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산 기행(2/2)
시월의 마지막 휴일 밤잠을 설치고 이른 새벽 장흥 천관산으로 갔다. 기암과 억새로 잘 알려진 장흥 천관산은 구레의 지리산, 정읍의 내장산, 영암의 월출산, 부안의 능가산과 더불어 예로부터 호남의 5대 명산으로 불리는 산이다. 옛적에는 들머리를 장천재로 해서 환희대에서 연대봉을 지나 바로 장천재로 내려오는 바람에 구정봉 뒤편의 죽순봉을 보지 못했다. 그 미련이 남아 이번에는 산악회에서 탑산사로해서 연대봉을 지나 봉황봉으로 내려오는 코스라 하기에 당일 코스로는 무리인 줄 알았지만 산악회를 따라갔다. 내려오는 동안 흐린 날씨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이도 산행하기는 좋았다.
@탑산사 가는 길.
마이산의 돌탑도 유명하지만 탑산사란 말에 걸맞게 절로 오르는 길은 돌탑이 늘어서 있다. 옛서러운 돌은 아니지만 신심(信心)이 깊지 않았다면 이런 돌탑을 한두 개도 아닌 수 십기를 쌓았을까. 천관산은 단순이 산세가 뛰어나서 명산으로 불리는 것만이 아니라 불심(佛心)이 서린 산임을 느끼게 한다. 군데군데 단풍나무들이 가는 시월이 아쉬운 듯 붉게 타오른다.
<반야굴>
반야(般若)라는 말은 범어 푸라지나<prajna>을 음사(音寫)한 것이다. 법(法)의 실(實)다운 이치에 계합(契合)한 최상의 지혜를 말한다. 이 반야를 얻어야만 성불하며, 반야를 얻은 이는 부처님이므로 반야는 모든 부처님의 스승, 또는 어머니라 일컫으며 또 이는 법의 여실(如實)한 이치에 계합(契合)한 평등, 절대, 무념, 무분별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상대 차별을 관조(觀照)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식(knowledge)은 공간적인 오감(五感)으로 얻은 것이요, 지혜(wisdom)는 경험이라 시간으로 얻어지는 것인데 반하여 반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앎이다. 이를 달리 번역할 말이 마땅치 않아 범어를 음사(音寫)하여 그대로 반야라 했다. 탑산사 오르는 길에 반야굴이 있다는 것은 이를 암시한 것일까. 모두들 성불(成佛)하라고. @현재 탑산사라 명칭되는 절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위치도 본래의 위치가 아니라고 한다. 본래의 탑산사는 현재의 탑산사에서 왼쪽 계곡을 타고가다 구룡봉 오르는 길 중간에 있었다고 한다. 천관산(天冠山) 남쪽 중허리이고, 거의 정상에 가까운 위치다. 불교 전성기에는 89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원탑산사는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 천관산에 있는 한국 불교 태고종 소속 사찰로, 서기 800년 통일신라 (애장왕1년) 때 통령(通靈)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사찰 이름은 절의 북서쪽에 있던 아소카왕탑(아육왕.阿育王塔)에서 유래되었으나, 현재 탑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의상암이 있었던 자리에는 중간석이 없는 석등 하나만 덜렁 남아 있다. 원탑산사는 대웅전, 시왕전, 공수청, 정방 등 크고 작은 방들을 갖춘 큰절이었다고 한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전만 해도 대웅전과 시왕전·공수청·향적각 등 많은 건물이 있었던 사찰이었고, 800근이나 되는 대종도 있었다고 한다. 대종은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녹여 총포를 만들었는데, 이때 작은 종도 함께 만들었다는 사실이 종의 용두에 기록되어 있다. @1745년(영조 21) 이후 3차례 화재로 소실되어 작은 암자로 명맥을 이어왔다가 1923년 화재로 이 작은 암자마저 소실되었다. 현재는 탑산암이라는 암자만 하나 있지만 탑산암 주변에 옛날 사찰터로 보이는 축대와 계단, 기와들이 흩어져 있어 이 절의 융성했던 시절을 말해 준다.
