지고 있는 가운데 ‘PD 수첩을 지키자’는 인터넷 카페가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달 28일 개설한 ‘사랑해요 PD수첩(http://cafe.naver.com/pdnote)’이라는 카페는 “소외된 자의 친구였으나 지금은 크나 큰 시련을 맞고 있는 MBC PD수첩을 응원하기 위한 모임”이라고 밝히며 현재 PD수첩 폐지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보거스(lbg219)라는 ID의 이 카페 운영자는 “우리들이 요구하는 것은 후속보도 실시, PD수첩 폐지반대, 보수언론과 비이성적 여론으로부터 언론 수호, 황 교수의 조속한 복귀와 진실 규명”이라며 “MBC를 비롯해 언론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더 이상 침묵하지 말라고 해야 하고 언론 정의를 추구하고, 진실을 원하는 이들이 있음을 우리가 이제는 우리의 이름으로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이 카페에는 9일 오전 11시 현재 665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으며 지난 8일부터 이 카페가 전개하고 있는 ‘PD 수첩 폐지 반대 서명’에는 9일 오전 11시 현재 405명이 서명을 마쳤다.이 카페는 내년 1월 8일 까지 10,000명의 서명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PD 수첩 폐지 반대 서명’에 참여한 ‘snowcat’이라는 ID의 한 네티즌은 “황 박사도 거짓말을 해서 사과를 했고 PD수첩도 잘못한 부분은(취재과정) 사과했다”며 “PD수첩이 폐지되어야 한다면 황 박사도 그만두어야 하는 거 아닌갚라며 PD수첩 폐지에 반대했다.
심지어 어떤 네티즌은 이번 황우석 파문을 지난 19세기 말 프랑스를 내전의 위기에 몰아 넣었던 드레퓌스 사건에 비유하며 PD 수첩 폐지를 반대하기도 했다.
PD 수첩 폐지 반대 서명에 동참한 ‘김소영’이라는 ID의 한 네티즌은 “드레퓌스 사건 당시 ‘나를 고발한다’는 고소장을 쓴 에밀졸라를 가장 위협했던 이들은 정부나 군대가 아니고 착하고 평범하고 온순한 대중들이었다”며 MBC를 공격하는 네티즌들을 드레퓌스 사건 당시 재심 요구파를 공격한 프랑스 대중들과 동일시했다.
드레퓌스 사건: 1894년 10월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포병대위 A.드레퓌스가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회의에 의해 종신유형의 판결을 받았다.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정보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으나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 혐의를 짙게 하였던 것이다.
그 후 군부에서는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확증을 얻었는데도 군 수뇌부는 진상 발표를 거부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어 재심(再審)을 요구해 오던 가족도 진상을 탐지하고, 1897년 11월 진범인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지만, 군부는 형식적인 신문과 재판을 거쳐 그를 무죄 석방하였다.
그러나 재판결과가 발표된 직후 소설가인 E.졸라가 공개한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논설로 사건은 재연되었다.졸라는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공박하는 논설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으로 1898년 1월 13일자 《오롤》지에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프랑스 전체가 ‘정의·진실·인권옹호’를 부르짖는 재심 요구파(再審派)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내세우는 재심 반대파로 분열되었다.
전자는 자유주의적 지식인을 비롯하여 사회당·급진당이 가담하여 인권동맹을 조직하였고, 후자는 국수주의파·교회·군부가 결집하여 프랑스 조국동맹을 결성하였다.마침내 이 사건은 한 개인의 석방문제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적 쟁점으로 확대되면서 제3공화정을 극도의 위기에 빠뜨렸다.
1898년 여름 군부는 어떤 새로운 증거서류에 의거하여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언하였으나, 그것이 날조로 판명되고, 체포된 증거서류 제출자는 자살함으로써 재심 반대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이에 정부도 재심을 결정했으며, 또 이때 재심 반대파에 대항하면서 공화정 옹호를 내세운 발데크 루소내각이 성립되어, 사태는 재심 요구파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899년 9월에 열린 재심 군법회의는 드레퓌스에게 재차 유죄를 선고하였으나, 대통령의 특사로 석방되었다.무죄 확인을 위한 법정 투쟁을 계속한 끝에 그는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판결을 받고 복직 후 승진도 하였다.
자유주의적 재심파의 승리로 끝난 이 사건은 프랑스 공화정의 기반을 다지고, 좌파 세력의 결속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광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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