<의상암이 있었다는 곳에는 암자의 흔적은 없고 거암만 우뚝 서있다.> @원탑산사의 위치는 천관산에서 가장 아름답고 전망이 좋은 위치다. 천관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아육왕탑이 바로 곁에 있을뿐더러,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산비탈 가득 어울려 있어 보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탑산사 옆에 서있는 거암>
@현재의 탑산사는 1991년, 청화 스님이 ‘탑산암’ 암주 최보살의 권청을 받아 새로이 개원했다고 전해진다. 이어 1992년 6월 12일에는 부처님 이운식도 가졌다. 곡성군청 창고에 방치돼 있던 곡성군 목사동(木寺洞)에 있던 폐사의 불상을 모셔왔다. 큰스님께서는 그 후로도 수 차례에 걸쳐 탑산사 중흥을 위한 큰 법회를 가져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도 아소카왕이 와서 쌓았다는 아육왕탑은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졌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기이하면서도 영락없는 탑의 형상을 하고 있다. 본래는 5층이었는데 그 때 한층이 무너져 내려 지금은 4층만 남았다고 한다.
@아쇼카(asoka)왕
중국에는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가 있다면 인도에는 아쇼카(asoka)왕이 있다.
아쇼카는 인도 마가다 국 제3왕조인 마우리아 제국의 세 번째 임금으로 인도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왕이다 (재위기간은 기원전 265년경 ~ 기원전 238년 혹은 기원전 273년경 ~ 기원전 232년의 두 가지 학설이 있다).
99명의 왕자들과 4년간의 왕권 쟁탈을 통해 권좌에 오른 아쇼카왕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손자이며,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의 하나로 불리지만 한때는 잔인하고 냉혹한 사람으로 정복전쟁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해 인도의 남동부인 오리사 주 해안의 칼링가 지방을 정복했는데, 그 전쟁의 참혹한 참상을 반성하고 불교를 믿게 되었으며, 그 후로는 무력에 의한 정복을 그만두었다. 그 당시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이는 10만 명에 달하며 잡은 포로는 15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지금도 10만명이 살륙당했다고 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인데 기원전 2세기에 그 상황을 상상해 보면 정말 엄청난 살륙이요 아비지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인 다르마(dharma: 法)에 의한 정치를 이상(理想)으로 삼고 이를 실현하는 데 아쇼카왕은 온 힘을 쏟았다고 한다. 아쇼카왕은 곳곳에 절을 짓고 탑을 세운 것이 무려 8만4000개라 하며 전법에도 지극하여 살론, 타이, 버마에까지 불교를 전파하였다. 또한 자신의 가르침과 사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구두 포고뿐만 아니라 마애(磨崖)와 돌기둥(石柱)에 그것을 새겨 적절한 곳에 세워두었다. 사르나트에서 발굴된 돌기둥 주두(柱頭)의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장(國章)이 되었으며, 바위 조칙(詔勅), 석주 조칙(아육왕마애법칙阿育王磨崖法勅)이라고 불리는 이들 명문(銘文)은 대부분 아소카 치세 동안 일어난 여러 역사적 사건, 그의 사상과 활동이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아소카의 업적을 통해 불타의 역사적 사실까지 밝혀내고 있다.
아쇼카(asoka)왕의 출생은 기원전 273~232년 경으로 추정되며 한자 문화권에서는 아육왕(阿育王), 아수가왕(阿輸迦王)으로 불린다. <아쇼카>라는 말은 범어로서 무우(無憂:근심이 없다)라는 뜻이다. 아쇼카왕은 권좌에 있는 동안 불교 장려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인도 전역에 불교를 퍼트렸는데 불멸(佛滅)후 제3결집으로 불리는 <논장(論藏)>도 바로 아쇼카왕의 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쇼카왕은 모든 정책에서도 부모·어른에 대한 순종, 살생을 삼가는 등의 윤리를 백성들에게 장려하고, 지방관이나 신설된 관리에게 명령하여 백성들이 자비와 더불어 윤리를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다.
모든 역사는 흥망이 있듯이 아쇼카왕의 이와 같은 정책도 마우리아 제국과 함께 점차 쇠퇴하였으나, 그의 치세(治世) 중에는 불교를 비롯한 갠지스강 유역의 고도의 문화가 다른 지방에 급속히 퍼져 불교전파와 문화의 발달을 촉진시킨 인도의 위대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구룡봉에서 바라본 연대봉>
@천관보살이 머문다는 천관산을 일명 지제산이라 한다. 두번째나 오르면서도 그 말의 참 의미를 몰랐는데 오늘 구룡봉에서 보니 연대봉의 산의 형상이 탑을 닮았다. 그래서 지제산(支提山)이라 불린 모양이다.
@천관과 지제의 의미
천관산에 주한다는 천관보살은 화엄경<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제32권 에 연유한다. 경에 이르기를 <동남방(東南方)에 한 곳이 있으니(有處하니) 이름하여 지제산(名支提山)이다. 옛부터 모든 보살이 그 가운데 머물었으니 현재의 보살이 곧 천관(보살)이니라 (從昔 已來로 諸菩薩衆이 於中止住이니 現有菩薩하니 名 天冠이라.)>하였다.
불교사전에 의하면 지제(支提)는 범어 caitya 의 음사(소리글)로 지제(支帝), 지제(脂帝), 지징(支徵)이 된다. 신역에는 제다제저(制多制底), 제저야(制底耶)라고 했다. 적취(積聚)의 뜻으로 토석(土石)을 적취(積聚)하여 만든 것, 또는 세존(世尊)의 무량한 복덕(福德)이 이곳에 적집(積集)함을 말한다. 뜻으로 번역하면 영묘(靈廟)가 되고 혹은 사리(舍利)가 있는 것을 탑파(塔婆stupa)라 하고 사리(舍利)가 없는 것을 제저(制底, caitya)라 분별하기도 한다. 혹은 모두를 탑(塔stupa)이라 하고 구별해서는 제저(制底)라 함은 제저와 탑파는 그 뜻이 같아서 총(總)과 별(別)의 차이가 없다라고 설해지고 있다.
현응음의3(玄應音義三)에 <지제(支提)는 혹은 지제(脂帝), 지제부도(脂帝浮都)라 하며 번역하기를 취상(聚相)이다. 보배와 돌을 모아 높게 모양을 만든 것을 말한다.>고 했다. 법화의소12(法華義蔬十二)에 <승기율(僧祇律)에 의하면 사리가 있는 것을 탑파라 하고 사리가 없으면 지제라 한다.>고 했다.
날도 흐리지만 산의 영기가 서렸는지 아둔패기라서 그런지 사진이 맑아지지 않는다. <구룡봉>
(구룡봉에서 바라본 진죽봉) (구룡봉을 지나오면서 돌아 본 아뉵왕탑비)
<진죽봉에서 돌아 보니 저 멀리 구룡봉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월출산 구정봉(九鼎峰)이 있듯이 천관산에는 구정봉(九頂峰)이 있다. 월출산 구정봉은 암괴 위에 솥처럼 생긴 아홉 개의 웅덩이가 있어 얻은 이름인데, 구정(九鼎)은 옛날 중국 주(周)나라 때 그 왕실의 상징이었는데, 그 후에 일어난 왕조의 정통성을 입정하는 기물이 되었다. 구정(九鼎)은 임금의 정치는 ‘백성을 배불리 먹이는 것’을 첫째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천관산의 구정봉(九頂峰)은 아홉 개의 암봉이 모여 암봉군을 형성하고 있어 얻은 이름이다. 존제(存齊) 위백규(魏伯珪) 선생의 「지제지(支堤誌)」에는 그 봉마다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대장봉(大藏峰), 천주봉(天柱峰), 문수보현봉(文殊普賢峰), 대세봉(大勢峰), 선재봉(善才峰), 관음봉(觀音峰), 신상봉(神象峰), 홀봉(笏峰), 삼신봉(三神峰) 등이다. 구정봉은 천관산 암봉미의 백미(白眉)다. 천관산 입구 들머리에 그의 사당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장천재다.
@존제(存齊) 위백규(魏伯珪) 선생은 조선 영조3년(1727)-정조22년(1798) 때의 학자로서 자를 자화(子華), 호를 존제(存齊), 본관은 장흥위씨(長興魏氏) 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천문, 지리, 율력, 복서, 병도, 산수 등에서 백공기예(百工技藝)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깊이 이해하고, 역례설(易禮說), 역총계몽(易總啓蒙) 등 어려운 책을 깊이 연구하여 20세에 이미 거유(거유)가 되어 원근에서 많은 제자들이 모였으며, 관직으로는 옥과(玉果) 현감(縣監)을 한 것이 유일한 관직이다.
저서로는 「정현신보(政弦新報)」, 「고금(古琴)」,「지제지(支堤誌)」 등이 있는데, 지제(支堤)는 천관산의 옛 이름으로 「지제지(支堤誌)」는 천관산 기슭에 태어난 선생이 6개 동천과 89개 암자를 포함하여 천관산 등성에 솟아 있는 조그마한 바위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과 유래를 밝혀 놓은 인문지리지로서 천관산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리는데 크게 공헌한 책이다.
이번 산행에서는 역코스로 오르다 보니그의 사당 장천제를 들릴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구정봉의 정상 환희대다, 석판같은 책바위 위에 두 연인이 정담을 나누며 앉아 있다. 구정봉의 정상을 환희대라고 명명한 것은 <비탈을 기어올라 백여 보를 기어 올라가면 넓적한 석대가 있는데 환희대(歡喜臺)라고 한다. 산에 오르는 자가 위험한 길에 곤란하다가 여기서 쉬면 기쁘다는 뜻이다.>라고 청명국사 천인이 쓴 <천관산기>에 나온 말을 따온 모양이다. 구정봉의 정상 부분이 된다. 넓적한 석대는 현재 책바위라 명명한 것을 이른 것같다.
책바위 뒤편에 책을 꽂아 놓은 듯한 책장같은 기암
나풀대는 억새도 지고 앙상한 대롱만 바람에 나붓낀다. 이번 산행도 억새와는 인연이 없나 보다. 천관산은 바위와 억새로 유명한데... 아쉽다.
@천관산의 이명
금강산이 계절마다 다른 이름을 지니듯 천관산도 뛰어난 산세와 기암으로 여려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천관보살이 상주하여 법을 설파하고 천자의 면류관을 닮았다 하여 천관산(天冠山)이라 했다. 천관(天冠)은 귀한 구술로 만든 보관(寶冠)으로 인간은 소유할 수 없기에 천관이라 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는 <이마 위에 비능가마니보 로 만든 천관을 쓰고 있다> 하는 말이 있다. @산의 형상이 탑을 닮았다 하여 지제산(支提山)이라 불린다. <지제>라는 말은 범어 stuppa와 파리어 카이탸 caitya에서 연유하며 중국에 건너와서 한자화 되어 탑(塔)이라 했다. @정상에 가끔 흰 연기가 서린다 하여 신산(神山)이라 불리며 @북쪽에 솟은 관음봉이 부처의 두상을 닮았다 하여 불두산(佛頭山), 우두산(牛頭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가야산 쪽에도 별유산과 연한 우두산이 있는데 우두산은 구실준가(범어 gosringa)에서 유래한 말이다. 원 우두산은 신강(新疆) 화전시(和闐市) 남쪽 13실 지점에 있는 산이라고 한다. 서역기(西域記)제13에 의하면 < 왕성(王城)의 서남 삼십리에 구실준가(瞿室餕伽)산이 있다. 이를 번역하면 우각(牛角)이라 한다. 산봉우리가 남쪽에 솟아 있고 바위언덕이 사방으로 깎아 지른 듯 하다. 골짜기에 한 가람을 세웠는데 그 중의 불상(佛像)이 때로 광명을 방(放)한다.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 와서 제천인(諸天人)을 위하여 법요(法要)를 약설하였다고 하며 기(記)를 달아 이 땅에 국토를 세워서 유법(遺法)을 공경하여하며 대승을 준습(遵習)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 밖에도 천풍산(天風山), 풍천산(楓天山)이라고도 불린다.
천관산의 주봉인 연대봉(煙臺峰)은 옛날에는 옥정봉(玉井峰: 서남쪽 정상 가까이 옥수가 솟는 샘, 감로수가 있어 얻은 이름인 듯)이라 하였는데, 고려 의종 때(서기1160년) 정상에 봉수대를 설치한 후부터 연대(煙臺: 연기를 피우는 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다. 1986년 그 정상에 연대를 복원하였다.
<정원석>이라 명명된 바위, 마치 인공적으로 쌓은 듯하다.
양근암
천관산의 절에 이르자 허공에 사다리 놓으면 하늘 끝에 이르겠네 인간들이 사는 세상 굽어보니 삼만리 티끌이 끼었네.
發跡天冠寺 (발적천관사) 梯空上春昊(제공상춘호) 俯視人間世(부시인가세) 塵埃三萬里(진애삼만리)
~존재 위백규 선생이 9세 때 천관산을 올라 지은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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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첫댓글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아육왕탑 .책바위 ..잘 둘러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날마다 좋은날 되십시요.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